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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철 시집『계단 끝에 달이 뜨네』해설 (2018. 북인) / 기억의 서식처에서 만난 아름다운 파동
이두철 시집『계단 끝에 달이 뜨네』해설 (2018. 북인)
기억의 서식처에서 만난 아름다운 파동
마경덕(시인)
몸짓이나 단순한 소리에서 시작된 언어 이전의 비언어들, 본능적으로 습득한 신체적 표현과 소리는 글자가 되어 복잡다단한 문장으로까지 발달하였다. “불편한 곳에서 가구가 태어난다”고 어느 시인이 말했듯이 문장에 활력을 주는 창의성도 필요에 의해 태어난다. 무채색에 가까워질수록 채도는 낮아지는 법, “선명한 언어의 채도”를 위해 창의성은 필수일 것이다. 하여 시인은 끝없이 새롭게 언어를 짓는다. 시는 “시간의 결과물”이다. 천천히, 그리고 지루하게 끈질기게 쌓아올린 “생각의 축적물”이다. 詩는 명사이지만 ‘짓다’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함축적이고 은율적인 언어로 의미를 부여하면 평면의 종이 한 장에서도 움직이는 동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시는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을 찾는 일이다. 답을 구하기보다는 질문이라는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도 그런 까닭이 아닐까. 시적 긴장을 유발하기 위해 시인은 “익숙한 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공상”을 꿈꾼다. 외재성을 가진 시인들은 정해진 틀에 안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날마다 바라보는 풍경이 지루해지고 퇴색되면 익숙함에서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 여행은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작품의 여백을 채우는 요소들은 적당히 거리를 둔 편안함과 불편함이다. 작가는 한 편의 시를 위해 긴 기다림을 감당하며 가장 “적합한 언어”를 찾아내어 하나의 의미로 만들어낸다. 어느 화가는 이사 간 집의 낡은 도배지를 벗기는 순간, 그동안 이곳을 스쳐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삶과 여러 겹으로 압축된 시간을 발견했다고 한다. 누렇게 바랜 타인의 흔적은 “삶의 퇴적층”인 셈이다. 과거에서 현재로 소환된 벽지 속에는 유추할 수 있는 무수한 상상력이 존재한다. 시 쓰기는 알 수 없는 시간의 겹을 탐색하고 새로움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벽이라는 장소에서 낡은 벽지 몇 장만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불러내는 것이다. 이렇듯 사소한 것에서 시의 발화가 시작된다. 완결 짓지 못한 과거나 방치해둔 기억에서 뜻밖의 것을 찾아낼 때처럼.
다채로운 소재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가는 이두철 시인은 과거와 현재를 유영하는 “탐색자”이다. 어느 지점에 멈춰 대상을 바라보아야할지 또 프레임 안에 들어온 소재를 어떻게 소화해야할지 알고 있다. 시인은 의지를 환기시켜 우리에게 대상을 인식하는 또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 사람이다. 발견한 낯선 것에 함께 유대감을 느낄 때 각각은 우리가 된다.
“기억의 공간”이란 제3의 의미가 발생하는 또 다른 장소이다. 매몰된 “기억의 서식처”에서 이두철 시인은 간결한 문장으로 가장 핵심적인 것을 공략한다. 여러 개성이 어지럽게 상충하며 함께 흘러가는 백화제방의 시대에 이두철 시인은 자신만의 색채를 간직하려고 노력한다. 간결한 언어의 방식은 수채화처럼 담백하지만 각각 무게를 지녔다. 녹록치 않은 호기심은 주변의 사소한 것도 놓치지 않는다. 아래 예시「장끼」에서 밑바탕에 깔린 측은지심의 뜨거운 호흡을 만날 수 있다.
