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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선생의 학문과 생애(도산 류영렬 지음)
서론
溪山 崔載閏詞兄이 八旬紀念 詩文集을 낸다. 七旬 때 書畵 집을 낸 이후 두 번 채의 큰 행사가 된다. 또한 6.25전쟁발발 육십 주 년 되는 해에 참전 노 병사의 문집을 내게 되니 큰 의미가 있음인 져 .
하늘이 주신 性은 하나라. 배우면 本善을 회복하여 가히 士가 되고 가히 儒가 되거니와 그렇지 아니하면 『崑山의 玉이 아름다우나 갈고 다듬지 않으면 보배가 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국난을 당함에 충성하고 죽백에 그 공을 기록하였으며 물러나서는 생업을 찾아 齊家에 힘쓰면서 先賢의 道를 따라 翰林에 놀고 名을 벼루 가에 숨기어 때때로 筆墨을 벗 삼고 때론 讀書에 힘써 학문과 예를 숭상하며 士道를 걸어왔으니 이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선생은 詩書畵의 三絶을 두루 섭렵한 文士이다. 일찍이 書畵를 공부했고 아울러 詩學도 공부하여 학업이 이미 성취되었다. 文彩와 筆華가 사계에서 칭송을 얻고 있다. 일찍이 1994년 서울특별시 중구신당동에 溪山學院을 개원했다. 어린이들을 모아 啓蒙시킴에 생도가 서실을 메웠고 배우기를 좋아하고 가리키기를 게으르게 하지 않으니 敎學의 相長으로 늦게 孟子의 三樂을 누리고 있다.
내가 계산 형을 만난 것은 한국민족서예가협회 서예대전에서 이였다. 그 후 나의 권유로 한시를 공부했고 때로는 열상시사에서 혹은 성균관한시수련원에서 무릎을 맞대고 토론하며 詩書를 문답했다. 한때 내후임으로 KBS冽上詩社 회장을 지내며 斯文振作과 儒道復興에 힘써왔다.
그는 天稟이 우직하고 온유하며 근면성실하며 전통서법을 존중하는 서예가였다. 내 늘 경외하며 교류하던 중 어느 날 그가 살라온 인생사를 내게 들려주었다. 동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6전쟁을 겪었던 같은 세대로서 그의 참전 이야기는 전쟁드라마를 다시 보는 깊은 감동을 주었다.
소년시절
溪山은 自號요 堂號는 舞鶴山房이라 名은 載潤이니 本貫은 慶州로 文昌侯 孤雲 崔致遠선생 후예이다 先考 達黙과 어머니 密陽朴守臨여사 사이에서 장남으로 1930년(庚午)년7월31일에 태어나니 일제통치를 받던 때이다. 경북청도군각남면일곡동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조부에게서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을 배웠다.
일제의 혹정으로 약탈이 극심했다. 가정형편은 날로 어려워졌고 호구지책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부모님은 부득이 가솔을 이끌고 재령평야가 있는 황해도 옹진군가천면장현리로 이사를 해 소작농으로 가계를 꾸려야 했다. 계산은 부모를 따라 재령평야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浩然之氣를 길렀다. 그러나 조부의 병환이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 와야만 했다.
1946년 대구의 신흥공업주식회사에 입사했고 대구대성중고등학교의 야간부에 입학한다. 晝勞夜學으로 배움의 길을 계속했다.
1949년 晉州姜順伊여사와 결혼했다. 슬하에 2남4여로 6남매의 자녀를 두었다.
해방의 감격도 잠깐
오호라 顯晦가 有數런가. 1945년 8.15일 일제36년 착취와 약탈의 치욕굴레를 벗게 되었다. 그러나 미∙소 양국은 한반도에 영향력을 유지하기위하여 38선을 설정 우리나라를 남과 북으로 갈라놓았다. 이 38선을 분계로 하여 남과 북에는 이념을 달리하는 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기쁨도 잠깐 해방 된지 5년 만인 1950년에 불행하게도 이 땅에는 6.25전쟁이 다시 발발되었다.
