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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
- 하나님의 요구 -
믿는 이의 체험에서 애정을 주께 순복시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은 다른 것보다 믿는 이의 애정으 더욱 주의한다. 주님의 요구는 믿는 이가 그들의 애정을 완전히 그분께 드리고 그분이 주인이 되시게 하는 것이다. 주님은 믿는 이의 애정 중에 으뜸되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헌신에 대해 자주 말하는 것을 듣는다. 우리는 헌신이 믿는 이의 영적 생활의 초보 단계임을 안다. 헌신은 영성의 종착지가 아니라 영성의 출발점이다. 헌신은 믿는 이를 거룩한 위치로 인도한다. 우리가 한 마디 할 수 있는 것은 헌신이 없다면 영적 생활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이의 드림에서 애정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없다. 애정의 드림 여부가 헌신의 허위를 결정해 준다. 애정이 곧 헌신의 시금석이다. 우리가 우리의 시간과 금전과 눙력과 다른 많은 것들을 주께 드릴지라도 우리의 애정을 드리기가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내 말은 당신이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을 아주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등석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이등석을 주께 드리거나, 주님을 사랑하는 것 외에 또 다른 것을 사랑하거나,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붙드는 것은 모두 헌신이라 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아직 우리의 애정을 드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적인 믿는 이라면 누구나 먼저 주님께 드려야 할 것은 애정임을 안다. 만일 애정을 주께 드리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드리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믿는 이의 애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믿는 이의 완전한 애정을 요구하신다. 주님은 다른 사람(혹은 일이나 물건)과 믿는 이의 마음을 나누어 갖기를 않으신다. 주님께 큰 부분을 드린다 하더라도 그분은 기뻐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완전한 것을 원하신다. 이것은 자아를 위하는 믿는 이의 혼 생명에 치명상이다. 주님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과 결별하기를 원하신다. ‘마음이 나누이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애정을 요구하시고 온전히 그분을 좇아 행하기를 원하신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다하여’라는 말은 주님을 위해 나 전체를 완전히 붓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 뜻대로 다른 것을 위한 애정을 남겨 두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은 완전한 것을 원하신다. 그 분은 ‘질투하시는’(출 20:5)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분의 자녀의 애정을 박탈해 가기를 원치 않으신다.
그러나 믿는 이가 하나님 외에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어떤 사람에게는 자기와 가까운 사람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이삭’이나 ‘요나단’이나 ‘라헬’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제단 위에 놓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제단 위에 놓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분과 경쟁하는 어떤 것을 그저 우리 몸에 내버려 두게 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이 믿는 이가 영적 능력을 얻는 길이다. 제물이 이미 제단 위에 놓였을 때 - 마지막 제물을 제단 위에 놓았을 때 - 에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된다. 제단이 없이는 하늘의 불이 없다. 십자가를 지고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주께 드리지 않고서 어찌 성령의 능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불은 제단 위의 것을 사르기 때문에 제단이 비어 있어서는 안 된다. 제물이 없다면 불은 무엇을 태우겠는가? 형제들이여, 우리가 머리로 십자가를 이해하고 입으로 십자가를 논한다고 해서 성령의 능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철저히 그분께 드려야 한다. 만일 우리가 비밀리에 어떤 끈을 붙들고 있거나 우리의 마음에 어떤 황소나 양이나 ‘아각’(Agag)을 남겨 두었다면 우리는 우리 몸에서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 저지를 당하는 이유는 믿는 이가 애정을 주님께 내어 드리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자녀를 버리지 못하고 자녀를 남겨 둠으로 결국 하나님의 왕국을 손상시킨 부모가 얼마나 많은지!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서로를 버리지 못해 추수할 밭에 일손의 부족을 초래하는가! 친구를 버리지 못해 후방에 앉아 자기 형제를 전방에서 홀로 싸우게 한 믿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가장 안타까운 것은, 믿는 이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을 주님과 같이 사랑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면 주를 사랑할 수 없고, 주님을 사랑하면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만일 우리가 아삽과 같이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73:25) 라고 말할 수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혼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믿는 이가 주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것의 중요성을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애정만큼 주님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그분을 위해 일하고 활동하는지를 보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신다. 에베소(계 2장) 교회가 주를 위해 수고하였지만 그들이 처음 애정을 버렸으므로 주님을 기뻐하지 않으셨다. 만일 우리의 일이 주님을 사랑함으로 행한 것이라면 그분은 기뻐하신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할 마음이 없다면 우리는 그분과 애정의 관계가 없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이 그분을 위해 많은 일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우리는 주를 위해 수고하고도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이 이러했다. 우리의 활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빛 비춤을 그분께 구해야 할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 안에서 더 짙어졌는가? 종일토록 주를 말하고 주를 위해 일을 한다 해도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한 절대적인 마음을 갖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사람이 그들이 영적인 생명의 성장을 저지한다는 인식이 없다. 믿는 이가 하나님 외에 사랑하는 다른 것이 있을 때 그는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점차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드러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렇게 될 때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영적인 데서 육적인 대로 낮추게 된다.
