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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 울타리의 국화꽃
이 재 익 (시인) / 소답자한 제59호
국화향이 늦가을의 정취를 화려하고 아늑하게 해준다. 국화에 대하여 동진의 도연명은 서리 속의 호걸 ,霜(상)下傑(걸) 이라 하였고, 송나라 소동파는 서리 속의 영웅 상중영, 霜(상)中英이라하였다. 18세기 조선 이정보가 읊은 시조에는 傲霜孤節(오상고절)이라고 칭송하였다.
국화야 너는 어이 3월 춘풍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네 홀로 피었나니? 아마도 오상고절, 傲霜孤節은 너 뿐인가 하노라.
또 18세기 신경준은 여암유고 <순원화훼잡설>에서 말하기를,
옛사람은 국화가 강직하고 고결하여 여러 꽃과 그 피고 지는 것을 함께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 때문에 국화를 거만하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국화는 사양하는 정신에 가깝다. 봄과 여름이 교차할 때 온갖 꽃이 꽃망울을 터뜨려 울긋불긋함을 다투므로, 봄바람을 일러 꽃의 화투, 花妬라 한 것이 이것이다. 국화는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나 있다가 여러 꽃이 마음을 다한 연후에 홀로 피어나 바람과 서리에도 꺾이는 것을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양보하는 정신에 가깝지 않은가. 라고 논했다.
나는 어느 날 친구들과 해운대 장산에 등산을 가서 장산마을에서 점심을 시켜먹게 됐다. 늦가을 날씨는 쌀쌀했지만, 손님이 많아서 방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야외 의자에 앉아서 음식을 먹었다. 나중에 방안에 자리가 비어 들어가게 되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치면서 "처남 오랜만이다." 한다. 나는 누군지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한참 후에야 이종4촌 매제요, 고등학교시절 한 반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오랜 투병 생활로 몸이 많이 수척했고, 오래 만나지 않은 터라 얼른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밖에서 음식을 나르던 주인아주머니가 내 이종4촌여동생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매제는 나를 만나서 기분 좋다고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 처지였지만 특별히 손수 산국, 감국 등을 따서 정성껏 담근 국화주를 내와서 나와 친구에게 대접을 한다. 친구요 매제였지만, 그는 취미가 산속에 들어가 소를 키운다며 도통 시내 도시생활과 친척을 멀리하는 바람에 오래전에 이모를 통해서 소식만 간간이 들었을 뿐, 만난 지가 오래 돼서 이 장산마을에서 살고 있는 것도 몰랐다. 그 때 마신 그 국화주는 멋지게 담기도 했지만, 뜻밖에 만난 매제가 나를 환영하며, 주는 술이라 그 맛이 특별했다. 나는 그 국화주 생각을 하고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며 국화에 대한 옛 한시 시편들을 들추어 보며 만추晩秋의 정취를 한껏 느끼고자 한다.
가을 산에는 들국화가 단풍과 함께 가을의 정취를 잘 자아낸다. 들국화라는 품종은 없고, 감국, 산국, 구절초, 쑥부쟁이, 참취, 벌개미취 등 국화과의 여러 꽃들을 아울러서 부르는 이름이다. 감국과 산국은 노란 색이며, 감국이 산국보다 꽃송이가 약간 크다. 구절초는 흰색과 연분홍색이며 들국화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쑥부쟁이는 꽃이 연보라색, 참취는 봄에 나물로 먹는 취나물의 꽃으로 작고 하얀 꽃이다. 벌개미취도 연보라색이다. 사람들이 가꾸어 피는 국화 품종이 현재 3,000종이 넘는데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품종들이 개발 될 것이다. 그만큼 국화꽃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꽃이다. 그러나 역사상의 국화꽃 이미지는 은일자, 隱逸者(조용히 숨어서 지내는 자)이다. 그리고 영원한 국화꽃의 주인은 중국 동진시대 이름을 도잠陶潛(365?~427), 호를 淵明이라고 하는 陶淵明이다. 그것은 그의 <飮酒, 음주>라는 시에서 비롯됐다.