6.25전쟁 발발
북한의 김일성집단의 적군은 6월25일 새벽을 틈타 남침 감행했다. 당일 삼팔선이 무너졌다. 전차와 야포, 다발총으로 중무장한 적군의 위세는 도도했다. 국군은 병력이나 장비 면에서 너무 약하여 대적할 수가 없었다. 격전 수일에 아군의 일차, 이차 방어전선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피침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정부는 부산으로 몽진했다. 도로마다 관민의 피란 행렬이 수백리길을 이었다. 파죽지세의 침공에 대전, 김천등지가 피탈되고 힘겹게 낙동강에 방어전선을 구축했다. 조국의 운명이 百尺竿頭에 이르렀고 風前燈火의 頃刻之間위기를 맞았다.
학도병지원 참전
이때 계산은 난국을 보고 앉아서 있을 수 없었다. 계산은 이미 공산주의의 정체를 배워 알고 있었다. 조국의 적화통일만은 막아야 한다. 이는 시급한 일이라
公憤義激하여 붓을 던지고 팔뚝을 걷고 나라를 지키고 저 학도병에 지원하여 참전했다. 군사훈련 도 제대로 받을 새도 없었다. 집총훈련만 받은 채 수일 만에 6사단7연대3대대에 배속되어 新寧, 安康戰鬪에 參戰하여 공비소탕에 공을 세웠다. 이때 연합군이 참전하여 우리국군을 도왔다.
미 29 폭격기 의 융단폭격이 연일 이어졌다.
1950년 8월 15일을 기하여 우방의 육해공군의 막강한 화력등 현대전능력에 힘입어 적의 공세는 꺾이기 시작했고 戰勢는 단시에 逆轉되었다. 또 1950년8월25일 미 해군의 인천상육작전이 성공했다. 우방군의 연합작전으로 서울이 회복되고 연일공습으로 적의 보급로가 차단하였다. 적은 퇴로를 위협받아 산골길로 밤을 이용 후퇴를 거듭했다
압록 강변 초산에 태극기를 세우다.
진격수일에 아군은 삼팔전선을 탈환했다. 승전여세로 북진을 계속 元山, 陽德을 거쳐 鴨綠江 楚山까지 진격하였다. 압록 강변에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승전의 북을 울리며 만세를 불렀다. 지금도 당시의 감격을 잊을 수 없어하는 노병의 두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슬프다. 감격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進駐 2일 만에 후퇴명령이 내려졌다. 조국통일완수의 염원은 楠架之一夢이 되고 말았음인 져. 이때 전항은 연합군의 지상군과 공군 그리고 해병대가 압록강연안을 공격 포성포연이 난무 중국국경을 위협하였다.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개념 아래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이라는 이름으로 대부대를 한반도에 투입하면서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달성하려고, 중공군은 압록강을 도하했다, 한편 소련군도 조선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두만강을 건너 남침을 시작했다. 때는1950년10월19일이다.
중공군참전과 인해전술
중공군의 인해전술은 시작됐다. 우선 압록강 초산(楚山)까지 진출해 주둔한 한국군 6사단의 배후를 차단하면서 우리사단을 완전 포위했고 한국군 2군단(6·7·8사단)은 섬멸적 타격을 입히었다. 우수한 공군력과 장갑차, 포화등 미군의 전력이지만 낮에는 폭격을 피하기 위해 참호나 숲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神出鬼沒하는 박쥐전술에는 고전이었다. 게다가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산악작전에 능한 중공군은 외피는 국방색, 내피는 백색인 그들 특유의 군복은 雪上作戰에 유리한 변장술 때문이었다.
10월 25일 새벽 사방에서 총성이 요란하고 북과 피리소리가 충천 四面楚歌였다. 적의 포화가 아군진지에 작열했다. 연합군은 낮으로 공습을 감행했고 중공군은 밤을 틈타 기습으로 맞섰다. 포성이 진동하고 포연이 하늘을 가렸다. 총탄이 비 오듯 했고 산악의 고된 싸움에 불가항전이었다.
초산의 태극기를 내리고 후퇴
슬프다. 부득이 우리사단은 해산되어 각개행동으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중공군 개입으로 이미 점령한 압록 강변에서 이룬 조국통일의 꿈은 하루아침 산산이 부서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진다.
제1차 공세에서 여유를 갖게 된 중공군 총사령관 임표(林彪)는 30개 사단 약 60만 대군을 집결시키면서 제2차 작전구상에 들어간 반면 그러나 오히려 연합군은 후퇴를 가장 평야지대로 적을 유인한 후 공습포격을 할 계략을 세웠다.
