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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소용돌이에 휩싸인 유럽은 빈 회의(1815년)를 통해 어느 정도 혼란을 수습했으나, 여러 제국의 몰락으로 불안한 징후를 보이는 가운데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 포르투갈, 에스파냐는 몰락하고, 독일, 미국, 일본 등의 신흥 열강이 대두하게 되었다.
음악사적으로 이 시기의 음악은 오스트리아의 빈이 주도하였는데, 빈의 유태계 재력가들로부터 환대받지 못한 리스트와 바그너는 빈과 결별하고 자국(독일)의 바이로이트에 자신들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였다.
슈베르트와 베버의 새로운 음악적인 요소를 통해 시작된 낭만주의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인 1908년에 쇤베르크의 ‘제2 현악 4중주곡’ 으로 무조 음악이 시작되면서 종결되었다고 할 수 있다.
1. 낭만주의 시대의 음악
❶ 낭만주의 음악은 개인주의를 바탕으로 주관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❷ 낭만주의 음악은 문학과의 결합에 의해 극적 구성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음을 이해할 수 있다.
❸ 낭만주의 음악은 전통적 양식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이 가속화되어 조성 체계의 붕괴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다.
(1) 19세기의 시대적 배경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엽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제국주의적 경향이 성행했던 시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100여 년간은 인류 발전상 극히 착잡한 양상을 드러냈던 시대였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사람들의 마음에 환멸감을 일으켰다. 계몽주의 최고의 성과가 이성에 의한 비합리적인 정치 체제의 타파였는데, 혁명을 통하여 드러난 인간성은 절망스러운 것이었으며 그들은 모든 원리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불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후 유럽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의 후유증을 1815년 빈 회의에서 수습했으나, 여러 제국의 몰락으로 불안한 징후가 보였다. 빈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에서는 회의가 난관에 부딪히면 향연과 무도회를 베풀어 국면을 타개하고자 했으며, 빈 체제가 확립된 이후에는 유럽 각지에서 일어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였다.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와 독일의 야욕은 유럽 대륙에서 전쟁의 도화선에 불을 댕기고, 이것은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바야흐로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포르투갈·에스파냐는 몰락하고, 독일·미국·일본 등의 신흥 열강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정신적 폐허 위에 자신의 심성에 맞는 문화를 이룩하려고 한 개인주의가 싹텄고, 그 결과 자아에 대한 확인과 그 내부로의 침잠이 시작되었다.
※ 낭만주의
낭만주의(romanticism)는 원래 영웅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중세 문학을 지칭하는 로망스(romance)에
서 유래하였다.
Der Wiener Kongress
▲ 빈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는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2) 19세기 음악 문화의 배경
낭만주의 운동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계급보다 개인의 고유함을 더욱 중요하게 여긴 계몽주의 사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나아가 고전 시대 계몽주의가 중시했던 객관적인 논리나 이성보다는 주관적인 감정의 세계를 다루었으며, 감정에 호소하는 다양한 표현 방식을 위해 추악한 가치도 대담하게 인정하고자 하였다. 낭만주의 영향으로 자국의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전설적이고 공상적인 세계, 옛 영웅적인 인물이나 사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또한, 19세기가 지니고 있던 불안감으로 말미암아 현실에 대해 절망을 느끼고, 공상이나 환상의 세계에서 구원을 찾으려는 경향이 강해져서 환상의 세계를 희구하고 이를 노래했다.
개인주의적 경향과 함께, 하층민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그려 낸 사실주의와 선조 작곡가들을 발굴하고 자국의 역사를 존중하기 시작한 역사주의, 같은 언어와 문화로 결합하고자 하는 민족주의 움직임도 나타났다.
특히, 음악에서의 역사주의와 민족주의는 모국어를 존중하는 태도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음악에 대한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모국어에 의한 문학과의 결합은 음악에서 다시 없는 큰 힘이 되었다.
※ 19세기에는 다양한 미학적 운동이 일어났는데 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반까지는 낭만주의 운동이 꾸준히 유지되었으며, 19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사실주의, 역사주의, 민족주의 운동의 경향이 나타났다.
(3) 낭만주의 음악의 경향
19세기 음악에서 화성은 계속 급격한 진보를 통해 확장되고 세분화되었고, 세기말에는 마침내 전통적 조성 체계의 붕괴 상황에 직면했다. 낭만 시대의 선율은 고전 시대의 명확한 윤곽에서 벗어나 더욱 복잡해지고 불규칙하게 되었으며 호흡은 길어졌다. 그리고 음향과 관현악법은 낭만주의 음악의 특색을 잘 드러내 주는 영역이 되었다.
또한, 19세기 말부터는 음악사 서술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옛 작곡가의 전기도 발표되었다. 특히 바흐(J. S. Bach)와 팔레스트리나(G. P. Palestrina)의 음악이 19세기 음악에 새롭게 수용되었다.
19세기 음악 문화는 여전히 귀족과 부유한 시민의 개인적 관심에 의해 주도되었으나, 1850년대 이후부터는 점점 더 일반 시민이라는 이름 없는 대중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 많은 예술 작품의 성공과 실패가 이들에 의해 좌우되게 된 것이다.
