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상 21:1-15, 도망치는 다윗과 하나님의 보호 24.7.3, 박홍섭 목사
다윗을 향한 사울의 시기와 질투는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습니다. 악신이 들리기까지 하면서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의 광기 앞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을 도망치는 일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무엘의 선지 학교가 있는 라마나욧으로 도망갔고 다음에는 놉 땅의 성막으로 도망을 갑니다. 얼마나 다급하게 피했든지 먹을 것도 준비하지 않았고 무기도 준비하지 못한 다윗은 성막을 섬기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먹을 것과 무기를 요청했습니다. 아히멜렉은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과 골리앗의 칼을 다윗에게 줍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얻어서 먹은 떡은 성소에 비치된 떡, 진설 병이었습니다. 이 떡은 제사장만 먹도록 규정되어 있는 거룩한 떡입니다. 다윗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제사장은 그 떡을 다윗에게 주었고 다윗은 그 떡을 먹었습니다. 떡은 먹고 힘을 내는 생존의 필수요소입니다. 성소에 진열된 진설 병은 모두 열두 개로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그 진설 병을 성소를 밝히는 등잔대의 등불이 비춰줍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늘 자비와 긍휼로 은혜의 빛을 비추어서 그들을 먹이고 힘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놓여있고 하나님이 먹이시고 힘주시는 은혜로 존재합니다. 진설병을 안식일마다 교체하는 의미도 거기에 있습니다. 떡이 부패하고 상해서 교체하기보다는 이스라엘에 주어지는 은혜와 힘이 이들을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안식일마다 매번 새롭게 주어진다는 의미입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이 사건을 인용해서 안식일에 밀을 잘라서 비벼 먹은 제자들을 향하여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한 바리새인들을 반박하십니다. 성소에 놓인 진설병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드러내는 떡이기에 제사장이 시장한 다윗을 위해 그 떡을 주어서 먹게한 것은 규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시행한 것입니다. 그처럼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시장해서 밀이삭을 잘라서 먹은 것은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니라 제사보다 자비를 원하시는 율법의 정신으로 충분히 납득가능한 행위입니다.
지금 다윗은 도망자입니다. 고단하고 지쳤고 배고프며 힘이 듭니다. 그가 왜 도망자가 되었습니까? 죄를 지은 적도 없고 사울에게 불손하게 행동한 적도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음으로 골리앗과 싸워 이겼고 악신에 들려 고통하는 사울을 수금 연주로 도와준 일을 한 것밖에 없습니다. 그후에도 계속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사울과 이스라엘을 위하여 믿음으로 싸웠습니다. 그런데도 사울은 계속 다윗을 미워하여 죽이려 했고 다윗을 그를 피해 도망칠 수밖에 없는 억울하고 고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다윗에게 제사장 아히멜렉을 통하여 성전의 떡을 먹이시고 힘을 주십니다. 이때 다윗이 먹은 진설병은 단순한 떡 한 덩이가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먹었습니다. 이것이 성소의 역할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도망갈 때가 없어서 지치고 굶주린 상태로 피하여 온 자에게 진설병 규례를 따지지 않고 그 의미대로 그를 먹여 기운을 차리고 힘을 내게 하는 역할 말입니다. 도망칠 수밖에 없는 절박한 자, 잔뜩 움츠러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공급하여 다시 힘을 내어 살게 하는 역할 말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에게 피하여 숨는 자들에게 거룩한 말씀의 떡을 먹이십니다. 그리고 골리앗을 죽이고 빼앗아 온 칼로 상징되는 당신의 능력을 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오늘 저녁이 그런 저녁 되기를 바랍니다. 이 험한 세상을 믿음으로 살다가 지치고 곤한 영혼에 하나님이 주시는 떡을 먹으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칼을 받아 새 힘을 얻고 다시 십자가의 군사로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그렇게 도망치는 다윗을 보호하시고 먹이시고 무기를 주시는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이 다윗의 도망자 신세를 면해주지 않습니다. 놉 땅의 성막에는 사울의 목자장 에돔 사람 도엑이 있었고 그가 다윗이 도망온 것과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떡과 칼을 주는 모습을 봅니다. 그가 이 사실을 사울에게 보고하면 여기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에는 사울을 피할 곳이 없다고 생각한 다윗은 놉 땅을 떠나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 까지 도망갑니다. 아기스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죠. 신분이 탄로난 다윗은 대문짝에 그적거리고 침을 수염에 흘리며 미친 척함으로 위기를 모면하여 살아나옵니다. 그때 만들어진 시가 시편 34편과 56편입니다.
