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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일진회 이용구를 할려고 했으나 최근 정국으로 60년후 박정희를 조명해보자.
앞의 유길준이 죽은지 1년이 지나고 구미 선산의 어느 마을에 막내가 잉태된다.
원래 영기는 한명의 위인이 죽으면 다른 곳으로 옮긴다
때는 일제치하 3.1운동이 일어나기 2년(1년 4개월)전이다.유럽이 독일이 제1차세게대전으로 무제한 잠수힘공격으로 미국과 대적하고 있엇으니 포성속에 태어난 셈이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에 경상북도 구미(선산군)에서 아버지 박성빈과 어머니 백남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 박성빈은 박문수의 6대 방손인 박영규의 세 아들 중 장남으로 1871년 6월 6일(음력 4월 19일)에 태어났다. 박성빈의 7대 방조 박장원과 6대 방조 박문수는 소론의 거두였고, 박문수는 암행어사로 실적이 있어 유명하였다. 당색으로는 소론 계열이었지만 몰락하였고, 그의 직계 조상들은 이렇다할 관직에 나가지 못했다. 경북 성주군 사읍촌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 박영규까지는 4대는 독자였다. 몰락 양반가의 자손이었던 박성빈은 초기에 관직에 나가려고 하였다. 딸 박재희의 증언에 의하면 벼슬을 하려고 전답을 팔아서 서울에 자주 올라갔으며, 이때 가산을 많이 날렸다.
그 후 박성빈은 가세가 몰락하여 처가의 선산(先山)인 경북 선산군(善山) 상모동의 위토를 소작하기로 하고 처가의 양해를 얻어 구미 상모동으로 솔가하여 이사를 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무능력했던 탓에 5남 2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은 그의 아내 백남의의 몫이 되었다 한다.그가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던 경력으로 후일 박정희는 동년배 또래들이 동학난이라 부르던 것을 동학농민혁명이라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어린 시절 마루에서 굴렀다가 마루 밑에 놓인 화로에 떨어져 머리카락과 눈썹 부분에 화상을 입기도 하였다. 아버지 박성빈은 황토를 짓이겨서 박정희에게 발라주었고 이때 화상을 입어 피부가 검게 그을린 것이라 한다. 이 일 이후로 박정희는 짧은 옷을 입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고 전해진다.유년기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훗날 입학하는 구미공립보통학교의 입학 전 경력에도 한학 수학이라 기재되어 있으며 학교에 다니면서도 일요일에는 서당에 가서 한문을 배웠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교회에도 다녔고, 나머지 시간을 이용해서 서당에 다닌 것이다.
그의 아버지인 박성빈은 조선 말에 효력부위를 지냈으나 동학 접주 출신으로 연좌되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할 수 없었고,맏형 박동희는 독립하였으며 둘째 형 박무희와 셋째 형 박상희가 실질적인 가장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아버지 박성빈과 둘째 형 박무희는 인근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칠곡군의 갑부 장승원을 찾아가 그의 집안 토지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유지했는데, 후일 장승원의 아들 장택상은 이를 회자화 하며 박정희를 공격했고 박정희는 이로 인해 장택상과 아주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1926년 병인년 열살에 4월 1일에 구미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보통학교 시절, 2학년 때까지는 급장을 담임선생이 지명했으나 3학년 때부터 교칙이 바뀌어 1등을 하면 급장을 시켜주는 새로운 제도 덕분에 공부를 잘하던 박정희는 3학년 때부터 내내 급장을 맡았다.
당시 박정희는 학교 수업 외에 독서를 즐겼는데, 군인을 동경하였으며 그중 나폴레옹과 이순신의 위인전을 탐독해 읽었다고 한다. 박정희 자신의 회고에도 '소년 시절에는 군인을 무척 동경했음. 그 시절 대구에 있던 일본군 보병 제80연대가 가끔 구미 지방에 와서 야외 훈련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군인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1932년 3월 1일에 보통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 박정희는 그해 대구사범학교에 응시했다. 총 응시자는 조선인과 일본인 합하여 모두 1,070명이었다.박정희는 51등으로 합격하였다
1932년 4월 1일 박정희는 대구사범학교에 제4기생으로 진학하였다. 이때 입학정원 100명이었는데 이 중 조선인 90명, 일본인 10명이었다. 대구사범학교 진학 후 박정희는 집을 떠나 대구 시내의 기숙사에서 등하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5년 중 3년간 그의 성적은 하위권이었다.품행평가에서 '양'이 네 번, '가'가 한 번이었으나, 군사 및 체육 관련 교과목의 성적은 뛰어났다. 이 성적표는 그의 집권 기간에는 공개 금지가 되기도 하였다
대구사범을 졸업하기 1년 전인 병자년 1936년 4월 1일, 세 살 아래인 김호남과 결혼했다. 병을 앓고 있던 아버지 박성빈이 죽기 전에 막내가 결혼하는 걸 보고 싶다고 간청하여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혼인 당시 박정희는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이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조혼도 아니었다. 1937년 3월 25일 박정희는 대구 사범을 졸업하고, 1937년 4월 1일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4학년을 맡았다.
