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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장 31절).
신앙생활에서 믿음이
차지하는 위치나 중요성은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어려움들을 이겨 낼 수 있도록 힘을 주며, 무엇보다도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에 대한 확신은 16세기 종교개혁자들로부터 내려온 개신교의 소중한
전통입니다. 복음주의 교회는 다른 무엇보다도 이러한 “믿음에 의한 구원”을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진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원은
믿음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애써 어떤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도, 그리고 긴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도 예수를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구원을
확신하게 됩니다. 처음부터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보다 확신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으며 보다 안정감
있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아마 여기 있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모두 이러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때에 유대인들은 이분법적인 가치관을 지니고 그것을 철저히 지켜 내려고 노력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지배했던 대표적인 가치관은 “정결과 부정”입니다. 즉,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깨끗한 사람과 더러운 사람을 분명히 구분해 내고 철저하게
정결함을 지켜내려고 노력했습니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더러운-종교적으로(not 위생적으로)- 것으로 규정된 고기나 생선 등은 먹지 않았고, 더러운 병에 걸린 사람들(혈루병자, 문둥병자, 시각장애자 등)과 접촉하지 않았고 그들을 멀리했으며, 더러운 사람들, 즉, 세리나 죄인, 이방인 등과는 식사도 함께하지 않았고, 나아가서 여자와 어린 아이도 무시했습니다. 성전도 이방인은 들어 갈 수 없었고, 여자들이 들어 갈 수 있는 곳도 제한되어 있었고, 일반인들이 들어 갈 수 있는 곳도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철저히 성별되고 구분된 삶을 살겠다고 노력했는데, 그렇게 하면 할수록 자신들은 “구별”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자신들 이외에 다른 사람은 “차별” 당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시에 이렇게 정결법에 의해 차별 당하던 사람들을 아끼셨고 함께 하셨고 돌보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보다 깨끗하게 살겠다고 노력했던 삶이 독선과 교만으로 많은 다른 사람을 차별하고 등한시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성과 속,” “정결과 부정”의 구분선을 분명하게 긋고 철저하게 한 편만을 고집한 삶의 결과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영은 선하고 인간의 육체는 악하다는 이원론적인 생각으로 예수께서 인간의 육체로 성육신하신 하나님이란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육체를 가진 인간이 거룩해지려면 더러운 육체를 철저히 제한하고 금지시키는 금욕주의자가 되거나, 반대로 거룩해지는 데 전혀 쓸모없다고 여긴 육체를 그저 내버려 두는 방종주의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분법적이거나 이원론적인 생각의 결과들이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일반적으로 이분법 또는 이원론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거룩한 것(聖)과 속된 것(俗), 하나님의 뜻과 사람의 뜻,
교회와 세상, 경건과 불경건, 신본주의와 인본주의 등 상대적인 개념을 설정해 놓고 명백히 구분해 내려 하고, 그렇게 해서 확실하게 한 편에만
서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분명하게 정의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항상 그 경계가 분명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한 편을
택해서 산다는 것은 사실상 힘든 것이며 또 한 쪽만을 선택해서 산다면 그 삶은 한 편으로 치우쳐 극단적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는 절대적인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고 믿고 있고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항상 절대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분명한 하나만을 추구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면 단순하고 분명한 것을 좋아하는 현대인의 습성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주위를 보아도
신학생들이나 저를 포함한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타협할 줄 모르고 포용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때때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주관이나
가치관이나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인 진리의 일부처럼 착각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 삶에서 믿음에 대한 강조는 자연스럽게 행함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행함을 무시하는 경향을 초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믿음과 행함은 서로 상대되는 개념으로서 행함은 부정적인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믿음 편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저는 성경을 근거로 믿음이 무엇인지 여러분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믿음을 정의하고 설명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어떠한 것들을 믿음이라고 할 수 없는가를
제시함으로써 믿음을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믿음은 명제적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리나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을 시작하는 일부 요소가 될 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믿음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이나 신앙의 내용의 어떤 것을 “이해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히 “동의나 이해”일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기독교를 “이해하는 방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적이고 기독교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오는 하나님적인 삶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에 관한 수많은 언급이 나타나는데 그 많은 용례 중 대부분에서 그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나 예수님 자신”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그분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자신 또는 그분의 능력, 그분의 말씀, 그분의 이름을 믿음의 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분의 능력이나 말씀이나 이름을 믿는 것 등은 모두 “그분 자신에 대한 신뢰”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을 믿으라”고 합니다. 언어적으로나 논리적으로 볼 때에 그러한 사실을 믿는 것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의 사실에 대한 이해나 그것에 대한 동의에 머문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으심을 이해하고 앎을 통해서 그분의 희생과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 그분”과 “하나님 그분”을 신뢰하게 된다면 그것을 성경적인 의미에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믿음은 “신뢰”라는 말로 표현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됩니다. 참고로 성경은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을 믿으라”고 표현한 일이 없습니다. 물론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언급했듯이 성경에서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말씀의 대부분에서 그 믿음의 대상은 주로 “하나님이나 예수님” 그분 자신으로 나타나고 있지 어떤 사건이나 사실 자체가 주된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강의 시간에 종종 “삼위일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몰라도 아주 훌륭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도 삼위일체에 대해서 안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 “삼위일체”라는 용어조차 없었으니까요.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단순히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는 참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둘째로, 믿음은 자신의 희망적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즉, 단순히 자신이
