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곡가 이상근은 1922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줄곧 진주와 마산 그리고 마지막에는 부산에 정착하여 생을 마쳤다. 이상근 하면 먼저 떠올리는 작품이 있다.
그는 '새야 새야'를 1947년 해방 직후에 작곡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는 한국 근대사의 큰 전환점을 가져온 동학혁명의 두령 전봉준을 두고 불린 전래동요의 하나이다. '강강수월래'와 함께 우리의 전래 동요 중 특이한 서정적 가락으로 우리 가슴에 파고 든 이 노래는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와 같은 가락으로 이어져 왔다.
이상근은 진주고보를 졸업했다.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할 수단으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지만 음악을 향한 열정을 살리기 위해 일본 도쿄 동양음악학교(동경음악대학)에서 1년을 수학하다 해방과 더불어 귀국했다. 집안 사정으로 일찍 귀국해 진주중학교와 진주농고의 음악교사를 겸임하다가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에 마산여고로 옮기고나서부터 그의 작품 활동이 시작된다.
36년 동안 일제의 압제에 고통받아 온 우리에겐 당장 부를 만한 노래가 없었다. 일반 대중도 그렇거니와 특히 학생들이 부를 만한 합창곡은 찾기 어려웠다. '새야 새야'는 학생들이 부르기 좋게 합창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그때 마산여고 합창단으로 이 노래를 불렀던 여학생들은 지금은 70대의 할머니가 되었다. 몇 사람만 거명하면 이화여대 교수를 지냈던 이영애, 동아대의 교수를 지냈던 김진명 등이 있다.
'새야 새야'는 문교부가 중등 교재용의 음악 작품을 현상 모집했는데 여기에 입상함으로써 그 악보가 출판되어 전국의 학생들이 즐겨 부르게 되었다.
이 무렵에 창작한 작품 중엔 공모에 당선한 시조 3수, 제1회 전국음악콩쿠르 작곡부 2등에 당선한 바이올린 소나타 등이 있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에 마산에서 제1회 작곡발표회를 가졌다. 이 발표회에서는 바이올린곡과 피아노곡 그리고 연가곡 '가을 저녁의 시'와 가곡 '늪'이 포함되어 있다.
종래의 가곡과는 사뭇 다른 현대 기법에 따른 곡이었다. 듣는 사람들은 가곡이 이렇게 앞서 갈 수 있느냐고 의아해 할 정도였다. 이상근이 당시 가지고 있던 많은 SP 가운데는 드뷔시, 라벨, 포레 등 프랑스 인상파의 음반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었다. 그의 주위 사람들은 이러한 음악적 소양을 바탕으로 단파라디오를 통해 해외에서 방송하는 현대음악을 접하고 새로운 작곡기법을 터득한 것이 아닐까 여기기도 했다.
제2회 작곡발표회를 부산에서 갖는 것을 계기삼아 작곡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이 이뤄진다. 그 뒤 1953년 부산고교로 자리를 옮기면서부터 부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1955년엔 부산 사범대학이 설립되면서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때 사범대교수 해외파견 프로그램에 선발되어 미국의 조지피바디 대학원에서 다시 음악 수학을 할 기회를 갖는다. 미국 수학에서 돌아와 비로소 오랫동안 벼르던 청마 유치환의 시에 곡을 입힐 것을 결심한다.
그의 시에 곡을 입힌 연가곡 '아가'는 모두 12곡으로 되어 있다. 그는 귀국 후 어느 날 청마묘소를 찾아가 머리를 조아린 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청마가 서거한 비통함도 있었지만 작곡가로서 자신의 무능과 나태에 대한 회한의 눈물이었다.
청마는 오래 전부터 시집이 발간될 때마다 그에게 시집을 부쳐 보냈다. 청마의 인품을 흠모하고 있었고 그의 시에 매료되어 있었다.
청마 시 12편을 골라 뽑은 이상근은 '그리움2'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청령가' 등을 작곡하면서 "눈물 섞인 감동으로 자신을 매질했다"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에겐 부산을 소재로 한 기념비적 작품이 있다. 부산시향이 부산 개항 100주년 기념으로 위촉한 교성곡 '분노의 물결'과 1986년에 작곡한 오페라 '부산성 사람들'이 그것이다. 이상근은 평론에도 손을 댔지만 그보다는 지휘자로서 자신의 관현악 작품을 서울시향과 부산시향이 초연할 때도 직접 지휘봉을 들었다.