"동쪽 울가에서 국화를 꺾어드니 아련히 남산이 다가서네." (彩菊東籬(리)下/ 悠(유)然(연)見南山)
라고 읊었는데 이 이후 오랜 역사에서 문인들은 국화하면 도연명을 떠 올린다. 이 구절은 음주라는 시의 한 구절인데 그 시를 우리말로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마을 안에 오두막을 지었으나 수레와 말의 시끄러운 소리 없다네 그대는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마음이 고원하면 사는 곳이 절로 외지게 된다네 동쪽울타리 아래서 국화를 따는데 멀리 남산이 아련히 다가서네 산 기운은 석양에 더욱 고운데 날던 새들 서로 함께 돌아오네 이 가운데 참다운 뜻이 있는데 말을 하려다 잊고 말았네.
이 시에 나오는 '동쪽 울타리'와 도연명의 고향마을 이름인 '시상', 柴桑은 국화의 대칭,代稱이 되었다. 도연명이 자신의 隱逸(은일)한 정취를 국화꽃으로 표현하였고, 명나라 문징명은 다음 <국화 그림>이라는 시로 도연명과 국화를 회상하며 자신의 가을 정취를 나타냈다.
도연명은 다 늙도록 가난을 걱정 않고 취하여 국화꽃 꺾어 드니 마음은 마냥 봄. 우습도다 하찮은 꽃 어쩌다 그런 행운 누리게 되었는지 도연명 있었기에 지금껏 사람들이 소중해한다네.
墨菊(묵국); 文徵(징)明 淵明老去不憂貧/ 醉(취)擷(힐)金莖(경)滿(만)意春/ * 취힐 ; 취하여 꺾어들다/ 금경 ; 황금빛 국화 却(각)笑(소)微(미)花何(하)幸(행)會/ 至今珍重爲斯(사)人 * 미화 ; 보잘것없는 꽃(국화), 위사인 ; 이 사람 때문에
또 청나라 운수평도 <국화 그림>이라는 시 역시 도잠을 언급하면서, 고결한 국화의 품격을 읊었다.
마냥 도연명을 좋아하여 서리 내린 덤불 속 술 들고서 가을 꽃 찾아가네. 가을이 익어가는 때 공명심 따윈 다 버리고 동쪽 울타리 가에 아롱진 노을을 그리네.
畵(화)菊(국) / 惲(운)壽(수)平 只愛柴桑處士家 / 霞叢戴酒問寒花/ 秋窓閑却凌雲筆/ 自寫東籬五色霞/ * 시상 ; 도잠/ * 능운필 ; 세상에 크게 이름을 떨칠 만한 작품
이 시에서도 시상이라는 국화의 대명사가 언급됐다. 우리나라 문인들 중에 고려시대 이규보 李奎報는 <영국, 詠菊>으로 읊기를
봄기운 빌리지 않고 가을빛에 의지하여 찬 꽃을 피워내니 서리도 두려워하지 않네 술이 있으면 누가 너를 저버리겠는가 도연명만이 홀로 너의 향기를 사랑했다고 말하지 말라.
또 조선시대 紫(자)霞(하) 신위,申緯(1769~1845, 문신, 병조참판에 이름, 화가)는 <영시월국 ; 시월국화를 읊다> 에서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일 무 넓이 남산의 도연명 댁 국화 시절에 배倍나 그리워지네 시 지은 후 울타리 아래서 꺾어들고 술 취하기 전에 담 앞에서 담박하게 마주하네 명품이 새로움을 다투어 해마다 불어나고 색과 향에다 맛까지 겸했음을 해마다 깨닫네 그대는 다만 서리이기는 웅걸함만 허가하나 이미 엄동의 대설 내리는 때라네.
정렴과 정작 형제의 중양절 즈음에 국화를 읊었다. 먼저 북창(北窓) 정렴鄭磏(1505~1549, 의원, 포천현감)이 구월 하순경에 만국을 읊었다.
십구나 이십구, 아홉이기는 매한가지니 구월 구일이라 때를 정할 필요 없다네. 많은 세상 사람들 이를 알지 못하는데 섬돌 가득 핀 국화만이 아는구나.