우리는 결코 어떤 사람이나 사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 인해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 만일 믿는 이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인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애정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덕분에 당신의 사랑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가 사랑하는 대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영향을 주게 되므로 장래 그 대상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박탈해 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 마음이 어떤 사람에게 기울어질 때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냉정한 상태로 보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감정의 자극을 받아서 뜨거운 마음으로 그 대상의 기쁨을 구하려 할 것이다. 이럴 때에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데 흥미를 잃어버리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 할 것이다. 아마도 그는 모든 영적인 - 직감적인 - 일에 대해 흥미를 잃을 것이다. 혹 밖의 것은 여전히 변하지 않을지라도 그의 마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기울어질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그가 영적인 것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더라도 많이 감소될 것이다. 이럴 때 세상적인 허영심이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마음속에서 끓어오를 것이다. 이는 믿는 이가 이것(허영심)을 통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점차적으로 이러한 믿는 이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세상적인 것과 세상적인 태도와 아름다움과 영광 그리고 상상 못할 일들을 추구하게 된다. 믿는 이는 하나님과 그분의 요구를 소홀히 하고 무관심하게 된다. 이럴 때에 믿는 이는 그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 있으며, 한 주인만을 섬길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과의 모든 비밀한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
사실상 믿는 이의 마음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람이 아닌 오직 하나님 자신이다. 대부분의 믿는 이의 실패는 하나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사람에게서 찾는 데 기인한다. 인간적인 사랑은 다 헛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믿는 이의 갈망을 만족하게 할 수 있다. 믿는 이가 하나님 외에 다른 사랑을 추구할 때 그의 영성은 즉시 타락한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람들을 사랑할 필요가 없단 말인가? 성경에서 거듭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한 말씀에서 우리는 이것이 사람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의 애정을 다스리기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누구를 사랑하길 원치 않고, 그분을 위해 사람들을 사랑하길 원하시며 그분 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길 원하신다. 우리의 천연적인 애호는 아무런 지위가 없다. 천연적인 친밀함도 그 능력이 상실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므로 그분의 다스림을 받기 원하신다. 우리는 그분이 우리에게 누구를 사랑하라고 하실 때 그분께 순종하고, 누구와 관계를 끊으라고 하실 때 그분께 순종하고 누구와 관계를 끊으라고 하실 때 그분께 복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생활이다. 우리가 혼 생명을 죽음에 넘기도록 성령께서 십자가를 우리 몸에 깊이 운행하실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신을 위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참된 죽음을 거칠 때 우리는 어떤 사람에게 ‘애착을 갖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의 인도로 삼게 된다. 우리 혼 생명이 이 단계를 거칠 때 혼 생명은 그 능력을 잃게 되고 사랑에 있어서 죽은 자같이 된다. 그런 다음에라야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다시 그분 안에서 그들을 사랑해야 할지를 지시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에 사랑하던 사람과 그분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갖기를 원하신다. 모든 천연적인 관계는 마땅히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부활의 경지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된다.
