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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임청각 고성이씨(철성이씨) 입향 600주년 기념 책을 보다가 이순신이란 글자가 눈에 띄어 잠시 봤습니다.매운 이정희라는 분의 자료입니다.
매운 이정희는 대한광복군 총사령 고헌 박상진,백산 안희제와 광복투쟁을 함께했고 광복후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1917년 경주우편마차를 습격한 사건때도 동참했군요.
고헌 박상진과 매운 이정희는 사돈이됩니다.청도군 명대마을도 언제 답사를 가야겠군요.아휴 머리야!
수백년간 이순신을 흠모한 한시가 수백편이 있을 것 같습니다. 통영과 남해,여수는 전국에서 이러한 자료들을 모아서 책을 내볼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한번 예산을 만들어서 해볼까합니다.
청와대 비서관을 하면 머하노?예천중학교 나온 내보다 므식한 걸...
니들 중학교는 나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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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고성이시 대종회에서 펌했습니다.
http://www.gosunglee.com/g5/bbs/board.php?bo_table=706&wr_i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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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지사 매운 이정희(1881~1955, 27세 참판공파 )
1. 매운의사(梅雲義士) 李公 傳 : 박순석 근지
公의 휘는 정희요 字는 내길(乃吉)이며 호를 매운이라 하고 고성이씨 사인(士人) 의선의 子로서 양헌공 용헌 휘 원(原)의 후예이다.
서기 1881(신사)년 1월22일 경북 칠곡군 인동면 신곡 외가에서 출생하여 외조 장의원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향리인 청도군 매전면 명대에서 성장하였다. 8세때 이미 시서에 조예가 있어 명성이 높았으며 시대조류에 적응코저 대구 광명학교에서 신학을 수학하여 신문명을 흡수하고 개화사상에 대한 일가견을 정립하고 자주 독립정신을 함양한 바 있다. (주, 7)
탁월한 식견과 포부를 가지고 관후인자한 성품으로서 동지간의 융화와 단합에 독특한 역량을 발휘하였으며 지조가 결백 견고함으로서 일단 목적한 바는 만난을 무릅쓰며 여진(勵進)하는 굳은 투지와 정열로서 기필코 관철하는 성격이었다.(주, 7)
국난을 당하여 결사항쟁하고 불의에 시종항거하는 정의감은 병이(秉彛)에 속하는 바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불구가사하고 일신의 안위를 초월하여 솔선수범, 살신성인하는 장엄한 결의와 처참한 투쟁이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며 그 투철한 정신은 만인의 사표로서 길이 추앙되어야 할 일이고 또 민족정기를 부식한 선열들의 위업은 그 성과의 대소를 막론하고 높이 현양되어야 할 것이며 그 행적은 사소한 일이라도 반드시 기록되어 후세에 전송케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자료의 멸실은 한 국가 한 민족의 크나큰 손실이며 비애로서 이를 빠짐없이 발굴하고 소명하여 후세에 전함은 우리들의 막중한 책무가 아닐 수 없다.
여기 매운 이선생의 사전을 찬하여 널리 세상에 공표코저 함은 비단 일개인의 으적(懿蹟)을 구명(鬮明)함에 그치지 않고 유구한 우리의 역사를 정확하고 빛나게 하자는데 의의가 있으며 아울러 충효사상의 창달과 호국정신의 진작에 일조가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이제 公의 25주기를 맞이하여 평소 문견한 바 가언선행을 일일이 거매(擧枚)할 수는 없으나 혁혁한 광복 투쟁사만은 고증 연대순으로 정리기록하여 그 단성의 일단이나마 소개함으로 동향후생으로서의 책임을 마감코자 한다.
1905년(을사)
을사보호조약을 전후하여 국정은 날로 문란하여지고 외세의 침범은 점점 노골화되어 국세는 쇠약의 극에 달하여 풍전 등화격인 국운을 만회하고 자주독립을 사수코저하는 비창한 결의는 이미 이때에 다짐되어 각종 정보수집에 골몰한 바 있다.