평양부근 순천에서 6사단 재편성
계산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밤낮으로 행군했다. 風饌露宿하며 22일간을 밤낮으로 남하 하였다. 많은 동료들이 포로가 되거나 전사했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평양 부근 순천에서 아군을 만나게 된다. 부대를 재편성한 6사단은 작전상 부득이 다시 후퇴해야만 했다.
하봉암에서 적탄에 우측어깨 관통
후퇴 도중 동두천 下鳳巖에 주둔하였다가 1951년 1월1일 중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교전 중 부상을 당하였다. 적탄이 우측어깨를 관통했다. 천만다행 생명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후퇴명령이 하달되었다. 동료의 응급처치를 받고 부축을 받으며 다친 몸을 이끌고 민간복으로 변신한 채 피란민으로 가장하여 낮에는 산속이요 밤이면 골짝 길을 걸었다. 눈길이 천리요. 하천마다 氷板이라. 설한풍에 동상을 입은 채 어려움을 이기며 연일 남하했다. 보급이 끊기어 걸식으로 허기를 때우며 초근목피로 기근을 면하는 등 취식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당시의 고생을 한 치의 혀로는 다 말하기 어렵다. 이때의 전황을 戰史는 1.4후퇴라 적었다.
폐허의 서울은 유령도시
미아리고개를 넘으니 시민은 보이지 않고 종로를 지남에 빈집과 허물러진 터들이 허다했다. 시가는 문을 닫은 채 빌딩들이 부서지고 인적은 드물었다. 곳곳마다 대파된 전차와 넘어진 차량이 나뒹굴어 전쟁의 상흔은 참혹했다.
간혹 적군의 초병들이 보일뿐 흡사 幽靈都市였다. 용산에 이르니 한강대교는 이미 폭파되었다.
죽음 무릅쓰고 어름위로 강을 건너
때는 마침 혹한으로 강바닥이 결빙되어 있었다. 결빙이 단단한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군에 잡히면 끝장이다. 사생을 걸고 도강을 결심했다. 강가의 정황을 탐색 새벽을 이용하여 도강에 성공했다. 때는 1951년1월9일 새벽이었다.
오직 一念지사는 아군을 만나고저 함뿐이었다. 고군 수백리길을 걸어 오산 부근에 당도 했을 때 설상가상으로 미군의 폭격을 또 당해야만 했다 연일공습으로 중공군을 대파했다. 이 일대에 중공군 대부대가 흰 천으로 위장한 채 많이 숨어있었기에 기관포사격을 했던 것이다. 이때 계산등 전우들도 흰 천 민간복으로 변장을 했던 때였다. 아군 피해도 커 전사자도 많았다. 20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몇 안 되었다. 계산 옹의 구사일생은 신의 도움인 져.
구사일생으로 야전병원 입원치료 후 명예제대
아군을 만나게 되어 위급한 난에서 구조되어 야전 병원에 입원되고 다시 제5육군병원에 후송되어 치료 후 1951년8월 20일 명예제대하게 되었다. 통한지사는 1953년 정전협정으로 휴전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음이다. 그 후 남북대치가 60여성상이 흘러갔으나 지금도 남북통일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이라.
환청환상에 괴로워하는 노병 계산
지금도 노병은 눈을 감으면 전쟁의 소용돌이 장면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살려 달라 애원하던 전우들의 절규는 하나의 幻聽이요 幻想으로 남아 평생을 가지고 가야할 고질인 져.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포화 속을 뚫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으며 적군의 총칼과 맛 써 싸우던 의기는 분명 祖國守護의 忠烈이었다.
80을 맞은 노병 계산 그에게는 중공군 개입으로 눈앞에서 통일조국의 꿈이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분통이 터진다.
痛恨之事는 남북통일은 언제나 이루어질것인가
휴전이 된지 60년이 되었지만 북에 포로로 잡혀 아오지 탄광에서 고생하는 전우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남북대화를 수 십 차례 했지만 포로귀환문제는 거론도 못하는 정치현실을 한탄한다. 어찌 위정자의 노력이 이뿐인가! 또 개탄스러운 일은 남침을 북침 운운하는 좌파의 왜곡된 역사관이다.
