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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상 >
오늘 그리고 내일
내면고등학교 - 이지영
언제나 도시락은 텅 비어있다. 엄마는 자장면이라도 사먹으라며 돈을 건네주고 오이를 따러 나가신다. 매일 아침, 텅 빈 도시락과 단돈 3,000원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엄마는 자신의 몸보다 훨씬 큰 박스티를 입으셨다. 모자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하얀 머리는 올해 갓 마흔을 넘긴 모습과는 멀어 보였고 흰 장화는 오늘따라 더 촌스러웠다.
엄마가 주신 3,000원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야자를 마친 뒤 집에 왔다. 평소 같았으면 집 대신 재배사 불이 켜져 있어야 하는데 오늘은 달랐다. 거실에 온 가족이 모여 있는 것이다. 낯설었지만 이 모습이 너무 설레었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들어서니 어두운 분위기가 엄습하였다. 엄마는 고개를 바닥에 떨구셨고 동생은 얼굴이 굳어 있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엄마가 입을 여셨다. 아빠가 하신 일이 잘못되어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아빠는 모임에 참석하셔서 집에 안계셨다. 물 밀 듯 밀려오는 아빠에 대한 실망감에 눈물이 났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엄마에게 아빠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며 따졌다. 그러자 엄마는
“그런 소리하면 못써 너도 알다싶이 아빠가 널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셨니? 새벽부터 밤 늦도록 일하시잖아.”
사실 그렇다. 우리 집에서 재배하는 오이가 시장에서 최고가 되기까지 밤새 연구하고 고민하신 아빠였다. 하지만 나에겐 아빠의 작은 실수마저도 용납되지 않았다. 그만큼 부모님은 나의 ‘길’이며 나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며칠동안 부모님 탓을 하며 부모님을 미워했다. 그러니 자연히 빈 도시락은 나의 화풀이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자장면을 사먹는 일도 짜증이나 아예 저녁을 굶었다.
그리고 며칠 뒤, 무궁화 장학금을 받으러 가야했다. 그런데 엄마가 아닌 아빠가 같이 가신다는 것이다. 차를 타고 가는 길 내내 조용했다. 그러다 아빠가 말씀하셨다.
“실망했니? 아빠가 미안해 아빤 단지 더 잘해보려 했을 뿐인데....”
아빠는 나에게 이해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동안 아빠는 내가 대학가는 것을 위해, 내 후일을 위해 많은 일을 준비하고 계셨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부모님을 미워하기만 했고 부모님이 하시는 일을 창피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일을 위해 오늘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이 자랑스럽다. 비록 허름한 옷에 촌스러운 장화를 신었어도 말이다.
오늘 새벽 서울에 가신 부모님께 전화가 왔다. 혹시 밤새 아프지는 않았는지, 늦게 일어나서 대회에는 늦지 않을까하는 걱정에서이다. 전화를 끊고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비록 텅 빈 도시락이 아쉽긴 했지만 오늘 새벽 전화 한 통이 내 마음을 싱그럽게 해주었다. 이렇듯 부모님은 나에게 ‘오늘 그리고 내일’이다.
< 장원 - 시 >
무궁화
서석고등학교 - 박슬기
피어난다.
피어나리라
투명한 아침이슬 머금고
피어나리라.
무향
그 순결한 기품 속
화려한 듯, 화려하지 않은
단아함으로.
하늘과 하늘이
바다와 바다가
하나로 이어지듯
꽃과 잎이 되어
하나가 되리라.
풍성한 꽃잎마다
부푼 희망을 담고
초록빛 먹은 잎마다
소망을 담아
세상팡세 활짝 피리라
밤빛이 스며들 때쯤
잠들어 버리지만
다시금,
아침마다 새로이
온 세상 가득히 피어
백의민족,
그 하얀 웃음을 보여주리라.
< 장원 - 산문 >
선생님
서석고등학교 - 이은지
12년이란 긴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면서 셀 수 없이 많은 반성문을 써 보았다. 머리채를 잡고 싸우던 여자애들의 다툼에 휘말려 상황 진술서를 쓴 것은 물론이고 같은 반 친구가 무단결석을 했을 때도 반 전체가 반성문을 썼다. 하지만 한 번도 진심으로 쓴 적은 없었고 억지로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라며 반복하기 일쑤였다.
내가 이런 반성문을 처음으로 쓴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당시 난 공부하는 것이 너무 싫어 오후 늦게까지 친구들과 돌아다녔고 짧은 반바지를 입고 욕을 배우기도 했다. 온갖 불량한 모습은 다 따라해 보려 했기 때문에 부모님은 크게 걱정 하셨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크게 야단치지는 않았고 그저 그러다 말겠거니 하며 지켜볼 뿐이었다. 이럴 때 나를 잡아준 사람은 막내삼촌이었다. 조금은 철없고 어린애 같은 삼촌이었지만 나를 매우 아껴주셨다.
아마 그 날은 삼촌이 명절을 맞아 할머니를 뵈러 온 추석연휴였을 것이다. 가족 모두가 저마다의 일로 바빠 개밥을 챙겨줄 사람이 없었다. 마침 나는 TV를 보며 빈둥대고 있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나에게 개밥 좀 주라며 시키셨다. 하지만 동물이라면 질색을 하는 나였기에 할머니의 말을 못 들은체했다.
“공주야, 개들도 배고프겠다. 부엌에 개밥 끓여 놓은 것 좀 가져다주렴.”
“아씨, 할머니는 왜 맨 날 나만 시켜?” 나는 신경질을 내며 문을 큰 소리가 나게 세게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괜한 개들에게 화를 내다가 조금 두려워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문 앞에는 삼촌이 빗자루를 들고 도깨비같이 성난 얼굴로 서 계셨다. “너 방금 뭐라 그러고 나갔어? 조그만 게 할머니한테 버릇없이 뭐하는 짓이야?” 삼촌은 매우 화가 나서는 손에 쥐고 있던 빗자루로 내 엉덩이를 사정없이 때렸다. 너무 아파서 엉엉 울며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삼촌은 내 손을 잡고 내가 잘못했다고 할 때까지 때렸다.
“삼촌, 잘못했어요.” “너, 무릎 꿇고 손들고 있어. 그리고 A4용지 줄 테니까 앞뒤로 빽빽하게 반성문 써와. 알겠어?” 나는 할머니가 삼촌을 말릴 때까지 벌을 섰다. 삼촌이 준 흰 종이는 정말 바다만큼 넓었다. 어린 마음에 콩알같이 큰 글씨로 간신히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삼촌은 날 용서해주셨다. 날 때리던 그 큰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셨다.
삼촌에게 혼나고 나서 나는 다시 모범적인 학생이 되었다. 솔직히 반성했다기보다는 또 혼나는 게 두려워서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착한 아이가 되었다.
나에게 처음으로 반성문을 쓸 것을 요구한 당사자인 삼촌은 아직도 그 반성문을 간직하고 계신다. 그러고는 가끔 나에게 기억하냐고 물으시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창피해서 기억나지 않는다며 시치미 떼곤 한다. 하지만 나는 정확히 기억하고 있고 감사히 여기고 있다. 힘들 때마다 곁에서 바로 잡아준 삼촌은 내 오랜 친구이자 선생님이기 때문이다.
< 차상 - 시 >
무궁화
홍천여자고등학교 - 원정인
하얀 잎
붉은 물결
그 속에 품고 있는
백의민족의 혼
풍마우세 속에서
흰 저고리
붉게 물들어도
어디선가 살아 숨쉬고 있는
여인의 흰 소매에
소록소록
한 송이 한 송이
떨어져서
그 설수 닿아
이어가리라
다시 태어나리라
< 차상 - 시 >
무궁화
홍천여자고등학교 - 김민조
삼천리 녹음 대지
분분히 흩어지는 바람
흐드러지게 핀
무궁화
빙옥 같은 꽃잎
마디마디 머금고 있는
붉은 눈물
붉은 눈물 토해 내여
영롱한 생명의 빛
빚어내어
생명의 빛
아롱아롱
녹음대지 위로
떨어져 내린다.
꽃을 피운다.
< 차상 - 산문 >
무궁화
인천인성여자고등학교 - 김새놀
하얗다. 하얗다 못해 깨끗하다. 너무도 깨끗하기에 손을 댈 수가 없다. 그 깨끗함이 수줍었는지 새색시처럼 볼이 붉게 물들어 있다. 너무도 꿋꿋하다. 기분 좋은 바람에도 일렁임 없이 자신의 긴 기럭지를 뽐낼 뿐이다. 한 줄기 빛이 보인다. 한빛이란다. 푸른 하늘 속에 희망이 날아다닌다. 파랑새란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그랬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자리만을 지킬 뿐이다. 그 모습이 굳은 의지를 지닌 백의민족이기에 더욱 애착이 간다.
