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 12:1-7, 입다와 에브라임의 전쟁, 23.6.14, 박홍섭 목사
입다의 이야기는 특이합니다. 다른 사사들의 이야기는 그 사사가 어떻게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방과 싸워서 승리하여 이스라엘을 구원했는가에 집중하는 반면 입다는 그렇지 않습니다. 10:6절부터 12장 7절까지 총 59절 중에서 암몬과의 직접적인 전쟁 이야기는 아주 짧게 11:32-33절 2절만 언급되고 나머지는 입다가 사사로 부름을 받는 이야기와 그의 서원,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같은 동족끼리인 에브라임 지파와의 싸움을 더 길고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보다 서원과 동족인 에브라임과의 싸움 이야기를 더 중요하고 자세하게 기술할까요?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언약에 관한 것입니다. 앞에서 확인한 입다가 사사로 세워지는 과정과 그의 서원도 언약에 관한 메시지였습니다. 입다는 기생의 아들로 자기 가문과 이스라엘이 버린 사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버리고 온갖 우상을 섬기고 있었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버린 입다를 구원자로 세워 자기 딸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말도 안 되는 서원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을 통해 언약의 중요함을 역설했습니다. 에브라임과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약속의 땅에서 안식을 누리며 그 복을 열방 가운데 나누어주어야 할 이스라엘이 동족끼리 싸우는 고통과 내분의 상황이 올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언약의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약속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12:7절을 보십시오. “입다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육 년이라 길르앗 사람 입다가 죽으매 길르앗 한 성읍에 장사되었더라” 우리는 이미 사사기에 나오는 패턴이 거의 비슷한 구조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방에게 내어주어 고통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사를 통해 구원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사가 살아있을 동안에는 이스라엘 땅에 평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조가 입다부터 조금씩 달라집니다. 입다 이전에는 적에게 지배받는 기간 보다 사사들의 통치를 받으며 평안을 누린 기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첫 사사 옷니엘의 경우 적의 지배 아래 고통을 받는 기간은 8년이었지만 사사의 통치 아래 평안을 누렸던 기간은 40년이었습니다. 계속 그런 사이클로 가다가 입다부터 사사들의 통치 기간이 짧아지고 적들에게 고통받는 시간이 더 길어지는 역전의 현상이 일어납니다. 입다의 통치는 6년이지만 암몬에게 고통당한 기간은 18년입니다. 여기에 더해 입다부터는 사사가 다스릴 동안에 그 땅이 태평했더라, 평안했더라는 기록이 없습니다. 적들에게 고통당하는 기간보다 사사가 다스리는 기간이 훨씬 짧았을 뿐 아니라 그 짧은 기간도 태평하거나 평안하지 않고 오늘 본문처럼 자기들끼리 싸우는데 오히려 적인 암몬과의 싸움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싸우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입다 이전에는 고통 중에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셨는데 입다부터는 그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이 다릅니다. 입다의 경우에는 처음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이 듣지 않으셨고 삼손의 경우에는 아예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지도 않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과의 언약에 충실하면 하나님께서 그 땅에서 안식을 주고 승리를 주고 평강을 주시는데 거꾸로 안식의 땅에서 적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기간이 더 많아졌다는 것은 그들이 그만큼 언약을 어기고 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사사인 삼손 때엔 안식이 아니라 고통받는 기간이 무려 40년이나 됩니다. 갈수록 이스라엘이 안식과 복이 아니라 고통과 싸움에 찌들리는 삶, 안식을 원하지만 안식하지 못하는 거꾸로 된 삶을 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왜 안식할 땅에서 안식을 빼앗기고 있으며, 자기들끼리 싸움으로 스스로 안식을 깨트리고 있습니까? 여호수아 1장 6-13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통해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언약 안에 잘 머물면 그 땅을 차지할 뿐 아니라 그 땅에서 안식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은 그 약속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떤 뜻입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에서 떠났다는 의미입니다. 언약을 버리고 다른 약속을 붙들고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에브라임 지파의 시비와 다툼과 불평은 상습적입니다. 전에 기드온 때도 나중에 자신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까? 이번에 입다에게는 더 심하게 거짓말까지 동원합니다. 입다는 암몬과 싸우기 전에 에브라임에게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요청을 거절해놓고 부르지 않았다고 불평하고 시비를 겁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내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싸울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한고로 나는 너희가 도와주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 내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고 건너가서 암몬 자손을 쳤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 손에 넘겨주셨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오늘 내가 올라와서 나와 더불어 싸우고자 하느냐 하니라” 자신들이 암몬과의 싸움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서 그 요청을 거부해놓고 막상 입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암몬을 물리치고 승리하자 뒤늦게 왜 안 불렀냐고, 우리를 왜 이렇게 대접하냐고, 반드시 불로 입다와 그 집을 사르겠다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억지 시비 아닙니까?