계속 말씀드리지만, 지금 사울은 사실상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다윗은 사울을 잇는 다음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사울을 즉각 폐위하지 않고 여전히 왕의 권력을 주셔서 다윗을 죽이려는 힘을 행사하도록 하십니다. 사울은 사무엘상 끝부분에 가서야 죽습니다. 그때까지 다윗은 긴 세월을 도망 다니는 고단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가 오늘 이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지은 시편 34:8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자신은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았으니 너희도 나처럼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 시편이 언제 만들어졌다고요? 부제를 보십시오. 사울을 피해 블레셋의 가드까지 도망친 다윗이 자신의 신분이 발각되어 미친 척하고 겨우 살아나온,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 뒤 지은 시입니다.
비단 그 사건만 아니라 도망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시간의 의미가 이 표현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도망자의 그 고단한 시간을 다윗이 어떻게 표현한다고요? “나는 그동안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았으니 너희도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다 알기를 원한다”입니다. 요나단의 언약적 사랑을 입고, 사무엘에게 피하여 말씀의 힘을 얻고, 놉 땅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진설병을 먹는 자비를 맛보았고, 블레셋의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척 하면서 겨우 살아나온 이 모든 과정에서 다윗은 여호와의 선하심, 여호와의 헤세드를 맛보았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선하심과 헤세드의 은혜를 도피 생활 중에 있는 다윗의 생애 속에 담아두십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미친 척하고 살아나왔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미친 사람을 ‘맛이 변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맛이 변한 척해서 살아남았는데 뭐라고 고백한다고요?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낮은 자리, 최악의 절망에서 당신의 선한 맛, 자비와 긍휼의 맛을 보여주십니다. 신자의 인생은 때로 그런 자리에서 우리의 연약함과 부패함과 변덕스러움을 절감하고 그와 비교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배웁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의 인격과 성품에 당신의 자비와 은혜와 긍휼을 담아내시고 그 은혜를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키우십니다.
그것이 지금 도망자의 고단한 시간을 지나고 있는 다윗의 고난이 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기름 부음을 받았다면 고생하지 않고, 승승장구하며, 원하면 무엇이든지 다 이루어지는 만사형통한 시간을 기대하지만, 하나님은 택하고 기름 부으셨기 때문에 길고 지난한 도망자의 시간을 허락하시고 그 기간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만 피하고 하나님이 먹이시고 공급하시는 은혜와 생명의 힘만 신뢰하게 하는 다윗을 만들어가십니다. 그리하여 사람이 원하는 힘 있는 왕 사울과 하나님이 세우고자 하는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의 왕이 얼마나 다른지를 그의 업적과 외형이 아니라 그의 성품과 인격과 신앙과 전 존재 속에 담아내십니다.
다음 시간에 보겠지만 그런 다윗 곁으로 환란을 당한 자, 고난당한 자, 억울한 자들을 불러 모아 아둘람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미친 척해야 살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본 다윗이 그들의 피난처가 되게 하십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다윗은 싫고 골리앗을 죽인 다윗만 원하지만, 우리를 택하시고 자녀 삼으신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선하심과 헤세드를 담아서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기르고 계시며 양육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양육을 잘 받아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사람으로, 여호와의 선하심을 담고 있는 사람, 흘려보내는 사람으로 남은 생애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