칠보산 등산로 입구
촌로가 사는 비닐하우스 옆
철망에 갇혀 서성거리는 장끼 한 마리
오골계 무리에 낀
저 화려한 빛
흑빛에 싸여 운다
긴 꼬리에 무지갯빛이 어른거린다
언젠가 숲길에서 마주친
꿩, 꿩
하늘로 솟구치던 그 눈부신 울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복달임이 다가오는데
무사히 삼복을 넘을 수 있을까
안절부절
까투리 울음이 날아오는 뒷산을 향해
꿩,
화답하는 목이 피를 토한다
—「장끼」전문
불편하지만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질문을 하고 답을 구한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기존의 틀에 삐걱거리며 “모순된 개념”에 의문을 품고, 혼란을 겪는다. 어느 날 시인의 반경에 포착된 대상은 철망에 갇힌 장끼 한 마리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철망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철망이라는 “고립된 장소”는 “불안함과 절망”이 존재하는 냉정한 세상이다. 강자에 의해 지배당하는 “힘의 논리”가 이 공간에 있다. 사건이 발생하고 생각이 충돌하는 순간, 앞으로 닥칠 “예견된 불안함”이 걸음을 붙잡는다. 조류 중에서도 깃털이 유난히 고운 장끼는 이곳에서 단연 군계일학이지만 검은 오골계 무리에 섞인 화려한 빛은 더없이 쓸쓸하고 초라하다. 까투리 울음이 날아오는 뒷산을 향해 화답하지만 어디에도 출구는 없다. 철망에 갇힌 장끼가 어떤 경로를 통해 이곳에 왔는지는 시인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시에 다가가는 접근 방식은 표면적이고 찰나적인 감정이 아닌 이면에 존재하는 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다. 우연히 상황에 접근해 명명할 수 없는 슬픔에 귀를 기울이는 시인의 “시각적 심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깃들어있다.
삼십년을 함께한 소가 죽었다
서울 딸, 미국의 아들에게 어미가 죽었다는 소식을 보낸다
황급히 달려온 자식들
소가 죽었다니 아연실색 볼멘소리를 낸다
바쁜 세상에 미국이 이웃집인줄 아느냐고
살아 있을 때 얼굴이나 한번 봐야지
죽은 다음에 보면 무슨 소용 있느냐
명절에도 내려오지 않은 너희들이 보고 싶어
부른 것이니 너무 속상해 하지마라
이 소는 삼십 년 동안 힘든 일 다해주고
내 눈빛만 봐도 알아주는 소중한 가족이다
어느 가족이 이 죽은 소만큼 할 수 있겠느냐
노부부의 고집에 동네 사람들
한마음으로 장례를 준비한다
꽃상여를 메고 갈 어깨도 소리꾼도 부르고
상복을 입고 곡을 하며 상여 뒤를 따라간다
가족장이란 이름의 소의 장례식
호상이다 호상
—「소의 장례식」전문
주변에 예기치 못한 충돌과 모순들이 산재해 있다. 어떠한 감정을 촉발시키는 것 중에 가장 큰 충격은 “근친의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상황적 계기를 통해” 벌어지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숱하게 보아온 현시대의 모습이다. 선택이 아닌, 신의 손에 선택되어지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죽음이라는 극단의 방법으로 어머니는 흩어진 자식을 불러 모은다.「소의 장례식」은 효(孝)를 소홀히 여기는 요즘 세태를 다룬 작품이다. 소의 죽음을 둘러싼 해프닝을 통해 이두철 시인은 이기적으로 흘러가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삼십년 곁에 있어준 소는 가족과 다름이 없다. 멀리 떨어진 자식들이 채워주지 못한 부분을 소 한 마리가 감당했을 것이다. 이웃 간의 무관심, 동물학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냉대가 만연한 시대에 한 마리의 짐승마저 귀히 여기는「소의 장례식」은 마음을 하나의 끈으로 묶어 유대감을 느끼게 한다. 칸트는 인간이 지닌 절대적인 가치를 존엄(尊嚴)이라 하고, 도덕적 가치를 최고의 가치로 보았다. 의(義)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정신이다. 자식이 부모에게 지켜야할 도리, 관습과 원칙, 바람직한 행동규범은 이제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어가고 있다. 개인이 “체감한 정서와 갈등”은 이성적 논리가 아닌 감각적 호소에 가깝지만 삶의 가치가 진정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다.