더군다나 입다와 길르앗을 모욕까지 합니다. 4절이죠. “입다가 길르앗 사람을 다 모으고 에브라임과 싸웠으며 길르앗 사람들이 에브라임을 쳐서 무찔렀으니 이는 에브라임의 말이 너희 길르앗 사람은 본래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자로서 에브라임과 므낫세 중에 있다 하였음이라” 입다와 길르앗은 에브라임에서 도망한 도망자, 난민이니 암몬과의 싸움에서 얻은 전리품을 우리에게 넘기라는 뜻입니다. 공갈 협박입니다. 입다가 속한 길르앗도 므낫세 지파의 한 분파로 당당한 언약 백성입니다. 그런데도 에브라임 사람들은 입다가 서자의 자식이며 다른 지역에서 굴러들어온 돌맹이에 불과하다고 조롱하면서 협박했습니다.
이런 에브라임의 시비와 조롱과 협박은 입다로 하여금 전에 기드온처럼 에브라임의 시비를 달래서 돌려보낼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도 남겨주지 않은 완전한 깡패짓입니다. 할 수 없이 입다는 에브라임과의 싸움을 결정하고 길르앗 사람들을 다 모아서 에브라임을 물리칩니다. 그렇게 해서 죽은 에브라임 사람들이 사만 이천 명입니다. 광야에서 인구조사 할 때 에브라임 지파에서 전쟁에 나갈만한 장정이 삼만 이천 오백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만 이천 명이 죽었습니다. 거의 에브라임 지파의 몰락에 가까운 엄청난 결과입니다. 스스로 자초한 죽음과 불행입니다. 왕상 12:25을 보면 나중에 에브라임의 불평불만이 통일왕국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분열의 주동적인 원인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다고요?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지 않고 자기 욕심과 자기 이기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은혜와 복을 누리지 못하고 시비와 다툼과 고통과 원망과 피곤함을 짐으로 짊어지고 사는 이런 모습은 없습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말씀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할 언약 백성이 그렇게 살기를 싫어하고 자기 욕심으로 나아가면 그렇게 됩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상실하고 자기 이름 내기 위한 이기적인 욕망으로 교회 생활하면 에브라임처럼 됩니다. 어떤 교회에서 커튼을 새로 교체한 일이 있었습니다. 낡은 커튼을 새 커튼으로 바꾸니 예배당 분위기가 밝아지고 좋다고 교인들이 좋아했는데, 한쪽 구석에서 예전의 커튼 붙들고 눈물짓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 커튼을 헌물한 권사님이었습니다. 그 권사님이 교회가 이렇게 교인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되냐고 항변하자 조금 전까지 기뻐하던 교인들이 전부 눈치를 살피면서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에브라임 지파의 말도 안 되는 시비와 원망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일면 비슷한 점은 없습니까? 그 권사님의 마음 아프게 하지 않으려면 교회가 끝까지 낡은 커튼으로 지내야 합니까? 예배당 분위기가 어떠하든 그 커튼만큼은 그분이 살아있는 동안은 건드리면 안 되는 성역이 되어야 합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에게 정직하게 물어봅시다. 혹시 나도 하나님의 약속과 부르심의 소망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과 이름을 위하여 신앙생활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지금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에 따라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는 복된 삶을 살 수도 있고, 시비와 불평과 원망으로 점철된 고통의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내 욕심을 붙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부르심의 소망을 붙드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