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강하드장사
경제적인 어려운 고비를 넘기자 날씨가 더워지면서부터
삼강하드는 점점
잘 팔리기 시작했고 그런 덕분에 나는 매일 조금씩 돈을 모으게되어 차츰
경제적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었다. 그런 그 때를
되돌아보면
결코 잊혀지지 않는 몇가지 일들이 있다.
첫째,단 한번 서울역으로 급히가느라 하드통을 들고 버쓰를 탓을 때 바로
마주친 같은 반 친구 한성원을 제외하고는 장사를 하면서 여러차례 학교
친구들을 마주쳤지만 얼굴에 까만 점까지 있는 나를 알아보지를 못했다.
교복대신에 푸른 가운을 걸쳤던 내가 너무나도 달라져 보였던 까닭이다.
두번째, 그 해 여름에는 광화문 사거리 남서쪽에 있었던 국제극장에서는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슬픈 영화가 꽤 오랫 동안 상영되었다. 그런
덕분에 종로, 무교동, 명동 주위를 돌면서 하드를 팔던 우리들은 상영이
끝날 때 쯤이면
모두 국제극장앞으로 모여들었다.
슬픈영화를 관람하면서 울어서 빨개진 눈을 식히느라 2 층난간에 서있던
관람객과 대기관객들께 달고 시원한 삼강하드를 던져 올려주기위해서고
관객들이 던져내려주던 돈을 열심히 주워모으기 위해서였다.
세번째, 어느날 밤은 관수동 좁은 골목에서, 옷을 잘입은 대학생 4명이
삼강하드를 2개씩 먹은 후에 깜빡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며 바로 뒤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겠다고 말하고 골목안으로 들어갔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린 후 골목으로
들어가보니 그 길은 뒤로 터져있었고 모두 뺑소니를
치고 없었다. 벼룩의 간을 빼먹지……그렇게 돈을 떼인 적도 있었다.
그것도 잘 사는 녀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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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유명한 요리점에가서 하드를 판 후 값대신에 맥주병을 받아
나오다가 그만 미끈 땅에 떨구어 깨뜨렸을 때, 얼른 다른 병을 가져다주던
누나같은 사람도 있었다. 분명 어려움을 잘 아는 분이리라……
비닐우산 장사
그리고 그 해 1965 년 여름에는, 유독 아침 일기예보와는 다르게 오후에
퇴근시간이 되면은 자주 소낙비가 내렸었다. 그럴 때는 나는
잽싸게 비닐
우산장사로 변신해서(하드점에서 우산도 취급) 을지로 입구에있던 내무부
정문으로 달려가서 “우산 사세요! 우산 사! ”라 큰 소리로 외쳐댔다.
그렇게 조금만 있으면 효과는 바로 나타났었다. 퇴근을 하려다 비에 막힌
직원들의 “우산장수 들여 보내세요!” 라는 요청에는 엄하기만 했던
수위
아저씨조차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해 여름에 내무부 직원들
모두는 나의 비닐우산 단골 손님들이 되었다.
고흥 시산도
여름방학이 시작된지 얼마 후에,나는 2학기 등록금과 생활비가 어느 정도
모이자 가족들이 그리워서 기여이 고향으로 내려갔었다.그 때 아버지는
고흥반도의 남쪽에 있던 작고 아름다운 섬 시산도에서 산 장어를 모아서
활어무역선에 실어 보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고향에 도착한 나는 여행을 겸해서 여객선을 타고서 긴 머리를 가진 예쁜
우리 누나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갔다. 여러 달 동안이나 가족들과 떨어져
그곳에서 지내다 아들과 딸을 반갑게 만난 아버지는 아래 직원에게 보관
중이던 산 장어 중에서 가장 큰 한 마리를 건져오라고 부탁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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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건져 온 팔뚝보다도 훨씬 굵은 산 장어를,
아버지는 날렵하게 칼로
배를 가르고 잘게 손질을 해서 장어회, 장어구이, 장어탕을 준비했었다.
그래서 오후에는 싱싱한 장어회를 먹었고, 저녁식사 때는 기름기가 많은
장어구이를, 그리고 밤시간에는 쌀이 섞인 장어탕까지 맛있게
잘 먹었다.
그런 후 잠자리에 들어서 새벽을 맞은 나는. 갑자기 어두운 바깥 화장실을
여러 차례나 드나 들어야만 했다.
오랫 동안 기름기있는 음식을 먹지못했던 내가, 아쉽게도 기름지고 맛이
좋던 장어고기를 미쳐 소화를 하지못한 까닭이다. 더욱 더 아쉬웠던
것은
그 곳에서 지내던 사흘 동안 내내 냄새조차도 맡기 싫던 그 장어고기가
떠나던 날 아침에야 또 다시 먹고 싶어진 것이었다.