아침 햇살이 회전문으로 빨려든다
품에 안겨
나비날개처럼 팔랑팔랑 돌아가는 출근들
이른 출근을 수납하는 시간
돌고 돌아 제자리에 꽂히면 하루가 시작된다
우르르 유리문이 몸통을 돌리고
한 무리의 점심을 방출하는 시간
걸음이 엉킨 도시의 소음이 문틈에 걸렸다
목줄에 명찰을 달고
한 손에 커피를 든 웃음은 문에 끼지 않는다
부옇게 황사가 날아들면 봄은 틈을 노린다
그 문으로 들기 위해
대형빌딩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취업준비생들
봄은 웃음과 울음으로 갈라진다
밀려난 사람에게 회전문은 완강하다
문이 낯을 가린다
—「회전문」전문
회전문은 회전축을 중심으로 여러 날개로 이루어진 회전형이다. 부채꼴의 공간에 한 사람씩 들어가 출입하게 되어있다. 대부분 초고층 빌딩에 설치된「회전문」은 스펙(Spec)이 “우선주의”인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치열한 생존경쟁을 다루고 있다. “소유의 욕구”는 인간의 기본적인 특성 중 하나이다. 나와 공존하지 않는 풍경을 바라보며 도시를 유랑하는 구직자들에게 ‘소유’는 곧 ‘가치’로 평가된다. 대개는 자신이 가진 인적 자원을 활용한 노동에 의존하여 소득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갑과 을’의 관계가 발생하고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에서 상류층과 하류층으로 구분되고 물리적 심리적 거리감이 생긴다. 소득 불평등이 심화되어 상대적 빈곤감이 늘어나고 현대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들이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비정규직에서 실업자로 추락한 사람들, 계약직과 비정규직의 미취업으로 발생한 삶의 무게는 개인의 몫이고, 결과 역시 개인의 책임으로 돌아간다. ‘희망고문’이라는 말도 있다. 세상을 지배한다는 0.1% 의 위력 앞에 얼마나 많은 청춘이 좌절하고 낙심하며 젊음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해마다 쏟아지는 수많은 취업준비생들, 이력서에서 일찌감치 탈락하는 스펙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취업의 벽을 넘지 못하는 “현대판 유목민”을 도처에서 만날 수 있다. 무한 경쟁사회에서 목표를 향해 달려가지만 회전문은 완강하다. 낯을 가리는 것이다. 부가가치가 높고 최상의 스펙을 쌓은 최적화된 조건만이 회전문을 통과할 수 있다. “목줄에 명찰을 달고/ 한 손에 커피를 든 웃음은 문에 끼지 않는다”고 하였다. 생의 희비(喜悲)를 대조적으로 보여준 이두철 시인은 이 시대가 겪는 “상대적 박탈감”을「회전문」의 이미지를 통해 조명하고 있다.