※ 음악사 서술
포르켈은 오랫동안 잊혀졌던 바흐 작품들을 연구하여 바흐 전기를 발표하였다(1802). 또한 ‘멘델스존에 의한 ‘마태 수난곡(1829)’ 의 연주는 바흐의 음악을 폭넓게 청중에게 소개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러한 활동을 계기로 바흐의 음악은 비로소 독일과 유럽 전음악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4) 낭만주의 시대와 음악 도시 빈
19세기 음악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의 빈(Wien)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시대를 통틀어 빈은 단순한 도시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전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하이든(F. J. Haydn; 1732~1809), 모차르트(W. A. Mozart; 1756~1791), 베토벤(L. v. Beethoven; 1770~ 1827) 등은 그들의 중요한 활동지가 빈이었기 때문에 이들을 묶어‘빈악파’라고 부르기도 하고 이 시대를 아예‘빈 고전파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후 프란츠 요제프 황제(1830~1916)가 즉위하여 전제주의적인 태도를 완화하면서 빈은 다시 19세기 동안 음악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해나갔다.
한편, 빈은 시대에 맞는 적절한 교육 기관을 설립하면서 음악 전문가 교육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여 19세기를 음악 전문가의 시대로 바꾸어 놓았다.
이런 변화는 19세기 말까지 연주회장 공연이 꽃피게 되는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예술 전문인의 인기 체제가 확고하게 정착되었다. 청중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연주 기교에 갈채를 보냈고, 기술적으로 음악계는 더욱 전문적이고 까다로운 훈련에 돌입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빈 음악계의 신흥 사업가 후견인들은 부유했던 귀족층 몰락의 공백을 채우게 되는데, 이때 부를 키우고 있었던 유대인 사업가들이 대거 이 공백을 메우게 된다. 그러면서 이들은 음악, 미술, 연극 및 교육 분야에서 유대인들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게 된다. 이런 빈의 풍토가 결국은 바그너의 반유대적이고 증오에 찬 독설을 남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 빈에서 1846년 이래 평론가로 명성을 날리던 에두아르트 한슬릭(E. Hanslick)은 예지가 번득이는 신랄한 필치로 빈의 음악 활동을 언급하며 음악계의 기준을 마련해 나갔다. 한슬릭은 브람스를 옹호했으며, 바그너와 리스트를 중심으로 한 신독일파를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그의 기준은 국외의 여론을 형성하는 데도 중심이 되었다.
Caricature du compositeur Franz Liszt par Lorentz.
▲ 리스트를 비웃은 프랑스의 풍자화
(5) 리스트와 신독일악파
오스트리아의 빈은 고전·낭만 시대의 음악을 이끌어갔지만, 한편으로 리스트(Franz Liszt)와 바그너(W. R. Wagner)는‘신(新)독일악파’라는 이름이 붙여질 만큼 이 시대의 다른 국면을 보여 주었다.
리스트는 독일의 바이마르에서‘미래의 음악’이라는 글을 통해 기존 전통의 답습이 아닌 대담한 형식의 개혁을 주창했다. 그는 기존의 음악계가 궁중, 극장, 대학 할 것 없이 하나로 유착되어 음모와 검열을 일삼고 있다고 비판하고, 빈의 문화와는 달리 열성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들이나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이 연주될 수 있도록 주선하는 운동을 했다.
19세기 말에는 많은 제3국의 작곡가들이 그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 당시 진보적이었던 베를리오즈나 바그너를 보호한 것도 리스트였다. 리스트가 1848년부터 1861년까지 바이마르에서 추구한 음악의 해방을 위한 노력은 큰 결실을 보았는데, 기존 음악계와의 갈등은 심했지만 개방성 있는 그의 예술관은 그에게 바이마르의 ‘신독일악파’를 확립한 사람으로서 역사적 위치를 부여했다.
리스트는 1865년에 수도사가 되면서 세상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는데, 수도사가 되면서 교회 음악에서도 획기적인 기법을 쌓았다. 리스트의 진보적인 생각들은 음악극을 만들어 새로운 시대의 우상이 된 바그너, 그리고 새로운 화성과 어법을 구사한 신독일악파 계열의 후고 볼프로 이어졌다.
※ 리스트
리스트는 1811년에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려 했던 그는 이국인이란 이유로 입학이 거절되었으나, 훌륭한 연주 솜씨로 파리 사교계의 스타가 되었으며, 유럽 음악계에 그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 신독일악파의 시작은 순수하게 음악적이었지만 이후에 이것을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6) 낭만주의 시대 음악의 장르별 특징
낭만주의 시대의 피아노는 19세기가 낳고 19세기를 대변하는 악기라고 할 수 있다. 피아노의 개량과 발달로 피아노 음악과 피아노 반주에 의한 성악(독일 리트)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오케스트라 곡은 빈 전통의 절대 음악과 신독일악파 중심의 표제 음악으로 양분되었다. 특히 바그너를 주축으로 한 신독일악파는 오페라에 대치하는 개념으로 총체 예술로서의 음악극을 선보였다. 관현악법적으로는 18세기 오케스트라가 목관의 역량을 대거 확장시켰다면, 19세기 낭만주의 시기에는 금관 악기의 역량이 신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 19세기 초의 오스트리아는 정치가 메테르니히의 보수 정책의 영향으로, 지식 계급은 현실에서 눈을 돌려 예술을 도피 장소로 삼으려했다. 또한, 시민 계급은 현실에 안주하여 즐거움을 추구했다.
