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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22강 쾌락의 자유와 홍대 클럽 문화
1)홍대클럽문화
이제 철학강의에서 마지막 문제에 이르렀군요. 사실 학생들이 나에게 던진 문제는 10개가 되지만 이번 문제 뒤의 두 가지 문제는 생략하려고 합니다. 왜냐고요? 너무 지쳐서 그래요. 또 그 뒤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될 것 같고요. 중복되거나 아니면 내가 대답할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래서 이번에 다루는 문제가 철학강의의 마지막 문제가 되겠어요. 마지막 강의는 아니죠. 이번 문제 역시 세 번 정도에 나누어서 다루려고 하니까요. 하여튼 설날 전에는 철학강의를 끝내려고 합니다.
이번에 다루는 물음은 ‘쾌락의 자유’에 대한 문제 제기입니다. 학생들은 더 상세하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정치적 자유에는 무관심, ‘쾌락의 자유’는 무한히, 병든 자유론” 여기서 쾌락의 자유는 병들었다고 비판되면서 필요한 것은 ‘정치적 자유’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정치적 자유는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이니까요. 이렇게 학생들은 ‘쾌락의 자유’와 ‘정치적 자유’라는 대조시켰는데, 음미해볼 수록 재미있는 대조라고 생각됩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우선 ‘쾌락의 자유’에 대해서부터 살펴보기로 하죠. 학생들은 이런 쾌락의 자유의 구체적인 예로서 ‘홍대 클럽 문화’를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홍대 클럽 문화가 “남녀 간의 추잡한 치정사건들”로 가득하다 하는군요.
치정이라면, 한자로 癡情이라고 쓰는데, ‘어리석고 미친 듯한 애정’이라는 뜻이죠. 치정이란 단순한 육체적, 일회적 섹스 정도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관계는 쿨하고 가볍고, 그야말로 육체적인 것이죠. 그런데 치정이란 그 이상의 것입니다. 흔히 치정이라 하면 불륜과 무도한 사랑, 치명적인 파멸을 동반한 사랑, 의심과 질투와 집착으로 가득한 사랑, 죽음 고통을 동반한 사랑 등을 의미하지 않나요? 여기에는 심리적 요소가 상당히 깊게 개입합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홍대 클럽 문화를 모릅니다. 홍대 클럽문화가 싹 틀 시기에(아마 90년대 말이 아닐까 싶은데?) 지방에 있었습니다. 지방에도 그와 비슷한 것이 있기는 하죠. 부산에는 서면 클럽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습니다. 학생들한테 듣기로 문 앞에 기도가 서 있어서 나 같은 연배는 쫓아낸다고 하더군요. 물 흐린다나요. 그러니 그런 데서 젊은이들이 어떻게 노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학생들 표현대로 그런 추잡한 곳인지는 좀 의문입니다.
하긴 어른들이 가는 곳도 있지요. 그런데는 서 너 번 가보았습니다. 같은 어른들끼리 간 적은 없습니다. 이상하게도 젊은 사람들하고 갔었어요. 한번은 졸업생 환송연에서 술 먹다가 남은 졸업반 학생들을 데리고 가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은 졸업여행 갔다가 나이트클럽에 학생들을(3학년 학생들) 데리고 갔습니다. 또 언젠가 서울에서 세미나 마치고 뒤풀이 삼아 후배들과 함께 간 적이 있죠. 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소위 ‘애프터(?) 서비스 차원’에서 데리고 갔었죠. 나는 그저 술자리에 앉아서 술만 퍼먹었지요. 나와서 춤추라고 할까봐 술을 더 열심히 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곳은 좀 심해요. 감각을 자극하는 선정적 쇼가 펼쳐지기도 하고, 소위 부킹(?)하는 아줌마, 아저씨도 보이는 느끼한 분위기였습니다.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무겁고 혼탁한 듯한 느낌이 들어요. 마치 숙취 속에 있는 것 같죠. 마치 어항 속의 붕어가 흐느적거리는 듯한 분위기죠. 이런 걸 ‘권태’라고 하나요? 피로하고 지친 듯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2)사유의 열린 틀
솔직히 나는 노래하고 춤은 전혀 못해요. 음치, 박치, 몸치이죠. 어떤 학생이 나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요. 선생님은 천재이시라고. 무슨 말이냐 했더니, 시계가 고장 나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 법이고, 보통사람은 음정박자를 몰라도 가끔은 맞는데, 어째서 선생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음정박자가 맞지 않는지? 그렇게 하는 것은 음정박자를 정확하게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아니냐? 그러니 천재이시라는 겁니다. 맞기는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죠. 노래가 꼭 음정박자가 맞아야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나도 왕년에 가수인 적이 있었다. 그때 젓가락 장단 집에서는 나도 유명했다라고 말이죠. 거기는 모두들 합창하고 젓가락 장단만 두들기면 되니까 나의 음치, 박치 수준도 감출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젓가락 장단 집에서 가수에게 중요한 것은 음정박자가 아니고 가사입니다. 가사만 잘 외우고 있다가 남들이 잊어버렸을 때 리드만 하면 됩니다. 나머지는 다른 사람이 맡아주는 거죠. 나는 평소에 사전을 외우듯이 가사를 외워두었죠. 그래서 왕년의 가수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노래방이 나와서 가사를 외울 필요가 없게 되자, 나는 몰락하고 말았죠. 왜 그런 아름다운 젓가락 장단집이 이 세상에 다 사라졌는지!!