박정희가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38년 9월 4일에 아버지 박성빈이 67세로 사망하였다.
한편 1939년 행적에 대해 다른 견해도 있으나 만주에 있었던 것을 빼면 확인된 것은 없다
1940년 4월 1일 박정희는 만주국육군군관학교(신경군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교하였다. 이때 박정희의 동기생들 가운데는 5·16에 가담한 사람이 없었으나, 간도·용정의 광명중학 출신의 선배 기수에서 5·16을 지지하게 되는 등, 이때의 인맥은 박정희의 지지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942년 3월 박정희는 만주국 신경군관학교 2기 예과 졸업생 240명 중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이때 박정희는 수석졸업 기념으로 만주국 황제 푸이로부터 은사품으로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이때 나이문제로 입학할 수 없었으나 천황과 일본을 위해 충성서약을 하여 감동을 이끌어내고 입학했다
졸업 후 5개월 정도 현장 실습을 마친 박정희는 1942년 10월 1일,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편입했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300명 가운데 3등의 성적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57기를 졸업했다. 그리고 수습사관 과정을 거쳐 1944년 7월 열하성(熱河省) 주둔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었다.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박정희가 배속되었던 부대는 보병 제8사단으로 동만주 지역의 열하성이었다. 주 토벌 부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좌파계열 독립군들이 팔로군에 가담하였고 박정희가 팔로군 토벌에 참여하였으므로, 독립군 토벌에도 참여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박정희는 만주 보병 제8단에서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때까지 근무하였다.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소속 부대가 없어진 박정희는 9월 21일 동료들과 함께 베이징 쪽으로 건너가, 장교 경험자를 찾고 있던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북경의 김학규가 지휘하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 제1대대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광복군 장교로 활동하다가 1946년 5월 8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귀국하였다.그러니 독립운동을 햇다는 것은 낭설이다.
1946년 5월 8일 귀국한 그는 고향에서 넉 달간 휴식을 취하다가 그해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하여 단기 과정을 마치고 1946년 12월 조선경비사관학교를 졸업, 광복을 맞은 한국의 군대에서 다시 육군 소위로 임관해 군인 생활을 시작한다. 박정희와 2기생도들은 1946년 12월 14일에 졸업하였다. 교육 중 동기 군번 69명이 탈락하고 194명이 졸업하였고, 군번은 성적순으로 받았다. 1등은 신재식 (육군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역임)이었고, 박정희는 3등이었다.춘천에 있던 8연대로 발령받았다. 8연대는 1947년 2월, 미군이 38선 경비업무를 일부 이관하면서 다섯 곳에 경비초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이 시절 국군 초의 연대단위 기동훈련을 기안한 공로로 중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대위로 진급한다.
박정희는 육영수와 결혼하기 직전에 당시 이화여대 1학년이던 이현란(당시 24세)과 동거를 했다. 1947년 12월 경리장교였던 박경원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1948년부터 1950년 초까지 약 3년가량 사실혼 관계에 있었다. 이현란과 약혼한 후 곧 이현란을 용산 관사로 데리고 와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박정희가 여순사건에 연루돼 감옥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 사이에 금이 갔다. 박정희가 좌익전력으로 구속되기 서너 달 전에 이현란이 사생아 아들을 출산했다. 하지만 이현란이 낳은 아들은 태어나자마자 사망했다
그 뒤 육군 소령으로 진급, 1948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순천 사건 연루 혐의를 받았다. 여수·순천 사건 후에 시작된 대한민국 정부의 군대 내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는 숙군작업에서 박정희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군부 하부조직책으로 의심받아 그해 11월 11일 체포되었다.