[1] 성악
1) 독일의 리트
피아노 반주에 의한 독창곡은 원래 가정의 음악회나 사교 모임을 중심으로 발달한 장르였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예술적 장르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는데, 독일의 예술가곡인 리트(Lied)는 연가곡(song cycle)으로도 많이 작곡되었으며, 형식과 규모가 확장되어 연주회용이나 오케스트라 리트도 작곡되었다.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1~1828)는 영웅적인 음악가로서의 활동보다 오히려 스스로 즐기면서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해 주려는 의도로 음악을 만들었다. 슈베르트의 이러한 생각은 19세기 초의 사회적 맥락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짧은 생애였음에도 998개나 남아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633개의 리트이다. 대표적인 작품은 연가곡인‘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Die scho¨ ne Mu¨ llerin; 1823)’, ‘겨울 나그네(Winterreise; 1827)’가 있다. ‘실을 잣는 그레첸(Gretchen am Spinn rade)’, ‘들장미(Heidenro¨slein)’, ‘마왕(Erlko¨nig)’, ‘자장가(D. 498)’,‘방랑자(Der Wanderer)(D. 489)’등도 현재까지 많은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은 클라라와 결혼하던 1840년, 그의 300여 곡의 가곡 중 138곡의 리트를 집중적으로 작곡했다. 그때까지 주로 피아노 곡을 작곡했던 슈만은 가곡에서 피아노 파트
에 많은 비중을 두어, 가곡을‘목소리와 피아노를 위한 이중주’로 평가받게하였다.
한편, 브람스를 반대하며 열렬하게 바그너를 추종했던 휴고 볼프(Hugo philpp Jakob Wolf; 1860~1903)는 음악사적으로는 바그너 계통의 신독일악파에 속하며, 300곡을 넘는 리트가 창작의 중심을 이룬다. 그는 시의 운율을 넘어선 언어의 리듬에 밀착한 리트를 추구하였으며, 시인별로 6개의 리트 모음집을 작곡하였다. ‘뫼리케 시에 붙인 노래(Gedichte von Eduard Mo¨rike; 1889)’, ‘아이헨도르프 시에 붙인 노래(Gedichte von Joseph v. Eichendorff; 1889)’, ‘괴테 시에 붙인 노래(Gedichte von J. W. von Goethe; 1890)’,‘ 스페인 리트모음집(Spanisches Liederbuch; 1891~1892)’, ‘이탈리아 리트 모음집(Italienisches Liederbuch)’이 그것이다.
세기말의 대형화 경향에 따라 관현악 반주를 가진 리트도 등장하였는데, 이러한 오케스트라 리트는 19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하였다. 대표적인 작곡가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1949)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이다.
바그너의 ‘베젠동크의 노래’ 와 말러의 연가곡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는 피아노와의 성악곡을 작곡가 자신이 관현악과 성악곡으로 편곡한 것이다.
※ 독일 리트 중 대표적인 연가곡
㉠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 ‘겨울 나그네’,‘ 백조의 노래’
㉡ 슈만의 ‘시인의 사랑(Dichterliebe, 1840)’,‘ 여인의 사랑과 생애(Frauen liebe und-leben; 1840)’
㉢ 바그너의 ‘베젠동크의 노래(Wesendonk-Lieder,1857)’
㉣ 말러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Lieder eines fahrenden Gesellen; 1883~1885)’
Oil painting of Franz Schubert by Wilhelm August Rieder (1875), made from his own 1825 watercolor portrait
▲ 슈베르트
A Schubert Evening in a Vienna Salon
▲ 슈베르트가 빈 살롱에서 연주하는 모습
Robert Schumann, lithograph by Josef Kriehuber, in 1839
▲ 슈만
※ 19세기 프랑스의 예술가곡을 멜로디(m´elodie)라고 한다. 베를리오즈, 구노, 마스네, 생상, 포레, 드뷔시, 라벨은 감각적인 멜로디와 화성을 선보였다.
[2] 오케스트라 음악
19세기 교향곡은 고전적 교향곡의 전통 계승과 새로운 낭만적 표현의 추구라는 두 가지 경향 사이에 있었다. 전자는 음악적 발상 중심의 절대 음악적인 교향곡이었으며, 후자는 낭만주의에서 새롭게 중시된 문학 등의 음악 외적요소를 도입한 ‘표제 교향곡(program symphony)’과‘교향시(symphonic poem)’였다.
1) 교향곡
절대 음악을 고수하는 낭만주의 교향곡은 전반적으로 고전 시대의 베토벤 교향곡의 모델에 따라 슈베르트, 멘델스존, 슈만, 브람스, 부르크너에 의하여 이어졌다.
