當時는 妻와 妾의 區分이 없이 모두 正婦人으로 待接을 받았다고 한다.
鄕妻는 故鄕의 婦人이란 뜻으로 咸興에 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였고,
京妻는 當時 高麗의 首都인 開京의 婦人으로 바로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姜氏)다.
神德王后 姜氏는 남편인 李成桂가 中央의 政界에 진출하여 政治 領域을 넓히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李成桂를 도와 朝鮮을 建國(1392년)하는 데에 큰 役割을 하였다.
李成桂의 첫째 婦人인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 韓氏)는 建國하기 一 年前인 1391년에 世上을 뜬다.
결국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 姜氏)가 朝鮮 最初의 王妃로 책봉되는 것이다.
神德王后는 膝下에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다.
큰 딸이 경순공주(慶順公主), 큰 아들이 무안대군 방번(撫安大君 芳蕃), 두째가 의안대군 방석(宜安大君 芳碩)이다.
神德王后는 자신의 아들을 世子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神德王后의 位勢와 큰 政治力, 그리고 太祖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으리다.
하지만 이일로 인하여 꿈 많은 이방원(李芳遠)과 對立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神德王后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였으리라.
엄청난 스트레스 때문이였을까? 太祖 5년인 1396년 神德王后는 세상을 뜬다.
太祖 李成桂는 슬픔을 못이겨 모든 일에 손을 놓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지금의 安岩洞 근처에 능지를 정하려 했으나 묘자리에서 물이 솟아 나왔단다.
하는 수 없이 都城 안인 지금의 德壽宮 近處인 (現 英國大使館 近處 ?) 貞洞에 무덤을 만든다.
그것이 貞陵이고 그래서 동네 이름이 貞洞이 된 것이란다.
太祖는 陵옆에 興天寺라는 절을 세우고 매일 그곳에서 神德王后를 위해 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까지는 역사책에 있는 이야기이지 실제 그것을 뒷바침할 어떠한 물건도 없다.
최근에 영국대사관 근처에서 望柱石이 발견됐다고는 하나 아직은 확실하지가 않다.
이제 그 후의 이야기를 찾아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