2심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하며, 감형한 징역을 집행정지함” 조치를 받았다. 다음 해 1월 강제 예편되었으며 정보국 문관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 중 소령으로 현역에 복귀하였고 이후 육군본부 작전정보국 제1과장을 거쳐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감행될 때 중령으로 진급하고 대구로 올라가는 육군본부의 수송지휘관을 맡았다. 10월 육영수를 소개받았고 육군본부의 전방지휘소가 서울특별시로 이동하게 되자, 그는 서둘러 약혼식을 올렸다. 10월 25일 장도영의 추천으로 제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11월에 김호남과 이혼하였다. 육종관은 딸 육영수가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육영수와 그의 모친 이경령은 집을 나와 대구 시내에 있는 박정희의 거처 주변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1950년 12월 12일 박정희는 대구시의 한 성당에서 육영수와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는 대구시장 허억(許億)이 주례를 보았고 신부의 손을 잡은 이는 육종관 대신 박정희의 대구 사범 스승 김영기였다
1950년 육군 정보국 제1과장이 됐다. 1952년 피난처인 부산에서 이용문 준장의 사무실에 찾아갔다가 그로부터 시인 구상을 소개받게 된다.이무렵 장녀 박근혜를 얻게 된다.
그는 이후 이용문과 이승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병들을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뒤에, 국회에서 개헌을 통과시키고 직선제 대통령으로 출마하려는 데 반발하여 정변을 계획하였다
1952년 5월 군부 내에서는 이승만 축출 시도가 있었다
이용문 등 군부의 일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장면을 추대하려는 시도를 계획, 이용문은 장면의 비서로 있다가 1952년 4월 사퇴한 선우종원을 포섭하려 하였으나 선우종원이 협조를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정변 계획은 미수로 끝났고 이용문은 그 1년 뒤 의문의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1953년 11월 25일 육군 준장으로 승진하여 장군이 되었으며[73] 1955년 7월 14일 제5사단 사단장이 되었다
1955년 겨울 예기치 않은 폭설이 발생, 작업 중이던 여러 사단 소속 장병들이 사고를 당한 사건이 발생한 후 박정희는 문책성 인사 조처로 대기 발령되었다가 1956년 육군대학에 입교하였다.
1957년 3월 20일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육군 소장 진급심의대상이 되었다
이때 경무대 행정관 곽영주(郭永周)가 나타나 박정희의 사상 문제, 결혼 문제 등을 이유로 그의 진급을 반대하고 나섰다. 당시 무소불위의 힘을 휘두르고 있던 곽영주의 반대에 부딪혀 박정희의 소장 진급 문제가 계류 중에 있을 때 김정렬이 나타나 심사위원들을 설득함으로써 박정희의 소장 진급은 무난히 통과하게 되었다. (곽영주는 5·16 군사정변 후 혁명재판에서 경무대로 몰려온 데모대를 살상한 죄로 사형되었다.) 이어 박정희는 제6군단 부군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7년 제7사단 사단장으로 부임하였다. 1959년 7월 1일 육군 제6관구사령관이 되었다. 1960년 1월 21일 부산군수기지사령부 사령관으로 발령받았다
1960년 5월 이승만이 하야하였다. 그 뒤 허정 대통령 권한대행 겸 내각 수반의 과도내각을 거쳐 1960년 7월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다. 이때 박정희는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으로 부임하였다.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 이종찬 장군은 국무총리 장면을 찾아 박정희의 중용을 건의하였다.장면은 이 문제를 바로 답변하지 않고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 사령관을 찾아 논의하였다.[74] 며칠 뒤 매그루더는 한국 육군본부로 박정희의 신원조회를 요청하였고
김형일 육군본부 참모차장은 '박정희는 좌익이다'고 답변하였다. 매그루더는 다시 장면을 찾아 '그런 사람을 어떻게 그런 요직에 앉혀뒀냐'라며 항의하였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부장이었다가 이 일이 있었던 후 12월 15일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전보되었다.
박정희는 1961년 4월 19일 4·19 혁명 1주년 기념식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러나 1961년 4월 19일에는 아무런 시위도 집회도 없었고 박정희는 당황한다. 이때 장면 정부의 정보기관인 시국정화단에서 미리 첩보를 입수하고 1961년 4월 19일로 계획된 학생들의 데모를 매수했다는 의혹이 있다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새벽, 당시 제2군 사령부(사령관 최경록 중장)부사령관이었던 박정희 등의 주도하에 육군사관학교 5기생과 8기생 출신의 전투보병사단 중령급 대대장(오학진 등) 그리고 6군단 포병단(단장 5기생 문재준 대령과 예하8기생 중령급 대대장-신윤창 구자춘 등) 제 1공수특전단(단장 5기생 박치옥 대령 등 예하 장교 등)기타 박정희의 만군 인맥인 해병대( 사령부(-사령관 김성은 중장) 예하 여단(여단장 김윤근 준장과 예하 대대장 오정근 중령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으로 뒤에는 참모총장으로 있던 장도영을 끌어들였다.
