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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의 수라상
(레21:1-24)
우리가 함께 읽은 레위기 21장 말씀 <임금님의 수라상>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여러분, 기억나시지요? 대장금이라고 하는 제가 외국에 있을 그 시기에 한국에서 대장금 저도 봤습니다. 감명깊게 봤어요. 그리고 중국과 심지어는 미국 같은 데 까지도 이 드라마가 수출되고 그 배우 김영애씨는 아직도 대장금 같고 우려먹는다고 그러나요? 충분히 그래도 될 정도로 정말 공전에 히트를 한 그런 TV드라마 아니었습니까?
거기 보면 임금님의 수라상이 중심 소재가 됩니다. 그렇죠? 그 수라상을 둘러싼 궁중 상궁들의 어떤 암투와 음식을 위한 어떤 그들의 정열과 또 음식을 하는 상궁들끼리의 어떤 계보 이런 것들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지 않습니까?
수라상. 임금님과 왕비, 대전대비, 세자빈 이런 사람들이 아침과 저녁으로 받던 일반적인 진지상을 수라상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그 임금님의 입맛을 맞추기 위해서 궁중의 주방인 소주방에서 정말 그 상궁들이 진땀을 흘리며 임금님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올리기 위하여 애쓰는 거 우리가 다 기억합니다.
오늘 제사장에 대한 일반적인 삶 속에서의 규정들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근데 참으로 하나님이 까다롭기도 하십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하나님의 비위를 어떻게 도대체 맞춰드릴 수 있겠나 싶을 정도로.
근데 전체 그 까다로운 내용 예를 들면, 수염을 옆을 깍지 말라, 머리를 대머리로 하지 말라, 살을 베지 말라, 결혼할 때 창녀나 이혼한 여자는 안 되고 처녀라야만 된다, 또 그 가족들은 상을 당했을 경우에 직계가족의 상에만 참석할 수 있지 이웃이나 이런 사람들의 장례에는 참석하면 몸이 더러워지는 것이라서 안 된다.
그 외에도 흠이 없어야만 된다 그래가지고 뭐 흠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장애를 말하는데 맹인이나 다리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육손 이런 것 말하는 거겠죠? 발 부러진 자, 손 부러진 자, 등 굽은 자, 백내장이 있는 자 하여간 가지가지로 까다롭게 제사장의 규정을 다 들었습니다.
근데 이렇게 까다로운 규정 예를 들어, 수염을 가를 깍지 말라, 대머리를 하지 말라. 이건 저는 상관이 없는 거 아닙니까? 저 뿐만이 아니라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이 만인제사장이 되면서 구약에 나온 제사장에게 허락하신 모든 규정들, 이전에는 우리가 뭘 봤지요?
제사를 드릴 때에 제사장이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해야 될 것인가를 하는 규정을 우리가 봤는데, 오늘은 제사장으로서의 신분을 갖고 있는 자가 일반적인 삶에서 주의해야 될 규정들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그 규정 속에 우리가 지금의 시대 속에서는 적용하기가 쉽지 않은 그런 규정들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가 무엇이냐 봤더니 「거룩」이라는 단어와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는 자」라고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음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라는 말이 21장 안에서 4번이 반복이 됩니다.(6,8,17,21)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는 자인즉 거룩할 것이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입맛을 맞춰드리는 자이기 때문에 이러 이러 이러한 삶의 모양이 나타나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레서 제사장의 삶의 어떤 핵심적인 포인트가 어디 있느냐? 제사장 삶의 패턴, 삶의 양식의 핵심이 되는 그 주제가 뭐냐?
하나님께 음식을 차려드리는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다섯 가지의 제사를 하나님께 백성을 대표해서 드리는 자 아닙니까? 이 제사라는 것을 곧 하나님께서는 음식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에요.
근데 한국에서의 제사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음식을 만들어놓고 숟가락을 꽂아놓습니다. 조상 귀신들이 와서 그 음식을 배불리 먹고 가라고. 근데 그런 뜻은 아니지요. 왜냐하면 우리의 제사는 드리는 그 제사물이 나와 동일시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반면 이스라엘의 제사는 헌제물이 곧 나와 동일시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제사를 음식으로 생각해서 먹는다는 것은 곧 제사를 드리는 자의 마음을 말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번제다 그러면 내가 죄로 속속들이 썩었기 때문에 각을 다 떠서 철저하게 죽이고 철저하게 분쇄해서 하나님께 살라 드린다. 그러므로 내가 철저하게 죽겠다는 마음을 하나님이 음식으로 먹는다는 이야기입니다.