1910년(경술)
한일합병의 비보를 접하여 비통한 나머지 족친선배인 석주 이상용(후에 임정 초대 국무령)을 찾아 조국 주권회복과 애국사상고취 및 청소년교육을 논의하고 고헌 박상진과 조국광복을 혈맹한 후 전국을 전전하면서 동지를 규합하다. (주, 7)
1912년(임자)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방편으로 박상진과 무역상을 위장한 상덕태 상회를 대구에 창설하고 만주, 상해에 지점을 두어 연락기관으로 하다.
1913년(계축)
왜적의 침략이 시작된 이래 각지에서 의기를 들고 결사봉기한 의병들의 항전이 도처에서 참패하고 무통일하게 분산 전개중이던「게리라전」마저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公은 동지들과 숙의한 결과 이를 조직화 하는 한편 윤치오와 한미흥업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염출하다.
1914년(갑인)
광복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채기중, 우재룡, 한훈과 접선하는 한편 이석홍, 양한위, 유진태, 권영목, 이병찬외 諸여러 동지를 규합하는 일방 안희제가 개설한 백산상회를 도와 독립운동을 지원케 하다.
1915년(을유)
8월 25일(음,7월15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생존의병 및 혁명동지 이백수십인이 집회하여 항일 비밀 결사대인 대한 광복회를 군대식으로 결성하고 박상진을 총사령에 추대, 오인 등은 나라의 독립은 물론 일생에 독립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손손에 이어 불공대천의 구적 일본을 완전 구축할 때까지 절대불변하며 일심육력(戮力)할 것을 천지신명에 맹서하고 여하히 선언함과 동시 실천방법과 부서를 정하다.(주 5,6,7)
선 언
天經地義 三才參一 惟我光復 以適來裔
仁爲安宅 非比萬物 爲國作福 以鼓同族 (註,10)
실 천 방 법
一. 부호의 의연과 왜적이 불법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기 위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一. 남북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一. 분산된 의병, 해산군인과 만주주민 및 국내 청장년을 소집 훈련한다.
一. 중, 로 양국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一. 본회의 군사행동 집회왕래 등 일절의 연락본부를 상덕태 상회에 두고 한-만 각지와 북경 및 상해에 지점 또는 여관 광업소를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一. 왜적고관과 한인 반역자를 처단하는 행형부를 둔다.
一. 무력이 완비되면 왜적 섬멸전을 단행 최후목적을 달성한다.
부 서
(고 문) 이 종 하 유 인 식 노 상 목 윤 충 하 이 석 홍
김 후 병 권 계 상 이 목 호 유 진 태 이 정 희
이 태 대 홍 주 일 김 진 만 이 정 찬 박 노 면
조 승 태 박 민 동 박 봉 래 이 기 선 이 병 기
정 순 영 윤 상 태 박 선 양 박 성 주 양 제 안
박 하 제
(총사령) 박 상 진 (부사령) 이 석 대
(지 휘) 우 재 룡 (참 모) 권 영 만 한 훈
(조 직) 이 정 희 김 용 순 김 상 옥 임 세 규 김 진 만
(재 무) 최 준
(선 전) 김 경 태 권 국 필 강 병 수 경 창 순 장 두 환
양 한 위 정 재 목 최 현 철 임 창 현 김 교 주
이 병 화 조 운 환 채 치 중 채 경 문 배 상 철