빈에서 태어나 많은 가곡을 작곡했던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는 가사에서 독립된 절대 음악 장르로서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9번 교향곡(The Great C Major Symphony; 1825~ 1828)’과‘미완성 교향곡(Unfinished)’이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멘델스존(Jakob Ludwig Felix Mendelssohn; 1809~1847)은 지휘자 겸 행정가로서 사회적 명성을 쌓았으며, 바흐의 ‘마태 수난곡’ 을 작품 초연 100주년 기념으로 무대에 올려 독일에서의 옛 음악 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멘델스존은 다섯 개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는데 1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제목을 갖고 있다.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법학을 공부했으나 음악의 길을 택하였다. 그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가지고 있었으나 손가락이 마비되어 작곡가 및 음악 평론가로 활동했는데, 1835년에 창립한‘음악신보
(Neue Zeitschrift fu¨r Musik)’에 브람스를 극찬하는 기사를 실어 브람스를 세상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슈만은 네 개의 교향곡을 작곡하였는데, 그중 교향곡 4번(1841~1851)은 악장 간의 연계성을 강조하기 위해 각 악장을 쉼없이 이어 연주하도록 구상하였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와 브루크너(Josef Anton Bruckner; 1824~1896)의 등장은 1860년대 이후 다시 화려한 빈 절대 음악의 전통을 지키는 계기가 되었다. 브람스는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각광 받았고, 네 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는데 그중 1번은 베토벤 10번 교향곡으로 불릴 정도로 베토벤 음악을 모범으로 삼았다. 그러나 1883년과 1885년에 작곡된 3번과 4번에서는 브람스 특유의 철학적이며 사색적인 음악 어법이 나타난다.조성 음악 안에서 가능한 모든 화음에 대한 시도와, 대위법과 바로크 작곡가들에 대한 탐구 정신이 반영된 헤미올라나 복합 리듬, 그리고 이중 선법 등이 그것이다.
뛰어난 오르간 연주자 브루크너는 아홉 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는 고전적 4악장 형식을 고수했으며 각 악장의 유형과 형식도 지켰고, 관현악법에 있어서는 베토벤의 중·후기 작품 모델을 따랐다.
한편 차이콥스키는 특히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존경했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를 바탕으로 러시아적 리듬과 민속 선율 등을 첨가하여 독자적 양식을 구축하였다. 특히 그의 고뇌를 반영하며 자신의 작품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여겼던 마지막 교향곡 ‘비창’1악장에서는 러시아 교회의 장례 미사 성가를 인용하였고, 2악장에서는 첼로가 러시아적 박자 왈츠 선율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 절대 음악
순수한 예술성만을 위하여 작곡한 음악. 시나 회화 따위의 다른 예술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지 않는다.
※ 낭만주의 교향곡의 뿌리는 베토벤의 작품에서 찾을 수 있다.
※ 멘델스존의 교향곡
2번 찬미가(Lobgesang)
3번 스코틀랜드 교향곡(Schottische symphonie)
4번 이탈리아 교향곡(Italienisch symphonie)
5번 종교 개혁 (Reformation)
※ 슈만의 교향곡
1번‘봄’ (Fru¨ hling Symphonie)
3번‘라인(Rheinische)’
Johannes Brahms ▲ 브람스
Tchaikovsky ▲ 차이콥스키
2) 표제 교향곡과 교향시
19세기의 표제 음악(programme music)은 베를리오즈와 리스트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주제의 출현은 순수한 음악적 구성 원리보다 음악 외적 아이디어에 의해 전개되었다.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가 지은 ‘환상 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 1830)’ 은 낭만 시대 교향곡의 전형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어느 예술가의 생애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5개의 악장에는 각각 ‘꿈과 정열’,‘ 무도회’,‘ 들의 풍경’,‘ 단두대로의 행진’,‘ 마녀들의 밤의 향연과 꿈’이라는 5개의 표제가 붙어 있다.
실연한 젊은 예술가가 절망에 빠져 극약을 먹고 무서운 환상을 본다는 예제도 붙어 있다.
베를리오즈는 이 곡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특정한 음형으로 나타낸 이데픽스(ide´``e fixe, 고정 악상)를 사용하여 전곡의 극적 진행을 통일시키고 있다. 이 곡은 최초의 낭만파 표제 음악 작품으로 리스트와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헝가리 태생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베토벤을 숭상했고 그의 동상 건립을 위한 세계 연주 여행을 처음으로 시도했다. 1823년에 가족과 함께 파리에 정착한 이후 피아니스트로 절정기를 맞지만, 연주자로서의 생활을 접고 1847년 독일 바이마르로 이주하여 진보적인 작곡가로 활동하며 신독일악파를 결성하였다. 바이마르 시절에 리스트는 음악적인 시(poem)란 뜻을 지닌 교향시(symphonic poem)를 창안하였는데, 이것은 드러내고자 하는 문학적 내용을 시적으로 압축하여 밀도 있게 표현한 단악장의 관현악곡이다.
그는 ‘전주곡(Le Pre´ludes; 1848)’, ‘마제파(Mazeppa; 1848~1951)’, ‘햄릿(Hamlet; 1858)’등 13편의 교향시를 작곡하였다. 리스트는 ‘파우스트 교향곡(Eine Faust-Symphonie in drei Charakterbildern; 1854~1857)’ 과 ‘단테 교향곡(Eine Symphonie zu Dantes Divina Commedia; 1855~1856)’같은 다악장의 표제 교향곡도 작곡하였다.
※ 베를리오즈는 의학 공부를 위해 파리에 왔다가 음악에 심취하여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환상 교향곡’외에도 ‘이탈리아의 해롤드’, ‘로미오와 줄리엣’ 과 같은 드라마적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Caricature of Conductor Hector Berlioz by Grandville
▲ 베를리오즈가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사용한 것을 풍자한 당대의 그림.