L마트 할인 대축제
꽁무니를 물고 줄지어선 카트들
힘이 센 카트, 그 보다 더
힘이 센 카드
삼박자가 맞아야 씽씽 마트가 돌고
바퀴가 돌아간다
많이 많이 담으세요
원 플러스 원이 대기 중입니다
입이 큰 카트
코너마다 넘치도록 집어삼킨다
주말 부부 대환영
일주일치 식단이 걸음을 붙잡고
떼를 써서 많이 받아가세요
아이를 태운 영리한 카트
계산이 밝다
독거노인의 외로움을 밀어내고
절룩거리는 가난도 밀어내고
집어 든 빵 한 봉지만 계산하는 카트
싸늘한 몸에 자본주의 피가 흐른다
—「마트는 카트를 사육한다」전문
마트 할인 대축제가 시작되고 원 플러스 원이 대기 중이다. 생활 방식이 저축보다는 소비 쪽으로 바뀐 소비문화에 맞춰 카트가 줄지어 서 있다.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상품생산이 이루어지고 노동력을 제공하며 사람들은 경제생활을 영위한다. 팔아야하고 구매해야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이두철 시인은 “카트와 카드”로 보여주고 있다. 금융제도가 전산화되고 은행 간의 전산망이 발달해 결제수단으로 태어난 카드, 편리한 카드로 인해 무현금시대가 오고 소비자는 상품을 선택하고 구입할 폭은 넓어졌다. 무엇이든 담을 수 있고 바퀴가 달려 이동하기 쉬운 카트는 품이 넓다. 소비를 부추기는 전략이다.
“떼를 써서 많이 받아가세요/아이를 태운 영리한 카트/계산이 밝다” 이두철 시인은 카트와 자본주의 생리를 교묘하게 접목시켰다. 아이를 태운 카트는 교활하다. 떼를 쓰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는 아이의 심리도 이용한다. 판매를 위해 서비스라는 명목으로 제공되는 것들도 자본주의의 치밀한 상술이다. 소비문화가 발달하고 자신의 분수를 넘는 과소비가 늘고 있다.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는 자본주의를 단순한 경제체제에서 벗어나 사람들의 생활양식 가치관, 신념 등과 연관된 문화 현상의 하나로 보았다. 우리 속담에 “외상이면 소도 잡아먹는다”고 하였다. 뒷일은 어떻게 되든 생각지 않고 우선 좋으면 그만인 것처럼 무턱대고 행동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이 속담은 우리민족의 “소비문화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대형마트가 카트를 사육하지만 힘 센 카트보다 더 힘이 센 것은 플라스틱머니이다. 편리한 카드는 신용을 담보로 한다. 결제날짜에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신용에 금이 간다. 한도액을 올려주고 소비를 부추기던 신용카드가 냉정하게 돌아선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원리이다. “독거노인의 외로움을 밀어내고/ 절룩거리는 가난도 밀어내고/집어 든 빵 한 봉지만 계산하는 카트” 싸늘한 몸에 자본주의 피가 흐르고 있다.
꿈틀대는 뱀을 닮았다
누가 저 작은집에 가두었을까
비늘을 온몸에 두른 소나무
이십년 묵은 키
발 뻗을 곳이 없어
제자리 빙빙 돌며 울퉁불퉁 똬리를 튼다
후천적 왜소증
천형처럼 제 키를 자르고
가지마다 혹을 매달았다
쇠줄로 엮인 팔다리
전족을 신은 여인처럼
한 발 한 발 허공을 걷고 있다
—「분재」전문
이십 년 묵은 뱀 한 마리가 화분에 살고 있다. 똬리를 튼 형상이 마치 뱀의 모습이다. 작은 분(盆)에 키 낮은 나무를 심어 성장을 억제했다. 분재 가꾸기의 핵심은 기교와 창의력으로 늙은 거목(巨木)을 축소시켜 특징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이다. 아무리 왜소하게 키운 나무도 ‘위엄’이 서린 노거수의 풍치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가지가 늘어지도록 철사감기로 모양을 유인을 하고 돌멩이를 매달아 가지를 원하는 방향으로 휘어지게 하는 과정에서 기암절벽에 서 있는 노송(老松)의 모습이 태어나지만 나무의 입장으로 바라보면 “후천적 왜소증”을 앓는 장애를 가진 나무에 불과하다. 