그런 술집에는 한 곳에 노래 부르면 다른 곳에서 화답하고 결국 술집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되어서 정말 신났었어요. 때로는 서로 화답하면서 노래하기도 했어요. 이쪽 하나, 저쪽 하나, 그러다가 선창, 후창 하기도 하고. 다만 죽어나는 것은 술상이었습니다. 술상을 보면 젓가락 장단의 자국이 흉칙하게 남아 있었어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대개 이렇게 놀다가 끝날 무렵에는 반드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누가 헛소리를 한 것을 빌미로 삼아서 논쟁을 주고받다가, 끝내 술잔이 나르고 술상이 뒤집어지죠. 그 다음은 멱살도 잡고, 술상에 뒹굴기도 하고, 난장판이죠. 더욱 웃기는 것은 그 다음날 다시 만나면 언제 싸웠는지도 잊어버린 채 서로 어깨를 겯고 다시 술집으로 가죠.
갑자기 이야기가 옛날이야기로 흘러갔군요. 하는 김에 한 가지만 더 하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독일에 겨우 일 년 갔다 와서 강의 때마다 써먹는다는 비난을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는 꼭 해야 되겠군요. 내가 클럽에 가서 감동받은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일에 있을 때 내게 독일어를 가르쳐준 강사와 같이 독일어를 배운 학생들(터키인, 이태리인 등 남녀 국제군단, 대개 대학원생 나이)과 함께 클럽에 딱 한번 간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거의 대부분이 젊은이들 같이 보였습니다.
물론 나는 바에 기대서서 술을 홀짝이면서 그저 구경하기만 했지요. 그런데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박자가 무척 빨랐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맞추어 춤을 추는 외국인 학생들의 춤이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큰 감동받았습니다. 리듬에 따라서 온 몸이 자유롭게 약동하는데, 생명력으로 가득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 리듬은 가만히 서 있는 나한테도 저절로 전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리듬을 느끼면서 온 몸에 그야말로 짜릿한 쾌감이 흘렀습니다. 나는 생각했습니다. 이게 바로 자유가 아닐까 하고 말이죠.
나는 홍대클럽 문화를 잘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이 가는 홍대클럽에도 내가 독일에서 보았던 그런 자유로운 생명, 약동하는 리듬이 흐르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아닌가요? 그러면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분위기인가요? 어떻게 보면 가볍고 쿨하고, 어떻게 보면 선정적이고 흐느적거리며, 어떻게 보면 치정적인 것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난장판 분위기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자유로운 약동인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이 모든 분위기가 뒤섞인 게 아닐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거의 엄격한 도덕적인 잣대를 가지고 이 분위기를 재단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표면적으로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것은 있지만 그래도 그런 분위기 속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요? 혹은 어떤 요소는 비록 그 자체로서는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그것을 매개로 해서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요? 말하자면 일종의 변증법적 매개가 되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예를 들어 치정적 사랑을 보죠. 많은 소설과 영화는 이런 치정적 사랑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개 제목은 ‘무슨, 무슨 정사’이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오페라로 유명한 「카르멘」이겠죠. 그런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치정적 사랑으로 고통과 파멸에 부딪히지만 이런 고통과 파멸을 통해 무언가를 깨닫고 새롭게 탄생하게 되죠. 이런 점에서 치정적 사랑은 새로운 것을 위한 매개가 되는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이 없다면 그저 주어진 한계 내에 머무르게 되겠죠.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는 왜 이런 홍대 클럽의 분위기가 출현하며 그 속에 어떤 새로운 것을 기대할 수 있는가 고민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홍대 클럽 문화’에 대해 생각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죠. 즉 사유의 ‘열린 틀’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마음을 여는 것보다 먼저 사유를 열어야 해요.