정 운 철 최 준 명 김 진 우 최 병 규 이 세 영
박 태 규 이 정 회 박 남 현
(지부장) 경기도 - 김 선 호 황해도 - 이 해 량 강원도 - 김 동 호
평안도 - 조 현 균 경상도 - 채 기 중 충청도 - 김 한 종
전라도 - 이 병 찬 함경도 - 최 봉 주
만 주 지 구
(총사령) 이 상 희(상용). (부사령) 김 동 삼
(지 휘) 김 대 낙 (참 모) 이 성 열
〃 손 중 현(진현) 〃 박 경 종
〃 이 진 룡 〃 권 영 목
(재 무) 황 만 영 〃 손 일 민
(선 전) 이 봉 희 김 좌 진 권 유 현
상 해 지 구
(군무총장) 노 백 린 (후에 임정 육군총장)
(주비사령) 심 영 택 (부사령) 안 종 운
(참 모) 이 민 식 (재 무) 여 준 현
(지 통) 장 응 규 (지 방) 소 진 형
이상과 여히 수회에 걸쳐 조직 하다.(주, 5)
희 생 자 명 단
(사 형) 박 상 진 임 세 규 김 경 태 강 병 수 채 기 중 김 한 종
(총 살) 이 석 대 김 용 순 정 재 목 김 상 옥 (전상자진)
(무기형) 우 재 룡 (옥 사) 장 두 환 김 동 삼
(십오년) 김 진 만 유 창 순 (십사년) 한 훈
(십년형) 정 운 철 (칠년형) 권 영 만 김 진 우
(육년형) 안 종 운 (오년형) 최 병 규 이 병 찬
(사년형) 장 응 규 소 진 형
(삼년형) 이 정 희 최 준 명 이 민 식 김 좌 진
(이년형) 여 준 현 (육개월) 심 영 택 홍 주 일
(망 명) 권 국 필 이 상 용 김 대 락 이 진 용 손 일 민
김 좌 진 노 백 린 (주, 5)
광 복 회
광복회는 무통一한「게리라전」을 조직적인 통일전선으로 결속한 민족항쟁 결사로서 합병이후 전국을 망라한 최대최초의 단체이다.
경북 영주에서 채기중을 중심으로 한 광복단은 이에 합류하였으며 팔도에 지부를 두고 만주에는 이석대가 전담하여 항일운동을 전개 중 노백린, 김좌진, 윤홍중, 신두현, 김정호, 권태진, 임병간, 윤형중, 김홍두, 윤치성, 이현, 박성태, 기명섭 등 제 동지가 참가하여 합류하니 회세(會勢)가 확장되어 회원수는 육백여명에 달했고, 노백린이 십여명 동지와 상해로 향발하고 김좌진 등 여러 동지는 만주에 진입 항전 중 부사령 이석대가 전사하자 후속전담하고 항쟁하다.
한편 이상용 김대락 이성열 박경종 등 제 동지의 지도와 황만영의 의연으로 만주 반석현에 군관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그 규모가 확대되자 길림성 신흥촌에 분교가 설립되고 이분교가 승격되어 신흥무관학교가 되다.
이에 힘을 얻어 국내 청장년층을 보구상으로 가장입대 시킴으로서 대성과를 거두게 되다.
1917년 총사령 박상진이 왜경에 체포되고 삼백여회원이 검속되어 국내활동은 잠시 정체되었으나 이어3.1.운동이 일어나고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니 산재되었던 회원의 활동이 다시 전개되고 일차로 손보현, 2차로 한훈을 상해임시정부에 파견 격려하는 한편 영국인 이육양행을 통하여 권총 사십정, 병탄환 이천발, 폭탄 십관을 구입 국내로 반입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광복군의 항일전, 중-일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을 거쳐 우리 민족대망의 광복대업에 성취를 보다. (주, 5, 6)
1916년(병진)
청도군청 신축기성회장에 피선되는 일방 청도청년회장에 추대되어 이를 표방하여 청장년 애국사상 계몽과 각지를 편력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한편 군자금 염출과 연락 집회장소로서 경주에 광업소를 개설하고 고헌 박상진과 인연을 맺어 사돈이 되다.