인간의 생각은 늘 인간의 쪽으로 기울어진다. 한번이라도 상대방의 고통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을까. 몸보다 작은 화분을 신고 평생 갇혀 살아야하는 분재의 고통이 더해질수록 멋지다고 박수를 보내는 아이러니를 시인은 “쇠줄로 엮인 팔다리/ 전족을 신은 여인처럼/한 발 한 발 허공을 걷고 있다”고 말한다. 이십년을 견딘 작은 키는 갈 곳이 없어 제자리를 맴돈 흔적이다. 전족은 여자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해 헝겊으로 발을 묶던 중국의 풍습이다. 발가락을 발바닥 방향으로 접어 넣듯 묶어 조그만 신에 고정시키는데 발뒤꿈치에서 발끝까지 약 10cm가 이상적이라고 하니 사람의 발, 역시 기형이다. “물리적인 억압”으로 성장이 제한된 발은 고통이 심해 팔자로 걸었다고 한다. 전족과 분재는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고대 철학자 플라톤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이데아 세계의 그림자라고 말했다.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를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에 비유한 것이다. 우리는 그림자만 보고 실체를 다 보았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무관심한 대상으로 버려진 것들을 을 새롭게 읽어내고자 하는 시인은 고통을 직접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상황으로 유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을 시각화하고 있다. 아래 예시「계단 끝에 달이 뜨네」는 시집의 표제작이다. 계단이라는 “삶의 장벽”을 통해 시인이 조명한 것은 어둠을 비추는 달, 곧 희망이다.
가파른 계단
어느 미술동아리 학생들이 그린 꽃길
사철 지지 않는 꽃이 피었네
발아래 아파트 숲엔 불빛이 황홀하고
비탈진 골목길엔 달빛만 고요하네
어쩌다 이곳까지 흘러왔을까
세상 끝자락까지 밀려온 사람들
꽃 한포기 심을 땅은 없지만
달 속에 꽃을 심어 꽃길을 만드네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꽃길을
팔순의 지팡이가
한발 한발 힘겹게 오르네
계단 끄트머리 달을 찾아
—「계단 끝에 달이 뜨네」전문
생소한 이미지를 조합하고 재구성하는 “콜라주 형식”의 시는 난해해서 겉돌지만 서사의 형식을 갖춘 이두철 시인의 시는 “서정성의 충일함”에 젖게 한다. 시인은 화자가 되어 말하고 독자는 청자가 되어 집중한다. 시의 전반적인 흐름을 주도하는 계단은 가난한 사람들이 오르내린다. ‘중심’을 둘러싼 ‘주변’의 것들과 그 주변에서 또 밀려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 외곽의 산등성이나 산비탈 동네는 가파른 계단만큼 굴곡진 삶이 있다. 그 ‘계단’은 숱한 발길을 받아주는 동적(動的)인 존재로 살아 움직인다. 시간이 쌓아 올린 “삶의 행적”이 그곳에 존재한다. 이두철 시인은 꽃 한포기 심을 땅도 없는 빈곤층의 일상과 노후의 고독한 비애를 아날로그적 방식으로 보여준다. 마주친 소소한 풍경과 평범한 사물이 널린 실재의 공간에서 느껴지는 상실감을 재조명하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다. 일상의 “사소한 요소”들은 퍼즐 한 조각과 같다. 그 작은 퍼즐 한 조각이 하나의 밑그림이 된다. 시인은 흩어진 기억의 픽셀을 모아 “생생한 삶”을 완성하며 진정성을 획득한다. 가파른 계단 끝에 뜨는 달은 힘든 삶을 “위무하는” 한 줌의 희망이다.