3)지식노동자의 출현
혼돈 속에 있는 홍대클럽문화에 대해 생각을 하다보면 우리는 60년대 말 서구에 등장했던 히피의 문화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양자가 여러 가지 면에서 서로 유사하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음악과 성적 개방, 그리고 언더그라운드라는 점에서 공통적인 것 같아요. 68 세대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런 히피 문화는 살아남아 서구문화를 변화시켰고,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홍대클럽문화도 어쩌면 이런 히피문화의 한국적 버전이 아닐까 해요.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도 1960년대 말에 이르러 서구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사회주의 사회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로부터 68혁명이 일어났고, 히피의 문화가 세계를 휩쓸었죠. 이제 이 히피문화를 중심으로 이런 전반적 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죠.
무엇보다도 새로운 과학기술혁명이 발생했다는 것부터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세계사에서 일차 혁명이 섬유공업이라면, 이차혁명은 1860년대 독일에서 일어난 중화학 기술이라 합니다. 그리고 3차 혁명이 20세기 중반에 있었던 자동차 혁명이구요. 그리고 1980년대 정보통신에 기초한 기술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산업이 변화하면서, 생산적 서비스업과 문화상품이 발달하고, 상품생산도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변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노동과정도 유연해지면서 노동자층이 분화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이런 경제적 영역에서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노동자층이 등장했죠. 우리는 그들을 전문기술관료 층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주로 서비스 업종이나 소위 지식노동, 감정 노동(간호, 가사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층이라도 하죠(간단히 줄여서 앞으로 지식노동자라고 말하겠습니다). 이 새로운 노동자층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사회에서도 등장했습니다. 이미 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이르면 어디든 노동자층의 50% 이상이 이들로 이루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에 앞서 등장했던 노동자층은 공장육체 노동자층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19세기 말부터 오랜 경험을 쌓은 직인 노동자층을 대신해서 등장했죠. 그들은 기계화된 대규모 공장에서 단순노동에 주로 종사했습니다. 이들은 농촌에서 바로 공장노동자로 전환했기에 모든 면에서 농촌의 정신을 익히고 있었습니다. 이들이 바로 민중문화 세대이죠. 그들은 비록 가혹한 노동조건 아래서 착취당하고 억압받았지만 단결된 힘과 물질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20세기 초 세계 곳곳에서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이끌어갔던 혁명적 노동자 세대이죠.
전후에 50년대, 그리고 60년대만 해도 여전히 이런 혁명적 노동자 세대가 지배했습니다. 그러나 60년대를 넘어서서 70년대에 이르면 서구에서는 앞에서 말했듯이 지식 노동자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라난 환경도 달랐습니다. 그들 부모는 가난과 전쟁의 체험 속에서 자기를 억압하는 태도를 배웠고, 이 자기억압적 태도로 전후 근면성실하게 일했으며 이를 통해 안정된 가정을 이룩했죠. 이들 부모의 덕분에 풍요로운 삶을 살았던 세대 그리고 대학의 확산을 통해 전문기술 노동을 배운 세대는 더 이상 자기억압적인 태도를 견딜 수 없었습니다. 욕망의 자연스러운 힘에 그들은 몸을 맡기기 시작했죠. 그들은 부모들의 자기억압적 태도에서 오히려 위선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하고 있는 노동의 과정도 달라졌습니다. 그들의 일은 과거처럼 단순반복적인 노동이 아닙니다. 단순 반복적 노동을 지배하는 것이 콘베어벨트 시스템입니다. 챨리 채플린의 영하 「모던 타임즈」에 이런 시스템이 아주 잘 그려졌지요. 그러나 새로운 노동자의 일은 이런 시스템을 벗어나 있습니다. 그들의 일은 이제 자유로운 창의가 필요한 노동이죠. 대개는 독립적 공간에서 자율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서로의 협력도 필요하지만 그런 협력은 강제가 아니라 자발성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일의 속성은 그들의 정신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죠.
