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약포집" 발간기념 학술회의
****약포 정탁의 삶과 학문세계****
언 제 ; 2013년 11월 27일(수) 10;30
어디서 ; 경북 예천군 예천읍 동본리 434-1
경상북도가 주최하고 한국국학진흥원, 안동대 퇴계학연구소가 주관하는 "약포 정탁의
삶과 학문세계" 학술발표회가 에천 청소년수련관 대강당에서 거행한다는 초청장을 받고
성주아재(연군씨)와 청주정씨대종회에서 대절한 관광버스를 이용하여 참석하기로 약속하고
버스에 탑승했드니 본인의 처가곳이 예천 삼강이라 낮익은 분들이 몇몇 뵙고 반갑다는 인사와
바쁘실텐데 멀리까지 가게된 것을 고맙게들 인사하시기에 마음 흐믓함을 느꼈으며 미숙한 사진
기술로 발표회의 이모 저모를 담아 여기 카페에 실어 봅니다.
충효(忠孝)의 역사가 살아있는 예천
약포 정탁(藥圃 鄭琢)선생을 배출한 충절의 고장
역사와 문화는 우리나라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걸어온 문화·산업·경제 등의
흐름을 검토할 수 있는 산물임과 동시에 청소년들에게는 정체성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돋보기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각 지역마다 닮아있지만 각기 다른 문화와 역사적 특성이 살아있다.
이에 따라 전국 각지 2백여 개의 문화원에서는 향토문화제부터 향토전통문화의 발굴·
정리·보존과 동시에, 문예 진흥 및 문화교류 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초청장을 받고~~~
충효(忠孝)의 고장 경북 예천은 임진왜란 당시 당쟁의 희생으로 모함에 빠져
이순신 장군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선조에게 이순신 장군의 출중한 무예와 인격을
논하며 정유재란에서 백의종군 할 수 있게 했던 ‘약포 정탁’ 선생을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며, 명심보감 효(孝)편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효자
‘도시복(始復)’의 생가가 존재하는 명실상부한 효(孝)의 고장이다.
예천문화원에서는 군민들에게 유서 깊은 충효(忠孝)와 함께 향토문화의식과 향토축제를
정착시키고, 역사와 문화 접촉의 기회를 넓히는 한편, 고유의 문화를 보급,
지역민들의 자부심을 높이고 있다고 한다.
예천 학술발표회에 갈 관광버스
예천에서는 다양한 문화가족을 배출시키고, 또한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
예천정신을 복원․계승․발전시키고 있는 예천문화원 원장은 예천의 역사적 배경과
문화사에 대하여 원대한 꿈을 상상하고 있다고 한다.
차번호보다 학술발표회 표시가 눈에 더 잘보여 차에 오르내리기가 쉽다고해서
못쓰는 필체로 써보았다.
예천은 1300여년의 오랜 전통과 문화가 어우러진 경북 북부의 소백산맥에 위치한
배산임수(背山臨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십승지지(十勝之地-전쟁이나
천재(天災)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살 수 있다는 우리나라 열 군데의 지역)로
손꼽히는 명당지역이다.
전체 총괄 안내할 정광일씨(삼강 출신)
동쪽으로는 안동시․영주시, 남쪽은 의성군․상주시, 서쪽은 문경시와 접하고 있고,
북쪽으로는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경북대 명예교수(국문학)이신 정철박사님이 인사하시고~~
경북대학교를 두루 거쳐 도서관장으로 정년퇴임한 정상열씨(역시 삼강출신)
또 동 북쪽에는 소백산맥의 산악지대가 병풍처럼 감싸고 있으며,
서남쪽에는 낙동강과 내성천변에 일부 평야를 이루고 있다.
돌에 새겨진 예천 청소년수련관 입간판
예로부터 죽령과 조령 사이의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요충지로써 청정한 환경과 농토가
비옥하여 쌀의 미질이 좋고 특히 양잠과 참깨, 사과와 예천 참우 등이 지역 특산품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전형적인 농업지역이다.
예천 청소년수련관 전체 건물도 담고~~~
이 고장에서 110여 기의 고인돌과 60여기의 선돌이 발견되었고, 그 중 용문면
상금곡리에는 북방식 고인돌 1기가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쪽과 서쪽의 두 재(嶺)사이에 개재(介在)한다는
윤상(尹詳)의 기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약포 정탁의 삶과 학문세계 프랑카~드
~~~충(忠)과 효(孝)의 유래~~~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슬기롭게 국난을 해쳐가며 오로지 국가와 백성을 위해
살았던 약포 정탁선생은 예천 태생으로 충(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며,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정승의 자리에서 경국제세(經國濟世)를
실현한 대학자이자 명재상이었다.