장면 총리는 카르멜 수도원에 피신하여 숨어 있다가 5월 18일 나와 하야를 선언하였다. 5월 16일 군사혁명위원회가 설치되면서 장도영이 의장에 선임되고 박정희는 부의장에 취임하였다. 5월 20일 장도영이 내각 수반이 되면서 박정희는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에 취임하여 혁명위원회를 국가 재건 최고 회의로 개편한다. 첫 번째 군사내각은 5월 20일에 발표되었으며, 7월 3일 장도영이 퇴진하고 박정희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하였다. 1962년 3월 22일 대통령 윤보선의 사퇴로 박정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기도 하였다.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어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해체되었다.
1964년 미국으로부터 베트남 파병 지원 요청이 왔다. 베트남 전쟁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하였으며, 1964년 8월 제1이동외과병원(130명)과 태권도 교관단(10명) 파월을 시작으로 주월한국군사원조단(비둘기부대), 방공포병대대(호크유도탄부대)를 창설하고 맹호부대, 백마부대, 해병 청룡부대 등 한국군을 파견한다
그해 8월 식량증산 7개년계획을 발표하여 65년부터 시행하였다. 이후 국토 종합 개발 계획 등을 실시하고 식량 증산 계획과 벼품종 개량 등을 시도하여 경제 부양을 시도한다.
한일협정을 통해 국가 기틀을 다질 자금을 마련하려 했으나 학생과 야당의 반대에 봉착한다. 특히 1964년의 6.3항쟁은 그 정점에 달한다. 6.3항쟁의 학생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박정희는 8월 25일 저녁 중앙청 제 1회의실에서 전국 방송을 통해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1965년 8월 26일 아침. 이때에도 한일협정 반대 분위기가 심했다. 박정희는 경찰력만으로는 치안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서울시장 윤치영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울시 일원에 위수령을 선포하여 학생시위를 진압하였다
1965년 5월 16일 오후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미국 대통령 존슨이 보내준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미국을 방문하였다.출발전 김포공항에서의 인사에서 자주, 자립을 강조하였다
22일 오전 10시 20분에 피츠버그 공항에서 플로리다 주의 우주기지인 케이프 케네디에 도착하여 로켓발사 시험을 참관하고 돌아왔다
1967년,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5·3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는 경제개발의 성과와 비전을 내세우면서, 이를 지속하기 위한 정치적 지지를 호소했다. 6대 대선에서는 신라 천년의 고도에서 신라 왕손을 임금으로 받들어 천년의 영광을 재현하자는 찬조연설이 지역감정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박정희는 다시 대선에 출마한 윤보선을 116여만 표의 근소한 차로 꺾고 재선에 성공하여 12월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67년 12월 농어촌개발공사를 창립하였고 1968년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다. 1969년 2월 농업기계화 8개년 계획을 확정하고 그해 11월 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을 승인한다.[22] 1969년에는 3선 개헌을 골자로 한 개헌안을 국민투표를 통해 통과시켰는데 투표율 77.1%에 찬성율 65.1%로 통과되었다
1970년 3월 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을 마련 발표하였다. 이 안에 의하면 86년까지 의무교육 확대를 단계적으로 실시하고, 의무교육을 9년으로 연장하는 것과, 교육세를 신설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22] 1970년 4월에는 새마을 운동을 제창, 시작하였으며 그해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였다. 같은해 8월 21일 관세청을 개청하였으며 1971년 10월 25일 내수용 생산업체에서도 수출을 의무화할 것을 지시하였다
1971년 대한민국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대중을 약 95만 표차로 이기고 3선에 성공했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종필은 1971년 선거에서 박정희 당선을 위해 국가예산의 10%인 무려 600억원이나 썼다고 밝혔다
1972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실시하였고 1월 27일 제3차 인력개발 5개년 계획을 확정하였다. 2월 9일에는 녹색혁명을 추진, 통일벼를 개발하였으며 쌀의 한국 자체생산 및 완전 자급자족은 1976년에 달성한다. 1972년 7월 4일 분단 이후로 최초로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1972년 박정희 정권이 헌법을 개헌한 일인 10월 유신을 단행해 제3공화국 헌법을 폐기하고, 긴급 조치권, 국회의원 정수 1/3에 대한 실질적 임명권, 간선제 등 막강한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6년 연임제의 제4공화국 헌법을 제정 통과시킨다. 긴급 조치 1호에서 9호를 발동하여 개헌 논의 일체를 금지하고, 정치 활동, 언론 및 표현의 자유에 제한을 가하였다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선포하기 직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를 두 차례 예고하고 배경에 대해 설명을 했다. 당시 남측 대표는 북측 대표를 만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 남북조절위원회 북측위원장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전달했다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 육성을 선언하였고 공업진흥청을 신설하였으며 3월 중화학공업의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온산, 창원, 여수~광양, 군산~비인, 구미 등 5개 대단위공업단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1973년 중반 기능공 양성정책을 수립하고 1973년 10월~1974년 12월에는 이리 수출자유지역을 착공하였다
1974년 8월 15일 국립중앙극장에 참석하여 광복절 29주년 기념사를 하였다. 그러나 관객을 가장하여 앉아있던 문세광이 난입, 연단을 향해 권총을 저격하였고 박정희를 쏘려 하였다. 그러나 귀빈석에 앉아있던 육영수가 문세광이 쏜 권총 두 발을 맞아 사망했다.