9일에도 19일에도 29일에도 국화는 핀다. 구태여 9일 중양에만 핀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의 아우 정작鄭碏(1533~1603, 형제가 의술 뛰어남, 사평 벼슬) 이 화답하여 읊었다.
세상 사람들 중양절을 가장 중히 여기는데, 반드시 중양절만 흥취를 돋우는 건 아니리. 만약 국화꽃 마주하여 백주를 기울인다면 가을 구십 일 어느 날인들 중양절이 아니랴.
유몽인의 어우 야담에 나오는 이 시들에 대하여 유몽인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전에 조정에서 관아를 설치해 우리나라의 시를 뽑았는데, 이때 정렴과 정작의 이 시에 대해 말한 이가 있었다. 대제학 유근이 정작의 시를 취하고 정렴의 시는 버리면서 시율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 아! 정렴은 음률을 잘 아는 사람인데, 유근만큼 음률을 알지 못한다고 할 수 있으랴, 그러므로 예부터 지음(知音)을 얻기 어려운 것이다." 라고 하였다. 중양절,重陽節이란 음력 9월9일인데 국화는 예로부터 중양절의 상징물이다. 우리나라는 신라대부터 중양절을 숭상해 왔다. 조선시대 중양절에는 황국을 따다가 국화전을 붙였다. 일본 시인 賴(뢰)春風(1753~1825)도 이렇게 읊었다.
삼려대부 굴원이 먹었고 오류선생 도연명이 땄었네 국화여 그대에게 묻노니 천 년 동안 지기가 몇이나 있었던가?
가을 국화를 보고 감탄하는 자는 모두 국화의 지기가 아니겠는가? ‘굴원이 먹었다’ 는 말은 屈原(굴원)(BC 343?~BC 277?년경, 전국시대 초나라 정치가, <이소>라는 장대한 서정시를 남김, 초나라 멸망 직전에 멱라수에 자결함)의 시에,
아침에는 목란에서 떨어지는 이슬을 마시고 저녁에는 가을 국화의 떨어진 꽃잎을 먹는다. 고 읊었던 것을 말한다.
목란이 피는 여름에서 국화가 피는 가을 사이를 아침에서 저녁으로 표현하여, 세월 흐름의 빠르기를 나타냈다.
근래 조선 말기에 이준 열사와 국화 사연을 들어 본다. 이준(李(이)儁(준), 1859~1907)은 함경 북청출신으로 일본 와세다대학 법과 졸. 한성재판소 검사. 서재필과 독립협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어느 때, 相臣 김병시 댁의 사랑에 김병시의 아들 김용규와 함께 기거할 때, 청년 이준에게 어느 날 친척 이인재가 놀러왔다. 이준은 주인집 아들인 김용규의 담뱃대를 손님에게 빌려줬다. 손님이 피우고 있는 동안 담뱃대 주인이 들어 왔다. 손님이 간 후 김용규는 이준을 책망하였다. 아무 말도 없이 듣고 있던 이준은 그 담뱃대를 들어 주둥이를 분질러 면전에 던지고는, “그 따위 양반의 자존심을 버려라 사람 있고 물건 있지 양반물건이라고 사람 위에 있을 것이냐. 일개 담뱃대로 손을 쫓고 면책을 하니 물건이 소중한 자와는 단 일시도 같이 있기 싫다.” 하고 그 집을 뛰쳐나가 낙향해 버렸다. 화가치민 김용규는 아버지의 세도로 함경감사 조병식에게 체포령을 내렸다. 스스로 출두한 이준은 당당히 말했다. "양반의 담뱃대 하나로 죄를 준다면 그 법은 공법이 아니라 사법이요" 그 기개를 장히 여긴 감사 조병식은 술상으로 대접했다. 활달한 청년 이준은 함흥 명기 함산국, 咸山菊의 치맛자락에다 시 한수를 썼다.
咸山시월에 서리 머금은 국화꽃은 중양重陽을 위해 핀 것이 아니라 객을 위해 피었구나.
