다산 정약용 선생 유적지를 다녀와서 - 노영숙
노인복지관 취미교실 서예반 전 반장이었던 최 선생님이 다산유적지 정보를 컴퓨터로 알아 전화 예약까지 해주어 우리 서먹한 사이였던 7,8학년 세 여자가 가기로 졸지에 약속하게 되었다.
막상 당일(2018년 4월 7일) 6시 10분에는 나이가 제일 높은 한 사람이 전화도 꺼놓고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작전역에서 인천 1호선전철 타고 인천공항열차 타고 서울역에서 국철 1호선으로 갈아타고 시청역에서 내려 2호선 9번 출구 찾아 나갔더니 젊은 사람 한 분이 전화를 거는 모양새가 다산유적지 가는 것 같아서 함께 중앙일보사 건물에서 좌회전하니 사람들이 듬성듬성 서있었다. 8시 20분에 1호차 2번째 좌석에 앉아 상큼하게 출발했다. 어제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이렇게 춥고 바람이 불 줄은 몰랐다. 그래서인지 동행이 별로 많지 않았지만 우리 차에 자리가 다 차서 출발했다. 기다렸다가 사람들을 태워 올 버스 2대가 더 있다고 했다.
1 시간 만에 목적지 남양주 유적지에 도착했다.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을 천천히 관람하면서 안내문들을 읽어보았다. 정약용 선생 서세 182주기묘제 및 헌다례식을 거행하는 묘지로 올라갔다. 3-5층 높이에 약간 험한 돌계단을 오르며 한 손은 난간을 또 한 손은 하나님을 붙잡고 주여! 주여! 최면을 걸면서 힘들게 올라갔다. 묘 주변을 한 바퀴 돌면서 살펴보았지만 다례식은 보지 않았다. 우리 둘은 골수 예수 신자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돌계단을 어렵사리 내려와서 생가를 샅샅이 살펴보았고 마지막 코스로 바람과 추위를 피해 실학박물관 입구에 가서 준비해놓은 다과로 목을 축이고 실내에서 목민심서 저술 및 해배200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실학관 관장 장덕호의 환영사와 행정안전부 장관 김부겸의 인사말을 듣고 이어서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석무의 강연을 들었다. 길지도 않고 내용이 알차서 좋았다. 끝으로 창작판소리 명창 임진택으로부터 정약용 가운데 ‘애절양’과 ‘하피첩’을 들었다. 점심에는 김밥을 맛있게 먹었다. 김밥이 남아서 더 가져가도 된다기에 집에 있는 남편 몫도 챙겼다.
조금 넓은 터에 흩어져있는 5군데 모두 걷는 운동도 할 겸 여러 차례 돌아보았다. 최 여사는 녹내장 수술을 하였고 나는 허리 시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둘 다 거의 환자들이지만 많은 것을 듣고 보고 느꼈다. 정약용 선생님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알게 되어 선생님과 주선해준 분들이 고마웠다.
유배생활로 전남 강진에서 18년 살면서 고난의 세월이었지만 또한 성취의 세월이었다. 명작 목민심서는 최 교수님이 영어로도 번역하였기 때문에 더 각별한 의미가 있다. 정약용 선생은 75세에 돌아가신 날은 1836년 4월 7일(음력 2월 22일) 바로 오늘이다. 해마다 4월 7일에 행사를 한다고 했다. 사나흘 앓고 회혼식 날 운명하셨다니 회혼식 잔칫상이 제사상이 된 셈이다.
우리는 돌아올 때에도 1호차를 탔으나 자리가 여의치 못하여 따로 따로 앉았다. 나는 남자 분 옆에 앉아서 줄곧 자면서 왔다. 모르는 사람 옆에 앉았기에 잘 수가 있었고 피곤이 좀 풀려 다행이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복된 하루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