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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호수>
서구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국가는 민족개념이 아닌 도시개념이었고 아테네는 도시국가로서의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헬라스 언어를 사용하는 그들은 이오니아인과 도리스인들이 중심이 된 종족으로서 그리스의 험난한 자연환경에 적응해 살았습니다. 평야지대보다는 험악한 산악지형으로 인해 육상에서의 교류가 어려웠으며 북쪽으로 부터의 민족이동은 그들에게 도시중심의 공동체를 단위로 하는 도시국가적 삶이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민족이동에 인구까지 증가하며 그들은 먹고살기가 점점 더 힘들었습니다. 결국 사회는 장남 이외의 차남부터는 고향에서 터전을 일구며 치열하게 살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한 공동체적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육지의 길은 산악지형으로 가로막혀있고 그들이 나아갈 길은 오로지 바다였으며 물 건너 타지(他地)가 그들의 운명이었습니다.
한번 트인 물꼬는 거침없이 흘러내리듯이 그들은 그런 운명을 당연하게 여김에서 더 나아가 자신들의 도시를 현지 연안에 건설하며 새롭게 이국땅에서 고향의 문화를 키웠습니다. 그렇게 꽃피운 문화의 향기를 모두 다 자신들의 순수한 고향냄새로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근동아시아지역으로부터의 오리엔트적인 향기와 아프리카 지역에서의 문물도 자연스레 들어와 함께하는 새로운 문화였습니다. 에게 해의 바닷길에 놓여있는 수많은 섬들과 그 동쪽 편으로 지금의 터기 연안은 그들 삶의 또 다른 제 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수많은 제 2의 고향들이 서서히 자신들의 본향으로 여겨졌으며 거기에는 이오니아뿐만 아니라 호모의 두 서사시에 나오는 트로이 지역도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삼천년 이전에 그들은 해적질까지도 좋은 삶의 방식으로 여기며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길로만 나아간 것은 아닙니다. 검붉은 노을로 장관을 이루는 곳을 향해서도 그들은 길을 떠나 피타고라스가 학교를 세워 가르치며 살았었다는 지금의 이탈리아 남부의 비옥한 평야지대와 시실리 섬에도 그들의 식민 도시들을 건설했습니다. 스페인 남부까지도 교역을 했다고 합니다. 지중해 연안을 따라 점점이 이어진 도시중심의 교역을 했으며 대부분은 에게 해를 중심으로 삶과 문화의 터전을 일구었습니다. 그 당시 이미 오리엔트지역은 선진문명의 세계였으며 비옥한 초생 달 지역이라고 부른 그곳과의 교역을 통해 문명을 받아들였으며 또한 이집트와의 교역과 여행을 통해 측량기술의 기하학적 지식과 조각의 기술도 수렴했겠지요. 그리스인들의 초기 문명은 오리엔트와 가까운 크레타 섬에서 크레타문명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사모스 섬으로 대표되는 이오니아 지역의 연안지대는 자신들의 헬라어를 사용하는 같은 동족이었다면 레반트 지역은 이민족들의 땅이었습니다. 즉 근동 아시아입니다. 레반트는 지금의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에서 지중해를 접하고 있는 해안지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오리엔트 지역은 그 안쪽의 이라크와 이란의 국경선 주변을 흐르는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까지 모두를 포함합니다. 즉 레반트 지역을 포함한 오리엔트 지역이 근대 유럽인들이 말하는 비옥한 초생 달 지역입니다. 그들보다 앞서 문명을 일군 비옥한 초생 달 지역은 그들의 문명교사이자 교역상대국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오천 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되었던 곳입니다. 인류 4대 문명의 하나인 그곳의 명칭은 중간이라는 뜻의 meso와 강이라는 뜻의 potamia가 결합된 ‘강들 가운데’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즉 ‘길가메쉬 서사시’가 점토서판으로 출토된 지역으로 수메르라는 그 최초의 문명국가가 시작된 곳입니다. 그 서사시의 형식은 희랍의 서사뿐만 아니라 유럽사회의 서사시의 원형이며 성경에 나오는 홍수이야기의 원전이기도 합니다. 그들 메소포타미아문명은 그리스인들에게 세상의 수많은 지식들을 전해주었습니다.