충남 서천, 이 곳은 나의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키워졌다. 아무 것도 없는 시골 깡촌에 자연히 내 유일한 친구는 할아버지 뿐 이였다.
“얘, 새놀아, 가서 물 좀 떠오너라. 으흠.”
할아버지는 늘 아침이 되면 같은 말을 반복하셨다. 바로 할아버지의 영원한 무궁화 사랑때문 이였다. 언제나 아침에 일어나시면 세수를 하시는 것도 잊으시고 무궁화에게 달려가셨다. 가서 꽃잎도 만져주시고 물도 주셨다. 그리고 햇살처럼 하얀 미소도 잊지 않으셨다. 육군 장교 출신으로 언제나 형식만을 따지며 엄격하신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미소를 보기란 좀처럼 힘든 일이였다. 말씀도 잘 안하시고 묵묵히 무궁화를 바라보시는 눈빛에는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흐르고 있었다. 시도 때도 없는 할아버지의 무궁화 사랑은 철부지 어린아이의 감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할머니 댁 앞마당에는 화려한 무궁화나무가 수를 놓듯이 빽빽이 들어차있었다. 한빛, 한뫼, 배달, 파랑새… 집 앞 마당엔 푯말이 걸린 무궁화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단순히 무궁화 하나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많은 종류가 있었는지 이 때 처음 알았다. 시골에서 지내는 기나긴 시간동안 할아버지의 무궁화 얘기를 들으면 시간가는 줄 몰랐었는데…
“새놀아, 이 무궁화를 보면 무언가 느껴지지 않니? 무궁화는 바로 우리 민족이야. 우리가 예전부터 일제의 탄압을 받을 때면 무궁화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했지. 너는 잘 알지 못하겠지만 저 무궁화도 우리와 함께 고통을 당했지. 일본은 꿋꿋하고 바른 무궁화가 우리를 상징하는 것 같아 없애려 했던 것이고, 하지만 그런 악재 속에서도 저 무궁화는 살아남지 않았느냐. 저런 끈질긴 생명력이 바로 할애비가 무궁화를 사랑하는 이유란다.”
태극기도 그리지 못했던 나에게 무궁화는 알 수 없는 가르침을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 서야 알았다. 할아버지의 눈이 빛났던 이유를… 그건 바로 애국심이었다. 할아버지의 나라사랑은 우리 민족, 무궁화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할아버지는 한 떨기의 무궁화가 되셨다. 돌아가시고 나서도 무궁화와 함께 하시고 싶다던 할아버지의 유언 때문에 수목장을 한 것이다.
무궁화 할아버지라 불리던 할아버지. 나의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가 있었기에 나는 애국심이라는 것을 배울 수가 있었고, 우리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이끌려 할아버지가 묻히신 무궁화나무를 찾아가 보았다. 아, 무궁화 꽃잎이 하나 떨어져 있다. 할아버지의 높은 애국심이, 우리의 애국심이.
< 차상 - 산문>
오늘 그리고 내일
홍천여자고등학교 - 안지수
오늘, 내일, 그리고 과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만한 것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그것들을 다 가지고 있지만 어느 하나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다. 나는 홍천처럼 멋진 강을 끼고 있는 양구라는 곳에서 태어나 거의 15년을 그 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우리 집은 언제나 싸움소리로 시끄러웠다. 트럭운전을 하셨던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와 잘못 없는 엄마를 두들겨 패곤 하셨다.
어머니는 지금의 내 나이였을 때 외할아버지와의 갈등을 못 이기고 집에서 뛰쳐나와 나이차이가 10살 이상인 아버지와 결혼을 하시고 18살이었을 때 나의 오빠를 낳으셨다. 그리고 그 당시 나이가 어렸던 어머니는 거의 20년이 넘도록 나이를 속이고 사셨다. 밑천도 없이 시작한 결혼생활은 그리 행복하지만은 않았다. 야속한 아버지는 언제나 술에 취한 얼굴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오빠, 그리고 나. 이렇게 네 식구가 모여 있으면 언제나 불행의 연속이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싸우고 계실 때 어리고 힘없는 나는 방 한 구석 쭈그리고 앉아 점점 격해지는 부부싸움을 막지 못하는 힘없는 나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어리석게도 아버지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내가 중학교 2학년 이었을 때 아버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 뭐가 그렇게 힘드셨던 것일까. 돌아가시기 몇일 전에 자신의 아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시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내가 아버지를 죽게 내버려두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내 자신이 쓸모없다고 느꼈다.
자신의 아버지를 저주한 이 세상에서 가장 못난 인간이라고 나 자신을 비난했다. 몇 주가 지나고 몇 달이 지나도 지나간 추억들과 아버지가 화장터로 들어가시던 그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그 때마다 격해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내 마음을 계속 황폐화시켰다.
하지만 나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내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선생님과 주위에 있던 이웃들이 ‘너 괜찮니?’라고 물으면 ‘네, 전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아요.’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내 마음은 과거에 집착하고 있으면서 겉모습은 마치 어두운 과거에는 집착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1년이 지난 후 우리 가족은 양구에서 홍천으로 이사를 왔다.
나는 처음 보는 낯선 사람들에게 소극적으로 행동하고 또 속마음을 잘 보여주지 않았다. 이러는 내가 걱정이 되셨는지 어머니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과거는 덮어두고, 우리 앞으로 잘 살아보자. 알았지?’라고…… 과거… 솔직히 나는 과거라는 것에 얼마나 얽매여 살았던가! 불행했던 어제는 잊고 현재 그리고 미래를 사는 것이 진정한 삶인 것을!
그때부터 나는 내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 먼저 나 자신을 사랑하고 현재에 살면서 내일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새로운 친구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먼저 손잡았다. 하나둘 실천해 나가자.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원래는 땀과 그림자만 보고 다니던 내가 언제부터인가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오늘에 살면서 내일을 본다는 것은…….
그렇지만 어제를 모두 잊으라는 것은 아니다. 그 틈에서도 빛을 발견하는 것은 중요하다. 나는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과거 중에서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 그리고 내가 배워야 할 것들만 남기지 않기로 했다. 떠올리기도 싫은 그 과거를 내가 해탈의 경지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내 삶은 너무나 행복하고 하루하루가 즐겁다.
어제를 안고 오늘에 살면서 내일을 꿈꾸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다. 또 궁금해진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또 내일은 얼마나 멋진 일이 생길까?’ 하고 말이다.
< 차하 - 시 >
무궁화
기린고등학교 - 조재연
노곤한 시간이 흘러간다.
계절의 녹음이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
나는 소멸을 향해 가는 무궁화 한
송이를 바라본다.
언젠가 수려하게 꽃 피었을
저 불혹의 굴곡진 생에게서
슬픈 냄새를 맡는다.
이파리는 곰삭은 상처들로 알알하다
세월의 흐름 앞에 갉아 먹힌 푸른
날들
잎맥의 혈액들은 잃어버린 감각을 보
듬는다.
짙무른 앙상한 손마디처럼
점점 야위어가는 줄기는
맥없이 지난날은 반추한다.
미망인이라는 삶의 딱지가
아픔들을 더 깊게 패어내었을, 그녀
나는 가만히 만져본다
축 쳐진 꽃 봉우리
주름 많은 봉분을 닮은, 젖가슴 속의
헐떡이는 생의 길을 읽는다.
퇴색된 향기가 내 코끝을 찡하게
한다.
오늘도 놓치지 않기 위해 꽉 움켜쥔
뿌리 깊은 연륜의
늙은 한얼단심 한 송이를 바라본다.
사랑해요, 어머니
나의 무궁화
< 차하 - 시 >
길
내촌중학교 - 신현성
가을날
새로 낸 아스팔트 길 옆
뼈만 앙상하게 드러낸
발자국 없는 흙길을 걸었다.
산이 내쉬는 푸른 바람소리를
홀로 듣는 새는 외롭다.
길 옆 폐교로 향한
바람불면 쓸쓸히 춤추는 낙엽 쌓인
정문 길옆에는
게시판의 시간은 5년 전이었다.
잡초 속에 잠든 마을길
집은 시간의 고통 속에 금이 갔고
논은 황금빛 가을을 잊었다.
새는 홀로 외로운 노래를 불렀다.
길 옆 냇물을 보았다.
어린 나를 비춘 그 물은
5년 전 그대로였다.
그날 냇물로 갈증을 풀었다.
