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6:39-45, 교회와 성도에게 요구되는 삶의 윤리 3, 7.28, 박홍섭 목사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는 삶의 윤리가 있습니다. 그 윤리를 요약하면 ‘원수 사랑’입니다. 이 요구의 주된 근거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입니다(6:36).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너희가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을 받고 주의 자녀가 되었다면 받은 그 자비를 원수 사랑으로 드러내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원수를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너희가 하나님께 대접받고 싶은 황금률의 원리로 그들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를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고, 뺨을 맞으면 다른 쪽도 돌려대며,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까지 주라고 하십니다.
성도는 이 과격하고 급진적인 말씀의 요구 앞에 자신의 지독한 죄 성과 이기성을 절감하면서 가난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복종합니다. 복종하는 만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급진적이고 지독한 사랑인지를 깨달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의 의도와 달리 자신을 의롭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심판관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이 자기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정죄하는 영적 소경이며, 비판과 정죄의 못되고 나쁜 열매를 맺는 마음에 악이 가득한 자라고 경고하십니다.
몇 가지 비유를 드시는데 먼저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냐고 묻습니다. 앞의 맹인은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면서도 스스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자처했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같은 사람을 비유하고 후자는 그들에게 가르침과 인도를 받는 어리석은 백성들을 의미합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의 해석자라는 권위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향하여 “너희가 긍휼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나의 제자라면 자기 의와 교만에 빠져서 비판과 정죄를 일삼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같은 영적 소경들을 닮아서는 안 된다. 만약 그들을 닮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아무리 잘 배워도 그들의 영적, 도덕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둘 다 구덩이에 빠질 뿐이니 조심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39-40).
도대체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렇게 주의를 당부합니까? 눅 18:9-12을 보겠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에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종교적이고 가장 도덕적인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이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거룩하고 의로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여 심판하고 멸시하는 전문가들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나는 저들과 같지 않고 세리와 같지 않아서 감사하다”라고 했습니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죠. 말끝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나는 다른 사람과 같지 아니하고” “나는 소득에 십일조를 드리고” 하면서 “나는, 나는, 나는”을 입에 달고 삽니다. 이들은 자기 의로 가득 차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멸시하는 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판단은 전혀 다릅니다. 마 23:13-17을 보십시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화 있을진저 눈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 도다. 어리석은 맹인들이여 어느 것이 크냐 그 금이냐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이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면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주님은 이들을 외식하는 눈먼 인도자, 어리석은 맹인이라고 하면서 ‘화’를 선언하십니다. 마 23장 전체가 이들을 향한 주님의 저주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의로운 재판장 노릇을 하면서 늘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이들이 정작 주님에 의해 비판과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이때 이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주님을 향한 분노와 시기를 견디지 못하고 주님을 죽이는 데 앞장섰습니다. 오늘 본문 41-42은 이들의 상태를 이렇게 직격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이들의 눈에는 들보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 눈의 티끌은 아무 거리낌 없이 비판하고 정죄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십니다.
이들의 외식은 어쩌다 한두 번 일어난 실수가 아니라 나쁜 나무에서 열리는 못된 열매이며 평소에 마음의 쌓은 악에서 나오는 악한 삶의 패턴과 특징입니다. 43-45을 보십시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자기 눈에 들보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원수 사랑으로 대변되는 말씀의 요구 앞에서 언제나 자기의 들보를 먼저 봅니다. 자기 눈의 들보를 보는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남을 함부로 심판하지 않습니다. 심판할 수가 없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하되 그 사람에 대한 판단과 공격과 심판은 유보하고 최대한 그 사람을 불쌍히 대하려고 애를 쓰고 노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눈의 비늘이 벗겨지고 남의 눈에 티끌보다 내 눈의 들보가 먼저 보이면 어떻게 됩니까? 애통하고, 마음이 가난해집니다. 그런 들보가 몇 개입니까? 한두 개가 아닙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겨우 하나를 빼내고 처리했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또 다른 들보가 보입니다. 어떤 때는 분명히 빼내었는데 또다시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자기 눈에 있는 들보 처리하기가 너무 바빠서 남의 눈의 티가 보일 틈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들 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저 사람보다 나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십시오. 더 잘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훨씬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대단하거나 잘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악당들과 우리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할 수 있습니다. 외식하는 자는 남을 비판하고 공격함으로 자신의 허물을 감추고 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는 자신의 허물에 대한 죄책감을 다른 사람의 허물을 공격하면서 쏟아냅니다. 남의 티끌에 대해 그렇게 민감하고 심한 비난을 퍼붓는 것은 자신의 들보를 발견하고 그것을 애통하며 돌이키려 하지 않으려는 심각한 외식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음에 은혜가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경험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이렇게 비유하십니다.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 나무는 그 본질에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가시나무가 무화과를 맺거나 찔레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습니다. 왜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의 티끌을 심판하고 정죄합니까? 왜 자신을 좋아해 주는 사람만 사랑합니까? 왜 주님이 요구하는 성도의 윤리를 외면하고 거절합니까? 오늘 말씀에 의하면 그 마음에 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에 쌓은 선이 없고 악과 교만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떻게 형제에게 자비로우며 원수까지 선대 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비판과 정죄와 헤아림 대신 아낌없이 주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은혜가 있을 때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자비와 성령의 능력이 만들어내는 생명이 있을 때입니다. 그 은혜와 자비와 생명이 있으면 바른 분별력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거룩을 사모하면서도 사람이 따뜻합니다. 함부로 심판의 칼을 휘두르지 않고 최대한 자신을 먼저 살피고 다른 사람을 긍휼의 눈으로 봅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선지자라 합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 맞습니까?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으며, 우리와 동일한 삶을 사셨습니까? 왜 십자가를 지셨고 부활하사 성령을 주셨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사 이런 요구를 하십니까? 왜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십니까?
이제 우리는 남을 이기고 이웃을 떠밀어야 겨우 자기 자리가 생기는 이 정글 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통치 아래 있는 우리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생명의 영광과 부유함을 사랑이라는 내용과 성도의 윤리로 요구받는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거룩한 부담과 벅찬 마음으로 그 요구를 믿음으로 수용해야 합니다.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상이 될 것이며,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과 연합된 자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은혜의 사람으로 자라고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를, 그런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