기원 전 1,200년부터 800년까지 그리스는 암흑의 시대로 자료가 전혀 없으나 그 이전 시대는 오히려 많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 자료로서의 토기나 조각들로 추정해볼 때에 그 시대에는 북으로부터 남하해오는 도리스인들을 감당할 수 없는 자연환경으로 인해 끝없이 이어지는 민족 대이동과 그들을 노리는 레반트 해적들의 출몰로 힘든 시기였다고 보여 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살길은 물길을 따라 수많은 지역들과의 교역에 있었습니다. 지금의 터키 연안인 이오니아 지역과 주변 섬들은 그들에게는 주된 이주지역 이었으며 헬라스 언어 문화권을 형성했습니다. 본토에서 그곳으로 이주해 정주한 헬라스 사람들을 우리는 지역의 이름을 따서 이오니아 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도시들은 내륙으로부터 들어오는 물품들의 집산지였으며 그리스 본토와의 무역항의 기능도 했지만 자신들의 터전으로 고향이 되었습니다. 그런 혼란의 시기를 거치면서 이오니아인들은 부를 축적해 도시국가로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고전문명이 시작되는 기원전 480년 이전에 이미 그들의 고유한 문화가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이오니아 지역의 자연주의적인 예술이 그리스 본토 즉 아테네의 인문학적 지식들과 합해지면서 그리스 고전시대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 명확한 시각일 것입니다.
그리스의 헬라스 인들은 패권적인 제국을 꿈꾸기보다는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잘 가꾸어가려는 치열한 내적탐구에 경도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삶에서의 가장 좋음은 경제적인 부의 축적과 그런 부를 가장 잘 사용하는 외적인 능력이 목표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그들 공동체에서 가장 존경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치열한 삶을 보여주는 것이었으며 그러한 노력으로 일구어진 내면의 높은 경지에 오른 경륜을 공동체의 정치에서 능력으로 기여하는 삶이었습니다. 즉 올림픽 운동경기에서 우승하면 그 영광을 기리기 위해 가장 훌륭한 조각가에게 작품을 의뢰해 조각품을 제작해 바쳤으며 매년 그리스 비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연극의 경연을 부자들이 스스로 후원해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우승으로 잔치를 베풀면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를 사회로 환원하는 조각품을 주문해 바치고 연극공연의 모든 비용을 들여서 주최하는 방식으로 삶의 질을 높이고 자신의 탁월한 안목을 한껏 시민사회에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폴리스 정치에도 참여해 경륜을 펼치는 것을 가장 명예롭게 생각했습니다.
땅을 점령해 그곳의 사람들과 재산을 약탈하고 노예로 삶는 야만적인 방식이 아니라 경제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치와 군사력으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현실에서는 치열한 경쟁과 투쟁으로 대상을 직접 꿰뚫어보는 치열한 삶을 실천하면서도 추상의 세계에서는 완벽한 완성을 향한 모든 군더더기를 없애버리는 냉철한 이성에 따른 이데아를 그들의 원형으로 가지려했던 것입니다. 즉 모든 동그라미들은 완벽한 원 하나로 집약되어야 했으며 모든 세모꼴들은 단 하나의 정삼각형으로 집약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런 이데아를 향한 이상적인 세계를 창조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교역과 거점도시는 건설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벌어들인 돈을 지키기에만 몰두하는 수전노가 되기보다는 그들 정치공동체의 참여를 통해 자신의 부를 환원하는 것을 명예로 알았습니다.