한겨울
파타야의 해변은 뜨겁게 달아오른다
이글거리는 햇살 아래
삼삼오오 짝을 이뤄 에메랄드 빛 바다를 품는다
새해를 여는 일월의 초입
어깨위에 탐스럽게 내린 함박눈
비행기 티켓 속에 담아 두고
남국의 바닷가 모래 위를 걷는다
한 장의 입장권으로 손녀는
허물어진 모래성을 쌓아 성주가 되고
파도는 달려와
제가 모래성의 주인이라고 우겨댄다
아이의 손을 잡고
발자국을 세어가며 모래사장을 걷는다
큰 발자국에 조그만 발자국을 올려놓고
크기를 재보는 일곱 살
집요하게 따라온 파도가
모든 흔적을 지워버려도
먼 훗날 외로이 험난한 산을 오를 때면
가슴에 묻어둔 모래밭 발자국 꺼내보며
잠시 쉬어 갈수 있으리라
—「손녀와 발자국」전문
새해를 여는 일월의 초입 시인은 손녀와 남국의 바닷가 모래 위를 걷는다. 큰 발자국에 조그만 발자국을 올려놓고 크기를 재는 일곱 살 손녀딸과 파타야의 해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작가는 대개 작업의 결과물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또는 작업하는 과정에서 얻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국의 바닷가를 상상하며 “절반의 설렘”을 얻었으리라. 바다를 만나고 모래밭을 걸으며 할아버지와 손녀가 느끼는 감정은 좋은 “에너지”로 저장된다. 먼 훗날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가 그리울 때 손녀는 “현재의 기억”을 꺼내보며 이 바다를 다시 만날 것이다. 이것이 삶의 “아름다운 에너지”이다. 세상에 나가 외로이 험난한 산을 오를 때 가슴에 묻어둔 발자국을 꺼내보며 잠시 쉬어갈 것이다. 이 소중한 추억을 어찌 값으로 계산할 수 있으랴. 세상에는 작은 일들이 보석처럼 빛날 때가 있다. 이국의 맛있는 음식과 에메랄드빛 바다와 즐거운 물놀이보다 손잡고 모래밭을 걸었던 사소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 ‘빛’으로 남을 것이다. 집요하게 따라온 파도가 모든 흔적을 지워버려도 가슴에 묻어둔 발자국은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이렇듯 행복은 대단하고 요란한 곳에 살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닌 작은 일상에서 뜻밖에 ‘기쁨’은 발견되는 것이다.「손녀의 선물」역시 할아버지와 손녀의 다정한 관계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팔십까지 버티며 구십까지 살기”를 미션으로 내준 손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칠보산에 오르는 시인은 “시의 늦깎이”이다. 자신의 삶에 가장 아름답고 “완성된 형식”을 선물하는 사람은 곧 ‘자신’이다. 세심한 관찰력으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자세는 시집 전편에 드러난 “인간의 가치”를 발견하는 안목과 “자기 성찰적” 자세와 무관하지 않다.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초대관장을 역임한 시인은 우리 문화재에도 뜨거운 관심과 깊은 애정을 지니고 “목화자단기국” 외 12편을 4부에 수록하였다. 우리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시작(詩作)의 근본이다. 누군가 달은 현재에 출몰하면서도 과거의 것이며 과거에 기원하면서도 현재까지 이어져 있다고 하였다. “시간의 고리”는 그렇게 끊임없이 이어져왔다. 다만 동시대가 아니어서 잊고 있었을 뿐이다. 이두철 시인은 미래가 불확실한 시대에도 매몰되지 않고 꿋꿋하게 자기계발을 해온 시인이다. “삶의 질곡”을 직접 체험한 시인이기에 감동을 동반한 그의 시는 “고백이며 확인”이다. 한 개인의 역사를 서술한 “생의 기록장”이기도 하다. 시의 출발점이 늦었지만 늦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첫 시집 한 권으로 입증한 셈이다. 공간이나 물질의 한 부분에서 생긴 주기적인 진동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주변으로 멀리 퍼져나가듯 이두철 시인은 늘 ‘파동’으로 출렁거린다. 나태함과 안일함에 잠시도 고정된 적 없는 시인은 오늘도 “한 편의 시”처럼 아름다운 삶을 얻기 위해 메모장을 끼고 칠보산에 오를 것이다.
이두철 시인
전남 고창 출생. 2017년 「미래시학」으로 등단
안산문화예술의전당 초대 관장, 안산시청 주민생활지원국장,
안산환경재단 초대 본부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