歷戰의 勇士는 이미 늙고 몸을 쇠해가고 있지마는 그러나 오로지 6.25전쟁진상은 또렷이 기억하고 하늘이 알고 땅이 증명하지 않는가?
문경탄광에 취직 다시 부산에서 장사를 시작
제대 후 문경탄광에 취직하였으나 그러나 박봉으로 가계유지가 어려웠고 장래성이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별무묘책이 아니던가? 곤란지사를 상의하고자 부산자유시장의 종형을 찾는다. 가사문제와 장래문제를 상의하니 종형은 상업을 권했다. 문구상, 식품상등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문구도매업을 경영 크게 번창하니 일취월장 수 년 만에 성업을 이루었다.
사업부도로 자살기도
好事多魔라 했던가.
收支亂調로 사업이 不渡나기에 이르렀다. 날로 채무가 쌓이고 문전에는 빗을 독촉하는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負債를 감당 할 수 없었다. 때론 자살할 생각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살은 난중지난사라. 그래도 늙으신 부모와 아내 그리고 자녀 등 가솔의 생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사의 기로에서 死를 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두 번 세 번 생각하다 문득 생각을 얻었다.『 적탄이 비 오듯 하는 전쟁 속에서도 홀로 살아 돌아온 대장부가 아니던가? 내 어찌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랴! 어리석게 자살을 생각하랴.』하고 마음을 고쳐먹고 의지를 굳게 해 생업회생에 힘썼다 . 다행이라. 어둠은 가시고 밝음이 돌아 왔다.
서단의 작가 계산
선생은 어려서 할아버지로 부터 한문공부를 한 인연이 있어 향학의 연을 놓지 않고 틈틈이 서예를 익히었다. 1990년도 예술전당 서예과 전문반, 연구반수료 友竹 楊眞泥先生, 杲崗 兪秉利先生, 白山 柳奇坤先生 ,首堂 金鐘國선생 등 서예계 명사서숙을 옮겨가며 전통서법을 익혔다. 그뿐이랴 명가법첩을 스스로 섭렵했다 대소서예전에서 입상했다. 국내외전에 출품도 수차례 하여 서예실력을 인정받았다.
국내외 대소 서예전에 수 십 차 출품했고 수상도 여러 차례 했다. 서예계에서 인정하는 중진작가사 되었다. 지금도 문화원강사 및 학원원장 , 한국민족서예가 협회초대작가로 활약하고 있다.
漢詩壇의 詩人 溪山
그뿐인가 한시공부는 열상시사에 입문하여 농산 정충락 선생지도를 받았고 성균관한시수련원 효산 김중석 선생의 교회를 받아 시학을 성취하였다. 수시 전국한시백일장 및 여러 시회를 周遊하며 詩學과 詩作을 琢磨하였다.
朝鮮朝科擧再現 漢詩白日場에서 入賞하는등 중견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금반 출간되는 문집은 시서화 종합총서이다.
칭송을 감히 부치노니
어려서 배우기를 즐기어 일찍이 가전효인을 학습했고
옛 도를 배워 구함에 자품이 敬과誠을 지향했다.
戰亂을 맞아 出征함에 압록강에 깃발을 날리었고
조국이 풍진에 휩싸일 때 정충으로 보국했네.
때로 書道를 익히어 마침내 筆華가 中堅이요
늦게 詩學으로 從遊하니 드디어 三絶을 이루었다
壽福과 康寧을 누림이여 南極星의 비춤이라
내외가 琴瑟을 고름에 자손이 뜰에서 춤을 추고.
行實이 義路를 따름이여 오직 이름은 벼루 가에 숨겼네.
명예를 구하지 안 해도 그 이름 스스로 세상에 빛나네.
배움을 싫어하지 않음이여 가르침에 정성을 다했도다.
문필로 몸이 빛나니 蘭亭에 모여 교분을 맺네.
슬프다! 남북형제 싸움질이여 어느 날이나 그치려나.
백발 노병의 애린 회포는 맑은 詩詞에 배여 있네.