아테네 고전주의시대의 정점에 있던 위대한 정치가 페리클레스는 전쟁으로 사망한 전사들을 추모하는 추도사에서 말합니다. “우리는 부(富)를 자랑과 허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그 쓰임새가 있을 때 받아들였습니다. 진정한 치욕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것입니다.” 아테네의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창조적 정신세계에 대한 관심과 앎에 대한 호기심을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최선의 좋음으로 여기는 그런 시각을 누구나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이 연설문은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그런 의욕적인 삶으로 창조를 향한 열정을 발휘할 때에만 고전의 텃밭이 일구어진다고 생각됩니다. 결국 그들은 스스로의 창조성으로 인류 최초의 거대한 문명의 기둥을 세워 영원한 정신적인 세계에 건설했습니다. 그것은 인류문명의 변치 않는 고전이라는 명칭을 얻은 고전주의였습니다. 부유함에 만족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나약함이 아니라 역동적인 창조적 문화로 전환시켜 일구어내는 부지런한 정신 즉 정신적 제국의 건설에 동참하는 것을 아테네인들은 삶의 보람이자 영광으로 여기며 전체가 공유한 시민사회였습니다. 헬라스 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현실적 인식은 천상에 있다고 생각되는 정신적 제국을 지상에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의 멸망과 함께 등장한 고대 로마는 지중해 전체를 자신들의 호수로 완벽하게 점유하면서 정치적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로마는 식민지 정복전쟁을 통해 이민족들을 복속시켜 속주로 편입시켰습니다. 거대한 제국으로 발돋움하기위해 거기에 요구되는 모든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필요들을 하나하나 마련해나가는 현실적 치밀함이 그들의 감각적 재능이었으며 그들의 군대를 최강의 전투부대로 육성시켰습니다. 마리우스의 당나귀로 표현되는 로마의 정예군대는 합리적 규칙과 엄격한 규율로 전투에 최적화된 완벽한 군대였습니다. 정복전쟁을 통해 그들은 물리적 이익과 영토를 넓혀갔습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과 노예를 더욱더 확대 재생산시키는 물리적 순환능력에서 탁월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정신적인 추구보다는 먹고 마시며 돈의 위력을 삶에 적용시킨 현실적인 민족이었습니다. 그것은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통치형태를 바꾸는 능력도 카이사르의 순교를 통해 거침없이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로마는 제국으로서 황제에 의해 지배되는 단일국가를 이루었습니다. 지속적인 전쟁을 통해 약탈한 전리품들과 노예들은 로마인들의 부와 명예를 위해 재투자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현실에서의 물질적 성취를 자신의 권위와 야망을 보여줄 좋은 기회이자 방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장군들은 자신들의 사병(私兵)으로 군단(軍團)을 거느리며 그들을 입히고 먹이며 월급을 줄 정도의 재력을 가져야 직위와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사랑한 것은 로마 10군단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은 교역을 통해 이득을 보며 자신들의 식민 도시국가를 개별적으로 건설하며 정신적인 고결함을 지향했습니다. 자신들의 가문보다는 공동체에의 참여에 자신의 명예를 걸었으며 이상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면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가문의 명예와 제국의 길로 나아감으로서 개인의 현실적 욕망을 위해 국가가 필요했으며 국가를 현실적 명분으로 삼아 자신의 명예를 추구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교역을 하며 합리적 계약문화를 달성하기위해 추상적 개념의 통일성과 수학적 지식에 몰두할 때에 로마인들은 원시사회에서 도시국가로 또 거기에서 벗어나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나아가면서 무력을 통한 해적질과 지속적인 식민지 건설을 위해 노예를 이용한 해상전력의 강화에 몰두했다 하겠습니다. 그들은 제국에서 욕망의 완성을 보았습니다.