그러나 믿는 이는 이러한 생활을 얼마나 어려운 일로 보는지 모른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들은 이것이 얼마나 복된지를 안다! 때때로 하나님은 믿는 이의 헌신 혹은 믿는 이의 유익을 위해 믿는 이가 사랑하는 사람을 ‘박탈‘해 갈 수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애정이 그분께 향하도록 역사하시거나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박탈해 가신다. 하나님께서 후자의 방법을 사용하실 때에 그분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에 대한 마음을 바꾸게 하거나 환경을 일으켜서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신다. 혹은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시거나 세상을 떠나게 하시는 등 다른 환경을 당하게 하신다. 만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헌신이 성실하다면 그분은 우리에게서 그분 외에 어떤 것도 남지 않도록 모든 것을 박탈해 가신다. 믿는 이가 참된 영적인 생활을 함에 있어서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충돌되는 것을 다 버리도록 우리에게 요구하신다. 영적인 생명은 우리의 애정이 다른 데로 흘러가거나 유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의 애정이 동기와 행위와 목적이 어떠하든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그것을 우리의 미움과 똑같이 잘못된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은 그것이 애정이든 미움이든 똑같이 더럽다.
이러한 노정을 거친 믿는 이는 다른 사람에 대한 자기의 애정이 얼마나 청결한지를 보게 된다. 그 안에는 자기에 속한 어떤 것도 섞여 있지 않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 안에 있다. 비록 이전에 사람을 사랑했었지만 그는 자기를 더 사랑했고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제 그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할 줄도 알며, 그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사랑으로 그들을 섬기게 되었다.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라는 것을 사랑하게 되었으며, 자기 자신을 남보다 더 사랑하지 않고 자기 몸처럼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와 하나님을 위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자기 몸같이 사랑할 수 있다.
믿는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애정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이 영적 생명을 자라게 하는 데 필수 조건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애정은 얼마나 절제받지 못하고 방탕한지! 만일 우리의 애정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수시로 우리 영적 생명을 해칠 가능성이 있다. 잘못된 생각은 교정받기 쉽지만 잘못된 애정은 처리하기가 정말 어렵다. 우리는 전심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하며 우리의 애정은 주님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한다.
- 주님에 대한 혼적인 애정 -
그러나 한 가지 주의할 사항이 있다. 우리는 결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들을 모두 거절하신다.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라 해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아무 쓸모가 없다. 한 면에서 우리는 믿는 이가 주님에 대한 친밀한 애정이 없으므로 주님을 슬프게 하는 것을 볼 수 있고, 다른 면에서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까지도 혼 안에서 아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본다.
믿는 이가 혼의 능력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애정도 역시 주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 믿는 이의 애정은 완전히 영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오늘날 세상적인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너무도 많으나 하나님께 속한 애정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이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오늘날 많은 믿는 이들은 인간적인 마음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영접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아바 아버지에 대해 논하고 주님을 그들의 ‘사랑하는 주’로 칭하고 주님의 고난을 생각한다. 이렇게 할 때에 그들 마음 속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느낌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에게서 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게 되고 주 예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는 뜨거운 애정으로 가득 차게 된다.
그러나 이것들은 마치 항해하는 배가 바다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듯이 아무 흔적 없이 그들의 생명을 통과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가지고 있는 애정이 이와 같다. 그러나 이것은 대체 무슨 뜻인가? 이러한 애정은 자기 자신을 즐겁게 할 뿐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느낌을 사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고난 받은 모습에 의해 그의 마음이 감동되었지만 그 안의 진리는 그의 생명에 아무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주 예수님의 고난 받으심은 믿는 이들의 마음 속에 얼마나 무력한지! 이러한 것들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믿는 이들을 교만하게 하고, 그들 자신이 남보다 더 주님을 더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을 말할 때에 그들은 자신을 하늘에 있는 사람들같이 생각하나 사실 그들은 불쌍한 ‘자신’안에서 반걸음도 나오지 못한 것이다. 그들의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은 그들이 주님을 아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심지어는 그들을 사모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주님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이러한 즐거움을 얻는 데 있을 뿐 주님 자신에게 있지 않다. 이러한 묵상이 그들의 ‘영성’을 평안하게 해 주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 이렇게 묵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닌 혼에 속하고 땅에 속한 것이지 영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애정과 혼적인 애정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외면적인 것으로 이것을 구분한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믿는 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근원이 어떤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 혼은 우리의 ‘자아’이기 때문에 혼에 속한 모든 것은 ‘자아’라는 단어를 벗어날 수 없다. 주님을 혼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곧 자아의 작용이 들어 있는 애정이다. 자기 만족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혼적인 애정이다. 만일 우리의 애정이 영적인 것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애정 안에는 우리 자신을 위한 마음이 섞여 있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하나님을 인하여, 그분을 사랑함을 인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우리가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다른 것을 인해 하나님을 사랑한 모든 것은 다 혼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우리는 애정의 결과로도 그 근원을 알 수 있다. 만일 그것이 혼적인 것이라면 그 애정은 믿는 이가 세상을 벗어나도록 영원히 돕지 못한다. 그는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염려하고 발버둥칠 것이다. 만일 그 애정이 영적인 것이라면 세상적인 것들은 자연히 그 애정 앞에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믿는 이는 그것들을 멸시하고 가증한 것으로 여길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육신적인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그는 다시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같이 된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러한 체험을 가진 후에 그는 자고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낮추어서 사람 앞에서 위축된 존재가 되어 버린다.