이때 충격을 받은 박근헤에게 영세교의 최태민이 접근한다.
1975년 4월 "영세교" 를 버리고 "대한구국선교회" 로 이름을 바꾸었다
대한구국선교회는 1976년 다른 단체와 규합하여 구국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구국봉사단 역시 1979년 다른 단체와 규합하여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새마음봉사단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한 뒤 1980년 11월 22일 자진 해산하였다.
1977년 1월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하였고 1978년 9월 26일 세계 7번째로 국산장거리 유도탄 등과 다연발로켓 시험 발사에 성공하였다.
대한민국의 인권문제는 박정희 유신정권의 존립을 뒤흔드는 문제였고, 박정희는 권력을 강화하고자 미국에 대한 로비를 진행했다.박정희는 기업인 박동선을 시켜 미국 상·하원 의원들에게 로비를 했다.1977년 10월 15일 미국 언론 워싱턴포스트는 한국 정부가 박동선을 내세워 의원들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한 기사를 보도했다. 박동선은 도주했고 1977년 12월 31일 한, 미 양국은 박동선이 미국 정부로부터 전면사면권을 받는 조건으로 증언에 응할 것이라는 합의를 보고, 공동성명을 냈다.
1978년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접선거로 제9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어 5선에 성공했다. 취임선서를 한 때는 12월 27일이었다. 박정희는 그날을 임시공휴일로 하고 통행금지를 하루 해제하며 고궁을 무료로 개방함과 아울러 1302명의 수감자를 가석방한다.
1979년 8월 9일 YH 무역회사의 여공들이 신민당사를 점거, 농성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8월 10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이 참석한 대책회의에서 강제진압 결정이 났고 박정희가 이를 재가했다
과정에서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해 사망하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당수 김영삼은 가택연금, 고은 시인, 인명진 목사 등 7명은 구속되었다. 김영삼은 이 사건과 박정희 정권의 탄압을 강도높게 비판했고, 박정희는 이를 계기로 김영삼을 제거하기로 하여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이 발생, 이는 부마 항쟁의 원인이 되었다
10월 16일부터 부산에서 시작된 부산마산 민주항쟁은 마산, 창원 등으로 확산되었다. 10월 16일 오전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의 개통식에 참석하였고, 싱가포르의 리콴유 수상이 내한하여 정상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10월 18일 새벽 0시 박정희는 부산직할시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1979년 10월 20일, 계엄령을 선포하여 부마 사태를 무력으로 진압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오전에는 충청남도 당진의 삽교천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귀경하였다. 10월 26일 오후 7시경 궁정동 안가에서 경호실장 차지철, 비서실장 김계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함께 가수 심수봉, 한양대생 신재순을 불러 연회를 하던 도중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저격당하여 김계원 비서실장에 의해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사망하였다. 당시 박정희의 나이가 한국 나이로 63세, 만으로 62세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10.26 사건이다.
새마음운동 조직은 87년 민주화 이후 부활했다. 1988년 ‘박정희 대통령·육영수 여사 기념사업회’가 발족하고, 이듬해 근화봉사단이 출범했다. 무궁화꽃을 일컫는 ‘근화’를 이름으로 내세운 봉사단으로, 1990년에는 회원이 40만 명으로 불었다. 국민의 정신 개혁을 목적으로 했던 새마음봉사단을 재건한 조직이다.