실내 프랑카~드도 담고~~~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엄청난 전공에도 불구하고 당파싸움에 의한
모함과 음해로 삭탈관직을 당하고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 처했을 때, 약포 선생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진정서를 올려 충무공 이순신의 목숨을 구했던,
그야말로 선비로서의 지조와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로 유명하다.
각처에서 들어온 화환들도~~~
예천문화원 원장은 “그 당시 이순신을 반대하는 세력의 기세가 높은 때라 그 누구도
이순신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약포 정탁선생이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렸다
간절하고 충심어린 상소 덕분에 이순신은 목숨을 구했고 백의종군하게 되었다.”며,
“이러한 약포 선생에 대해 이순신은 ‘나를 추천한 이는 서애요, 나를 구해준 이는
약포’라고 했다. 이때부터 ‘무약포면 무충무공’이라는 말이 회자되기도 했다.”
라고 설명했다.
약포 선생은 원칙과 대의명분을 위해서는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고 직언하는 강직한
면모와 함께 대범하고 바다처럼 넓은 도량을 지닌 인물이었다.
또한 천성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억울함을 풀어주는 성품이었다.
그래서 억울한 죄를 뒤집어쓴 사람 사이에 ‘약포공만 있으면 살 수 있다’
라는 말이 널리 퍼지기도 했다.
“우리 고장이 충의 고장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충절어린 약포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지만, 하늘도 감동한 효(孝)의 대명사 효자 도시복(始復)이 태어난 곳”이며,
“도효자는 명심보감 효행편에 실릴 만큼 이름난 우리나라 효(孝)의 대표적인 인물”
이라고 말했다.
야계 도시복(始復)은 조선조 철종 때 사람으로, 효심이 깊었지만 매우 가난했다.
매일 나무를 해서 내다 팔아 자기들 내외는 꽁보리밥과 감자, 옥수수로 끼니를
이으면서도 어머니에겐 항상 쌀밥과 고기반찬을 사다가 지극정성으로 봉양했다.
가정이 빈한하여 학문의 길은 걷지 못했으나 효행이 지극하여 살아생전
부모 섬김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그를 기념해 조성한 ‘효(孝)공원’은 시복(始復)의 생가를 복원하고, 그 주위에
공원을 조성했다. 이곳에는 목조형 초가 형태의 도시복의 생가와 샘터, 장독대
등이 복원돼 있고 효자각과 사모정, 홍살문 등이 설치돼 있다.
방명록에 시도하려고 너도 나도~~~
또한 명심보감 효행편에 수록된 ‘소리개가 날라준 고기’, ‘호랑이 타고 음력
5월에 얻어온 홍시’, ‘한겨울에 때 아닌 수박을 얻다’, ‘실개천에서 잡은 잉어’
등 시복(始復)과 관련된 4가지 이야기를 테마로 재현해 놓았는데,
본인의 처남 덕섭씨도 사도를 하시고~~~
그의 효성에 하늘마저 감동했다는 내용이다. 효공원 한쪽에는 도시복의 효행에
감동해, 도움을 준 호랑이 상이 도시복 생가 옆 낮은 언덕위에 세워져 있다.
학술발표회에 오신 전체 귀빈도 담고~~~
한국국학진흥원 소속 책임연구원
오용원교수(박사)가 전체 사회를 하시고~~~
약포학술발표 자료 책자도~~~
맨 앞줄은 귀빈으로 오신분들이~~~
왼쪽이 대산선생 종손 길태처남(삼강) 처형
전체를 담으려고~~~
도포에 갓쓴분이 약포 종손(정경수씨)
국학진흥원장 김병일씨가 개회선원 및 인사말씀을 하시고~~~
도지사 대행 국장이 인사하시고~~~
약포 종손 정경수씨 모습도~~~
예천군 군의회의장 권점숙의원도 축사를~~~
종손도 인사말씀하시고~~~
전체를 다시 담고~~~
여기도~~~
성주아재(연군씨)도 담고~~~
처가집 식구들도 기념으로 한 컷~트
명지대 교수 한명기박사의 기조 강연
권경열박사의 발표도~~~
철승(고성)이씨 문중에 이종오선생
의회의장과 이종오선생 기념을~~~
전체를 한번 더 담아 보고~~~
본인 모습도 한 컷~트 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