어려움에 처해 있거나 계획대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 이 모든 것이 언젠가 반드시 잘 풀릴 것이라고 기대하고 믿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잘 될 때까지 무조건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과 기독교적인 믿음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자기 기대”이거나 “자기
신념”이거나 “자기 암시”이지 기독교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그분의 인격 그분의 계획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태도이지 자신의 계획이나 희망적인 운명을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일이 무엇이든지 잘 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저변에는 보통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깔려 있습니다. 또는 하나님이 내 편이시라면 당연히 내 모든 일이 잘 되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인 기대가 깔려 있습니다. 참 믿음은 자신의 현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바라게 되는 자신의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기대와는 다른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거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더라도 자신의 계획이나 희망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과 그 왕국의 미래를 추구하고 기대하는 것이 믿음의 중심입니다.
혹시 자신의 삶이 더 절망적이 된다고 해도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길 희망하고 기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즉, 믿음은 자기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중심적인 것입니다. 믿음은 자신의 미래를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믿음은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거나 보장해 주는 수단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으면 비교적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원의 확신만 있으면 구원이 보장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믿음은 주로 하나님께 대한 것입니다. 자기 확신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자기 확신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행위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자기 확신이 무엇을 보장해 줄 수는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 자신의 말씀에 근거해서 확신을 갖고
있는 것이겠지만, 이것은 성경이 요구하고 믿음과는 다른 것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자신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
받은 백성으로서 어떤 의미에서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확신과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과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은 그
안전을 보장받을 것이라고 믿었고, 물론 자신들도 보장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의 확신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성전도
예루살렘도 파괴되고 그들은 이방인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런 역사적인 경험을 하고도 그들은 계속 자신들은 보장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들은 약속의 자손,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니 우리의 삶이나 구원은 당연히
보장될 것이야”라고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유대인들에게 침례요한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닥쳐올 징벌을 피하라고 일러주더냐?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너희는 속으로
주제넘게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다’ 하고 말할 생각을 하지 말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표준새번역, 마 3:7-10).
그들의 구원의 확신을, 구원의 “자기 확신”을 무참히 깨뜨리는 선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일상생활의 어려움이나 사고로부터 우리를 지켜주는 수단도 아닙니다. 단순히 자신에게 병이나 사고가 나지 않을 것을 믿고 확신하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병들지 않거나 사고 나지 않거나 어려움을 당하지 않게 되지는 않습니다. 즉, 반대로 믿음이 없어서 그런 일들을 겪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수단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믿음이 우리를 지켜 준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대신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딤후 4:7). 자신의 생애를 다해서 어려운 투쟁을 하면서 믿음을 지켰다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유다서에서는 유다서를 쓰게 된 동기를 서술하고 있는데, “이제 여러분에게, 간곡한 권고의 편지를 쓸 필요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한 번 결정적으로 전해진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분에게 힘써 싸우라는 것입니다"(유 1:3).
믿음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전이 지켜지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우리의 안전을 내어 놓고라도 일생을 다해서 애써 싸워가면서 믿음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상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현실생활에서 어떤 보장을 받는 것과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에게 있어서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던 보장마저도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삶의 "well-being"은커녕 목숨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믿음이 우리의 안전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안전을 내어 놓고라도 믿음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로, 믿음은 행함의 반대어가 아닙니다.
저는 앞서 이분법적인 사고의 문제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가진 믿음이 머릿속의 동의나 이해에 머물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보통 믿음은 행함과 반대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사로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어떤 성경진리나 성경사건이나 내용을 믿는 것을 보통 믿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이미 앞서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에서 오는 하나님적인 삶의 방법”이라고 정의한 일이 있습니다.