4)히피의 문화
이렇게 변화된 환경과 노동과정 속에서 이들은 새로운 정신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감수성, 새로운 모럴, 새로운 문화를 획득했죠. 이들의 새로운 정신을 가장 보여주는 것이 비트족의 문화와 히피족의 문화입니다. 양자는 차이가 있지만 비트족 문화는 대체로 히피문화 속으로 수렵되고 말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비트족이라면 60년대 중반에 출현한 미국 동부의 통기타 세대를 말합니다. 이들은 동부 엘리트 계층이었죠. 그러나 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에 망명했던 망명 지식인과 예술가들로부터 유럽의 급진적 지식을 습득하였습니다. 이들의 우상이 마르쿠제와 같은 비판철학자와 뒤상과 같은 아방가르드 예술가였습니다. 이들은 60년대 초 케네디의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고, 대학의 개혁 운동에 참가했죠. 그리고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미국이 월남전에 빠져들자 처음으로 반전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을 대변하는 것이 통기타 노래였죠.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80년대 운동권 세대이죠.
반면 60년대 후반에는 미국 서부 로스앤젤리스를 중심으로 소위 히피세대가 출현했습니다. 그들은 전후 미국 로스엔젤리스 근처의 군수산업에서 일했던 노동자 계층의 아이들이었습니다. 풍요한 환경에서 자라난 그들은 가정과 학교의 억압을 견디지 못했죠. 대학이 팽창함에 따라 이들도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당시 대학은 대학팽창에 따라 급조된 콘크리트 덩어리였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자본주의적인 소외된 삶에 기대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기들만의 해방구를 만들었죠. 그 속에서 그들은 미국 서부에서부터 발전했던 락 음악에 빠져들었죠. 인도의 명상과 대마초, 그리고 자유로운 성적 개방이라는 독특한 히피 문화를 발전시켰습니다. 이들은 정치적 혁명보다는 문화적 혁명을 지향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들은 서태지의 음악에 열광했던 90년대 신세대와 닮았죠.
대학생이 월남전에 징집되기 시작하자 더 이상 히피들도 해방구에 도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비트족의 선도에 따라서 반전운동에 뛰어들었죠. 그들은 꽃을 들고 시위했고 “필요한 것은 사랑뿐”이라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경찰의 총에 꽃을 꽂아주는 모습은 여러분들도 익히 알고 있을 겁니다. 이런 히피들은 초기 반전 운동을 이끌어갔던 비트족을 대체하고 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들은 월남전 반대 운동을 통해서 정치적으로 급진화되기 시작했습니다만, 월남전에서 미군이 철수하게 되자 저항의 동력을 상실했죠. 소수 급진주의자들의 테러적 활동이 남기는 했지만 정치적 의미는 없었습니다. 히피세대가 마지막으로 빠져들었던 것이 락 페스티벌이었습니다. 락 페스티벌은 음악과 사랑의 축제였으며 동시에 거대한 정치적 축제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락 페스티벌조차 상업적 문화의 지배 아래 종속하게 되자 결국 히피는 소멸되고 말았죠. ‘이것이 끝’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도어즈 그룹의 짐모리슨의 자살이 히피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죠.
5)성적 억압과 관료적 억압
히피의 혁명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은 다시 군산복합체의 손에 되돌아갔고, 남은 것은 히피의 문화적 혁명이었죠. 그들은 거대한 혼돈된 문화를 남겼습니다. 무언가가 새로운 정신적 변화가 있었습니다. 새로운 감수성, 새로운 모럴, 새로운 문화가 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변화는 기존의 사회 속에서 굴절되고 왜곡되어서 나타났습니다. 그런 새로움과 왜곡 사이에서 이들은 방황했던 거죠.
예를 들어 히피 문화의 특징인 ‘성 개방’을 보도록 하죠. 성 개방은 그 시대 성적 억압을 고려해서 보아야 합니다. 젊은이의 우상 제임스 딘이 나오는 유명한 영화 ‘이유 없는 반항’을 보면 당시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50년대에는 미국에서 여학생이 남학생과 혼전 섹스를 했다고 해서 학교를 퇴학당했습니다. 이런 성적 억압은 여성을 배제하는 정치적 사회적 억압의 장치로 사용되었습니다. 여성의 보호, 성적 순결성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사회로부터 배제하고 가정에 구속하였던 거죠.