溪山의 學問과 生涯
序言
上梓于溪山崔在潤詞兄八旬紀念詩文集 而此事也 古稀紀念出版以後再擧事矣歟
又六二五戰爭勃發六十週之年 參戰老兵士溪翁之平生玉稿而發刊于詩書畵文集也 此特有別之意義歟
伏惟 天賦之性一也而本善養之可爲士可爲儒歟 不學則宜崑出之玉美矣而然不及琢磨而器惟不成矣 臨亂國忠 竹帛記功也 應時齊家 唯崇習于先賢之道而閑遊翰林 身隱硯池 時親筆墨 愛日讀書 尙文崇禮 成於一家而此何不稱美哉
先生己修三絶之文士也 早熟書畵而倂工詩學 學業己成而文彩筆華 而斯界稱德矣 設于私塾而時卽一千九百九十四秊春也 開所於中區新堂洞而 懸額曰溪山學園也 傾心啓蒙而生徒滿席 接膝請講 學不厭而敎不倦 敎學相長而晩亨孟子三樂矣
我初交人事溪山兄 而時卽韓國民族書藝家協會書藝大典也 我勸詩學而有時洌上詩社 或成均館漢詩修練院 接膝問答詩書而交流矣 一時我後任歷洌上詩社會長而 斯文振作儒道復興勉勵耳
先生 性卽愚直溫柔而勤勉誠實 尊崇傳統書法之書藝家也 恒尊畏交遊之際而何日聽與先生之人生遍歷之事矣 六.二五戰爭者也 而同族相殘 悲劇之大戰也 我亦同世代而經驗于此戰亂之者 參戰勇士之一事一言與一戰一談 撼動惹起而生生懷憶之映畵一帳矣歟
少年時節
溪山自號堂號舞鶴山房也 名載潤本貫慶州 而文昌侯孤雲崔致遠先生後裔也 生于先考達黙公先妣密陽朴守臨女史之間長子而 時卽一千九百三十年(庚午)年七月三十一日而日帝統治之時也 生于慶北淸道郡角南面日谷洞矣 幼時學於祖父而千字文及明心寶鑑與小學焉
倭帝酷政掠奪無極而難謀於齊家不求於糊口之策 不得已家率移家于黃海道瓮津郡茄川面長峴里 卽載寧平野之近郊也 小作農爲生計 溪山亦隨父母逍遙少年時節遊躍于此載寧平野而修養浩然之氣焉 然傳接遞信於祖父病患危重急報而不得歸鄕也
入社于大邱新興工業株式會社而時卽一千九百四十六年也 倂入學于大邱大成中高等學校夜間部矣 晝社夜校而學業持續也
結婚于晉州姜順伊女史而 時卽一千九百四十九年也 孫有二男四女也
解放後五年
嗚呼顯晦有數矣歟 一千九百四十五年八月十五日也 解放于日帝三十六年之羈縻矣 然美蘇兩國設定于三八線而分點影響力於韓半島 以後此線分境而南北理念相馳政府樹立也 喜情暫時解放之後五年次一千九百五十年勃發于六.二五戰爭耳
六二五戰爭勃發
北金日成集團之敵軍六月二十五日未明奇襲南侵耳 則日崩壞于三八線矣 戰車及野砲多發銃等重武裝敵軍威勢滔滔而賊勢不可抗力矣 國軍兵力與裝備不足不可對敵耳 猥侵三日首都陷落 時急政府移都于釜山也 官民避亂之行列 連道數百里也 破竹之勢敵攻而被脫于大田金泉等地敵之手中耳 我軍以死護國而構築于防禦戰線洛東江也. 祖國運命懸於百尺竿頭 而風前燈火之危境也
學徒兵志願 參戰
公坐不安視祖國危難矣 溪山己學而能知共産主義正體也 祖國之赤化統一防禦耶而時急之事也 公憤義激 斥筆奮臂 志願學兵也 練兵習弓數日 配屬於六師團三聯隊而參戰於慶北新寧安康戰鬪耳 此卽 聯合軍參戰而助我軍也 美二十九爆擊機絨緞爆擊連日
而賴被于友邦陸海空火力等莫强現代戰能力 而戰勢短時易轉之也 時則一千九百五十年八月十五日也 此際美海軍仁川上陸作戰成功而時則一千九百五十年八月二十五日也 賴此友軍聯合作戰 漢城回復 是以遮斷于敵軍退路而 此後敵後退連日也而 敵軍夜行山路涉川越山敗退已耳