※ 리스트의 아버지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치 가문의 집사였다. 리스트의 비상한 재능을 5~6세에 발견한 아버지는 집을 비엔나로 옮기고 체르니(Karl. Czerny)에게 리스트를 맡겼으며, 리스트의 기초는 여기에서 다져졌다.
※ 문학 등 음악의 외적 요소를 중시하던 리스트와 바그너는 신독일악파(Die Neudeutsche Schule)를 결성하였다.
Oeuvre van Franz Liszt
▲ 리스트
[3] 19세기의 오페라
1) 이탈리아의 오페라
이탈리아에서는 19세기 전반에도 각 도시에 오페라가 성행했으며, 아름다운 아리아가 중심을 이루는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로시니(Antonio Rossini; 1792~1868),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로 이어지는 19세기~20세기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그들의 전통적인 오페라 세리아와 오페라 부파의 토대 위에 전문적 기교가 극대화된 오페라의 최고 걸작들을 남겼다.
로시니는 18세기 오페라 전통을 중심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 작곡가이다. 그는 1816년에 보마르쉐(Pierre de Beaumarchais; 1732~1799)의 대본에 의한‘세비야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를 작곡하였다. 그는 관현악 에피소드나 합창을 삽입함으로써 극의 연속성을 이어 갔고, 관현악 반주에 의한 레시터티브 아콤파냐토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였다.
벨리니는 비극 오페라에 탁월한 감각을 선보였는데, 이것은‘노르마(Norma; 1831)’와‘몽유병자 여인(La sonnambula; 1831)’에서 잘 드러난다. 벨리니는 벨칸토(bel canto) 기법을 극대화하여 당대에 큰 인기를 누렸으며, 프리마 돈나의 전문적 스타성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도니체티는 70여 곡에 이르는 많은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희극 오페라‘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 1832)’과 비극 오페라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 1835)’가 가장 많이 알려져 있다. 화려한 목관과 금관의 음향을 비롯한 화려한 관현악법은 이후 베르디에게 이어졌다.
주세페 베르디에 이르러 이탈리아 오페라는 최대 절정기를 맞는다. 인간의 성격·상황과 운명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베르디는 인간의 성격과 상황 묘사를 집중적으로 추구했고, 등장인물들의 심리적 특성은 그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었다. 시기에 따른 그의 작품 경향은 다음과 같다.
제1기(1840년대까지)는 정치적 소요를 주로 다루었는데 주요 작품으로는 ‘나부코(Nabucco; 1842)’가 있다. 인간관계를 심층적으로 다룬 제2기(1849~1854)의 작품으로는 ‘일 트로바토레(Il Trobatore; 1853)’와‘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 1853)’가 있으며, 프랑스 그랑 오페라의 영향을 받은 제3기(1855~1871)의 작품은 ‘돈 카를로스(Don Carlos; 1867)’와‘아이다(Aida; 1871)’가 있다. 셰익스피어 문학에 기초한 ‘오텔로(Otello; 1885)’와 ‘팔스타프(Falstaff; 1893)’는 그의 마지막 오페라이다. 그는 분명하고 뚜렷한 구조와 유연하고 표현력이 강한 선율을 통해 이탈리아 고유의 음악적 특성을 세계에 알렸다. 베르디의 오페라는 항상 당대 인간과 사회를 바탕으로
인물 설정을 했으며, 아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직접 화법으로 인물의 내면을 그려냈다.
19세기 말에는 이탈리아 오페라에도 사실주의(베리스모; verismo) 경향들이 나타나는데, 푸치니는 이탈리아 오페라 전통을 이어받은 작곡가로 꼽힌다. 베리스모란 ‘진실(vertas)’에서 비롯된 말로 낭만주의적 과장이나 꾸밈이 없이 현실적인 소재와 음악적 특징을 가진다. 또한 일반인, 하층민의 현실적 이야기를 다루며, 소음, 군중 장면, 사실적 대화 등을 음악적으로 처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의 대표작은 ‘라 보엠(La Boem; 1896)’,‘ 토스카(Tosca; 1900)’, ‘나비 부인(Madam Butterfly; 1904)’과 ‘투란도트(Turandot; 1926)’이다.
‘ 나비 부인’과‘투란도트’는 각각 일본과 중국을 배경으로 한 것이며, 나머지 작품들은 하층민이나 보헤미안에 대한 내용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의 오페라는 베리스모 오페라로 분류된다.
▲ 로시니의 커리커처
식도락가로 유명한 로시니는 나중에 직접 요리를 배워 요리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 세비야의 이발사
로시니는 파이지엘로(G.Paisiello; 1740~1816)의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1782)’를 보고 같은 이름의 작품을 작곡하였으며(1816), 모차르트 역시 같은 작품을 보고 그 후속으로 보마르쉐 대본의 ‘피가로의 결혼’을 작곡하였다(1786).
※ 벨칸토
벨칸토란 ‘노래로 울게 만든다’ 란 뜻으로, 극적으로 화려하며 기교적인 노래 연주 방법을 말한다.