나아가면 이런 성적 억압은 곧 당시 사회의 억압적 구조를 잘 보여줍니다. 전후 서구 사회는 일반민주주의가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조차 합법화된 자유로운 사회이었죠.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관료적인 억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관료들은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만들면서 독점자본을 위해 봉사했지요. 전후 국가가 대대적으로 팽창함에 따라 관료들의 수도 증가했고, 사회 전반 즉 기업이나 공공기관조차 이런 관료화된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는 관료사회가 되었습니다.
관료들은 합리적 과학의 이름으로 그리고 보편적 복지,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구호 아래서 지배했습니다. 이런 관료적 억압의 장치에 관해서는 프랑스 철학자 푸코가 정말 명쾌하게 분석했습니다. 그는 ‘소국가’, ‘생명정치’, ‘쾌락의 정치’, ‘판옵티콘’, ‘훈육국가’ 등의 개념들을 통해 억압의 기제를 해부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런 개념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많이 들겠어요. 이런 개념들에 대해서는 이미 고등학교 책에서도 나오니 상당히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설명하는 것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억압 장치는 표면적으로는 자유롭고 즐거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고 그래서 사실 아무도 자신이 억압되고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는 거죠. 그들이 느끼는 억압은 거의 무의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런 억압의 장치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성적 억압입니다.
그러므로 히피들이 ‘성적 자유’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사실 사회적인 억압, 그리고 관료적 억압 전반에 대한 저항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적인 욕망의 해방에 그들이 그토록 고착되었던 것은 그만큼 전반적으로 억압된 힘을 무의식적으로나마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은 의식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국가의 억압적 장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관료적 억압에 저항하는 힘은 그들에게서 단지 성적인 욕망을 통해 표출되었을 뿐이었죠.
6)대마초와 자본주의적 소외
이런 측면은 대마초 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히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이 대마초이죠. 이들 히피들이 대마초를 즐긴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그들은 대마초의 경험을 통해서 자연과 자신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고 합니다. 이런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경험은 명상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히피들이 대마초를 즐긴 것은 명상을 좋아하는 것과 동일한 정신적 맥락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자연과 하나이기를 바라는 것은 거꾸로 삶 속에서 그들이 소외되고 고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전후 서구 자본주의는 점차 독점화했습니다. 자유 경쟁적 소규모 자본주의 체제는 거의 완벽하게 사라졌고 대규모 독점자본이 시장을 과점적으로 지배하는 체제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런 독점 자본은 소위 포드테일러 시스템이라는 노동방식을 채택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공장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전반에 확산되었죠. 이제 학교도, 병원도, 국가도 이런 포드테일러 시스템을 적용했습니다. 어쩌면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포드테일러시스템이 되었습니다.
이런 포드 테일러 시스템과 노동에서의 소외가 극심해졌죠. 과거 소외는 자본가의 인격적 지배에 의한 소외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동자의 노동은 종속적으로 일어났죠. 노동자는 자신을 실현하지 못한 채 자본가의 명령에 의해 생산하면서 소외됩니다. 그래도 인격적으로 지배하는 경우에는 숨을 쉴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포트 테일러 시스템에 의해 노동과정은 기계적으로 합리적으로 조절되었습니다. 이런 기계적 합리적 지배 앞에서 노동자는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노동의 소외가 그만큼 가혹했다는 거죠. 심지어는 이런 지배는 과학의 이름으로 행하여졌기 때문에 저항의 시도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이런 소외에 의해 노동자는 고립감을 느꼈으며, 노동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했죠. 감수성은 둔중해졌으며, 신체는 점차 마비되어 갔습니다. 바로 이런 소외는 거꾸로 노동자에게 나와 타인의 합일, 자연과 나 자신의 합일, 감수성과 신체의 감각의 회복, 노동의 즐거움의 회복 등의 요구를 야기했죠. 이런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채택된 것이 바로 대마초이며, 명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마초나 명상이 일시적으로 고립감을 잊게 하고, 신체의 감각을 회복시켜주었다 하더라도 이는 근본적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소외가 계속되는 한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에 부딪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히피들은 근본적인 극복보다는 대마초와 명상을 통해 도피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만든 해방구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도시의 주변에 자기들만의 해방구를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로스앤젤리스의 ‘헤이트애쉬베리’라는 해방구였죠. 거대한 락 페스티벌 역시 그들이 만든 해방구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히피는 그 외에도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었고 이런 공동체 가운데 몇 개는 거의 80년대 말까지 유지되었습니다.