< 차하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화촌중학교 - 김영림
내가 태어나기 전, 엄마와 아빠는 이혼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빠의 바람은 엄마의 인생을 바꾸었다. 1993년 10월 7일 배가 너무 아파 산부인과를 찾았다고 한다. 그 후, 몇 시간 후 내가 태어났다. 너무 나도 순진했던 내 어린시절.....,,
6살 때까지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와 같이 살았으며 7살 때에 엄마와 언니들이 있는 곳으로 왔다. 엄마는 슈퍼를 했다. 아마도 내가 8살 때 엄마와 아빠가 이혼을 했다. 친척들은 아빠를 욕했지만 내 귀엔 엄마를 욕하는 것 같아 친척들이 싫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지금의 나는 평범한 학생이 되었다. 매일 똑같이 8시 20분에 학교를 가고 오후 6시에 집에 와서 12시에 자고... 8시20분에 학교를 가고.......,
지금은 한 사람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게 짝사랑이라는 것이 늘 싫다. 도시락도 싸주고 커플 티도 입고 싶다. 하지만 그것마저 나에겐 너무나 큰 희망인 것이다. 그 사랑을 이루고 싶지만 안 되기에 그 사람을 포기해야겠다. 사랑보다 좋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다. 사랑이 세상의 다는 아니니까 언젠가는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거니까 사육사가 돼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 그게 나의 꿈이다. 위대한 과학자나 대통령이 되는 꿈보단 보잘 것 없는 꿈이겠지만....,..,
나에겐 가장 행복하고 가장 큰 꿈이다. 내가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는다면 그 아이에게만은 좋은 부모이고 싶다.
< 차하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홍천여자고등학교 - 박혜인
‘내일’이란 말을 간단히 물리학적인 개념으로만 본다면 오늘에서 하루가 더해진다는 의미이겠지만, 그 의미를 더 들여다보자면 이 단어처럼 추상적인 것 또한 없을 것이다. 나에게 내일이란 단어는 오늘에서 하루가 더해 진다기 보다 오늘보다 더 나은 날이 되기를 바라는 이상향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사실 나는 내일이란 이상향을 마음속으로 꿈꾸고는 있지만 과거에 얽매여 내일을 제대로 볼 수 없을 때가 많았다. 그러니 거창하게 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만족할만한 내일의 계획이 세워져 있어도 쉽게 새로운 계획에 도전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결정에 대해 나는 항상 내 의지보다 주위를 의식할 때가 더 많았기에 어쩌면 미래 또한 정해져 있는 건지도 몰랐다. 그래서 혼자서 울던 때도 많았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친구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겠다고 할 때마다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 일쑤였구, 내 또래 애들이 우리 집 근처에 다가와 있으면 괜히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애들이 지나 간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집에 들어오곤 했다. 그때 난 너무 창피했었다. 지하층에 한 칸짜리 방에 살고 있다는 것이 창피한건 아니었다. 부엌엔 도배 칠도 되어 있지 않아 겨울만 되면 냉랭한 시멘트위로 곰팡이가 피어나던 그 곳이 창피했었던 것도 정말 아니었다. 나는 학교에서 다녀와 집에 오면 다른 집처럼 앞치마를 맨 엄마가 아닌 아직도 이불을 깔고 누워 자고 있는 아빠가 너무도 창피했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힘들게 일을 하고 집에 올 시간이 되면 그제야 준비하면서 어디론가 나가는 아빠가 너무도 싫었다. 몇 년 후에 양덕원에 있는 이모에게 도움을 받아 싼값에 식당을 인수받은 아빠 또한 새사람이 되겠노라고 엄마와 내게 약속했었다. 그때 나는 우리도 다른 가족들처럼 될 수 있을 거란 새 희망을 갖고 있었고 나 또한 실망시켜드리지 않기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하며 틈틈이 식당일도 도왔다. 하지만 아빠는 행복해지기도 했던 그 꿈과 약속들을 한순간에 다시 망가뜨려놓았다. 정말 그건 참을 수 없는 증오였고 아픔 이였다. 하지만 정말 참을 수 없던 건 우리가족이 행복해 질수 있다고 가장 큰 희망을 품었던 엄마가, 식당일이 끝난 후 남몰래 흘렸던 그 쓰디쓴 눈물이었다. 그 뒤로 아빠는 우리의 옆에서 사라졌다. 가끔씩 전화벨이 울려 받아보면 수화기만 들고 있는 것이 아빠이거란 추측 밖에 더 이상 그이하도 그이상도 없었다. 어쩔 때에는 아빠가 정신을 차려 새사람이 되어 우리 곁으로 오기를 바랬지만, 그런 아빠의 소식보다 빚 독촉장이 상처받은 나와 엄마에게 안겨질 뿐 이였다. 결국 아빠가 없는 상태에서 이혼을 해야만 했고, 복잡한 서류절차에 변호사를 선임할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인터넷을 뒤져가면서 엄마의 이혼을 나또한 도왔다. 이모들이 내게 아빠가 오면, 그래도 아빠인데 받아들여야 옳은 것이 아니겠냐고 하지만 나는 내 스스로를 강하게 다잡으며 생각했다. 아빠란 사람 용서하지 않겠노라고. 내가 성공해서 당신 없어도 잘 살았노라고. 그렇게 나는 내 자신에게 채찍질했다. 내 친구들이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충분한 거름을 얻을 때 나는 아빠에 대한 배신감과 불쌍한 엄마에 대한 일념으로 내 미래의 거름으로 삼았다.
행복한 내일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그 내일과 미래가 자신의 꿈에 따른 이상향이겠지만 내게는 나뿐만이 아닌 내 가족을 위한 이상적이고 현실적인 내일이 되어야만 했다. 어쩌면 내가 과거에 얽매이는 것도 나를 더 채찍질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자라면서 나는 느꼈다. 싫다고. 너희아빠 용서할 수 없다고 하는 엄마였지만 가끔 방문을 닫고 흐느꼈을 때. 그리고 그 사건이 옛날 우리 세 가족이 행복했을 때, 놀이공원에서 찍었던 사진임을 알았을 때 엄마도 나도 아빠를 용서할 수밖에 없음을 말이다. 오늘이 있어 내일이 있다면 그 오늘이 있기 위해 과거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과거에 내가 아빠를 증오해 하며 오늘과 내일을 꿈꿔왔다면 오늘에는 그런 아빠를 용서해주는 것이고 미래에는 서로가 멋진 모습으로 만나 과거엔 이랬었다고 웃고 넘어갈 수 있는 그런 날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꿈꾸는 내일이다.
< 장려 - 시 >
무궁화
내촌중학교 - 강한솔
초라히 시들어 갈
자신이 부끄러울까?
온몸 떼어내는
고통도 마다 않고
눈물 아닌 자신을 송두리째
그늘 밖으로 떨궈 낸다.
뚝 뚝 떨어진
무궁화 주위로
쓸쓸한 고독만이
쌓여간 데도
간직했던 아름다움만이
눈물을 지켜낸다.
무궁화의 숨결.
어디론가 흘러가겠지
마지막 아름다움만을
쥐어 쥔 채로…….
무궁화의 마지막 사투에
내 마음이 울렸다.
< 장려 - 시 >
길
홍천여자고등학교 - 안하영
우리는 걷는 다
꿈을 향한 각자의 길을
부푼 가슴을 안고
그 끝을 향해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발을 내딛어본다.
때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가시에 찔려 피가 나고
어두워서 앞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좌절은 없다!
다시 일어나자
그리고 힘차게 달려보자
아름다운 우리의 꿈을 위하여
< 장려 - 시 >
친구
서석고등학교 - 김선영
푸른 가슴 덜 안고
다른 무엇보다
가벼운 가슴으로
너의 발자국이 되어
이 자리에 남는다.
내 가벼움
너의 길 그곳에
나는 살포시
정말 온전히 내려앉겠지.
네게 밟혀 상처 난 데도
아물 수 있는
가벼운 상처 아니라 해도
내 살점이 다나가 시리도록
그렇게 나는 너의
낙엽이 되어
외로운 너의 어깨에
말없이 내려앉아
마른 잎의 바스락거림,
그것으로나마
너의 이야기가 되어 내린 다
내가 낙엽 되어 내리는
이 순간만큼은
너의 책 속에 남을 책갈피.
영원함의 벗이 되고 싶어라.
< 장려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화촌중학교 - 강슬기
나는 현재 화촌 중학교에 다닌다. 지금 나는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엔 정말 사람들이 혀를 찰 정도로 나쁜 애였다.