1917년(정사)
경주, 영일, 영덕 3군 세금을 왜적이 강징하여 대구로 수송한다는 정보를 탐지하여 총사령 박상진과 상의 우재룡, 권영만을 집행위원으로 선정, 11월 7일 경주 광명리 노상에서 습격 압수하여 금8천7백원을 재무 최준에게 보관케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다. (註, 5, 6)
박상진과 상해로 망명을 기도하던중 그의 생모 정부인 이씨의 별세로 장례를 마치고 떠나려다가 장례 전일인 12월21일 박상진이 광복회 사건으로 왜경에 피체 됨으로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뒤따라 公도 체포되다.(주, 5)
광 복 회 사 건
광복회사건은 전 경상북도 관찰사 장승원을 규탄하여 “왈유광복천인소 부성차대죄계아 동포” 성계인 광복회원 이라는 격문을 선포함과 동시에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를 사살하고 안동부호 이종국 등을 불러 독립운동자금 조로 244원을 강징한 사건으로서 전기 장승원은 일찍 박상진이 사사한 왕산 허위가 참정으로 재임시 후일 거사시에 의연금 십만원을 제공한다는 조건하에 허위의 천거로써 관찰사가 되었으나, 왕산 의거시에 배신 위약하였고, 탐관오리로서 영세서민을 잔학착취하고 왕산 순사 후 그 형 방산 허훈이 망제의 유지를 계승 설욕코저하자 밀고 저해하는 등 반역행위를 자행함으로 처단하고, 박용하는 왜정의 간악한 첩자인 동시에 악질 부역관리로서 민중의 증오대상이며 또 독립운동을 항시 밀고하였으므로 처단한 것이다.
광복회 활동은 종횡무진으로 질풍과도같이 신속함으로서 왜경이 그 근원을 찾지 못함에 혈안이 되어있던 중, 천안 이종국의 밀고와 서산 우체국의 우연한 우편물 검열에서 단서를 잡아 전모가 탄로되여 전격적으로 독립투사 3백여명이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투옥된 대옥사이다.
그 후 약2년에 가까운 기간동안 혹독한 고문에 의한 취조를 받은 후 아래 40명이 공주지방법원 예심판사 심전자치에 의하여 사형7명, 체형25명, 면소8명으로 언도 즉시 항고하여 대구서 복심법원 형사1부로 이송되다. (주, 1,5,6)
박 상 진 35세 경북경주 채 기 중 46세 경북영주
김 한 종 35세 충남예산 장 두 환 25세 충남천안
유 창 순 38세 충남천안 임 세 규 39세 경북영주
권 상 석 52세 충남천안 김 경 태 40세 충남청양
김 재 창 31세 경기인천 김 재 풍 43세 충남예산
조 종 철 27세 충남천안 손 기 찬 33세 경북칠곡
강 석 주 52세 충남아산 성 문 영 32세 충남아산
조 용 필 52세 경북예천 이 재 덕 30세 경기인천
김 상 준 32세 충남예산 정 태 복 31세 충남예산
황 학 성 35세 경기인천 김 동 호 42세 강원삼척
윤 창 하 35세 경북예천 정 진 화 45세 경북예천
유 중 협 38세 충남천안 김 원 묵 27세 충남예산
김 재 철 46세 충남예산 성 달 영 46세 충남천안
김 재 정 57세 충남예산 기 재 진 48세 충남청양
홍 현 주 37세 충남청양 조 재 하 46세 경북영주
정 우 풍 40세 충남아산 이 정 희 38세 경북청도
권 준 흥 38세 경북안동 최 준 35세 경북경주
김 노 경 35세 경 성 최 면 식 39세 경 성
이 병 호 32세 전남보성 신 양 춘 30세 충북괴산
정 운 한 41세 충북괴산 강 순 필 37세 경북봉화 이상(주, 8)
1918년(무오)
公은 광복회 사건으로 1月24일 송국되어 공주감옥에서 8개月 24일간의 옥고를 겪고 예심종결 면소로서 출옥즉시 박호진으로 하여금 대구에서 계림여관을 경영케하고 박상진의 생부 전승지 박시규와 함께 동지들의 구호운동을 전개하면서 뒷바라지를 하다.
1919년(기미)
박시규를 수행하여 투옥된 동지들의 구명 운동차 도일하여 일본정계 거물인 두산만 표손일 중야정강 말영절 정상아이 등을 만나 교섭 후 귀국하다.
1920년(경신)
이상재 김진태 윤치소가 주간하는 조선교육회 조직에 참여함과 동시 향리에 온명 학원(현재 매전초등학교)을 설립하고 동 원장에 취임하여 교사 급여등을 사비로 지급하면서 후진 청소년을 교육시키다.
