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폐쇄명령에 아이들도 항의
1945년 8월15일 조국이 해방된 후, 아마가사키(尼崎)내 각지에서 잇달아 <국어강습소>가 열렸다. 이듬해에는 조련초등학원(3년제) 8개교가 설립. (오쇼(大庄), 하마다(浜田), 오시마(大島), 무코(武庫), 쓰네마츠(常松), 다치바나(立花), 소노다(園田), 나가슈(長州))
그 가운데 4월 24일에 개교한 오쇼초등학원(교원 14명, 학생 350명)이 현재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의 전신이 된다. 48년에는 8개교가 통합 개편되었고, 이전에 강제 연행되어 온 조선인들이 숙소로 사용했던 후루카와 전기공업의 기숙사를 사들여 조련 아마가사키초등학원이 창립되었다. (본교 : 오쇼, 분교 : 모리베, 소노다, 다치바나, 오시마)
-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 교직원 일동(1960년 5월) -
아마가사키를 포함한 한신(오사카~고베)지역 학교의 특징은 해방이 되자 서둘러 조선인이 소유한 토지에 독립 교사를 세운 것이다. 그 때문에 48년에 학교 폐쇄명령이 내려졌을 때도 직접적인 학교 양도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1949년 10월 일본정부와 GHQ(미 점령군사령부)는 <조선인학교 조치방침>을 정해 조선인의 의무교육은 일본의 공립학교에서 실시하고, 무인가 조선인학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등 각의 결정 후 효고현 내 40개교에 폐쇄명령을 내렸다.
아마가사키에서는 교원과 동포들이 연일 시 당국에 항의했다. 또 조선인학교를 공립학교의 분교로 사용할 수 있도록 강하게 요청했다. 한편, 동포들은 40여 일 간 학교에서 숙식하며 당국의 강제 접수로부터 학교를 지켜냈다.
분교 인가 획득의 성격상 당국의 개조명령이라는 도발을 피하기 위해 교원들은 일단 교단을 내려왔고, 6학년 학생들이 저학년 아동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가족의 동의도 얻지 않고 조속히 283명의 조선인 아동이 가수용된 무코(武庫)소학교에서는 전쟁이 끝난 후라 교실이 부족해 2부제 수업이 이뤄졌는데, 급격하게 아동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일본인 교사들도 대응이 어려웠다. 강제로 일본학교로 전교한 조선인 아동들은 12월 2일에 “일본어는 모른다, 조선말로 가르쳐라” “일본어는 이제 끝났다” “우리들의 선생님을 따돌렸다” “일본의 교육은 받지 않는다”고 외치며 240명이 스크럼을 짜고 독립가를 부르며 항의했다.
-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 새 교사가 건설되는 모습(1958년) -
12월 4일, 시 당국과 조선인 아동보호자대표와의 회담에서 조선인 측의 요망이 전면적으로 받아들여져 <시장이 책임을 지고 모리베(森部)에 있는 이전 조선인학교를 사용해 가분교를 개설한다> <분교에는 조선인 교원을 채용한다>는 사항이 합의 되었다. 분교로서 인가를 획득한 것은 전국에서 최초 케이스로, 그 후에 도쿄, 가나가와, 아이치 지역 등으로 이어진다. <4.24 한신교육투쟁―민족교육을 지킨 사람들의 기록 1988>
동포들의 손으로 중급학교 설립
그 후 15년 이상 아마가사키 시의 조선학교는 일본학교의 분교 형태로 이어졌는데, 이같은 상황에서도 조선인 교원이 교단에 서서 민족교육을 견고하게 지켜갔다.
5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귀국운동이 활발해진다. ‘조선말을 배워 조국으로 돌아가자’는 표어가 내걸렸고, 아동수가 가장 많았던 오쇼 분교에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교원 6명, 학생 48명)가 창립되는데, 중급부를 포함하기에 충분한 환경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런 가운데, 동포들 사이에서 중학교 교사를 단독으로 세우자는 이야기가 진행되어 학교건설위원회가 발족한다. 상공인이었던 건설위원회 김호위(金虎衛)위원장을 비롯해 많은 동포들이 자금을 제공해 건설비가 조달되었다.
- 중등교육 실시 20주년 기념 학생 축하집회(1966년10월) -
59년 3월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당시 교장 임병도(林炳道))가 2층 목조건물 교사로 완성되었다. 그 이듬해부터 이 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한 동포 이대희(李大熙 당시 28세)씨는 교사를 배경으로 촬영한 교원들의 집합사진을 보면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단독으로 중급부를 건설한 것은 한 층 더 민족교육의 발전을 바라는 동포들의 심정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간절히 염원하던 것이었다. 특히 김호위 건설위원장의 많은 자금 제공이 큰 힘이 되었다. 진심으로 민족교육에 대한 열의가 강한 분이었다.”
같은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에서 교원을 한 이대희씨의 아내 이옥례(李玉禮 당시32세)씨도 당시 학생과의 추억을 이야기했다.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서클 활동으로 바느질을 가르쳤어요. 아이들이 만든 작품을 문화제에서 전시하자 보호자들의 반향이 컸고, 조선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을 모두 자랑스럽게 여겼지요.”
- 이대희씨와 이옥례씨 부부 -
분교에서 자주학교로
조선학교를 자주학교로 만들기 위한 요청운동은 65년 9월부터 전개되었다.
일본 시민과 보수층의 지지까지 얻기 위해 선전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같은 해 6월에 한·일기본조약이 조인된 이후, 일본정부의 조선학교에 대한 압력이 더해지는 가운데, 시 당국과 교섭을 진행해 결국 분교를 폐지하고 자주학교를 만드는데 이르렀다.
65년 7월 18일, 오쇼, 오시마, 모리베의 각 분교가 통합되어 아마가사키 시(市 ) 소유지(현재의 아마가사키 조선초중급학교가 있는 니시 다치바나쵸)에 신교사가 건립된다. 그리고 다음해 4월 1일부터 <오시마 조선초급학교>라는 이름으로 자주학교로서 운영을 시작한다.(오시마 조선초급학교 연혁사, 66년)
이옥례씨는 그 후 자주학교가 된 다치바나 조선초급학교와 소노다 조선초급학교에서 교단에 섰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운영자금의 조달이었습니다. ‘부모로서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힘을 보태 주십시오, 100엔도 좋고, 200엔도 좋으니 기부해 주십시오’ 하고 호소하며 모든 학부형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교원의 급료조차 거의 나오지 않는 정말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 때부터 지원자도 늘어나고, 학생 수도 늘어 갔습니다.”
1967년 4월에 유치반(교원 2명, 원아 50명)이 신설 되었고, 10월에는 아마가사키 조선중급학교와 통합되어 현재의 교명이 되었다. 동시에 학교 건설위원회 이병행(李炳行) 위원장을 중심으로 많은 지역 동포들로부터 지원이 모아져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새 교사가 건설되었다.
첫댓글 번역하시는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많이 배우고.. 잘 읽고 있습니다.
저도 감사드립니다. ^^
고맙습니다.지금 제 친구가 교장선생님을 하니 감회가 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