믿음을 행함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이해하게 된 성경적인 근거로는 주로 로마서와 갈라디아를 들 수 있습니다. 사실 로마서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믿음이란 단어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40회, 갈 22회).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수없이 반복해서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믿음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은 믿음에 대해서도 잘못 이해하고 있지만, 한 편 그 상대 개념이라고 생각되는 “행함”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반대하고 있는 행함을 올바로 이해해야 그가 말하는 믿음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모두 “이방인”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라고 해도 안식일도 지키고 할례도 행하고 율법대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었지 그들이 유대인이 될 필요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즉, 이방인들은 유대인을 위한 법인 안식일을 지키거나 할례를 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믿는 유대인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바울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필요하다면 바울의 교회가 있는 장소에까지 가서 이방인 교인들에게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 받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은 그러한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거듭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행위에 대해 언급하는 많은 구절들에서 바울은 단순히 “행위”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율법의 행위”(evx e;rgwn no,mou)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서신에서 대부분의 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은 이러한 율법의 행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롬 3:28).
전체적으로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떤 율법 규정을 지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해 이루어 놓으신 일을 보고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 이러한 관계를 시작하시는 것이지 사람이 어떤 규정들을 지켜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단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시작은 율법의 행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율법적인 삶은 그 이후에도 배격됩니다. 율법적인 또는 율법주의적인 행위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시작이나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바울의 생각이고 성경의 생각입니다.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미
시작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어떠한 종류의 신앙적 실천이나 행함도 필요 없다는 말이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된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그렇게 의롭게 인정받은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거듭해서 역설하고 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주된 강조점은 어떻게 사람이 의롭게 되느냐를 설명하려는 것보다는 이미
의롭다고 인정받은 로마, 갈라디아 교인들은 어떻게 그에 걸맞게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바울서신은 다 이미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교인들에게 보낸 것이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쓴 책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다시 한 번 설명해 준 다음 이제 본론에서는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겨서 불의의 연장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여러분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난 사람답게, 여러분을 하나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를 의의 연장으로 하나님께 바치십시오"(롬 6:13).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
이런 것이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중심이었고 본론이었습니다. 아시다시피 갈라디아서는 성령을 따라 행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권고합니다. 이 두 책은 어쨌든 믿음으로 이미 의롭게 된 성도들이 어떻게 행위와 실천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행함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이 두 책이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계를 시작하거나 지속하는 데 있어서 율법적인 행함은 전혀 의미가 없지만 은혜로 그리스도인 된 성도들은 마땅히 “자발적인 사랑의 행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은 곧 올바른 행함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흥미롭게도 “믿음의 행위”(tou/ e;rgou th/j
pi,stewj)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둔 소망의 인내를 언제나 기억하고 있습니다"(살전 1:3). "우리는 언제나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시고, 또 모든 선한 뜻과 믿음의 행위를 그의 능력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살후 1:11).
믿음이란 단어가 로마서 다음으로 많이 나타나고 있는 책은 히브리서입니다(32회). 믿음의 장이라고 알려진 11장에서만
믿음이란 단어가 24회 사용되고 있는데, 그 중 20회는 수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믿음으로”(Pi,stei)라고 부사구 형태로(by
faith)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무슨 행동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려 하고 있습니다. 즉, 과거에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들이
“믿음으로” 어떻게 살았는가, 어떻게 행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믿음으로 제물을 하나님께 바쳤습니다"(히 11:7),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지었습니다"(히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나갔습니다(떠났습니다)"(히 11:17),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쳤습니다"(히 11:21), "믿음으로 야곱은 경배를 드렸습니다"(히 11:24), "믿음으로 거절하였습니다"(히 11:27).
믿음의 조상들에게 믿음은 단순히 그것을 가지고 있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사느냐 하는 행함의 방법이고 행함의 수단이었습니다(“믿음의 행위").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11장 내내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의 삶을 나열한 다음 12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름같이 많은 실제의 믿음의 증인들을 따라서 “우리도 갖가지 짐과 얽매는 죄를 벗어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달음질을 참으면서 달려갑시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그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죄를 벗고 예수님처럼 고난을 참고 인내하자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씀은 그런 의도로 기록한 것입니다. 현재의 어려움이나 자신의 죄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해 보인다 하더라도 죄를 벗고 고난을 참으면서 믿음으로 그것들을 이겨내자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산다면 우리가 바라는 미래는 바로 실제가 되고 우리가 보지 못하는 미래도 우리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에서도 믿음은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실천을 위한 수단, 행함을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진정한 실천, 진정한 행함을 위한 수단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다 없다 하는 말을 많이 합니다. 여기서는
단순히 믿음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보다 믿음으로 살았느냐 아니냐, 행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믿음이란 단어가 많이 사용된 책은 흥미롭게도 야고보서입니다(16회). 야고보서가 행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약
2:26)라고 선언합니다. 보통 야고보서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와는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이해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야고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약 2:15-17).