1921년(신유)
독립운동의 발판으로 경상북도 초대 평의원에 입후보 피선되어 일본시찰을 빙자하여 재차도일 소위 일본삼대인맥인 자유주의파 견양의 임의륙박사 국수주의파인 낭인두목 두산만 말영절 내전양평 수영원 중야만태랑 갈생능구와 관료파인 관옥정삼랑 표손일 유길충일 등을 비롯하여 언론인인 중야정강 학계의 중산구사랑, 사궁헌장 양 박사 실업인 정상아이등을 순방하고 광복회사건에 대하여 식민지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당위성과 정치범에 대한 극형의 부당성을 통론 설득함과 동시 재야여론을 환기시켜 일본 식자층과 언론계의 상당한 이해와 지원을 얻어 필사적 노력으로 동분서주 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사법권에 대한 불간섭 원칙이라는 구실하에 특사를 받지 못하고 허사가 되다. 만 4년에 걸친 예심복심의 종결로서 광복회사건은 1920년 9월11일 대구복심법원 재판장 前澤成美 주심으로 배석판사 2명 합의로서 사형 5명, 체형과 태형 20명, 무죄 7명으로 언도되어 1921년 8월11일 박상진 김한종은 대구 감옥에서, 채기중 임세규 김경태는 경성 서대문 감옥에서 각각 사형이 집행되고 장두환은 옥사하여 선화하니 비분을 참지 못하고 복수를 다짐하다.(주, 4,9)
1922년(임술)
경상북도 평의원으로 재임하면서 이상용 노백린과 계속 비밀연락을 취하고 지하운동을 전개 중 의용단 사건으로 피체 투옥되어 1년 2개월간 미결로 계류되었다가 대구지방법원 예심에 기소되다.(주, 4,7,9)
의 용 단 사 건
의용단 사건은 경상남,북도를 중심으로 배일지사들을 규합한 비밀결사로서 이상용 노백린 김응섭과 연락을 취하면서 활동한 대군자금사건이다.
백 여명이 체포되어 다음 42명이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다.
이 상 용 65 세 군정서총재 (미체포는서류송치)
노 백 린 50 세 군무국장 이 응 수 42 세
김 시 현 41 세 안동 박 호 진 35 세 여관업
이 정 희 42 세 도평의원 신 태 식 60 세 경북단장
김 찬 규 61 세 경남단장 정 원 영 51 세 교사
김 홍 기 45 세 창녕 김 응 섭 45 세 안동(길림성)
엄 주 련 60 세 문경 김 용 환 36 세 안동
이 대 기 35 세 안동 장 진 우 55 세 예천
이 종 국 35 세 안동(대구) 김 재 명 56 세 상주
김 병 동 65 세 예천 서 상 업 50 세 보은
손 영 기 30 세 예천 한 양 이 50 세 문경, 교사
김 은 묵 30 세 선산 장 택 원 40 세 칠곡
곽 규 36 세 서산(대구) 정 은 상 33 세 거창
김 돈 희 50 세 창녕 김 동 진 32 세 경성
이 여 주(女) 31 세 경성(길림성), 유 재 욱 42 세 영동
김 용 운 35 세 경성 김 홍 석 36 세 합천
양 한 위 40 세 대구 허 종 40 세 대서겸, 운수업
장 세 명 28 세 문경 이 명 균 59 세 김천
김 병 록 30 세 예천 김 병 표 40 세 예천
손 성 운 60 세 예천 김 회 문 50 세 예천
김 규 헌 37 세 상주 이상(주, 1,9)
1923년(계해)
12월12일 대구지방법원 예심판사 산구정신에 의하여 公은 체형 3년의 언도를 받고 재차 안재홍과 함께 옥고를 겪었으며 복역중에도 왜경은 추가로 장기투옥코저 허위사실까지 조작하여 재삼 추가송치하는 일방 조정식 고모, 문모등 밀정을 사주하여 악랄한 수법으로 거짓 사건을 날조 고소케 하여 5회나 추가 송치 하였으나 그 부분은 증거 불충분으로 인하여 면소되다.(주, 2, 3)
1926년(병인)
3년 8개월 간 옥고를 겪고 출옥한 후도 계속하여 동지를 찾아 배일운동을 획책하며 미국인 원한경을 만나 국제정세를 탐지하고 재거를 기도하던 중 왜경 고등계의 요시찰 인물로 수차의 가택수색과 예비검속을 당하다.(주, 7)
1932년(임신)
족친선배인 석주 이상용이 망국의 한을 품고 광복의 환희를 몸소 보지못하고 북만주 이역땅에서 서거하자 부음에 접한 公은 그 비통을 참지 못하여 시로서 애도하다.(주, 10)
1937년(정축)
무기형으로 복역 중이던 동지 우재룡(일명 이견)이 석방 되었으므로 권영만과 함께 심방 상봉하여 시국을 개탄하면서 대책을 강구 하였으나 광복회원의 국내활동은 지리멸렬되어 인부족 역부족으로 소강상태에 머무르다.