다음은 정사년에 사망한 순원왕후얘기이다. 왜 두 애기를 하느냐하면 이런 파쇼적 정권이 생긴 건 여기에 빌붙은 세력들때문인데 그들은 친일파로 알려져있다.친일파는 익히 다 아는 개념이고 여기에 그 뿌리를 소개코자 한다
1789년 6월 8일(음력 5월 15일)에 태어났다. 시파 계열이자 정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한 아버지 김조순의 영향으로 당시 왕세자였던 순조의 유력한 세자빈으로 떠올랐고 초간택과 재간택을 거쳐 사실상 세자빈으로 확정되었으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1800년) 최종적인 삼간택이 미루어졌고 결국 순조의 즉위 2년 뒤에 왕비로 책봉되었다.(10월 2일 (음력 9월 6일))
대왕대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거두고(1804년 2월 9일 (1803년 음력 12월 28일), 순조의 친정이 선포되자 순조의 장인이자 순원왕후의 아버지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은, 그때까지 정순왕후와 함께 권력을 쥐고 있던 김관주를 비롯한 경주 김씨의 벽파를 대규모로 숙청하고 김이익(金履翼)과 김이도(金履度) 등의 안동 김씨 시파를 등용하였는데 이들 중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많아 정순왕후 집권 이후 계속된 천주교 박해는 다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대규모 숙청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시발점이 되었다. 이후 순원왕후는 1809년에 맏아들인 효명세자를 낳았는데 효명세자는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순조의 많은 귀여움을 받았다. 당시 순조는 안동 김씨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1819년, 풍양 조씨인 조만영의 딸을 효명세자의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는데 훗날의 신정왕후이다.
1827년, 순조는 효명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였는데 이 대리청정 기간 동안 효명세자는 현재(賢材)를 등용하고 형옥(刑獄)을 신중하게 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으나 1830년, 대리청정 4년 만에 갑작스럽게 급서하였고 1834년에는 순조마저 승하하자 당시 8세였던 왕세손이 헌종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헌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를 익종으로 추존하고 순원왕후는 대왕대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는데, 헌종의 왕비를 자신의 친척인 김조근의 딸로 맞아들였으니, 이가 헌종의 정비인 효현왕후이다.
그러나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녀는 친가인 안동 김씨 세력과 결탁하여 장헌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손자 원범(元範)을 강화도에서 궁으로 데려와 덕완군(德完君)으로 책봉하고 자신과 순조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시키니 조선의 제25대 왕인 철종이다. 철종을 즉위시킨 뒤에도 그녀는 철종의 왕비를 다시금 안동 김씨인 김문근의 딸(철인왕후)로 맞아들여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이어나갔으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절정에 달하던 1857년 9월 21일(음력 8월 4일), 창덕궁 양심합(養心閤)에서 69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위치한 인릉(仁陵)으로 남편인 순조와 합장되어 있다.
이후 대한제국 광무(光武) 4년(1900년)에 남편 순조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로 추존되자 그녀도 함께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로 추존되었고 순조와 순원왕후의 인릉에는 '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라는 묘비가 새로 세워졌다.
5월 10일 - 인도에서 세포이의 항쟁이 일어나다.
7월 20일 - 스페인 출신의 호세 마리아 디아스(San Jose Mar?a D?az Sanjurjo) 신부가 베트남에서 순교하였다. (→Thomasian Martyrs)[1]
탄생 편집
2월 22일 - 독일의 물리학자 하인리히 루돌프 헤르츠.
4월 23일 -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가 루제로 레온카발로
5월 31일 - 교황 비오 11세, 259대 로마 교황.
6월 2일 - 영국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
7월 30일 - 미국의 사회학자, 경제학자 토스타인 베블렌
8월 20일 - 조선의 친일파 인사 송병준
9월 5일 - 러시아 과학자 콘스탄틴 치올콥스키
9월 15일 - 미국 27대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11월 26일 -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
사망 편집
2월 15일 - 러시아의 작곡가 미하일 글린카.
5월 23일 - 프랑스 수학자 오귀스탱 루이 코시
7월 15일 - 오스트리아의 음악가 카를 체르니
8월 4일 - 조선 순조의 정비(正妃) 순원왕후(純元王后)
9월 5일 - 프랑스의 사회학자 오귀스트 콩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