지금의 아프리카 북단에 위치한 지중해연안의 튀니지도 기원전 8세기부터 카르타고라는 도시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카르타고는 모두 다 도시국가로 출발했으며 그리스가 동쪽의 에게 해를 중심으로 헬레니즘의 제국을 이룩하였다면 로마는 지중해 서쪽에서의 교역을 두고 카르타고와 숱한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3차에 걸친 포에니전쟁을 통해 카르타고 도시 시민들을 모두 몰살시키고 자신들만의 영광된 로마도시를 건설해 아프리카에 거점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이 전쟁이야말로 로마가 지중해를 자신들의 호수로 확정시킨 중요 고비였으며 여기서부터 그들은 제국으로 나아갈 교두보를 확보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들은 이미 전쟁을 통해 제국의 길을 보았으며 그런 영광의 준비를 위해 모든 걸림돌들은 제거되어야 했고 소멸시켜야 했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시민들에게 영광된 제국으로 나아가는 성소가 되어야 했으며 결국 로마제국에 포함된 서구적 고대 도시국가로 재탄생 되었습니다. 최장 20년씩이나 군대에서 보낸 퇴역군인들에게 고향은 이미 타향이 되었고 결국 부대생활을 했던 인근도시에 대부분 안착했습니다. 로마인들의 실용성에 걸맞게 그들은 새로운 계획도시 즉 신도시를 구 도시와 구분시켰으며 완벽한 부대시설을 갖추고 퇴역군인들을 정착시켰습니다. 그들은 정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연금을 받으면서 그처럼 조성된 신도시에서 노예여성을 맞이해 새로운 안식처를 마련했습니다. 결국 지중해는 돈과 무력이라는 헤게모니가 지배하는 세계가 되었으며 중세 말에 북유럽의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고딕양식이 나타나기 이전까지 서구사회의 문명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며 유럽문명의 고대세계를 이끌었습니다.
고대세계에서 지중해는 세계의 전부였으며 그곳의 지배자가 당연히 세계의 지배자였습니다. 서구의 고대시대는 해상을 지배하는 국가가 헤게모니를 가졌습니다. 헤게모니는 이처럼 초기에는 다른 도시국가에 대한 정치와 군사라는 양면성을 가지고 지배하는 패권적인 방식을 말했으나 제국으로 나아가는 알렉산더대왕에 와서는 문화와 군사력이 헤게모니가 되었습니다. 로마에 와서는 로마 시민권과 군사력에 의한 헤게모니로 변화하기도 했습니다. 즉 평화적으로 항복하면 로마 시민권을 부여해주었지만 저항할 경우에는 무력으로 점령하고 포로들은 전부 몰살시키거나 노예로 잡아갔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한 이후 가장 커다란 통치의 문제점은 그들의 시각에서 볼 때에 야만적이고 이질적인 요소들의 통합이었습니다. 특히 서쪽의 로마와 동쪽의 비잔티움은 제국이 시작되면서부터 서로의 종교적이고 문화적 이질성이 제국의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제국을 유지하기위해서는 정치적 공동체에의 단일한 통치이념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새롭게 도입된 것이 보편적 체계를 가진 가톨릭(기독교)의 국교로의 승인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종교와 군사력으로 제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서방세계의 헤게모니의 변천사로서 지금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고대 헬라스 시절에 헤게모니는 한 도시국가가 다른 도시국가에 대한 정치-군사적 지배력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패권국으로서 아테네와 로마 그리고 카르타고라는 도시국가가 지중해를 중심으로 기원전 8세기에 이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도시국가란 도시와 그 주변의 영토를 가지고 있는 주권국가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들의 흔적은 서구 역사시대 최초의 문명사회의 근간을 이룩했으며 그 이후의 서구사회의 팽창은 그러한 패권적 전철을 당연시하며 전통으로 이어져왔다고 생각됩니다. 교역과 무력으로 외부세계를 제압하였으며 그 가능성을 최초로 역사에서 보여준 것이 헬라스 사람들이었습니다. 서구 역사에서 세상의 최초들은 헬라스 인들의 생활과 문화 속에서 나왔다고 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그처럼 세계 최초로 고전주의라는 문명을 꽃피웠던 헬라스 사람들은 모두 도시국가 체계였습니다. 그것은 아테네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인들의 인본주의 사상과 지금의 터키 연안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에서 일어난 보다 동양적이고 세속적인 화려한 자연주의가 혼용되며 일어난 인간지성의 개화를 최초로 알리는 서구문명의 탄생이었습니다.