※ 주세페 베르디
주세페 베르디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으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가담하면서 ‘나부코’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큰 성공을 거두어, 베르디는 민족주의자의 상징이 되었으며 통일 이탈리아가 세워진 후 그는 새 정부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 르네상스~바로크 시대의 클라우디오 몬테 베르디(C.Monte Verdi, 1567~1643)와 낭만주의 시대의 쥬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 모두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오페라 작곡가이다.
※ 푸치니의 많은 작품들은 20세기에 작곡되었으며, 그의 음악 어법과 작품 내용은 이전 작곡가들에 비하여 근대적이다.
2) 프랑스의 오페라
프랑스의 오페라는 대규모 합창, 호화스러운 무대, 발레의 전통을 이어 갔다.
19세기에 이르러 그랑 오페라(Grand ope´`ra), 오페라 코미크(ope´`racomique), 서정 오페라(ope´`ra lyrique)의 세 가지 유형이 굳어졌는데, 그랑 오페라는 역사적이거나 낭만적인 비사실적 주제로 구성되었다.
오페라 코미크는 그랑 오페라와 대립적 성격을 띠었는데 일상적이고 희극적인 내용 위주였으며, 희극적 내용이 아니더라도 레시터티브 대신 대사로 처리한다면 오페라 코미크라고 했다. 1850년 이후 그랑 오페라와 오페라 코미크의 중간 형태인 서정 오페라가 새롭게 나타났다.
서정 오페라는 인간의 내면적인 심리 상황이나 개인적 운명을 주제로 삼았고, 음악적으로는 서정성과 감정 표현을 강조하고 대화의 방법으로 레시터티브를 사용하였다. 마이어 베어(Giacomo Meyerbeer; 1791~1864), 베를리오즈(Louis-Hector Berlioz; 1803~1869), 구노(Charles Fran?ois Gounod; 1818~1893), 비제(Georges Bizet; 1838~1875) 등이 오페라 작곡가로 활동했다.
베를리오즈는 ‘트로이 사람들(Les Troyens; 1858)’이라는 5막의 그랑 오페라를 작곡하였는데 이 작품은 륄리, 라모, 글루크, 마이어베어를 잇는 프랑스 전통성을 계승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
※ ‘위그노’는 가톨릭을 옹호하던 왕실과 신교도의 대학살을 초래한 위그노 전쟁을 주제로 한 그랑 오페라로연주 시간이 5시간이 넘는 대작이었다.
※ 구노의 ‘파우스트’ 와 비제의 ‘카르멘’은 모두 레시터티브 대신 대사로 이루어진 오페라 코미크였으나 후에
레시터티브를 붙여 서정 오페라로 바뀌었다.
※ 1875년 첫 상연 후 지금까지 유명하고 대중적인 오페라로 자리하고 있는 비제의 ‘카르멘’은 초기에 귀족들
의 취향과 맞지 않아“외설적이고 저속하다.”라는 혹평을 받았다.
3) 독일의 오페라
낭만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확산된 독일에서는 철학적·신화적·종교적인 사고에 바탕을 둔 낭만주의 오페라가 크게 발전했다. 초자연성과 죄와 불행한 운명에 빠진 인간의 구원, 권선징악의 주제를 다루는 독일 오페라는 베버(Carl Weber; 1786~1826),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 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베버는 ‘마탄의 사수(Der Freischu¨ tz; 1821)’, ‘오이리안테(Euryanthe; 1823)’,‘ 오베론(Oberon; 1826)’을 작곡하였는데 ‘마탄의 사수’에서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무대와 효과적인 음악으로 19세기 독일 최초의 낭만주의 오페라를 선보였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음악이 오페라의 모든 다른 요소와 유기적인 관계가 되도록 힘썼으며, 오페라 서곡이 오페라 내용과 음악을 함축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바그너에게 영향을 끼쳤다.
바그너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적 깊이를 가지고 있었으며, 오페라 외에도 각종 저술과 이론으로 19세기 독일의 문화와 예술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한 인물이다. 그는 모든 대본을 직접 집필하였으며, 그의 작품은 저주와 축복, 죄와 구원 등 서로 대조되는 관념과 열렬한 감정 표현, 깊은 화성과 관현악 색채를 특징으로 한다.
바그너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er fligende Holla¨ nder; 1840~1841)’, ‘탄호이저(Tannha¨ user; 1842)’, ‘로엔그린(Lohengrin; 1845~1848)’을 지은 이후 정치적인 이유로 스위스로 망명을 가게 되었다.
이미 1830년대 초부터 음악을 비롯한 다른 모든 요소들이 극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종합 예술 형식을 추구했던 그는 1851년에 음악과 극, 그 외의 모든 예술적 요소를 동등한 위치에서 조명하고 이 장르를‘음악극(Musikdrama)’이라고 불렀다. 음악극의 특징은 으뜸화음으로의 해결 없이 기악과 성악의 성부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무한 선율과, 반음계 주의와 변화 화음 그리고 전곡을 통해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라이트모티브(Leitmotiv) 기법이다.
음악극에 대한 자신의 신념에 따라 4개의 연작 음악극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ungen)’의 대본을 썼으며 이 대본을 바탕으로 1853년부터 1874년까지‘라인의 황금(Das Rheingold)’,‘ 발퀴레(Die Walku¨re)’,‘지크프리트(Siegfried)’, ‘신들의 황혼(Die Go¨ tterda¨mmerung)’의 오페라 연작을 썼다. 막이 진행됨에 따라 시종일관 계속해서 흐르는 무한 선율을 들을 수 있다.