나는 부모님께서 이혼하시고 동생이 장애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친구도 별로 없었다. 또 성적은 날이 갈수록 하락해 갔다. 나쁜 언니들과 같이 다니고 나쁜 일도 많이 했다. 마음을 고쳐먹으려 해도 환경이 잘 따라주지 못 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내 삶이 삐뚤어지고 있었다. 열심히 하려고 나머지 공부도 하고 친구들한테 나쁘게 보이지 않고 잘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아무도 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난 포기했다. 아무것도 못하는 나에게 잘해 줄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 난 더욱더 나쁜 언니들과 많이 붙어 다녔다. 그러면 더 괜찮을 꺼라 더 나에게 마음을 주지 않는 애들에게 복수할 수 있을 꺼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장애인인 동생을 핑계로 학교도 한두 번 빠지다가 한달정도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나 때문에 아빠가 많이 힘들어 하셨다. 그래서 아빠가 결정한 것이 동생을 어느 시설로 보내는 것이었다. 너무 슬펐다. 왜냐하면 아무도 나에게 눈길을 안 주었지만 동생 하나만큼은 나를 사랑해주고 이해해줬다. 비록 장애인이라서 아무것도 못하지만 날 사랑해주는 동생의 마음은 나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동생이 시설로 간다고 날짜가 알려줬다. 고모도 오시고 다른 친척들도 많이 오셨다. 그런데 그 시설원장님께서 똑똑한 사람이 한 명 더 있으면 좋겠다고 내가 올 것을 제안 하셨다라는 말을 아빠로부터 전해 들었다. 당황하기도 했다.
아빠도 부탁하고 고모도 부탁해서 난 거절하지 않고 승낙했다. 이 길이 나에게 좋은 길로 이끌어주는 길이었다. 난 어려서 아직 몰랐다. 하지만 어른들은 알고 계셨던 것 이다. 그래서 나와 동생이 이 시설에 오게 되었다. 처음엔 낯설었지만 차츰 적응해갔다. 또 내 동생은 날이 갈수록 변해져갔다.
이 곳에 온 후 나는 공부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 장래로 갈 때에 걸림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깨달았다. 내가 이 시설에 오기 전에는 내 꿈을 향해 갈 때에 걸림돌이 많아서 공부도 못하고 자꾸 나에게서는 안 될 길을 간 것 이었다. 나는 그 동안 못한 공부도 했다. 친구들도 많이 사귀고 하락했던 공부도 열심히 하니까 상위권에 들게 되었고 장애인이라 학교도 못 다니던 내 동생도 2년 만에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 곳에선 사랑도 배우고 행복도 알았다.
그리고 시설원장님 보고도 엄마라고 불렀다 .또 엄마(시설원장님)께서 나를 제주도도 데리고 가시고 호주도 데리고 하셨다 감사했다. 또 다른 한편으론 죄송하기도 했다.
그런데 몇일 전 아빠가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고 했다. 날 데리고 간다고. 장애인인 동생은 엄마가 키우라고 나는 데리고 간다고 그 이유는 새엄마를 맞았다는 이유로 날 데리고 간다고. 난 안 간다고 했다. 결국엔 안 갔지만 그 후로 아빠는 나에게 연락도 안 하고 생활비도 안 줬다. 그래서 깨달았다. 내 인생은 내 인생이란 걸 말이다.
나는 이 곳에 온 후 모든 것이 변했다. 내 꿈, 내 삶 등 과거에 내 꿈은 공부도 못하면서 판검사가 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회복지사가 될 것이다. 불쌍한 내 동생처럼 힘든 장애인들을 위해서 난 맹세했다. 꼭 사회복지사가 될 꺼라고 말이다…….
< 장려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서석중학교 - 이주현
2005년 8월 나는 어제의 검둥이 시골학생 이주현에서 오늘의 까무잡잡한 도시학생 이주현이 되었다. 시골과 도시의 차이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지는 내 배경이다. 하지만, 고향이 강원도이고 ‘동’이 아닌 ‘면’에서 살았다고 하니, 도시 아이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결코 착하지 않은 착한 아이가 돼 버리고 말았다.
뭐, 이 정도면 학교생활도 순탄히 잘 돌아갈 것 같고, 나쁘지도 않아 나름대로 만족해하며 하루하루를 나름대로 알차게 보냈다.
“시골 아이들은 너무나도 순박해서 참 친절하지.”
내가 전학 왔을 무렵, 같이 전임하신 영어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영어선생님은 내가 말 그대로 아주 순박한 시골 아이라는 것을 모르고 계신 채, 이 말 한마디를 꺼내셨다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몇몇 친구들은 나를 향해 키들 웃어주었다. 사실은 정말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내가 전학 오기 전에는 모두들 도시 아이들은 공부에 예민하며 아주 잘한다고 했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그렇지가 않았다. 이 반에 전교 일등과 이등이 동시에 있는데도 불과하고, 시골학교 못지않게 꽤나 웃음 있고, 공부를 무지무지 싫어하는 모두들 똑같은 학생이었다. 친구들과 선생님 몰래 쪽지를 써서 옆 친구에게 보내기도 하고, 모두가 모여 앉아 싫은 선생님, 좋은 선생님 한명 한명씩 모두가 얘기해 본적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비슷한 점은, 점심시간만 되면 아이들이 예민해 진다는......,
단지 조금 다른 점을 얘기하려면, 여기는 시골과는 다르게 전학이 잦고, 해외로 유학을 가는 친구가 많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두가 눈물과 작은 편지로 그 친구를 보내는 일은, 시골 도시할 것 없이 마음 아프기는 똑같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 파티의 주인공이 되었다.
2006년 3월 집안의 작은 사정으로 나는 다시 시골학생 검둥이 이주현이 되었다. 모두들 그리운 친구들 이였는데도 불과하고, 모두들 나를 보는 눈이 예전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새 학년이고 게다가 삼학년인 만큼 전신 차리고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니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공부하고 있다는 걸 조금 티도 내볼까 해서, 영어단어 몇 개를 적은 수첩을 들고 화장실에 가려한 순간, 나는 친구들의 대화 속에 내 이름이 흘러 나왔다는 것을 느꼈다.
“이주현 이번에 일등 할 것 같지 않아? 서울에서 엄청 좋은 성적 받았대.”
서울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다? 나는 분명 그런 소리를 한 적이 없는데..,.,.,
서울이라는 이 두 글자가 나를 이렇게 만든 것인가? 아주 조금은 오만감에 빠졌었지만, 그 오만감이 10이라면 이제 얼마 안남은 시험에 대한 불안감은 90이였다. 중간고사에 가까워질수록 나의 그 오만함은 균형을 잃은 채, 불안감을 더해주고 있었다. 나는 그냥 다시 왔을 뿐인데 단지, 전학 온 곳이 서울일 뿐인데 왜 이리들 경계하는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의 중간고사 성적으로 인해 그들의 경계 또한 사라졌다. 나로서는 집에 들어가 욕을 바가지로 먹을 앞일을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우리들이 꼭 우물 안의 개구리는 아닌 것 같았다.
짧지만 긴, 어제와 오늘의 꿈 사이에서는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다른 이들이 겪지 못한 수많은 일들을 걸쳐 성숙한 나를 이루어 냈다. 예전 같으면 도시 아이들은 무조건 재수가 없다는 둥, 공부에 미쳤다는 둥, 불평을 늘여 놓았을 텐데 실은 모두가 공부를 어려워하는 똑같은 학생인 것을 알게 되어 어느 정도의 부담감은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어쩌면 우리 모두가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아주 멋진 우물속의 개구리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언제나 우물 안의 개구리라면 좌절을 안겨주는 어른들의 말 보다는 우물의 깊이가 그리 깊지가 않다는 사실, 좌절이 희망으로 바뀐 사실에 나는 너무나도 만족한다. 육 개월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여행 이였지만 나는 귀로 듣는 것이 아닌 눈으로 희망을 안고 돌아왔다. 나로서는 공부를 아주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희망이란 녀석을 안고 최대한 즐겁게 하려 한다. 그렇게 연필을 쥐고 한자 한자 읽을 때면, 이상하게 나는 더 이상 우물 속 그늘이 아닌 햇빛을 본 것만 같아 더 큰 소리로 글씨를 읽어 나가고 있다.
< 장려 - 산문 >
선생님
서석고등학교 - 김미래
“미래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요?”
“저는 선생님이 될 거예요.”
초등학교 1학년. 잘 알지는 못했지만 장래희망을 선생님이라 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라는 곳에 처음 가던 날, 나는 무척 낯설었다. ‘나도 언니처럼 초등학생이 되었는데...’ 그 익숙하지 않은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허둥대고 있을 때 참 자상하신 분이 내게 다가와, “1학년인가 보구나. 나는 1학년 담임선생님이야.” 하시며 나를 향해 미소 지으셨다. 아! 그 순간, 바로 그 일이 첫 장래희망에 선생님을 적게 된 이유로 작용했다. 그리고 그 때 만난 선생님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미소 짓고 계신다.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무척 좋은 이미지로 다가왔기 때문에 지금도 일단 선생님이라고 하면 살짝 기대도 하고 어떤 분일지 관심을 갖곤 한다.