또 소제는 매 시간 시간 시간 시간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방향을 갖고 위를 향하는 마음을 갖고 ‘위엣 것을 찾으라 그 곳에는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그 보좌 우편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골로새서의 말씀처럼 하늘을 향하여 마음을 뻗고 살아라. 이 세상의 앞날 앞으로 이렇게 좋은 세상이 올거야, 이런 일이 이루어지면 참 좋을 거야. 이렇게 미래를 보면서 시간을 덩어리로 썰지 말고, 매 순간 수간을 위를 향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가지라. 이것을 하나님이 맛있어 하신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만인제사장의 십자가 사건이후 그러한 신앙적 고백이 통용되고 있는 이 교회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내가 제사장으로서 어떤 사람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갑니까? 하나님께 음식을 차려드리는, 임금님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수라상을 준비하는 상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겁니다.
또 한 가지는 제사장은 일반 백성들의 마음을 제사로 드리는 자들이었습니다. 근데 우리가 제사장이라는 것은 곧 내가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하나님이 먹게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제사장 시절에는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드실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제사로 표현하며 드렸는데, 이제 만인제사장인 이런 시대에서는 나 스스로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이면서 동시에 그 드리는 것을 누가 드리느냐? 또 내가 드리는 주체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지요.
제사물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 한번으로 이루어진 그 사건이 나의 제사물이 되면서 곧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고 내가 제사를 드림으로 내가 제사장이면서 동시에 내가 또 헌물이 되는 그러한 상황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이제 이 말씀을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 삶 속에서 적용을 해보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이제는 좀 오래됐어요. 오래는 됐지만 계속 되고 있는 게 Value Innovation 이라고 하는 말을 1997년에 Harvard Business Review 라는 잡지에 처음으로 말을 만들어 발표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계 미국인인 김찬 이라고 하시는 분이에요.
Value Innovation을 우리 말로 번역을 하면 ‘가치혁신’이 될 것이에요. 이 사람이 Harvard Business Review 라는 잡지에 뭘 냈느냐 하면 5년 동안 세계 30대 기업을 조사해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유지하고 있는 회사와 그렇지 않은 회사를 비교를 한 겁니다.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한 회사는 왜 이것을 이루어냈느냐 봤더니 그 사람 말로 붙인 것이 바로 가치혁신을 끊임없이 했기 때문이다.
Value Innovation 가치혁신이라는 게 무엇이냐?
경영을 하는데 이전에는 회사가 어떻게 했느냐면 좋은 물건을 만드는데 중점을 둔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사 자체 내에서 좋은 물건에 대한 기준이 있었겠지요. 이렇게 돼야 된다, 이렇게 돼야 된다.
근데 이 가치혁신이라는 말은 무엇이냐면 무조건 좋은 물건을 만들려고 애쓰지 말고 그 물건을 쓰게 되는 소비자의 가치지향성, 소비자의 가치지향성이라는 것은 소비자가 어떤 것을 좋아하느냐를 빨리 캐치해서 그 소비자의 가치지향성에 맞추어야 된다.
이것이 바로 Value Innovation을 지속적으로 해가는 회사들이 지속적인 성장을 하는 이유였다는 말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래서 생활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중국음식점이다 그러면 이전에는 그 중국집이 자장면을 맛있게 만드는데 중점을 둔 겁니다.
근데 요즘은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자장면 맛있습니까?” 그러면
“예, 맛있지요. 우리 자장면 되게 맛있습니다.”
“아, 그래요. 그러면 짬뽕은? 짬뽕도 맛있어요?”
“짬뽕도 되게 맛있는데요. 염려하지 말고 하십시오.”
이걸 옆에서 중국집 아들이 본 겁니다. 손님이 자장면과 짬뽕을 놓고 고민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들이 한마디 하는 거예요.
“아빠, 손님이 자장면도 맛있고 짬뽕도 맛있다고 하니까 어느 걸 먹어야 될지 모르는데 자장면과 짬뽕을 같이 드릴 수 있는 그런 거 뭐 없을까?”
그래서 나온 게 뭡니까? 짬짜면이에요.
자장면과 짬뽕을 내 기준으로 맛있게만 만드는데 이게 능사가 아니라는 겁니다. 소비자가 어떻게 원하느냐에 따라서 그것에 맞추어서 음식도 파는 거예요. 그래서 짬짜면에 요새는 자장면과 볶음밥하면 볶짜면... 이름도 다 모르겠다. 하여간 탕수육과 자장면을 같이 넣기도 하고 이래서 파는 거라는 겁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한번 물어볼게요.