그런 아쉬운 일도 있었지만 그때 나는 그 곳 시산도에서 엄하기만 했었던
아버지와 바닷밑의 생태계와 밤 하늘에 떠있던 밝은 달에 관한 이야기 등
많은 정담을 나누면서
오랫 만에 부자간에 친하게 지냈다. 그렇지만 아래
남동생을 서울로 데리고가서 함께 일하며 공부를하려고 했던 나의 제안은
끝내 거절 당하고 말았다.
그런 그때에 나는 시산도 바로 앞 아름다운 무인도에 갔다가 절벽 위에서
자라고있던 귀한 풍란(風蘭) 한 그루를 채취해서 가져왔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바닷바람 맞으며 자랐던 풍란은 서울 언덕에서는 곧 시들어버려서
괜한 짖을 한 것같아 후회를 했었다)
그 때 귀향 길에 아버지와 함께들렸던 여수 한정식당에서는 아버지가 큰
마음 먹고서 아들 딸에게 사주셨던 정갈하고 푸짐한 한정식음식을
맛있게
먹었던 기억은 아직도 나의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편안하고 즐거웠던 며칠간의 고향방문을 마치고 또 다시 상경하자 2 학기
수업은 시작되었다. 그렇지만 얼마간의 생활비가 준비되었던 까닭에 내
마음은 안정되었으며, 재치있고 익살스러운 악동과 같은 반원들 덕분에,
나에게 학교생활은 점점 더 즐거워졌고 기다려지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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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방과 후와 주말에는 계속해서 돈을 모으기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다보니 학교친구들과 가까이 사귈기회가 없었고 방과 후에도 미술반의
특별활동시간에 참여를 하는 것도 전혀 꿈을 꿀 수가 없었다. (그 것들이
나의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내가 가장 아쉬워했던 점들이었다.)
통금위반과 영창
2학기 때인 가을 어느 토요일 저녁에는,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친구와
밤 늦게까지 하드장사를 한 후에, 마지막 버쓰를 타기위해 광화문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었다. 그런데 평소에는 늦게까지
기다려 주던 마지막
버쓰는 손님들을 기다려 주지도 않고서 급히 떠나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없이 책가방을 옆에낀 체로 나는 친구와 함께 홍제동집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런 그 때 서대문 로타리를 막 돌아서서 달리자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소리가 길고 크게 울렸고 우리는 이미 차가 끊겨서
조용해 진 텅빈 도로 위로 더욱 속도를 내면서 달려갔었다.
그런데 독립문 파출소 앞에 다달으자 경찰관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우리를
멈춰서라고 했었다. 그래서 그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고 해서 나는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통과시켜주길 요청했다. 그러나 그 날 저녁은 달랐었다.
그 날은 바로 통금위반 단속날이고 그런 까닭에 마지막 버쓰도 기다리지를
않고 그렇게 급히 떠나버린 것을 그 때야 알게 되었다.
결국 파출소 안으로 끌려 들어갔던 우리는, 이미 잡혀있던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한시간 정도를 기다리다 결국 서대문 경찰서로 연행되었고 그 곳에서
철장에 갇힌 체로 술에 취해 고함을지르는 아저씨들과 얼룩달룩한 복장의
아가씨와 불편해서 절절매는 여러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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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마침 일요일이어서 학교결석은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장사하기에
가장 좋은 날 인 일요일 하루를 공치게되어서 너무 아까웠고 우선은
갇혀서
있다보니 너무나도 갑갑하게 느껴졌었다. 그때 나는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법에 저촉되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크게 깨달았다.
다행스럽게도 일을하며 공부하는 고학생이고 고의가 아닌 점이 참작되어서
오후가 되자 유치장 철장문을 빠져 나왔다. 그러나 그 때에 비록
짧은 하루
동안에 철장안에 갇혔지만, 사람이 자유롭게 행동하며 지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크게 체험한 하루였었다.
코끼리 코
그 해 1965 년의 가을 추석 날에 나는 아침도 거른 체로 친구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서 서울역 북쪽 편의 합승정류장에서 온 종일 내내 이차 저차로
뛰어다니면서 코끼리 코 장사를 했다.
그 곳에서 잠깐 동안 합승뻐쓰가 정거를 할 때마다, 부모와 성묘길에 나선
어린아이들에게, 무척 갖고싶어하는 코끼리 코 장난감을 훅훅 불어대면서
마치 선심을 쓰는 듯이 하나 씩 선물을 했었다. 물론 장난감 값은 아빠와
엄마로부터 거두어 들이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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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이야기꾼이시네요. 늘 교훈을 결논적으로
퍽 성숙했고 경제관이 확립된 것도 어릴 적 고생 덕분.
뒤돌아 보면 인생은 힘든 만큼 값졌고 그 쓰린 경험이 스승이 되어 우리를 키워주었지요!
장하십니다. 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