이준은 죄를 받으러 갔다가 妓 하나를 얻어 왔다. 이렇게 멋진 이준 열사는 을사조약의 항거하고 열국에 폭로하고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머나먼 네덜란드 헤이그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다. 1907년 6월 5일 만국평화회의 의장을 방문하고 고종의 친서를 전했다. 러시아인 의장 넬리도프는 일본의 압력을 받자 네덜란드 정부에 미루었고, 네덜란드 역시 일본의 압력 때문에 우리 대표의 참석을 거부했다. 각계 요로에 일본의 한국 주권 강탈진상을 호소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울분으로 ‘한번 죽어 국가에 보답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 스스로 칼로 목을 찔러 순사,殉死하였다. 아! 통재라, 서리에도 꺾이지 않는 국화의 기개로 스스로 나라를 위해 순사하였구나.
현대에 수없이 많은 시인들이 국화를 읊었지만, 서정주의 <국화옆에서>가 백미이다. 그 외는 유명 시인의 국화에 관한 명시는 얼른 떠오르지 않는다.
<산국화>, 고동주(전통영시장)
아침 산책길에서 밤새 별들이 지켜준 산국화 무더기를 만난다.
정갈한 여인인듯 미소까지 당당하다.
지순한 숨결마저 소슬한 바람 따라 향기로 풀어내는 꽃, 산국화 앞에서 때 묻은 마음을 열어 본다 묻은 땟자국 진하지만 하늘빛 청순한 향기로 나는 새롭게 태어난다.
마지막으로 필자의 졸시 <들국화 언덕에서> 를 소개하며 마친다.
<들국화 언덕에서>, 이 재 익
라일락 향기롭던 날 만남이여 너울너울 줄장미가 담장을 넘어갈 때 그대는 시詩요, 시가 그대였다.
들국화 속절없이 바람에 흔들리니 어리석음은 강물같이 흘러가고 소중한 사념은 파도처럼 부셔졌다.
높구름 더러, -날 잊으세요, 날 잊으세요- 절래절래 흔드는 몸짓 또한 시였다 쑥부쟁이, 구절초, 벌개미취가 모두 들국화 기쁨과 슬픔, 안타까움도 모두가 시.
아!, 어이하리요, 억새 흩날릴 때, 들국화 또한 사위어 갈 것을...... 마음속에 피는 꽃, 그 향기만 기억하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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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연명
도연명((陶淵明)은 중국 동진시대 시인이었다. 연명은 호이고, 이름은 도잠, 365~427)이다. 팽책의 현령이 되었으나 80일 만에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고 귀향하였다. 전원시인 은일 시인은 그의 작품은 평담한 가운데 진정을 토로하고 유가적인 기질과 노장적인 초월을 함유하였다. 도화원기, 오류선생전, 자제문 등에서 고매(高邁)하고 무애(無碍) 무우(無憂)한 운치가 높다. <도화원기>는 지배계급의 착취와 전쟁의 혼란속에서 시달리는 농민의 아픔을 그리며, 현실의 질곡으로부터 벗어난 이상사회를 노래한 것이다.
도연명은 은자(隱者)라기 보다 피하려던 것은 정치였지 인생 그 자체는 결코 아니었다. 도연명에겐 위대한 인생애가 있었고, 처자식은 너무나 참된 존재였다. 도연명은 '뜰의 국화 한가지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고 읊었다. 그게 그가 가을의 풍류를 즐기는 방법이었으리라.
오늘 2012년 12월 7일, 나는 어제는 도연명의 국화를 생각하며, 카페에 올렸는데, 오늘은 절기상 大雪이라고. 마침 전국적으로 눈이 온다. 눈에 들뜬 마음으로 도연명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산에는 단풍이오, 들에는 국화로다. 산은 붉고 들은 누르다. 어느듯 지금 눈내려 천지가 희니, 이 절묘한 색상은 누가 대비시켰을까?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도연명의 마음은 무슨 색깔일가? 아마도 시인 선비이니. 연푸른 옥색이리라. 왜 옥색이란 말인가? 글이나, 마음을 옥을 조탁하듯 다듬고 또 다듬어 가니까... (학정의 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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