그 후 6학년이 되었을 때 학기 첫날, 우리 학교에서도 무섭다고 ‘호랑이’라 이름난 선생님과 만나게 되었다. 그 분은 지금까지 내 생애 중 첫 전환기를 제공하신 분이랄까? 소문과는 다르게 사뭇 다정하시고 따뜻하신 모습에 성어 중 ‘외유내강’이 아닌 ‘외강내유’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에 반 친구들과 깊이 어울리지 못하는 나를 일부러 학급 게시판 꾸미는 것에도 참여시키고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 덕에 자신감도 붙었고 반 이이들과도 잘 어울리게 되었으니, 활발한 내 원래 성격을 찾게 해주신 그 분은 나의 인생 전환점을 갖게 해주신 분으로 마음깊이 새겨 두었다.
그리하여 초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졸업 후 현재 고등학생이 되어 있는 나다. 6학년 이후, 중학교 때는 솔직히 말하자면 기억 속에 있는 분은 있지만 재 마음속에 남는 분은 없었다. 단지 즐겁거나 좋은 기억일 뿐이다. 나이가 대략 성인에 가까워진 지금은 나이를 먹은 만큼 나의 생각도 많이 변했다. 뭐랄까?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렇게 변한 내 마음에 맞추어 작년 겨울 알게 된 국어 선생님, 참... 그 분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무언가가 내가 힘을 내게 해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철없이 고등학교에 들어 왔는데 정말 나의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힘들 때, 살며시 다가오신 그 분, 점차 내 맘을 열어 주셨고 공부하다가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으로 낙심하고 있을 때는 “미래는 할 수 있어!” 라며 등 다독여 주신 정말 좋으신 분. 이 분은 내게 있어서 부모님 이래로 가장 존경하고 본받고 싶은 분이다. 내가 무엇보다 그 분이 좋은 이유는 누군가의 말을 진심으로 들어 주신다는 점이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대학 진학과 자의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은 시기에 자신의 진지한 본심을 알아주고 진심을 다해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 선생님을 만난다는 것. 그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그 분이 내게 있어 바로 그런 선생님이기 때문에 나는 무척 이 하나만은 행운을 가졌다 말 하고 싶다.
현재 나의 꿈은 선생님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리저리 돌아오기 했어도 결국 나의 꿈은 선생님이다. 나는 기억 속에 남는 선생님이 아니라 마음속에 남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 나의 선생님들이 보여 주셨던 것처럼...,누구보다 내가 느꼈던 좋은 선생님의 모습으로 서 있을 10년 뒤의 내 모습을 기대해 본다.
< 입선 - 시 >
무궁화
강원고등학교 - 윤병수
파랗게 질린 공허한 하늘 위로
단풍처럼 붉게 익은 태양이 떠오르면
유리 같은 이슬 머금고
우리 민족의 기쁨과 슬픔 같이 한
피어나는 찬란한 보랏빛 보석
민족의 눈물 되어 방방곡곡에 흩날려
겨레의 한 풀어 줄 보랏빛 향기
얼마나 순수한 눈동자인가
반만년 암흑의 터널을
겨레와 같이 버틴 보라빛 불꽃이여
< 입선 -시 >
길
두촌중학교 - 고아름
난 어떤 길을 걷고 있어
이 길은
포장되지 않아
험준한 산길이지.
내 앞에 보이는 건
높은 언덕 들 뿐이야.
지금은
많이 힘들지만
언덕 너머에
평평한 아스팔트길을 생각하며
참고 넘을 수 있어
언젠가 끝날 이 길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 봤을 때
후회가 없었으면
좋겠다.
< 입선 -시 >
길
서석고등학교 - 채윤병
이 길을 걸어본지 오래다
바람과 함께 걷던
추억의 이 길
시원한 바람과
이 길 위에 누워보면
은행잎은 바람을 타고
내 가슴속에 스며든다
파아란 하늘이
우리를 축복해 주고
노오란 은행잎이
우리에게
방긋 인사해 주던
이 길을...
나는 지금 살고 있다.
< 입선 - 시 >
길
내면고등학교 - 최현하
집에 가는 길
사르락 바람과 맞닿는 기척에
도토리 두어 개 이고 가는 다람쥐 하나
풀 섶에
꼬투리가 바래가는
가을색의 도토리 몇 줌
주머니에 우겨넣다
다람쥐가 불쌍해
녀석의 나무둥치에 놓아 둔
도토리 다섯 개
그리고
당귀 밭 하나 돌면
연붉은 줄 콩이 조록조록 성긴
그 사이로 뵈는 울 엄마
도토리 몇 줌 가지고
집에 가는 길
< 입선 - 시 >
무궁화
문막중학교 - 윤진희
진눈깨비에 맞서 희로애락을 함께하였다
남새밭이 저 눈발에 무릎 꿇길 때
소리 없을 아우성 친 아사달과 아사녀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색색이 수놓인 동산에 숨쉬고 있다
감히 어떤 이가 근화향에 범접하는가
순백색 이파리 붉게 물들여가며
파랑새를 부르짖던 미려한 옥토끼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색색이 수놓인 동산에 숨쉬고 있다
네온사인 찬연한 도시의 밤거리
조촐한 구석에서 생명의 빛 뿜어내는
우리의 역사를 혹여 잊지는 않았는지
화려함에 묻혀진 수려함을 느껴보아라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그 얼마나 아름다운 동산인가
< 입선 - 시 >
길
양덕중학교 - 박인애
황무지에 소낙비가
황급히 다녀가고
흙먼지만 가득하던
그 곳에도
무언가가 꿈틀거리네
아. 나의 열정
나의 의지, 나의 노력
그 무언가가
나를 불렀는가!
졸업이라는 축복 아래
내 마음 한 구석이
아려오는 까닭은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채워 줄
그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한 까닭이요
내 앞에 펼쳐진 일들을
선택하지 못하는 까닭이요
아직 세상에 까막눈인 까닭입니다.
하지만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이 길이 나에겐 가장 큰
축복이라는 것을...,
< 입선 - 시 >
길
한독문화여자고등학교 - 박선옥
1988년에 걷기시작한길은
육하원칙으로 끝을 모르는 길이다
걷지 않아도 스치듯 지나가는 길
걷지 않아도 걸어갈 길
밟지 않아도 지나갈 길
왜 좁고 고르지 못한 길인지
투정한 길 위
낡은 양동이를 짐처럼 얹은 가장이
같은 길 위 나와는 시계바늘처럼 이어져
있었다.
수많은 길 위 만난 것은
다시 돌아와 만나는 바늘처럼 예행되
있었을지 모른다.
분침이 시침을 끄는지
시침이 분침을 끄는지 모르는 상태로
시계처럼 아직도 길 위를 걷고 있다.
< 입선 - 시 >
무궁화
홍천여자중학교 - 주예리
한적한 저녁놀
곱게 깔린 오솔길에
춤추는 코스모스보다
유리창 너머로
피어 있는
빠알간 장미보다
아름답습니다.
고 속에 띄운
선조들의 눈물보다
10시간을 꼬박
불구멍에 앉아
영혼으로 검을 내리는 장인정신
누구보다 깨끗한 마음으로
붓을 잡는
선비정신 담아 핀
그 숭고한 자태는
누구라도
감동받게 합니다.
자리에 멈춰 서게 합니다.
< 입선 - 시 >
친구
치악 중학교 - 천소정
지금은 보고 싶은 5학년 친구들
개구쟁이였던 5학년 친구들
공부와는 거리가 먼 5학년 친구들
툭하면 싸웠던 5학년 친구들
그 모든 것이 싫었던 5학년 친구들
실험을 좋아하던 5학년 친구들
체육은 좋아하고 수학을 싫어했던
5학년 우리 반 친구들
노는 것이 좋았던 5학년 친구들
멋 내기를 좋아했던 5학년 친구들
철이 없던 5학년 친구들
지금은 소중한 추억으로 남게 될
5학년 친구들
언젠가 만나게 될 5학년 친구들
어른이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 친구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우리 반 친구들
< 입선 - 시 >
길
강원과학고등학교 - 방현수
문득 돌아본 등 뒤에는
발자국조차 삼켜버리는 아스팔트뿐,
그의
시커먼 입을 피해 달아나던
겁먹은 눈알들을 가로막는 수능 54km
이정표가 채찍질하는 너희들의 길을
더 이상은 내달리지 않으리라
길가로 내려서서 걷는다. 달린다.
너희들의 길에서 탈주하는
한 줄기
나의 길이 뻗어 나간다.
좋다.
아무도 걷지 않은 비포장도로의
거친 환영인사를 받으며 내달리는
아웃사이더는 웃는다
너희에게도 행복한 비웃음을 선사하리
문득 돌아본 등 뒤에는
아스팔트조차 삼켜버린 발자국들뿐.