스스로 창단한 프로무지카의 합창 지휘자로서 10회에 걸친 공연을 갖기도 했다. 전쟁 중에 작곡한 칸타타 '보병과 더불어'(청마의 시)는 반세기 만에 그의 사후 고향에서 초연되었다.
부산대 예술대학장을 거쳐 교수직을 정년으로 마쳤고 많은 후진을 길러 냈다. 2000년에 운명하기까지 부산 음악의 대들보로서 충실한 예술 혼을 불살랐다.
_ _ _ _ _ _
첫댓글 이상근 교수님 앞에서 피아노로 바이엘을 치던 시절이 스쳐 지나갑니다. 교수님은 천으로 커튼을 쳐놓고 피아노 소리만 듣고 학점을 주었습니다. 내가 만약 그 당시 이상근 교수님께서 진주고보 선배님이란 사실을 알았다면 피아노를 치기 전 진고 졸업생 몇 번 이학원이라고 선창을 하고 쳐서 A학점을 받을 수 있었을 터인데.아주 공정한 점수라고 생각했던 B학점 밖에 못 받았으니 초등학교 교사로서는 역 부족이었습니다. 1964년 이태원국민학교에 발령을 받아 3학년2반 담임을 했습니다. 음악시간에 유관순 누나를 풍금을 치며 가르쳤습니다. 3월 하는 우러러.... 도미솔 솔시레 화음을 넣으며 열심히 부르는데 오세자라는 제자가 나를 보
고 싱긋 웃는 것이었습니다. 솔시레 화음이 틀렸던 것이죠. 음악시간이 끝나고 교장실에 있는 피아노 앞에 제자를 앉히고 네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곡을 쳐보라고 했습니다. 엘리자를 위하여, 문나이트소나타 등을 악보도 없이 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가 한국의 모잘트를, 베토벤을 망칠 우려가 커졌습니다. 그 뒤 교대가 4년제가 되어 예체능 기능이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열고 보니 교육학과 전공분야 교육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이럴바에야 교대와 사범대를 합하는 것이 옳겠다 싶었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는 예체능에 특별한 재주와 기능이 있어야 하고 대학 교수급 대우를 해서
레벨업 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질 좋은 초등교육이 한국 선진화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금천님의 예체능교육에 대한 일가견 귀하게 읽었습니다.
이교수의 적나나한 표현 고마워요. 故이교수님의 자상한 지도와 용기를 주신 듬직한 분, 청마 詩를 작곡하신 일, 모두 불멸의 작업이라 사료됩니다. 너그러운 분께서 후학들 앞길 잘 보살펴 주세요.
정재종님은 문학에 조예가 깊으시니 언제 한 번 유치환의 장시 [보병과 더불어]를 읽고 독후감과 해설을 기대해 봅니다.
곽회장님 ! 작곡가 이상근의 칸타타[보병과 더불어]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새삼 교대시절 교수님 모습이 떠 오르고,
그 위대한 작곡가님의 제자였음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컴퓨터에서 kbs 파노라마 다시보기를 통해 시청했습니다.
정말 감명깊게 보았습니다. 화면을 통해 이교수님도 뵈옵고, 제갈삼 선생님도 나오시더군요.
파노라마를 보느라니 서울서 6.25때 대구로 피난오며 격었던 끔직한 기억들이 생생히 떠오르고.......
좋은글 올려주셔서 고맙고,감사합니다.
솔방울님, KBS파노라마 재방을 통해 [보병과 더불어]를 감상하셨다니 놀랍습니다.
이교수님과 제갈삼 은사님들을 차례로 뵈니 감회가 남달랐으리라 짐작합니다.
더군다나 서울에서 대구로 피난하며 겪었던 전쟁의 참상을 떠 올리셨으니 분명 이 프로그램은 솔방울님에게
뜻이 컸으리라 생각합니다.