본질상 하나님의 애정은 시간이 가도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애정은 가장 변덕이 심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즐겁다고 느끼지 않을 때에 하나님에 대한 애정이 냉랭해진다는 것을 보게 된다. 장시간의 시험을 받을 때에 그는 실패하고 만다. 이는 그가 자기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했고 자기 자신을 위해 - 자기의 즐거움 등을 위해 - 하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가 바라는 즐거움 등을 얻지 못할 때에는 물러서게 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한다면 어떤 상황에 떨어지든 어떤 위치에 처하든 조금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실로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아 8:6-7) 만일 하나님에 대한 믿는 이의 사랑이 참되다면 환경과 느낌에 관계없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감정이 멈출 때에 혼적인 사랑도 멈추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강하고 지속적이며 포기하는 일이 없다.
주님은 믿는 이가 자기를 위한 목적으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도록 종종 느낌에서 고통스럽다고 여기도록 체험하게 하신다. 믿는 이가 자기의 사랑으로 자신을 위한 목적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주님의 사랑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믿는 이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을 위한 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 그분은 믿는 이로 하여금 그분의 사랑을 느끼게 하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믿게 하신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초보에서 주님은 항상 여러 방법으로 믿는 이가 그분의 사랑을 느끼도록 매혹하신다. 그러나 믿는 이가 이것을 체험한 후에 그분은 믿는 이를 한 걸음 더 깊은 노정으로 인도하시는데, 그것은 바로 믿는 이가 그분의 사랑을 느끼지 않고 그분의 사랑을 믿는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맛보는 체험임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주님의 사랑에 매혹된 믿는 이만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전진하고 주께 돌아오게 된다. 믿는 이의 영적 생명의 시작 단계에서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느낌은 필수적이고 도움도 되며 믿는 이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바이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을 느끼는 체험을 갖고 얼마 지난 후에 믿는 이는 이러한 느낌을 다시 ‘붙들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생명은 손실을 당하게 된다. 이는 영적인 체험은 영적 생명의 노정에 있는 각 정거장(단계)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정거장에서는 그러한 체험이 정당하고 유익하다. 만일 믿는이가 체험에 있어서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전단계에서 머물러 있기를 원한다면 그는 퇴보하거나 제자리에 머물게 된다. 하나님은 믿는 이에게 주님의 사랑을 느끼게 한 후에 주님의 사랑을 믿게 하신다. 그러므로 믿는 이가 주님의 사랑을 느낀 체험을 가진 후에 그런 느낌을 다시 가질 수 없을 때에 그는 당황할 것이 아니라 이때가 바로 그가 믿을 때임을 인식해야 한다.
