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 포토 콜라쥬를 이용한 기법을 위주로
1918년 라울 하우스만(Raoul Hausmann)은 휠젠베크, 조지 그로스(George Grosz), 존 하트필드(John Heartfield), 한나 회흐(Hannah Höch), 바더 등과 베를린 다다운동의 창립자로 그가 편집한 1919년 『데르 다다 Der Dada』의 창간호에서 ‘포토꼴라쥬’의 기법을 이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1924년 《ABCD》이다. 라울 하우스만은 인물을 우스꽝스럽게 변형시킨 콜라주 작품 《The Art Critic》를 비롯하여 일상에서 발견한 오브제들을 끌어 모아 만든 앙상블라주 《Mechanical Head(The Spirit of Our Age)》, 그리고 소리를 회화와 결부시킨 《ABCD》등 다양한 작품들을 볼 수 있다. 그가 신문과 포스터에서 잘라낸 이미지로 재구성하여 얻어 그림을 ‘Potomontage’라 일컫는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일상에서 쉽게 얻어지는 정보라는 재료 매체로 표현한 몽타쥬 기법의 새로운 방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의도였다.
그의 작업 방식은 눈에 익숙한 일상의 이미지나 의식 없이 받아들여지는 전통적 질서 개념을 시각적 관계에서 해체하고 변형한 합성된 이미지로 이미지가 주는 효과는 역동적으로 일어날 상황을 예시하는 듯하다. 이 작품에서 작가가 선택한 일상생활의 진부한 사물이미지는 혼종돤 합성의 결과물은 사물을 바라보는 시대의 다양한 요구를 보여준다. 그가 발췌한 이미지는 이미 그 대상 자체의 의도된 텍스트와 이미지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이를 해체하여 새로운 조합으로 생산된 ‘메세지‘는 대상을 향해 일상에서 끌어들인 정보들을 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시각적 대상이 아니라 보는 방식을 바꾸어 다각적 측면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개념을 작가는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다다’란 아무런 뜻이 없다는 의미로 기성관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반예술’을 지향하는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ABCD>작품에서 이에 물고 있는 ABCD나 한쪽 눈을 가려버린 그물 같은 구조물과 2,6.A,B, 인체 해부도의 성적인 묘사 등의 오브제들은 서로 아무 관련 없는 대상일 수 있다. 선택된 오브제는 무작위의 이미지로 보이지만 합성된 이미지와 사용된 이미지의 의도적 연계성도 보인다. 본인의 눈에 보이는 단면의 인체 해부도와 'C'의 손가락 모양은 욕설의 의미와 성기 형태, 화폐, 자신의 이름, 티켓 같은 숫자들, 들리지 않는 소리 등의 이미지에서 기존 문화에 대한 철저한 부정, 합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아카데미 미술에 대한 거부, 이성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는 다다의 운동을 시대적 사실성을 가진 신문과 포스터의 조각 요소들로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려는 의도의 알레고리로 보여 진다. 본인의 분석이 작가의 의도나 학술적 해석의 오류가 생겨나더라도 라울 하우스만의 작업에 개입하여 작가의 ‘메세지’ 찾는 일은 반예술의 부정적 시각에 대한 작업을 이해하고 해체하는 과정의 단계에 놓이게 된다고 본다. 이런 과정은 본인의 작업<언과기실>에서 그와 차별성을 두기위해 포토몽타쥬 이미지를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텍스트의 명암과 칼라, 크기만의 텍스트로 작업하게 되는 배경이다. 작업 전의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어원적 의미와 에스키스 밑그림 이미지에서 전환된 일루전 이미지에서 텍스트는 관람자의 알고 있는 정보인식을 자극하게 된다. 이런 정보의 자극은 또 다른 텍스트 정보를 검색하는 관람자로 머물게 된다. 관람자가 시각적 이미지나 조형적 형태를 스치듯 보는 관람에서 많은 텍스트를 읽게 되는 본인의 작업은 작가 자신 만큼이나 관람자도 시간과 집중의 노동에 동참해야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텍스트의 언어 기능 때문이다.

<언과기실>, 인쇄물텍스트.(printed text collage on paneel). 54x43cm. 2010.
무작위로 사용된 텍스트와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사전의 어원,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경험적인 텍스트, 지식의 정보를 돌출시키는 문맥의 텍스트의 남용은 <언과기실>의 명제에서 관람자는 이미 작가의 옵티컬 메시지를 짐작할 것이다. 본인의 작품에서 텍스트는 아무 의미 없다. 그저 무책임하게 버려지고 단절되었던 정보의 차용물일 뿐이다. 차용된 언어의 사전적 의미의 기억은 관념어로만 받아들어지고 실체에서 징용된 텍스트는 시간의 단절에서 폐기된 무의미한 과잉 정보의 텍스트를 대행하고 있다. 작품을 보게 되는 관람자는 부처의 얼굴과 의미 없는 텍스트를 임의로 결합시켜 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할 관계로 놓이게 된다.
라울 하우스만의 작품에서 본인이 읽게 된 추상적 의미와 지식으로부터 얻게 되는 작업의 분석들은 그들이 1차 대전 후 과학과 경제의 발전이 결국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데 쓰인 문명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반성을 드러내고자 했던 '반예술'의 개념과 또 다른 상반관계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의심한다. 현실의 실체 매체로부터 떼어낸 라울하우스만의 이미지와 본인의 텍스트는 서로 작가적인 공유의 의도가 포함 될 수 있는 리얼리티를 삽입하였으나 인식하기 힘든 포토몽타쥬와 이미지가 드러나는 일루전에서 우연과 의식, 무의미와 의미의 선택은 라울하우스만과 본인, 나와 관람자의 관계에서 재해석의 차이는 가까울 수도 멀리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