이렇게 해방구를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국가나 가정의 억압을 혐오했습니다. 그러므로 히피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체적 질서나 집단적인 공동노동 같은 것을 혐오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로빈슨크루소처럼 또는 은둔자처럼 혼자 살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처럼 타인의 사랑과 공동체의 분위기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소수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들었죠. 거기에는 어떤 소유도 없었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수 있었죠. 어떤 사랑의 제약도 없었습니다. 마음에 맞으면 누구와도 하룻밤을 같이 지냈죠. 철저한 개인주의와 철저한 공동체 주의의 이 기묘한 결합이 그들이 만든 해방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방구는 현실 속에 유지되기 힘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본주의라는 바다에 뜬 조각배와 같은 것이었지요. 자본주의의 힘은 곧 그들을 찢어놓았고 그들은 무기력하게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7)마르쿠제의 철학
히피들의 철학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르쿠제입니다. 그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연구소에서 활동했던 비판적 좌파철학자이죠. 나치의 탄압을 받아 그는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뉴욕에 거주하면서 동부 비트족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죠. 그리고 그의 철학은 히피들의 정신의 기본 축을 이루었습니다.
마르쿠제의 철학의 핵심은 소외를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온 몸에는 성적인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 성적 에너지를 성기적 성욕에 국한시켰고 나머지 온 몸에 있는 성적 에너지는 박탈했다고 합니다. 이제 온 몸은 마치 성적으로 마비되어 마치 고깃덩어리가 되어 버린 듯하다고 합니다. 이렇게 온 몸에서 빼앗은 성적 에너지를 자본가는 노동의 에너지로 전환시킨다는 것이죠. 그 결과 노동은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죠. 그게 바로 소외라고 그는 말합니다.
온 몸에 성적 에너지가 흐른다는 생각은 그렇게 어렵지 않게 이해됩니다. 우리는 자주 온 몸이 성감대가 되는 경우를 발견하니까요. 프로이트는 이런 현상을 오히려 신경증이라고 해서 비정상적 상태로 보았으나, 마르쿠제는 거꾸로 생각했습니다. 그게 본래의 상태라는 거죠. 아이들의 몸을 쓰다듬어주면 아이들은 마치 성적으로 자극된 듯 까르륵거리는데, 그것을 보면 원래 우리의 온 몸에 성적 에너지가 흐른다는 겁니다.
마르쿠제는 소외의 극복을 위해서 다시 본래의 성 에너지를 되찾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노동의 생산성은 떨어지겠지만 이제 기계가 그것을 대신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온 몸에 다시 성적 에너지가 흐르게 된다면 우리는 삶 자체, 하나하나의 행동 자체가 성적인 쾌감을 줄 것이며, 결국 노동과 유희가 일치하는 경지에 이를 것이라 합니다. 그게 소외가 극복된 모습입니다.
마르쿠제는 이런 성적 에너지는 결국 우리가 서로 하나가 되는 에너지라고 합니다. 나와 너가 온 몸으로 합일에 이르는 것이 성적 관계이고 그것은 단지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통합한 어떤 힘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마르쿠제는 노동과 유희, 그리고 사랑이 일치가 되는 세계를 꿈꾸었습니다.
마르쿠제의 이런 생각은 히피들이 성적 자유를 추구하고, 히피들의 공동체를 추구할 때 기초가 되었던 생각입니다. 마르쿠제의 이론이 옳든 그르든 간에 그는 히피문화의 밑바닥에 있는 어떤 것을 건드린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기 보존에 필요한 생물학적 욕망 이상의 어떤 힘이 있다는 겁니다. 이 힘은 자유와 쾌감을 동반하는 힘이죠. 일단 마르쿠제와 히피들은 그것이 바로 성적인 욕망이라 보았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욕망의 범주에 집어넣어야 할지, 아니면 인간에게 존재하는 더 큰 의지 즉 자주성의 의지에 집어넣어야 할지는 더욱 토론해 보아야 할 문제라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히피들을 통해 그게 실현되었던가는 제쳐놓고 그들이 그런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쩌면 홍대클럽문화 속에도 노동과 유희, 사랑이 하나가 되는 사회에 대한 꿈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그것인 지금은 선정적이고 치정적으로 표현되더라도 언젠가는 새로운 사회를 위한 동력으로 발전하리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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