너희들의 대로는 이미
버림받았다
그것은
나의 길가에 피어난
‘꿈. 직진’ 이정표를 따라온
수많은 아웃사이더들의
황홀한 탈주
< 입선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홍천여자고등학교 - 이예지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고민한다. 지금 살고 있는 건 오늘이지만 모두 내일 일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오늘만 중요하게 생각한다. 내일 일을 고민한다고 내일이 빨리 오진 않는다. 오늘이라는 시간은 모두 똑같이 주어진다. 24시간은 가난하든 부자든 착한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지 모두 똑같이 주어지는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다. 누구든 시간이 공평하다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늘의 24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오늘의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냐에 따라 내일이 바뀐다. 하지만 나도 오늘이라는 시간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아니다. 나도 오늘을 살지만 내일 일어날 일들을 고민하고 오늘을 최선을 다해 살아보지 않고 너무 행복한 내일을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이 바뀌지 않고서는 내일도 바뀌지 않는다. 내일도 역시 오늘의 연속일 뿐이다.
나는 중학교 때 성적이 좋은 편이였다. 하지만 최상위권에는 들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 성적에 만족하며 고등학생이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첫 시험 때 아버지께서는 중학교 때처럼 반짝 공부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지만 나는 또 시험 때만 공부를 해서 시험을 보았다. 시험 결과에 나는 정말 깜짝 놀랐다. 내 성적은 바닥을 겨우 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왜 이런 성적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나는 늘 내일로 미루다가 막상시험이 되어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중학교 때부터 오늘을 최선을 다하지 않고 늘 내일만 생각했다. 중학교 때는 공부량이 많지 않아 조금만 해서 좋은 성적은 받을 수 있지만 최상위권에 들지 못했던 것이 그 이유였다. 고등학생 때는 공부량이 많아졌음에도 중학교 때의 공부방법으로 오늘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내일로 미루고 좋은 성적을 기대했던 내가 어리석었다. 그것을 깨달은 나는 오늘 최선을 다하며 살려고 노력한다. 내가 꿈꾸는 내일은 오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에게 좌우명도 생겼다. ‘내일이 아닌 오늘 최선을 다하자’이다. 내일로 미루고 싶은 일이 있다면 좌우명을 생각하며 열심히 한다. 사람들은 ‘오늘 걸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연 오늘 걷던 사람이 내일은 뛸 것인가 결코 내일도 뛰지 않고 오늘 내일 열심히 뛴 사람과 거리차이는 날것이다.
오늘 일을 다 하지 않은 채 내일을 기다리고, ‘오늘 못 했으니 내일 해야지’생각하고, 오늘이 아닌 내일은 뭔가 다라지길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미룬 것은 내일이 되고 그 내일로 미룰 것이고, 뭔가 다를 것이라고 기대한 내일도 다음에 라고 미루는 오늘과 다른 것은 없다고 나는 오늘을 산다. 그래서 내일이 있다.
< 장려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강원고등학교 - 정석영
오늘처럼 내일을 꿈꾼 적이 몇 번이던가 복권에 당첨되고, 길가다 줍던 돈들도 모두 이에 해당될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처럼 밝고 둥근 달이 더 밝고 크게 보인적은 내일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행복을 우리는 단순히 기쁜 것으로만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깨달은 행복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행복이다. 다시 말하면, 단순히 물질적인 행복보다도 오늘을 넘어선 밝은 내일을 꿈꿀 수 있는 행복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인 것이다.
아픈 친구가 병상에서 일어났을 때 그 친구의 밝은 삶을 상상해보기도 했고 오늘처럼 백일장에서 글을 수상한 사람에게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해줄 훌륭한 작가의 모습을 상상해보기도 한다. 오늘의 일을 상상해보면 내일의 행복이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올해 8월은 나에겐 가장 큰 행복한 오늘이었다. 고3때 누구나 가장 희망하는 내일은 대학합격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도 먼저 이뤄냈으니 오늘한해처럼 밝은 내일을 계획하고 꿈꾼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앞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될 수업에 열중하는 훌륭한 영어교사의 모습도 떠올렸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 내가 좋아하는 영미문학을 공부하게 될 밝은 내일을 꿈꾸기도 해보았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오늘처럼 크고 높다른 산 정상 같은 곳에 몇 번을 더 올라갈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의 행복을 소중히 간직하고 희망찬 대학생활을 꿈꾸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대학생활을 통해 날개 짓을 하는 큰 학도 되고 싶고 높고 든든한 느티나무도 되고 싶다.
마지막으로 대학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를 계속하고 발전해가는 나의 문장력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 밝은 내일을 꿈꿔본다.
< 입선 - 산문 >
무궁화
구미시 금오고등학교 - 이재진
“영석아! 학교가야지. 어서 일어나.”매일 아침 반복되는 엄마의 잔소리로 나의 하루가 시작된다. 빠알간 세수 대야로 흐르는 맑은 물을 작은 두 손에 받아내 고양이 세수를 하고서 등굣길에 올랐다. 거리에는 하얗고 빨간 무궁화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항상 피어있는 꽃이 지만 아홉 살 난 나에게는 신기하게만 보였다. “어? 어젯밤만 해도 떨어졌었는데....... 누가 꺾은 건가?”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무궁화를 바라보며 학교로 향했다.
학교에 분위기는 정적을 끼얹은 듯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고 선생님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만이 학교를 차갑게 뒤덮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자습만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집문 앞 초록색 우체통에는 한 통의 편지가 와 있었다. “엄마! 엄마! 편지 왔어.” 엄마가 문을 열고 나와 편지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밭일을 하다 오셨는지 엄마의 몸에선 밭 냄새가 늘씬 풍겼다. “엄마.......”엄마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엄마의 손에서 힘없이 흘러내린 편지를 읽어보니 집을 부수고 짐을 싸라는 내용이었다. 이곳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뜻이었다. “영석아, 우린 아무데도 안 갈 거야.” “하지만....”나의 엄마는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거리에 피어있는 무궁화를 바라보며 눈물을 애써 삼켰다. 이틀 후, 거리에는 집을 부수기 위해 찾아온 경찰들과 깡패들로 가득 찼고 집집마다 집을 못 내어준다는 통곡소리가 거리를 울려댔다. 낫, 곡괭이를 들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홉 살인 나에겐 너무나도 큰일이었다.
우리 집에도 찾아왔다. “아주머니, 나가주세요. 위험해요.” 야구방망이와 총으로 무장한 장정들이 나와 엄마를 둘러싸고 위협하였다. “안...안돼요. 43대째 내려온 마을이에요. 못내줘요. 못내 준다구요.” 여러 차례 엄마를 설득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깡패들은 엄마를 때렸고 바닥에는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 “영석아...이제 더 좋은 집에 가서 고깃국 먹으면서 멋있게 자라야 되. 미안해.” 머리통을 심하게 맞은 엄마는 이렇게 나의 곁을 떠났다. “이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지독해! 거리에 무궁화처럼 말이야.”
나는 고아원에서 부잣집으로 팔려가게 되었다. 커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온 편지는 철거계고장이었고 마을사람들은 예전부터 내려온 마을과 무궁화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학교의 분위기는 폐교설이 돌았던 마을 분위기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지는....... 그래서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무궁화가 그립다. 무궁화 같았던 마을사람들이, 엄마가 그립다.
< 장려 - 산문 >
무궁화
인천 안일여자고등학교 - 주미희
전송국 선생님께-
선생님, 저 국희예요. 요즘도 몸 건강히 잘 지내고 계시죠? 언제나 학생들 생각뿐이시던 선생님, 이곳으로 와 있는 지금, 가장 많이 생각나는 분은 선생님이네요. 부모님과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들으시면 조금 서운해 하실 지도 모르겠지만요. 전 그곳이 그리워질 때면 가만히 눈을 감고 떠올려 봐요. 선생님 그리고 전교생이었던 여섯 명의 친구들과 함께 강가에서 잡았던 가재며, 은빛으로 반짝이던 몸으로 손과 손 사이를 요리조리 빠져나가던 작은 물고기들을요. 한번은 장난꾸러기 창섭이가 제 목 뒤로 작은 개구리를 넣기도 했었잖아요. 그 바람에 놀란 저는 ‘꺄악-’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넘어졌고, 까진 무릎에 피가 맺히는 걸 보고 엉엉 우는 저를 선생님이 업어주셨죠. 그때는 아픔보다도 왠지 모를 서러움에 더 눈물이 났었는데... 그래도 저는 금방 다시 웃을 수 있었어요. 경아와 미선이가 선생님 등에 업힌 저를 샘나는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다친 무릎보다도 더 아플 제 마음을 마치 아버지처럼 다독여주시고 보듬어주시던 선생님. 저는 그렇게도 넓고 따뜻했던 선생님의 등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가을에 낙엽을 모아 불을 피우고 모두가 둘러앉아 구워먹던 속살 뽀얗던 감자와 서로의 얼굴에 검댕을 묻히며 웃던 아이들의 그 밝은 웃음도요.