鴨綠江邊楚山進擊 太極旗高揚萬歲
進擊數日再奪還于三八線也 勝戰餘勢北進元山寧德而遂點領于鴨綠江沿岸楚山也
揭揚國旗勝戰打鼓萬歲高唱矣 至今不忘當時感激矣 老兵之兩眼流淚也
嗟 感激瞬間已耳 進駐二日之際 下達于後退命令也 祖國統一大業完遂一朝之南柯一夢哉 此際 聯合軍之空軍與海兵隊陸空爆擊于鴨綠江沿岸一帶 而砲聲砲煙亂舞于國境而被侵憂慮中國也 毛澤東脣亡齒寒之槪念下而 抗美援朝保家衛國 護國之目標 欲達二策矣 中國人民支援軍名分大部隊出征而 渡于鴨綠江也 又一便蘇聯軍援朝名分渡河豆滿江進南也 時則一千九百五十年十月十九日也
中共軍參戰 人海戰術
中共軍人海戰術之作戰開始也 一次鴨綠江楚山進出韓國軍六師團背後遮斷包圍也 此時被禍于二軍團則六,七,八師團兵力之殲滅的被擊矣 美軍之優秀空軍力 戰車 裝甲車 曲射砲等 現代軍事力不可對敵也 苦難之事也者 而晝遁樹林與或塹壕而乘夜神出鬼沒之夜鼠戰術也 又加增難事山岳作戰能術也 又不免苦戰之由 外綠內白之軍服 時用雪上之變裝術也
十月二十五日未明銃聲擾亂于四面楚歌 照明彈飛如流星天 而鼓笛破曉而砲火
炸壘也 友軍乘晝陸空襲 而敵反利夜奇襲對我與 砲聲振動 爆烟蔽空 飛彈如雨 山岳苦戰 不可對敵也
楚山太極旗 撤收後退
嗟 仍因遂下達於師團解體而各個脫出包圍網之令也 如此中共軍介入 旣占領鴨綠江邊之成統一之蒙 哀惜一日破散矣 至今難忘於憤痛之事 吐鬱憤耳
一次攻勢勝戰餘裕裏 中共軍總司令官林彪 三十介師團六十萬大軍渡江集結而第二次戰略構想也 然猶聯合軍敵誘引於平野地帶而假僞後退也 此空襲砲擊之計略也
平壤附近 順天集結 六師團 再編成
溪山兵士越山涉川晝夜步行而風餐露宿南下二十二日之頃到于平安南道順天 而此際捕虜多數戰死數百矣 生還歸隊天佑神助之幸也 再編師團整備戰列而 作戰上不得已再後退 而道中京畿道東頭川下鳳庵駐屯時 又被于奇襲敵軍矣 哀惜也
下鳳巖駐屯時 敵彈 右側肩貫通
被禍戰傷而流彈右肩部貫通矣 一千九百五十一年一月一日也 然再下達後退之命耶 應急處置而傷身依杖 變裝民服 或假亂民 夜谷晝山 雪路千里 氷川萬野 寒風凍傷 刻苦克難 連日南下 補給旣絶 乞食解饑 根皮免饉 取食自處 當時辛苦 寸舌難言也 而一筆難述歟 戰史命名於當時戰況稱一.四後退焉
廢墟漢陽 恰似幽靈都市
到于彌阿里難見市民 過于鐘路空家廢墟許多 而撤市崩廈人跡鮮矣 啻大破戰車及軍車輛倒壞處處 或見敵軍哨兵 恰似幽靈都市 至于龍山而旣爆破漢江橋後也 時的酷寒而結氷江面 結氷之固 目測難量也 敵手被捕 萬事終止 死生懸天 死決渡江矣 探索江情 乘時早曉而渡河成功作戰 時卽一千九百五十一년一月九日寅時也
死生懸天 決死渡江
一念之事欲逢我軍也 孤軍苦行數百里 當到五山之時 猶雪上加霜 被爆于美軍空襲矣 連日空襲 敵陣大破 而此處駐屯于中共軍大部隊僞裝白衣隱遁雪原也 此時同僚部隊員戰死者多數矣 而然生者鮮耳 公之幸也九死一生救命神助與哉
野戰病院 入院後 名譽除隊