지금 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 Value Innovation에 있습니다. 오히려 문제라는 거예요. 뭐에? 소비자의 입맛을 따라 말씀이 바뀌는 겁니다. Value Innovation의 방향이 지금 소비자라고 비유될 수 있는 교인들에게 맞추어지고 있다고 하는 이게 문제라는 거예요.
특히 우리나라 안에 잘 아려져 있는 미국교회들. 미국교회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 Value Innovation을 앞장 서서 가는데 소비자의 성향에 맞추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성경 전체가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는 자들, 즉 하나님의 입맛에 맞추어야 된다는 겁니다. 설교자건, 만인제사장 시대를 사는 한 신앙인으로서 제사장적 직분과 사명을 갖고 있는 한 평신도건 모두가 다 Value Innovation을 위하여 맞추어야 될 대상이 이 세상과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 가족이 아니라 우리 남편과 아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 입맛을 맞추어드려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전부 입맛을 맞추고 있는 방향이 뒤바뀌어 버렸다는 거예요.
임금님의 수라상을 차리는 상궁은 상궁이 갖고 있는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그 수라상에 올려지는 음식의 간을 맞추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임금님의 입맛에 맞추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때로는 임금님이 잘못된 입맛을 갖고 건강을 해치는 음식을 먹을 때 대장금을 보니까 그 임금님에게 건강에 좋은 음식을 해드리기 위해서 비난을 감수하는 경우도 있습디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맛이 잘못될 수가 있느냐 말이에요. 인간인 임금의 입맛은 잘못되지만 하나님의 입맛은 잘못될 수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무조건 하나님의 입맛에 맞추는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입맛에 맞추어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
여러분, 아주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세상의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잖아요. 이 소금이 되라고 하는 말도 우리가 너무 오해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뭐 소금신학을 만들어 내는 거예요. 뭐 부패를 방지하는 것이 되어서 썩어가는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이런 거 아니잖아요.
소금이라는 것은 이 주님의 말씀 속에 무슨 의미가 들어 있냐?
소금이 맛을 내는 것이에요. 소금이 맛을 낼 때 소금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음식을 변화시키지를 않습니다. 삶은 달걀을 소금에 찍어먹는다 이렇게 하면 달걀 자체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라 먹는 사람의 입맛을 변화시키는 거예요. 달걀만 먹을 때와는 다르게 입맛을 바꾸는 거 아닙니까?
미역국에 소금을 집어넣는다 하면 미역국 자체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잖아요. 먹는 사람의 입맛을 바꾸기 위하여 느껴지는 맛을 바꾸기 위하여 하는 것이지 미역을 변화시키는 게 아니거든요? 미역국은 그대로 놔두고 그 속에 녹아들어갔을 때 미역국을 먹는 사람의 입맛이 그렇게 느끼게 하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하나님께 음식을 만들어드리는 자로서 우리가 살아간다. 만인제사장으로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냐?
예를 들면 자식이 하나 있잖아요. 그러면 자식이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된다. 자식을 바꾸어줘야 된다. 자식이 잘못됐다고 이렇게 생각을 해요.
그러나 하나님이 자식과 내가 마주 대하고 있는 이 상황을 맛있게 먹으시려면 내가 소금이 되어야 되는데, 내가 소금이 되어야 된다는 건 뭐냐?
그 자식을 바꾸려고 하지 마요. 미역국인 자식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내 자신이 하나님의 입맛에 맞는 태도를 취하면 된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꾸 문제가 있으면 그 문제를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 문제를 끌어 안아버립니다. 그러지 말아요.
그 문제가 문제가 아니라 그 문제 앞에 서 있는 내가 하나님 입맛에 맞는 태도를 취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예요.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는 손바닥 뒤집기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열불을 내고 이럴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남북한 통일을 생각한다. 그것은 구 소련이 없어진 걸 생각하면 손바닥 뒤집기에요. 그러면 우리가 통일을 위해서 애를 쓸 게 아니라 분단된 조국의 현실 앞에서 내가, 교회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나님 입맛에 맞게.
그리고 자식문제, 남편문제 모든 문제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요. 그 문제를 마음에 두지 말고 그 문제 앞에 서 있는 내가 하나님 보실 때 쉽게 말해서 진짜 문제는 하나님 입맛이라는 얘기입니다. 내가 풀어야 될 숙제는 눈앞에 보이는 이 세상의 문제들이 아니라 그 문제들 앞에서 서 있는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입맛이 문제라는 거예요. 그 입맛에 맞추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 문제는 내버려둬요.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도 하지 말아요.