바그너는 음악극 외에도 비극적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und Isolde; 1857~1859)’와 희극적 오페라‘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Die Meistersinger von Nu¨ rnberg; 1861~1867)’등을 썼다. ‘트리스탄과 이졸
데’의 서곡은 19세기 말의 화성 어법을 설명하는 데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음악이며, 주제의 화음은 조성의 해체를 알리는 역사적인 화음이라 일컬어진다.
▲ 2005년 세종문화회관에서 국내 초연된 ‘니벨룽겐의 반지’
이 작품은 나흘 저녁에 걸쳐 최소한 열네 시간 동안 연주해야 하는 엄청난 대작이다.
※ 독일 오페라는 징슈필(Singspiel)의 전통으로 레시터티브 대신 독일어로 말한다.
※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 ‘로엔그린’등은 1850년대까지 빈에서 연주되었고, 바그너도 어디에서보다 비
엔나에서 성공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1860년대 비엔나 무대에 올리려고 했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무려 77회의 리허설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막을 올리지 못하였다. 비엔나를 찬양하던 바그너는 이로써 그들의 체제와 문화에 온갖 분노를 터뜨리고 비엔나를 떠나게 된다. 결국 바그너는 바이로이트에 자신의 근거지를 마련하였다.
WAGNER, Richard caricature about opera Lohengrin. Composer himself standing in boat next to swan
▲ 로엔그린으로 분장한 바그너를 그린 러시아의 풍자 만화
▲ 바그너
※ 트리스탄과 이졸데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인해 두 주인공이 죽음에 이르게되는 내용이다.
[4] 피아노 음악
피아노는 19세기의 중심 악기로 자리 잡으며 중산층 시민들의 가정 음악 생활에서 중심이 되었고 그 연주도 보편화되었다. 또한 피아노는 낭만주의의 주관적 감정 표현에 적합한 악기여서 작곡가들은 서정적이고 화려한 많은 피아노 작품을 발표했다. 낭만적 정서에 맞는 짧은 성격 소곡이 새롭게 19세기 피아노 음악을 주도했으며, 18세기 형식의 피아노 소나타 작곡은 그 수가 줄어든 반면 베토벤의 모델에 따른 소나타 작곡은 19세기 초 슈베르트를 비롯한 낭만주의 작곡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슈베르트는 디베르티멘토, 판타지, 즉흥곡 등 다양한 작품을 통해 성격 소곡을 새로운 장르로 정착시켰다. 그는 베토벤의 전통을 이어 21개의 소나타 작품을 작곡했으며, 이외에 소나타와 같은 4악장 구조로 이루어진‘방랑자 환상곡(Wandererfantasie; D. 760)’이라는 곡도 지었다. 슈베르트는 아마추어를 위한 피아노 작품으로 왈츠나 춤곡, 변주곡 외에 14개의 피아노 소품을 작곡하였는데, 이것은‘음악의 순간(Moments musicaux D. 789)’에 6곡,‘ 즉흥곡(Impromptu D. 899, 935)’에 8곡씩 있다.
한편, 48개의 시적이고 낭만적인 멘델스존(J. L. F. Mendelssohn)의 ‘무언가(無言歌; Lieder ohne Worte)’는 이 시기의 대표적 성격 소곡이다.
슈만은 시적인 제목이 붙은‘환상 소품’,‘ 카니발’,‘ 어린이 정경’,‘ 숲 속의 정경’등의 피아노 소품 모음집을 작곡하였다.
쇼팽(Frederick Chopin; 1819~1849)은‘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릴 정도로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을 선보였는데, 이것은 피아노 페달의 발달로 레가토(legato) 주법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쇼팽의 작품에는 조국 폴란드의 민족성이 잘 드러나는 춤곡 선율이나 리듬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폴란드의 민속춤인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를 56개의 마주르카와 16개의 피아노 작품으로 부활시켰다.
이외에 ‘밤의 노래’라는 뜻을 가진 21개의 ‘야상곡(Nocturne)’, 시나 음악의 민속적인 서술성을 느끼게 하는‘발라드(ballade)’, 성격 소품적이며 장조와 관계 단조를 5도권 순으로 배열한 에튀드와 프렐류드, 비루투오소적인‘스케르초’등 피아노를 위한 새로운 형식의 작품들을 만들었다.
리스트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작품으로 성격 소곡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리스트의 당대 청중은 딱히 음악적 소양이나 식별력이 있는 지식인이라기보다는 리스트의 열정과 고도의 기술에 매료당해 흥분한 대중들이었다.
리스트도 조국 헝가리에 대한 향수를 잊지 못해 ‘헝가리 광시곡(Ungarische Rhapso die; 1847~1849)’을 작곡하였다.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곡으로는 2개의 협주곡이 있으며, ‘헝가리 광시곡’중 14번을 확대시킨 ‘헝가리 판타지아(Ungarische Fantasie)’, ‘죽음의 춤(Totentanz; 1849)’, 12곡의 ‘초절기교(고난도) 연습곡(Etudes D’execution Transcendante; 1827, 1839,1851)’등이 있다. 그는‘b단조 소나타(1852~1853)’에서 낭만적 소나타 형식을 보여 주었다.