우 재 용 사 건 (일명 이견)
우재룡은 산남의병장 정용기 부대의 선봉장으로 활약중 왜적에게 체포돠어 무기형으로 복역 중 한일합방특사로서 석방돠어 광복회에 가담한 인물로 광복회 사건당시 적의 포위망을 교묘하게 탈출하여 경기 호서 호남 영남 만주등지를 잠행 활약중에 1920年 4月 반역도의 밀고에 依하여 군산에서 피체되어 다시 무기형을 선고받아 재차 복역 중 17년간의 옥고를 치루고 1937년 출옥하니 시년이 54세였다.(주, 7)
1945년(을유)
8월15일 드디어 고대하던 해방을 맞이하여 외손 박문태(고헌 박상진의 손)를 영남지방에 파송하여 우재룡을 상경케하고 동지 권영만과 3人이 감격의 대좌를 하고 포옹낙루하면서 이미 선화한 동지들의 명복을 빌고 합의하여 명륜동 자택에 광복회 간판을 다시 걸고 최후봉사를 다짐한 후 한훈, 이석홍, 이병찬, 양한위, 안종운 등 생존동지들에게 연락 가담케 하다.
公은 광복회대표 및 영남유림의 대표로서 임시정부 지지를 선언하고 반공 반탁운동을 전개하여 조국재건에 헌신하다. (주, 5,10)
1946년(병술) 건의서 제출
근일 항간에 빈번하게 유포되는 좌우합작에 대하야 일언코저 합니다. 대한독립 촉성국민회는 우리 삼천만 총의인동시 총정신적 총육체적 합체이며 총의로 된 단체라 우만도 아니며 좌만도 아닌 좌우총체인 이상 엄연한 우리 삼천만총체가 아닙니까? 그러함을 불구하고 또 새삼스럽게 무슨 좌우합작 해야만 된다고 그러면 금번 좌우 그 분자는 향일국민삼천만대회이외 이국인과 합작인지 또는 향일국민총회가 처위란 말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재 지방적으로 보면 삼천만이 일치하게 대한독립촉성국민대회로 총집결된 사실을 무시하고 어떤좌와 어떤 우가 있어서 합작이란 무슨 이유입니까? 그러면 없는 가운데라도 기어코 불순반동분자를 찾아다 끼워 넣어서 어서 독립을 방해하고 지연시키고 정권쟁탈이나 조장시키면 쾌어심할 제공의 심소가 아닌가? 라고 의심치 않을 수 없습니다. 나날이 심각한 것은 우리 동포의 도탄이며 시시갈망은 우리 국가완전 독립정부 수립인데 세계 공약하에 수립할 우리정부, 우리국민총회 내버리고 또 무슨 좌우합작으로 무슨방해 무슨모략에 빠져 지연될런지 알 수 없어서 수언을 제상하오니 일일일시라도 좌우합작 그만두고 급히 기성된 대한임시정부 그대로 정부나 건설하여 시급한 이 민족의 도탄을 구하심에 전력하시는 것이 가장 우리민의에 적합하고 국제적으로도 합리합법이라고 믿습니다.