예를 들어 이스라엘 백성이 로마 식민지로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셨냐?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게 아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 식민지라고 하는 민족의 문제를 건드리신 게 아니라 그런 삶의 환경 속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만 생각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가룟 유다 같은 사람이 생겼어요.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투신할 마음으로 예수를 쫓아다니다가 예수님이 안 그러니까 배신합니다. 그래도 가룟 유다의 마음에 맞춰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 입맛에 맞추려다가 가룟 유다에게 팔려버립니다.
그러니까 제가 목사 일을 제대로 하려면 교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입맛에 맞추다가 교인들에게 쫓겨나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바른 거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자식문제 아내문제 남편문제 집안 문제가 드글드글 일어나잖아요? 그러면 제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요.
그 문제 앞에 서 있는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이게 바로 번제의 태도요 소제의 태도입니다.
자식이 대학에 못 들어간다. 이 자식의 미래가 걱정된다.
미래? 벌써 이게 소제적 삶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간을 덩어리로 잘라버린 것 아닙니까? 얘가 앞으로 뭐가 되려고 그래? 이렇게 생각하는 것 이거 하나님이 안 좋아하신다는 거예요.
지금 공부를 안 해서 대학에 못 들어갈 것 같은 아이가 있다면 그러면 그 아이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하느냐? 강남 아줌마 따라잡기 하지 말고 하나님 뜻 따라잡기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 입맛 따라잡기 하라는 거예요.
왜 강북 엄마가 강남 엄마를 따라 잡으려고 애를 씁니까? 강북 엄마는 강북 엄마대로 살면 되지요. 내가 따라 잡아야 될 것은 하나님의 입맛입니다.
남편이 이런 문제에 봉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와 연관되어 있을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 상황에서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입맛에 맞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그 상황 자체가 내가 소금이 되어서 하나님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는 거예요.
항상 모든 상황에서 그 상황에 주어져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미역국을 변화시키려 하지 말고 나는 소금이 되면 돼요.
소금이란 뭐냐? 하나님의 입맛을 위한 존재가 되면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상황을 바꾸시고 그 상황을 변화시켜나가시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머리털 하나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라는 거예요.
머리털 하나 바람에 날린다는 말이 있나요? 모르겠네. 하다보니까 나온 말인데... 어쨌든 그렇게 쉬운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그렇게 쉬운 일을 하나님이 안 이루어주시면 뜻인 줄 알고 그 문제 앞에서 바른 태도를 취해서 하나님 입맛에 맞게.
그러니까 우리가 웨이터로 살면 돼요. 제사장은 곧 웨이터다. 제사장은 곧 주방 상궁이다.
모든 상황에서 그 상황의 문제를 파악하려 하지 말고 이러한 상황 앞에서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좋아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언제나 좋아하시는 게 있어요.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에 기억하고 내가 그 문제 앞에서 죽은 자가 될 때 하나님이 언제나 맛있어 해요. 언제나 맛있어 해서 그 상황을 덥썩 먹으시면서 당신의 뜻으로 완전히 바꿔놓으신다는 겁니다.
언제나 무슨 상황에서나 맛있어 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며 하나님의 입맛을 생각하는 것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상황이든지 다 받아들여요.
받아들인다는 게 뭡니까? 에덴으로 바꾸신다는 얘기에요.
제사장이다. 나는 웨이터다. 나는 주방 상궁이다.
오늘 하루 살아가는 것은 임금님되시는 우리 하나님의 입맛을 위해 살아간다. 내게 주어지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살아가는 게 아니다. 그 문제 앞에서 내가 소금이 되는 것이다. 그 문제를 변화시키는 게 아니다. 임금되시는 하나님의 입맛에 맞는 소금이 되기 위하여 나는 살아가고 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늘 하루 임금님 수라상 차리는 겁니다.
임금님 수라상 차릴 때 자식이라는 반찬, 남편이라는 밥, 아내라는 국, 이웃이라는 사업이라는 젓갈 이 모든 반찬을 만지고 음식을 만들 때마다 전부 하나님의 입맛으로 하나님이 어떻게 하면 좋아하실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입맛에 맞을까 이런 것을 생각하시면서 사시면 그저 좋은 일만 생길 거예요. 감사한 일만 생길 거예요. 믿으세요!!
임금님의 수라상 차리는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주방 상궁입니다.
(070629)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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