幸得逢我軍而救助危亂 入院于陸軍野戰病院而移送于釜山第五陸軍病院矣 治療後 再轉屬於三八九援護隊而名譽除隊也 時卽一千九百五十一年八月二十日也 痛恨之事也而一千九百五十三年停戰協定締結 以後南北對峙六十餘星霜經過 而然于今未成南北統一也
至今老兵請眠之中 生生回憶於熾烈戰爭狀況如映畵一場面矣 哀請戰友生願之絶叫而尙餘耳目邊之幻聽與幻像也 平生同伴之痼疾歟 不顧如雨銃彈裡而一進一退 不顧一死見危授命之義 唯祖國守護之忠烈與
痛恨之事 兄弟鬩墻何日終止
耋壽之年老兵溪山 憤痛之事於中共軍介入祖國統一之夢破也 翅今休戰六十星霜旣流也 痛恨之事尙在北抑留我軍捕虜未歸還 而阿吾地炭鑛酷勞之苦矣 南北對話數十次已而不得歸還之協商也 盍爲政者努力若此歟 又慨歎之事南侵反北侵云云之左派歪曲史觀焉 歷戰勇士己老 然惟憶六二五戰爭眞相而天認地證歟
釜山自由市場商業經營
除隊後入社于 聞慶炭鑛事業所矣 然以薄俸難計八名家率糊口生策也又難望將來之事也 然別無妙策焉 欲議困難之事 而訪釜山從兄之宅矣 相議家事及將來問題而從兄聽之勸誘試圖商業也 食品商又文具商等轉業數次 唯文具都賣之商業盛盛繁昌耳 好況月將年增而然好事多魔耶
事業不渡自殺企圖
輒收支亂調而遂至事業不渡歟 仍故日尤積債而辨濟督促門前騷亂矣 然難堪負債 不能謀免而終數思自殺 然自殺難之難事 深思家率之生計 是非易擇生死之重大事 再考三慮中 忽覺敵彈如雨中我獨存生還之大丈夫歟 我何不忍苦耶 愚思自殺乎 斥邪衛正而更心固志勉勵生業矣 幸得消晦歸顯之兆矣 溪山翁誠實與正直再起勞力 周圍之協助 維持于營業而更心固志勉勵生業矣 幸得 消晦歸顯之祚矣
書藝家 溪山
先生幼時自祖父漢學受敎之緣而恒懷向學之心矣 乘暇勉勵書藝工夫耳 一千九百九十年乃進藝術殿堂書藝課專門班,硏究班修了 以後轉學書藝界名師書塾而 友竹楊眞泥先生,杲崗兪秉利先生,白山柳奇坤先生,首堂金鐘國先生等矣 正統書道工夫已矣 涉獵於多數名家書帖 而數十次出品于大小書藝展而 受賞多回也 而國際展出品數次也 而國內外書道實力認定矣 仍得世稱中堅作家也 現今活躍之歷 而文化院講師及學院院長外 韓國民族書藝家協會招待作家也
先生幼時漢學祖父而一便乘暇時時勉勵書藝工夫耳 乃進藝術殿堂書藝課專門班,
漢詩壇 詩人 溪山
啻漢詩學入門洌上詩社 修學於農山鄭充洛先生也 而敎誨於成均館漢詩修練院曉山金重錫院長矣 周遊全國漢詩白日場及多數詩會而詩作詩學琢磨也 朝鮮朝科擧再現漢詩白日場入賞 外全國白日場攀桂等入賞數多 而詩作數百篇中堅作家也 今般出刊之著書者也 詩書畵綜合叢書矣
稱辭敢添曰
幼而好學兮 早習庭傳 以求古道兮 資性敬誠
行由義路兮 名藏硯邊 不求其譽兮 自有其名
臨亂出征兮 鴨江旗騙 風塵祖國兮 竭力忠貞
時習書道兮 筆華中堅 晩從詩學兮 三絶遂成
壽福康寧兮 南星照然 瑤琴奏室兮 寶樹舞庭
學而不厭兮 敎而唯惓 以文潤身兮 會契蘭亭
嗚呼鬩墻兮 何日終宣 老兵之懷兮 淸詞含情
聽泉齋下散人 道山 柳暎烈 謹撰
(成均館典學.韓國漢詩協會理事.前洌上詩社會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