선생님을 처음 만났던 때가 생각나네요. 마을버스 차창을 통해 보았던 길가에는 흰색이며 분홍색의 무궁화가 피어 있었죠. 그날이 제가 그곳 홍천을, 또 선생님을 처음 만난 날이에요. 하지만 저는 그날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홍천 터미널에서 ‘국희야, 가면 할아버지 말씀 잘 들어야 돼. 밥도 잘 먹구. 아빠랑 엄마는 미국 가서 돈 많이 벌어 올 테니까...’ 하며 울먹이던 엄마의 얼굴이, 그 습기어린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거든요. 돌아서는 아빠의 회색 옷깃을 붙잡으며 저는 물었어요. 아빠... 나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밥도 잘 먹으면 올 거야. 응? 열 밤 자면..., 하고요. 엄마는 고개를 돌리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고, 아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셨어요. 하지만 전 알고 있었죠. 터미널까지 나와 계시던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마을버스에 오르며 생각했어요. 울며 발버둥치던 내 앞에서, 어떤 아저씨들에게 들려나가던 내 피아노를요. 빨간색 스티커는 제 까만 피아노와는 어울리지 않았어요. 저는 그래서 저를 안은 엄마의 품에서 으앙, 하고 더 큰 울음을 터뜨렸어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교실에 들어선 제게 선생님은 ‘아이구, 네가 우리 무궁화 영감님네 손녀로구나.’ 하시며 다정하게 웃어주셨죠.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왜 우리 할아버지를 ‘무궁화 영감님’이라고 부를까 하고요. 동내 어귀에서 만나 할머니나 가겟방 아주머니도 다들 저를 그렇게 부르셨거든요. 알고 보니 제가 마을버스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길가의 많은 무궁화들은 우리 할아버지가 심고, 또 오랫동안 가꿔오셨던 거래요. 정말 할아버지는 아침 이른 시간부터 파란 물통을 양손에 들고는 밖으로 나가셨어요. 사람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대단하신 분이라고 말해주었지만 저는 싫었어요. 6.25참전 때 다치셨다는, 그 절뚝거리는 다리로 혼자서 너무 고생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저는 또 밖으로 나가시는 할아버지 뒤에서 눈을 비비며 ‘할아버지, 오늘은 가지 마세요. 어제 기침도 심하게 하셨잖아요. 네?’ 하고 조르기도 했지만 할아버진 언제나 가만히 웃기만 하셨어요. 그렇게 나가셔서는 늘 초저녁쯤에야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그림자를 끌며 돌아오셨죠. 그런 할아버지도 이젠 세상에 계시지 않지만 저는 또렷하게 기억할 수 있었죠. 할아버지의 어깨는 비록 기울었지만 그 가슴 한켠은 무궁화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으로 빛나고 있었다는 것을요.
유난히도 홍천의 모든 것이, 또 모든 이가 보고픈 오늘도, 저는 여기에서 또 한 송이의 무궁화를 피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 거예요. 그럼 다음번에 꼭 찾아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6년 가을에 국희 올림
< 입선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홍천고등학교 - 이영찬
‘오늘 그리고 내일, 어제가 있기에 오늘이 있고, 수많은 오늘이 내일을 만든다. 하지만 찬란한 내일을 선사할 오늘은 나에게 있어 슬픔과 외로움, 그리고 고독을 준다.
벌써 가을이 다 되어가는 강원도의 어느 마을에, 고등학생이라면 모두 겪고 있는 시험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짐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그러면서도 쉽게 이 짐을 풀어헤치고 방황할 수 없는 것은 이제 서서히 내일이 그 숨겨진 자취를 드러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뚝!.......”
아래를 보니 두 동강 난 분필쪼가리... 아... 오늘도 어김없이 수학시간이면 빠져드는 인생 이야기에 넋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키득키득 웃고 있는 아이들, 피곤한지 잠을 자고 있는 아이들, 뚫어져라 책을 보는 아이들로 교실은 어지러웠다.
“너희들 이런 식으로 해서 성공할 수 있겠니? 수능이 내일 모렌데......” 공부. 수능... 고등학생이라면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하루에도 수백 번씩 들리는 이 단어들은 나의 웃음도, 감정도 모두 빼앗아 버린 지 오래다.
공부 = 성공이라는 말에 항상 반항기 어린 대답을 둘러대면서도 막상 하지 않으면 실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그것 때문에 졸린 눈꺼풀을 수십 번씩 떼면서 억지로라도 펜을 들고 있는 것이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면 밥이 목구멍 속으로 여간해선 넘어가질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인생에 대한 한탄을 급식소에서 풀어 내다보니 사실 먹는 시간보다 한숨쉬는 시간이 많다.
“휴......”
“오늘은 또 왜?”
항상 호쾌한 지훈이가 국물을 떠 마시며 게걸스럽게 말한다. 매사에 자신 있는 지훈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지훈이가 나는 너무 부러웠다. 매일 틀에 박힌 일상 속 에서도 나와는 너무 다른 오늘을 살고 있었다.
“그냥...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아서...”
“힘내! 어차피 지나가야 할 일 아니겠니?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잖아.”
“이런 상황을 어떻게 즐기니? 넌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 하니까......”
“무엇이든 열심히 해봐. 오늘은 내일의 준비과정이야. 너도 내일을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봐.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또... ”
“그만하자. 알겠으니까 밥이나 먹어.”
어깨를 툭툭 쳐주며 말하는 지훈이가 무안하게 나는 혼자 일어나 한가들 남긴 밥을 버리고 혼잡스러운 생각들을 물에 씻겨내었다.
오후수업. 키득키득 웃고 있는 아이들. 피곤한지 잠을 자는 아이들, 책을 보는 아이들은 오전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나도 역시 그렇게 나 혼자만의 상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란 말, 내일이 있기에 오늘을 흘려보내지 않는 것 ....... 정말 입에 발린 말들뿐이네 마치 누가 만들어낸 명언처럼!’
이런저런 허상에 빠져 있던 중 어느새 저녁이 되고 학원까지 마친 후에야 빨개진 눈을 하고 축 쳐진 모습으로 집 앞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런데,
“광섭아!”
캔 커피를 던지며 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그는... 역시 지훈이였다. 지훈이는 피곤하지도 않은 듯 웃으며,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괜한 말해서 미안,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어. 오늘이 힘들어서 내일이 절망적인 건 진정한 내일을 찾기 위해서야. 공부가 다는 아니야. 당장은 힘들겠지만, 너도 너의 꿈이 있잖아. 그 꿈을 위해 지금부터 살아봐.”
교복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선, 내 꿈은 뭘까? 내 꿈은 뭘까? 내 꿈이란 것이 없이 살아왔구나하는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왔다.
잠에 빠져 들다 보니 어느새 내일이 왔다.
< 입선 - 산문 >
선생님
홍천여자중학교 - 지윤정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많은 선생님을 만난다. 선생님은 많은 교훈도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이끌어 주시기도 한다. 초등학교, 중학교... 많은 선생님을 만났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선생님은 우리에게 친구같이 대해주시고 편안하게 대해주셨다. 그래서 졸업을 한 후에도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선생님과 나의 3명의 친구들과 그리고 나는 마트에 가서 김밥재료와 샌드위치재료를 산후 선생님의 집으로가 김밥과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그리고 김밥과 샌드위치를 싸들고 식물원에 가서 꽃도 보고 사진도 찍으면서 재미있게 놀았다. 또 목걸이도 만들고 너무 재미있는 추억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렇게 좋은 모습만 있으신 건 아니었다. 우리를 많이 혼내시고 꾸중도 많이 하셨다. 그때는 선생님이 정말 밉고 이해도 안 되었었는데 이제야 선생님의 마음을 알 것 같다. 아마도 선생님은 정말 힘들었을 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항상 웃는 모습으로 대해 주시고 잘해 주셨다. 이렇게 우리에게 잘해 주셨는데 스승의 날에 찾아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와 몇 명의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2학년을 맡고 계셨다. 아직 어린아이들을 가르치시는 거라 힘들어 보이셨다. 하지만 역시 웃고 계셨다. 나와 친구들과 선생님은 옛날을 떠올리며 얘기도 했다. 하지만 요번에는 찾아가지 못했다. 나는 정말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던 도중 난 메일을 확인하려고 로그인을 했다. 1통의 메일이 와있었다. 바로 선생님에게 온 편지였다. 힘들고 지쳐도 힘내라는 내용 이었다. 나는 이 편지를 읽는 순간 선생님이 더 가까워 졌다고 느꼈다. 난 그 후 가끔씩 선생님 생각을 한다. 힘내라는 메시지, 함께했던 추억들을 생각해보면 더 힘이 나는 것 같고 마음이 뿌듯해진다. 나의 선생님은 위대하시다. 선생님이 나의 또 다른 나를 만드셨다. 나에게 이렇게 좋은 선생님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울 뿐이다.