- 한 가지 경계해야 할 일 -
우리가 영을 따라 행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애정이 잠잠하도록 유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직감의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없다. 만일 우리의 애정이 하나님의 뜻 아래 완전히 굴복되지 않았다면 우리의 마음은 분란하게 되고 또 이로 인해 영의 인도가 저지를 당하게 된다. 영 안에서 믿는 이는 항상 그의 애정에 자극을 주는 것으로 주의해야 한다. 만일 사탄이 다른 것으로 당신을 이기지 못한다면 그는 이것으로 당신을 시험할 것이다. 많은 믿는 이가 이 점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친구만큼 우리의 애정을 더 격동케 하는 것은 없다. 친구, 특히 이성이 주는 영향을 실로 크다. 이성 관계는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서로 결제를 필요로 한다. 타고난 어떤 것들의 차이 때문에 그들은 서로 끄는 힘이 있다. 이것은 혼적이고 천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믿는 이는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이성이 애정에 가장 크게 자극을 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은 동성보다 이성으로부터 더욱 자극을 받는다. 심리적인 상호간의 욕구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동성보다 이성을 비교적 더욱 가깝게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적인 것이고 천연적인 것이며 타고난 본성에 속한다. 그러므로 이성의 의해 일어난 조그마한 자극도 큰 감정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천연적인 면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영을 좇아 행하는 믿는 이는 이 점을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사람을 대하는 데 있어 - 애정 면에서 - 동성과 이성을 대하는 태도가 서로 다르다면 우리는 이미 혼의 자극 아래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원인이 아닌 단지 상대방이 이성이기 때문에 대우를 다르게 한다면 우리의 감정은 여전히 천연적인 것이다. 만일 믿는이가 단지 상대방이 이성이기 때문에 이성을 가까이하도록 어떤 이상한 힘에 끌리는 것을 느낀다면 그는 거기에 천연적인 감정의 작용이 발동한 것을 알아야 한다. 때때로 이러한 자극은 정당한 목적 안에 섞여 있다면 그는 그들의 왕래가 완전히 영적인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그의 일에 있어서 혹은 일을 할 때에 자기의 일이 이성에 영향을 받지 않는지를 주의해야 한다. 이성 가운데서 영광을 얻으려는 마음을 모두 절대적으로 거절해야 한다. 이성의 영향으로 한 말과 모든 태도는 참된 영적 능력을 소멸시킬 수 있다. 모든 것을 잠잠히 청결한 동기 안에서 행해야 한다. 죄만 더러운 것이 아니라 혼에서 더러운 것도 더러운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는 이성과의 우정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도 마르다와 마리아 등 다른 여자들과 왕래하셨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애정이 완전히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는가에 있다. 그 안에 혼의 자극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다. 형제자매가 왕래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결코 혼 - 죄만이 아님 - 의 작용이 있어서는 안 된다. 믿는 이가 더 깊은 십자가의 작용을 거치기 전에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성과의 우정을 갖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러나 믿는 이가 어떤 위치에 이르렀던 간에 이성의 친구를 찾고자 하고 사모한다면 그는 혼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안배를 순종해야 한다.
어쨌든 믿는 이의 애정은 완전히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 언제든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버리기 어렵다고 느낄 때에 우리는 우리의 혼 생명이 거기서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애정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못한 그 부분에 분명 영적이지 않은 어떤 어떤 것이 끼어 있을 것이다. 혼에 속한 모든 애정은 우리를 세상과 죄 안으로 이끈다.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은 애정은 얼마 안 되어 정욕으로 변한다. 이러한 일에서 실패한 사람이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삼손 한 사람이겠는가? 들릴라는 곳곳에서 사람의 머리를 깎고 있다.
우리는 애정이 믿는 이가 가장 헌신하기 어려운 점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헌신한 것이 참된 영적인 표시이다. 믿는 이의 자신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죽었는가가 그의 영성의 정도를 말해 준다. 이것은 가장 큰 시험이다. 인간적인 애정에 대해 죽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하여도 죽지 않은 것이다. 애정에 대한 죽음은 곧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의미한다. 우정과 연애와 애정을 구하는 것은 모두 자아의 생명에 대해 죽지 않은 것이다. 참되게 혼 생명에 대해 죽은 사람의 표시는 하나님 외의 애정을 버리는 데서 볼 수 있다. 영에 속한 사람은 얼마나 탁월한지! 이는 영에 속한 사람은 사람의 애정 위에서 행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