아테네는 근동지역의 도시국가로부터 유입된 화려하고 세속적이며 자연주의적 경향들과 자신들의 인본주의적 지성의 신념들로 인류가 갈구해온 최초의 문명을 꽃피웠던 도시국가였습니다. 그들의 창조성은 역사상 최초의 고전주의라는 사조를 인간에게 선물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구와 근동의 세계가 합쳐지며 자연스럽게 걸어간 인간의 길이었습니다. 모두가 그러한 고전주의에 경도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동서를 막론하고 그들의 근본적인 고유한 본성들이 내재되어 있음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인지하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근대까지의 모든 문화적 구축물들은 그러한 그리스인들의 고전주의에 빚지고 있으니 무수한 문화적이고 창조적인 영감(靈感)들이 그곳에서 연유해왔습니다. 그러나 화려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세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내전이 뒤따랐습니다. 인류의 영광이 오래 지속된다면 그것을 누가 영광이라 회상하며 기억하겠습니까. 순간만이 영원을 향합니다. 결국 펠로폰네소스라는 내전은 스스로 쇠퇴의 길로 들어섰으며 그리스의 북부에 위치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등장과 재위 13년만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함께 시작된 헬레니즘시대는 지금의 에게 해를 중심으로 그리스와 터기 그리고 중동을 거쳐 이집트에 이르는 모든 지역을 로마에 내어주기 전까지 헬레니즘 문명으로 지속시켰습니다. 아테네는 헬라스만의 학교라기보다는 근대까지 이어지는 여러 다양한 문명에 영감을 부여해준 인류의 학교였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그리스가 자신들이 벌어들인 부(富)를 예술과 정치에 투자하며 스스로 고전주의와 민주주의 문명을 이룩했다면 로마는 정복전쟁으로 들어오는 모든 부를 로마로 집중시키기 위해 제국이라는 정치체제를 도입했으며 개인별 가문으로 성장시켰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는 결국 정치적으로는 제정(帝政)으로서의 우월성을 시민사회는 공화(共和)적인 안락한 삶을 선호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리스가 교역을 통한 식민지 건설의 도시국가 체계라면 로마는 전쟁을 통한 약탈과 노예로 제국의 통치체제를 고수했습니다. 그리스가 이상을 향한 집중에 몰입했다면 로마는 현실을 위한 실용성에 집중했다고 보여 집니다. 결국 서구세계는 그리스의 문명과 로마의 무력이 그들의 본질임을 우리는 고대를 비교해봄으로써 보다 근원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전쟁으로 운용되는 패권국가에게 필요한 것은 군사방면에서의 엄격한 위계적 질서체계와 법질서의 철저한 적용입니다. 문명사회의 시민공동체에서는 자신들의 결속을 이룩할 수 있는 사상적 통일로서의 보편적 이념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의 현실은 군사적인 문제보다는 동, 서간 특히 서방과 동방이라는 이질적인 문화적 요소들로 인해 그들의 결속이 느슨해지며 서로가 갈등관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원 후 1세기에 팔레스타인 지역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신약성경의 기록이 완성된 100년 이후 기독교의 교리는 해석을 두고서 지역 간의 견해가 달라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특히 로마와 비잔티움은 서로의 견해차를 좁히기 위해 많은 회합과 양보가 필요했습니다. 광활한 제국이 동, 서 로마로 갈리게 된 것도 어찌 보면 그러한 근본바탕으로서의 동, 서간 지리적이고 정신적 세계관의 차이를 극복하기가 어려워짐에 의해 어쩔 수없이 제국을 유지하기위한 차선책이었다고 여겨집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