< 입선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양덕중학교 - 홍다경
한때 텔레비전만 틀어보면 여기저기서 한.미FTA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었다. 한.미FTA는 우리나라와 미국간의 조약이다. 이 조약은 옛날 우리나라가 일본이나 다른 서양의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 조약과 같은 것이다. EH 중국이나 일본의 심각한 수준의 역사왜곡들도 우리나라의 새로운 위기에 해당한다. 중국이 아시아의 다른 약소국들에게 한 공정들을 지금 우리나라에게 까지 하려고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동북공정을 통해 평양을 자신의 식민지가 우기는 것과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유산을 자신의 것으로 흡수시키려는 우리 국민이 아직 모르는 엄청난 일들이 중국곳곳에서 번번히 일어나고 있다. 일본이 독도를 자신의 영토라 주장하는 것도 마찬가지 일이다.
우리나라가 초기에 세워졌을 때부터 여러 가지 국제위기에 잘 대처해 나라를 굳건히 지켜낸 예들이 적지 않다. 그 예들을 여러 고전서적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박씨부인전에서는 병자호란에 잘 대처하진 못했지만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흔적들이 나타나 있다. 또 광해군이 한 외교정책만 보더라도 우리의 선조들이 아주 훌륭했음을 알 수 있다. 중립외교정책이라고 하여 강성하는 후금과 쇠퇴하는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적이며 현명한 외교정책을 사용해 나라의 위기에 대처했다. 고려시대의 스님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보면 불교의 힘으로 나라의 위기를 막아낸 이야기들이 실려 있다. 15수 향가 중 혜성가에는 혜성이 나타난 과학적인 일을 노래로 막아낸 일들이며 몽고족의 침입 때 팔만대장경을 새겨 부처님의 힘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함이 잘 드러나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가 옛부터 지혜를 발휘하거나 용기를 발휘해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한 예들은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자세이다. 우리나라의 반만년 역사를 다른 나라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옛것을 보존하여 새로운 것을 배워가는 온고지신을 자세를 십분 활용하여 나날이 변화하는 국제정세의 위기를 잘 대처해 나가야겠다.
< 입선 - 산문 >
선생님
두촌 중학교 - 권보라
내가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교가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모든 게 낯설던 나에게 선생님은 부모님 같은 존재였다. 초등학교 1 학년 때 선생님은 어린 우리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수업시간에 재미있는 이야기도 해 주시고, 가끔은 밖에 나가서 게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초등학교 3 학년 때 우리는 갑자기 선생님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선생님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때는 너무 갑작스럽고 선생님과 정이 많이 들어서 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웃는 모습으로 보내드렸으면 선생님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 텐데 왜 울면서 선생님 마음을 더 아프게 했는지 .......’ 하는 생각이 든다.
중학교 1 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우리랑 친해지시기 위해 여러 가지 학급 행사도 많이 하셨다. 한번은 우리 반끼리 토요일 날 수업을 마치고 먹을 것을 사서 강으로 놀러 갔었다. 선생님께서 강으로 놀러 가자고 했을 때 우리는 불만이 너무 많았다. 토요일이라 일찍 집에 가서 그동안 못했던 것들도 하고, 잠도 자고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설득으로 인해 우여곡절 끝에 억지로 가다시피 해서 강으로 갔다. 처음부터 가고 싶었던 곳이 아니여서 그런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친구들과 강에서 놀고 있었다. 결국엔 친구들과 그리고 선생님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 가기 싫다고 하는데 끝까지 우리들을 데리고 갈려고 했던 선생님이 싫고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왜 그때 선생님이 끝까지 우리를 데리고 갈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마 내가 그때 강으로 놀러가지 않았다면 이렇게 좋은 추억이 없었을 것이다. 중학교 1 학년 때 우리가 중학교 생활이 처음이어서 실수도 많았고 선생님 맘에 들지 않게 행동했었다. 그래서 꾸중도 많이 듣고 잔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때는 그 잔소리가 왜 그렇게 싫고 듣기 싫었는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뒤에서 묵묵히 우리를 위해 애쓰시고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뭐든지 알려 주시려고 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선생님이 잔소리를 조금만 하면 듣기 싫어하고 말도 잘 듣지 않는다. 항상 뒤에서 묵묵히 우리를 위해 애쓰시는 선생님처럼 우리도 선생님 말씀도 잘 듣고 잔소리도 기분 좋게 듣고 항상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 입선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홍천농업고등학교 - 최재숙
오늘도 이 길을 걷는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늘 같은 길을 난 걷는다. 학교를 가기 위해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난 또 이 길을 걷는다. 늘 똑같은 일상 전혀 다를 게 없는 오늘과 내일......, 지루한 일상......, 오늘도 내일도 나는 의미 없는 웃음을 띠고 사람들을 맞이한다.
“잘 지내니?” 그럼 난 또 의미 없는 웃음으로 “응. 나는 잘 지내”라며 또 의미 없는 웃음으로 이 지루한 오늘을 또 버텨낸다. 내일도 이렇게 지루하게 보내겠지. 자기 생각만하는 이기적인 사람들과 오늘을 함께 지낸다. 이 이기적인 사람들과 의미 없는 웃음을 진나는 이렇게 뭉쳐 이 세상을 살아간다.
당신은 알고 계신가요? 당신도 늘 의미 없는 웃음과 이기적 인연으로 오늘과 내일을 살아간다는 것을요......, 지루한 오늘을 그리고 내일을 좀 더 활기차게 지내실래요? 의미 없는 웃음 따윈 버리고 자기만 생각하는 그런 이기주의는 버리고 정말 내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웃음과 친해 보실래요? 의미 없는 웃음이 아니라 진정한 웃음어린 아이 같은 웃음으로 지루한 오늘과 내일을 살아보실래요? 오늘도 내일도 늘 같은 일상이라면 소중한 오늘이 내일이 너무 아쉽게 지나 가버리잖아요......,
오늘 그리고 내일 지루한 일상은 이제 안녕~ 하고 말해 버리세요 ......, 그리고 활짝 웃어보세요. 하하하 이렇게 말이예요.
< 입선 - 산문 >
오늘 그리고 내일
홍천여자고등학교 - 윤소희
초등학교 시절, 학교 주변에 조그만 경로당 하나가 있었다. 경로당은 엄마의 소박한 가게로 이어지는 지름길에 있어서 매일 그 앞을 지나곤 했다. 경로당 앞을 지날 때면 시골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에 밖에 앉아 계신 할아버지지, 할머니들께 정답게 인사를 드렸다.
그러던 중 나에게는 친할아버지 못지않은 분이 생겼다.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자주 걸었는데 그럴 때 마다 할아버지는 항상 6.25전쟁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할아버지는 금강산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농사일을 하시며 아내와 두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나날을 보내셨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고 할아버지는 가족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과 헤어진 후 할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여하셨는데 불행히도 중공군의 폭격에 그만 다리를 심하게 절게 되셨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시는 할아버지의 눈에서는 휴전선이 만든 그리움들이 방울방울 맺히셨다.
나는 아직도 할아버지의 슬픔의 목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죽기 전에는 아내와 두 자식들을 보고 싶다던 그 목소리를......, 그 분이 살아오시며 느꼈던 슬픔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야영이나 여행을 다니며 가족들과 잠시 떨어져 헤어졌을 때, 내가 서러운 일을 당했을 때 경험을 생각해보면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는 내가 알고 있는 할아버지 같으신 분들이 많다. 그래서 더욱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태극기 휘날리며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벌써 수십년을 남북한이 따로 살아오고 있다. 휴전선이라는 매개로 반을 갈라 서로에게 아픔을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직까지 이산가족들이 많다. 하지만 전쟁의 피해자이며 이산가족들의 아픔을 잘 아는 1세대들이 그들의 소원인 통일도 못 이루고 세상을 떠나고 있다.
진정 우리가 통일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이산가족들 때문은 아니다.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히 통일이 되어야 한다.
21세기를 나아가고 있는 현재 우리는 진정한 가치를 잊었는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며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정으로 통일을 원한다면 또 진정으로 한 민족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이산가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가진 이산가족 할머니, 할아버지께 지난날의 아픔보다 앞으로 통일이 되어 누릴 수 있는 기쁨을 드리도록 나와 학생들이 손을 잡고 오늘과 내일을 열심히 노력하여 생활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