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2:7-10, 포이에마, 선한 일을 위해 창조된 작품
우리 모두는 시간과 이 세상 자원을 갉아먹다 끝나는 소비품으로 지음 받은 존재가 아닌. 어떤 중요한 공헌을 하라고 지음 받았습니다. 인생의 과제는 얼마나 오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공헌을 하며 사느냐? 어떤 선한 열매를 남길 것이냐? 내 곁에 어떤 변화를 이루어 낼 것이냐? 의 문제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답이 되고 축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7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여기서 ‘나타내려’‘엔데익세타이’의 원형‘엔데익뉘미’는 단지 드러내다 정도가 아니고 법률용어로서 ‘공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의 의미는 교회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속된 무리들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제시함으로 공포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답답함은 뭘까요?
구원받았는데 중생하였는데 거듭났는데 단번에 변화를 가져 오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때로는 조금씩 변화되어 간다고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옛날로 뒤돌아가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난 안돼, 하고 절망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풍성하신 긍휼은 그러한 성도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지속적으로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그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풍성한가를 들어내시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에서 ‘여러 세대’ ‘엔 토이스 아이오신 토이스 에페르코메노이스’는 그대로 직역하면 ‘다가오고 있는 그 세대들 안에’ 이는 한 두세대를 의미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되는 세대들과 재림 예수님이 오신 후 존속하게 될 영원한 모든 세대들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직접 보고 느끼게 될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현재의 구원의 감격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오는 세대 안에서 누릴 은총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롬12:2절,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다시 여러 세대의 모형을 찾아보면 아브라함을 볼수 있는데요,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유업으로 받았는데 실상 아브라함은 가나안을 받지 못하고 일생 동안 가나안에서는 발붙이고 살아갈 땅을 얻지 못했습니다. 창15:13절에 언약하시길 ‘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14절에 말씀하시길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가지고 나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시105:8절에 “그는 그의 언약 곧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은 오고 오는 세대, 천대에 걸쳐 이루시는 언약임을 볼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형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나타내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딤전1:16절을 보면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믿음의 후배들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대에 전하고 세워 나가는 것입니다.
벧전2:9절을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본질이 무엇인지 깨달아 지시나요?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전체 구원계획과 연결과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만의 구원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전체구원의 계획을 보아야 하고 거기서 나에게 부여된 의무와 역할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구원은 나의 힘으로는 불가합니다.
8,절“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을 통하여 너희가 구원을 받았다, 라는 말씀입니다. 또 다시 안으로 들어가서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근거이고 우리의 믿음은 구원을 받아들이는 도구에 즉 통로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의해 이루어지고 구원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의 믿음을 도구로 사용했을 뿐이므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단독사력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시고 있습니다. 이 말의 참 의미는 뭘까요? 이는 인간에게서 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날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9절에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함으로서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어떤 선행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선물을 살펴보면 ‘선물’‘도론’(δωρ?ν)이 쓰인 용례는 ‘제단에 드리는 예물’ (δωρ?ν)(마5:23,24),“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또는 ‘하나님께 드림’ (δωρ?ν)(막7:11), ‘헌금’(δωρ?ν)(눅21:4), ‘하나님의 선물’(δωρ?ν)(엡2:8) 등입니다.
선물을 예로서 살펴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율법으로써의 남편만 있고 참 생명으로써의 남편이 없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δωρε?)과 물을 달라고 하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임을 알게 되면 당연히 생수인 진리의 말씀을 구하여 얻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4:10).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로 죽어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유일한 선물(δωρε?)은 ‘그리스도이신 예수’ 뿐이며, 또한 구원 받은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선물(δωρ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예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깨달아지면 아멘.
바로 이 구원자 예수님을 하나님이 인간에게 값없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상으로 주신 것은 공기와 물, 햇빛, 생명, 등은 다 거저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댓가를 지불하고 쓰는 자도 없고 또 지불할 수도 없습니다. 같은 이치로 구원은 어디 가서 돈 주고 살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욥이 지혜에 대해 고백한 말이 연결이 될까요?
“그러나 지혜는 어디서 얻으며 명철이 있는 곳은 어디인고 그 길을 사람이 알지 못하나니 사람 사는 땅에서는 찾을 수 없구나”(욥28:12-13) 같은 이치로 세상에서는 구원얻을 출처도 모르고 얻을 수도 없습니다. 기독교외에 구원 얻을 길을 제시하는 종교는 없습니다. 이 땅에 구원의 길이 존재 한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희생을 치루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9절,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그 선물이 바로 그리스도예수님이십니다. 이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여야 하고 가슴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받은 자로서의 합당한 반응이 삶속에서 나와야 하는데 그 일이 선입니다. 다시 말해서 행위로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지만 구원 얻은 자로서의 결과는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는 주를 닮아가야 합니다. 엡4:13절,“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러므로 삶에서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선한 일의 열매를 맺어 그 열매로서 믿음의 성숙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깨달아지면 아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10절 “참으로(가르, 번역되지 않음)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원어‘만드신 바라’ ‘포이에마’를 살펴보면 ‘만들어진 것, 제작물, 작품, 피조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의 작품, 포이에마(πο?ημα)다’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상태, 하나님이 만드신 바로서의 걸작품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열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시143:5절,“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읊조리며 주의 손이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여기서 ‘행하신’‘포이에마신’이 구약의 첫 창조를 의미한다면 본문에 ‘포이에마’는 신약의 재창조를 의미합니다. 첫 창조나 재창조나 인간으로서 기여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음을 찬양하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사는 일 뿐입니다. 그 선한 일을 위해 새로 지음을 입었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포이에마(πο?ημα)가 된 성도는 비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 삶, 고전10:31절“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재 창조된 ‘포이에마’는 진정한 구제를 할(ποι?ω) 수 있으며(마6:3), 대접(ποι?ω)할 수 있고(마7:12) 그리고 좋은 열매를 맺을(ποι?ω) 수 있는 것입니다(마7:17).
말씀을 마쳐야 할 시간입니다.
성도의 착한 일, 혹은 행실은 세상의 선악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 혹은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착한행실은 이 세상 속에서 순종과 비움으로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행 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삶은 자기를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 말씀의 순종, 십자가의 인내, 이러한 모습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자로서 역동적인 삶을 사시고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계절로 바꾸고 복음으로 악을 선으로 바꾸어 변화시킬 수 있는 ‘포이에마’가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