※ 19세기 피아노는 음색과 음량이 폭넓게 개발되었다.
건반이 일곱 옥타브로 확장되었으며, 펠트 천으로 감싼 해머와 철제 부속물, 그리고 페달의 발달로 다양한
다이내믹의 비루투오소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Mendelssohn Bartholdy 1821.
▲ 열두 살 때의 멘델스존(칼 베가스 그림/1821년)
멘델스존은 슈베르트와 달리 경제적으로 부유한 아버지와 음악적 재능이 풍부한어머니를 둔 행운아였다.
※ 쇼팽은 섬세하고 우아한 그의 작품이 공공 연주 장소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중요한 귀족 후원자들의 살롱에서만 연주했다고 한다.
※ 레가토 외에 쇼팽의 피아노주법 중 중요한 것은 루바토(rubato)이다.
▲ 쇼팽
※ 리스트의 피아노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파가니니였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신기에 가까운 바이올린 연주를 듣고 이것을 피아노로 재현하고자 하였다.
※ 리스트가 b단조 소나타에서 보여 준 낭만적 소나타 형식은 단악장 구조에 쓰인 4개의 주제를 순환 구조 형식으로 하여 한 악장에서 발전시킨 것이다.
▲ 1832년의 리스트
20대 초반의 모습으로, 잘 생긴 외모에 뛰어난 피아노 연주 솜씨로 많은 여성들의 인기를 얻었다.
[5] 협주곡
과거의 협주곡이 독주자의 연주에만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면, 19세기에 들어서는 오케스트라와 독주를 동등한 비중으로 연주하는 교향악적 협주곡이 주류를 이루었다. 또한 오케스트라에서 관악기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면서 주요 주제나 섬세한 선율을 연주하게 되었다. 바이올린의 연주 기교도 급격히 발전했는데, 바이올린의 기교는 특히 파가니니(Niccolo` Paganini;1782~1840)의 5개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 잘 드러난다.
멘델스존은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독주를 위한 곡 등을 작곡하였다.
이 중 지금도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바이올린 협주곡 e단조(1844)’이다. 이 협주곡은 전통적인 3악장 구조로 되어 있지만, 전체의 유기성을 위하여 각 악장을 이어서 연주하도록 되어 있다.
슈만은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첼로 협주곡을 각 1개씩 작곡했는데, 특히‘피아노 협주곡 a단조(1841~1845)’에서 독주 파트의 기교와 낭만적 섬세함을 연결시키는 작품을 선보였다.
쇼팽은 피아니스트의 높은 독주 수준을 반영하는 두 개의 피아노 협주곡을 통해 피아노의 기교와 예술성을 보여 주었다.
브람스는 교향적 성격과 표현력이 강한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이중 협주곡(double concerto)을 작곡하였다.
이외에 리스트의 피아노 협주곡,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과 바이올린 협주곡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 브람스
브람스의 세 개의 현악 4중주는 화성 진행과 소나타 형식의 확장 등, 19세기 후반의 음악 언어를 잘 보여준다.
[6] 실내악
19세기에 실내악은 고전적 전통을 중시한 작곡가들에 의하여 발전되었으며, 피아노와 현악을 위한 실내악이 유행했다. 슈베르트는 현악 4중주, 피아노 3중주, 현악 5중주 등 다양한 실내악곡을 남겼다. 그는 현악 4중주 ‘죽음과 소녀(Der Tod und das Ma¨dchen, D. 14)’와 피아노곡 ‘송어 5중주(Die Forellen, D. 667)’에서 자신의 리트를 한 악장의 재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19세기 실내악의 절대 음악의 정통성과 순수성을 고수한 작곡가는 브람스였는데, 그는 Op. 51-1, Op. 51-2, OP. 67의 주옥같은 세 작품과‘피아노 5중주 Op. 34’,‘ 클라리넷 5중주 Op. 115’를 작곡하였다.
※ 동기의 발전적 변형
동기의 발전적 변형이란 주제의 형태를 유지하며 변형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제안의 작은 요소를 발전시켜 새로운 선율이나 주제를 만드는 작법이다.
그 밖의 낭만주의 음악가
프란츠(Robert Franz; 1815~1892)는 브람스와 마찬가지로 슈만과 맥을 같이한다. 약 350개의 성악곡 대부분이‘나의 큰 고민에서’,‘ 장미는 말했다’,‘ 안녕’같은 서정 가곡으로, 형식은 유절 가곡이나 민요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는‘천국과 지옥’으로 유명하며, 가벼운 사회 풍자를 곁들인 오페레타를 만들었다.
요한 슈트라우스 Ⅱ세(Johann Strauss; `1825~1899)는 비엔나 왈츠를 확립시킨 요한 슈트라우스Ⅰ세의 장남이다. 부친은 ‘왈츠의 아버지’, 아들은 ‘왈츠의 왕’ 이라고 불리며 많은 춤곡을 작곡하였고, 1870년 이후에는 ‘박쥐’,‘ 집시 남작’ 등의 오페레타를 발표하며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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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zt-women Caricature of women at a Liszt concert,
Franz Liszt as virtuoso at piano - caricature from La Vie Parisienne published 3 April 1886 Hungarian pianist and composer, 22 October 1811 - 31 July 1886.
Hector Berlioz Conducting is a photograph by Gran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