곽형! 우리들의 스승이신 이상근 선생님에 대한 올림글 잘 읽었습니다. 생생하게 질풍노도처럼 몰려오는 옛날일들에 대한 추억을 제한된 댓글로는 모자랄 것 같아서 '이상근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란 올림글로 댓글을 보충합니다.Thank You!
이형의 글을 읽고 깊은 공감과 감명을 받았습니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고 존경했던 스승님의 단편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읍니다.음악과로 입학을 하였지만,..남자 동문들처럼개인적인 사사나 만남은 없었지만 음악을 좋아했고 교대시절 음악성적을 항상A++로 주셨던 은사님입니다.
몇년 전인가 기억은 안 나지만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한동안 이교수님 생각이 떠나지 않았읍니다.
학교 다닐때는 솔직히 그렇게 훌륭한 작곡가 인줄은 미처 몰랐읍니다.오늘 그 모습을 뵈오니 교대시절이 다시금
떠오르고 KBS파노라마를 한번 보았으면 하는 생각입니다.회장님의 이 글을 지금 막 보았기에 재방의기회가
없을것 같군요.
문경자동문, 음악과에 지망하셨군요~~ 재학때는 조용히 활동하셔서 몰랐습니다.
[KBS파노라마] 다시 보시기를 꼭 권유드립니다. 다시 보기는 간단합니다. 혹 케이블TV에서 지난 프로 다시보기를 시도해 보십시오. 이때 수수료가 조금 붙지요. \1,000원 정도입니다. 나중에 요금표에 나옵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제가 해보지는 못했지만 솔방울님처럼 인터넷에서 KBS다시보기로 들어가셔서 시도해 보십시오.
결코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가르쳐 주신대로 시청 잘 하였읍니다.
정말 감동 그 자체입니다. 두 천재적 예술가를 통해 6.25의 비극을 다시 느끼고 그렇게 훌륭한 예술가요 작곡가인 스승님
밑에서 한 때나마 배움의 기회를 누릴 수 있었다는게 큰 영광으로 새겨집니디.사진을 통해 교수님 모습을 자꾸 보고,또
보았읍니다. 좋은 프로 안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재방을 통해 시청하셨다니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우리 곁에 계실때는 그 분의 위대성을 미쳐 깨닫지 못했습니다.
부산교대 교수 시절이 그 분에게는 가장 좌절을 안기는 기간이라고 짐작됩니다. 그 전에는 사대 음악과교수, 그리고 우리 부산교대를 떠나신 뒤로는 부산대학교 예술대학에서 후진들을 가르치셨으니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부산교대 시절은 음악과는 관련없는 초등학교 일반교사 양성기간이다 보니 그러했을 것입니다.
어제 저녁 이 글을 읽고 많이 놀라웠습니다. 조용하시고 언제나 무표정 하시던 교수님께서 그렇게 인간적이며 청마 유치환 시인의 시에 열광 하셨다니 어디에 그 놀라운 열정을 간직하고 계셨는지 ? 한발짝 교수님께로 다가가고 싶은 마음에 오늘은 좋아 하셨다는 시를 적어 볼까하고 재방송도 보고, 친구들 한테 시집도 있는지 물어보고, 책방문도 두들겨보고, 도서관 2군데 가서야 겨우 옛날 시집 한권을 구했습니다. 방송 직후라 책들을 다 빌려가고 없었습니다,전쟁중에 합창과 관현악이 딸린 대규모 편성의 칸타타를 작곡했다는 것에 시대를 예술로 승화 시킨 교수님의 천재성에 박수를 보내며 늦으나마 명복을 빕니다.
젊은 시절 우리곁에 가깝게 오셨던 작곡가 이상근선생을 TV프로를 통해 다시 만나셨으니 제가 올린 글이 보람을 찾았습니다. 무상보님이 책방과 도서관을 뒤져 시인의 옛 시를 발견하고 소개까지 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곽 형! 늦게나마 댓글을 답니다. 나는 음악과 지망을 하지 안했는데도 진정 개인적으로 이 교수님을 존경해 왔으며 그 배경은 요담 카페를 통해 소개 할까 합니다. 정말 감명깊은 좋은 글을 올려 줘 감동 받았습니다
최동문이 이 글을 읽으셨다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최형이 방송의 최일선에 계셨으니 선생님과의 인연도 남 달랐으리라 짐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