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1932년)의 주요 내용
라인홀트 니부어 (Reinhold Niebuhr,1892 ~1971)는 신학자이자 기독교 윤리학자이며 교육가이다. 그의 학문적 방법론은 양 극단을 지양하면서 양자의 종합에서 진리를 찾으려는 변증법이다. 이것은 윤리 문제에도 적용된다. 이상만을 추구하는 것도 오류이고 현실에만 집착하는 것도 잘못이다. 이상과 현실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때는 건전한 상태이지만, 그 균형이 깨어져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질 때는 헛된 것에 집착하는 공상 아니면 아주 저열한 속물주의가 된다는 논리이다.
니부어가 보기에 사회 윤리의 난점은, 개인은 도덕적이고 이기적이지 않은 데 반해 그러한 개인들이 모인 집단은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과 어긋남을 어떻게 풀고 조화시킬 것인지가 이 책의 문제 의식이다. 여기에서 니부어는 인간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자유주의나, 반대로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냉소주의에 반대하면서 기독교 사회주의를 택하려는 기본적인 틀을 제시하고 있다.
한 개인은 동정심도 있고 자기를 희생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이타심이 있어서 이성적이고 양심적일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은 자기를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 집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한 국가나 계급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부도덕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 집단의 악을 견제하는 데는 양심에 대한 호소나 설득같은 것은 아무런 효력이 없다. 한 국가나 사회 집단의 악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폭력이나 강제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러한 폭력이나 강제력이 도덕적인 선 (善)을 바탕으로 행사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견제하는 또 다른 폭력과 강제가 사용될 수밖에 없어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러므로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요소가 이러한 폭력이나 강제력과 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간디의 비폭력적 저항 운동이다.
개인의 양심과 국가의 사회적 요구는 그 초점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불가피하다. 양심은 내면 생활의 요구에, 사회적 요구는 사회 생활의 필요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서 쉽게 조화되지 않는다. 그렇다 할지라도 양자의 조화를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출제될 만한 내용
다음 글을 읽고, 종교적 도덕의 의의와 한계, 그리고 개인의 바람직한 도덕적 태도에 대해 논술하시오.
퀘이커 교도들은 정치적 책임을 인정하지만, 영구적인 무저항주의자는 아니다. 즉, 그들은 폭력은 부인하지만 저항은 부인하지 않는다.
이러한 도덕적 전략에서는 사회적 결과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전략이 적어도 개인적인 관계의 영역에서는 구원적인 사회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용서한다고 해서 범죄자가 언제나 회개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해서 언제나 원수의 마음이 온유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좋은 영향을 줄 것이다. 타인의 이익에 맞서 자신의 이익을 주장하지 않는다고 해서 언제나 그가 부끄러움을 느껴 이기적 성격을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끔 그런 일이있을수있다. 사랑과 자애가 항상 완전한 상호 이해를 가져오지는 않지만, 그런 경향은 있다. 특히, 친밀한 인간 관계의 영역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만일 정의(正義)가 확립되기 위해서는 모든 측면에서 이기심과 이기심이 충돌하고 주장과 주장이 맞서야 한다면, 인간 생활은 사실상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실 사랑, 자애, 공평 무사 등과 같은 종교적 가치들은 사회적, 공리적으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물론 종교는 이것들을 내면적이거나 초월적인 입장에서 보려 하겠지만, 이것들이 덕의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진정으로 그것들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 (중략)
그리스도의 가르침조차도 관용적인 태도가 건전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너희가 베푼 만큼 베풂을 입을 것이니라. ��
도덕적 삶의 역설은, 진정한 상호 이해는 의식적인 사랑의 결실로서의 상호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왜냐 하면 사랑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을 때 가장 순수할 수 있고, 가장 순수할 때라야 가장 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호 관계를 맺고 있는 양쪽에 모두 이익을 주는 완전한 상호 이해는 의도적이지 않을때, 즉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이는 사회를 초월한 이상을 추구하는 종교적 도덕의 광기(狂氣)가 어떻게 해서 건전한 사회적 결과를 가져다 주는 지혜가 될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말이다. 바로 같은 이유로 해서 아주 분별력 있는 도덕은 최선의 결과보다는 차선의 결과에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 관계가 친밀한 곳에서는 (그리고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사랑이 효력을 충분하게 발휘하는 곳에서는) 사랑의 방법만이 정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해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에서는 상호 이해를 현명하고 지혜롭게 계산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생활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곳에서는 서로 이해를 공유하지 않을 경우 행복은 파괴되고 만다. 따라서, 주장과 반주장에 의해 정의를 세우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마찰은 양자의 행복을 모두 파괴해 버린다.
상충하는 이해 관계를 면밀히 계산하여 얻어낸 정의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마찬가지로 달성하기 어렵다. 이해 관계는 매우 상호적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를 파악하고 규정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오히려 이렇게 하려는 시도는 인간 정신이 파멸에 이르렀음을 보여 주는 증거에 지나지 않는다.
친밀한 관계는 오직 인간의 정신에 의해서만 확립될 수 있다. 상호 이해의 정신은, 상호 이해에서 파생되어 나온 개인적인 이익에 크게 개의치 않는 정신적 태도에 의해서 유지될 수 있다. 사랑이 정의를 실현하는 원동력이 되려면 정의보다 더 순수한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이기적 충동은 이타적 충동에 비해 훨씬 강력하기 때문에, 이타적 충동에 대해 보통 이상의 강력한 지지를 해 주지 않게 되면, 아무리 선한 사람이 생각해낸 정의도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