야고보는 이처럼 생각과 입으로만 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고 행함과 삶으로 실천되어야 올바른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야고보가 강조하고 있는 행위란 할례를 행하거나 안식일을 지키거나 어떤 율법조항을 지켜내는 것과 같은 율법적인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추구했던 것과 동일한 그리스도인다운 실천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행위에 대해 말할 때에 절대로 “율법의 행위”란 말을 쓰지 않습니다. 결국 바울과 야고보는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은 당연히 행함으로써 삶으로써 실천함으로써 표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서 믿음이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란 단어를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책도 3개나 있습니다. 그 중 요한2서와 3서가 포함되는데 워낙 짧은 책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믿음이란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나머지 한 책은 놀랍게도 “요한복음”입니다.
일반적으로 로마서와 요한복음은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하는 데에 가장 자주 사용되는 책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에는 믿음(pi,stij)이란 단어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실 요한복음은 믿음이란 명사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는 대신에 “믿는다”(pisteu,w)라는 동사(또는 분사 형태)는 98회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 요한복음이 그 많은 분량의 책에서 믿음이란 명사를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간단히 이렇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말 그대로 요한에게 있어서 믿음이란 개념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정의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행하고 사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고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은 그냥 믿음이
아니라 믿는 삶, 믿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곧 “믿음-행위”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은 믿음이 실제의 삶이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보통 요한복음을 최초로 읽었던 독자들은(요한공동체) 주로 유대인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로부터 유대인 공동체에서 추방당하고 강한 핍박까지 받았던 아주 조그만 교회였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구절인 요한복음 20장 31절은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의 교회는 이미 핍박을 당하면서도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믿게 한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성경원어의 뜻에 보다 가깝게 다시 옮기자면, “너희로 하여금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계속 믿게 하고, 또 그렇게 계속 믿음으로써(믿음을 지킴으로써)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9장에는 날 때부터 시각장애를 가졌던 사람이 고침을 받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가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를 그 부모에게 질문하지만 그 부모는 잘 모르니 아들에게 직접 물어 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 부모는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요 9:22) 라고 설명합니다. 그 당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유대사회에서 추방되는 것을 의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런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요 16:2)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과 로마인들에게 핍박을 받고 순교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로 추방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고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시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상황에서 살았습니다.
요한복음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 1:12)고 선언하는데, 이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영접한다고 고백하거나 기도하는 일로 끝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단순히 그분이 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해하거나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또 그들에게 믿음은 밝은 미래를 보장해 주는 수단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믿는다는 것은 믿음 때문에 현재 모든 것들을 잃을 수 있고 미래에는 목숨까지 잃을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믿음은 그들을 안전하게 지켜 주는 수단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모든 삶을 걸고 믿음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렇게 유대 회당에서 추방당한 작은 교회의 교인들로서 그들은 서로를 격려해야 했고 또한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것을 당당히 알려야 했습니다.
추방당해 삶의 기반도 시원치 않고 얼마 되지 않는 적은 무리들이 내세울 것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돈이나 지위나 명예나 그런 것은 당연히 없었겠지요. 예수께서는 그들에게는 서로 힘이 되고 외부에는 자신들이 당당한 제자라는 것을 알리는 방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4-35).
그들에게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행위였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행하고 실천하는 삶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의 사랑도 말로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 1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그렇게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사랑하는 방법으로써 그것이 바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요한의 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 믿는 것은 그저 예수 사건을 이해하고 예수를 받아들이는 영접기도를 하는 것, 그래서 개인적인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과는 아주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믿기 때문에 추방당하거나 핍박당하거나 죽음에 이르는 상황을 겪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초대교회와는 다른 상황에서 우리가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본질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질 수 없습니다.
믿음은 단순히 기독교의 중요 교리나 내용을 잘 이해하고 수긍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단지 자신의 밝은 미래를 갖기 위한 수단도 아닙니다. 믿음은 단순히 영접하거나 고백하거나 그에 근거해서 구원의 확신만을 얻고 그 안에 안주(安住)하는 수단도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을 보장해 주거나 지켜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 우리 모두가 삶을 걸고 인생을 걸고 그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말로 정의하고 머리로 이해하는 “명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몸으로 행하고 삶으로 지켜가야 하는 “동사”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입니다.
-권종선 교수(침례신학대학교 신약학), 2005년 4월 19일(화) 침례신학대학교 대학예배
설교 중에서

첫댓글 믿음은 단순히 기독교의 중요 교리를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만도 아니며, 삶을 지켜주는 수단도 아님을 역설하며 올바른 믿음의 행위를 성경적으로 강조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행함이 함께합니다. 그것이 바른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