단기4279(1946)년 6월 13일
한성시 동사헌정 48의 30
김 구 주석 귀하 광복회 회 장 이 정 희
광복회 간사장 안 종 운
1947년(정해)
남로당에서 이모를 심야에 밀파하여 김일성의 최고훈장수여 운운의 감언이설로서 남로당 가입과 북조선인민 공화국 지지를 종용하였으나 公은 이에 현혹됨이 없이 단호히 거절 역설득하고 자수 전향케하여 민족운동에 가담케 하다.
1949년(기축)
반민특위가 설치되어 간악한 일제고관들과 잔인무도한 고등경찰관 헌병보조원 등등 민족 반역자를 처단하기 위한 심문에 증언하게 되자 公은 그들의 죄상은 가증스러우나 일정의 강점하에 도생을 위한 불가피한 사정도 있을 것이고 강압에 못이겨 본의아니게 죄과를 범한 자도 있을 것인즉 조국이 광복된 마당에 인재의 필요함이 그 어느 때 보다 절실한 실정에 비추어 개과천선하여 건국대열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줌이 가하다는 은수를 초월한 관대한 아량으로 의견을 개진함에 당자는 울면서 뉘우치고 재생하기를 맹서하였으며 심문하던 검찰관과 그 가족 친지들을 크게 감동케 하여 눈물로 얼룩지게 하다.
1954년(갑오)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기념비가 건립되자 노구를 이끌고 친히 참배하고 시를지어 감회를 풀다.(주, 10)
1955년(을미)
6월2일 파란만장의 생애를 망국의 한을 품고 오직 조국광복을 위하여 진심갈력하고 강토의 반쪽이나마 건국을 목격하고 천리타향인 서울우사에서 서거하니 향년 75세였다.
6월9일 뜻있는 사람들의 진정한 조상을 받으며 고산에 반츤하여 명대 월봉산 선영하에 안장하다.
1968년(무신)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公의 일생을 통한 광복혈투의 위공을 현양하기 위하여 조국광복 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증하다.
1977년(정사)
정부에서는 다시 건국 공로포장을 추정하여 公의 혁혁한 건국공로를 포상하다.
公은 영남의 명가인 명대이문의 출신으로서 그 출생 환경이 유복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신의 안일을 초개같이 버리고 전 생애를 두고 오직 조국광복에 헌신하였으니 그 숭고한 정신과 장엄한 실천이야말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며 외유내강한 천품이 전형적 지사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평생을 순교자와도 같은 자세로서 한번도 변절함이 없이 시종일관 독립운동에만 지성을 다 하였다고 확신한다.
오호라! 公의 서거 후 이미 25년이 되니 평일 지척에서 뫼시고 많은 교회를 받은 처지로서 새삼 흠모의 정을 금할바 없고 公의 사적이 유구히 산실됨을 두려워한 나머지 구전된 허다한 투쟁사실을 일일이 고증치 못하고 다만 백분의일도 못되는 문헌에 기록된 일부를 간추려 간략한 전으로 삼게 되니 죄송스러운 마음 감출 길 없다.
더욱 유고 하기군이 수년을 두고 세의로서 간청하므로 누차 사양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 효성에 감동하여 참망됨을 무릅쓰고 위와 같이 찬하여 후세에 전하고저 하는 바이다.
1980년 1월 22일 몽향선관에서
향후생 밀성 박 순 석 근지
주 1 : 고등경찰 요사 (일제 극비본)
2 : 조선 형사사건 처리부 (부산지검소장)
3 : 조선 형사사건 판결문 (부산지검소장)
4 : 동아일보, 매일신보, 기사 (국립도서관)
5 : 광복회 부활 연혁지
6 : 한국 독립사
7 : 경북판 독립운동 실록
8 : 한국 독립운동사 (문교부 국사편찬회)
9 : 일제침략 한국 36년사 (문교부 국사편찬회)
10 : 매운 유고
매운공의 생전 모습
청도군 매전면 온막동 월봉산의 매운궁의 묘소와 국사편찬위원장이 지은 비문을 새긴 묘전비
청도군 화양읍 유등리 썬영하에 세운 애국지사 매운이정희선생추모비
敦巖莊 接受證
京橋莊 接受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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