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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법마을의 최초 형성은 5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본격적인 마을 형성시기는 丹陽禹氏 17세손 등이 임진왜란때
청도 및 機張에서 난을 피해 이곳 법기(本義谷)로 이주해 마을
을 이루게 된 것이니 지금부터 약 420년 전이라고 합니다.
10시18분, '상수보호구역'이라고 새긴 콘크리트 말뚝이 박혀있고
여기가 지도상에 표시된 서낭당 터인지
오른편으로 폭 7,8m의 방화선이 시작되는
등산로가 벼랑처럼 떨어져 내려갑니다.
거대한 잡초 능선길이 또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데
문득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어차피 자연으로 돌아갈 육신,
장기기증을 해야겠다고 언젠가 아내에게 이야기,
펄쩍 놀라든 일을 떠올립니다.
*2003년5월11일(日)雲 晴
▲낙동정맥종주24구간(원효산~자두농원)*사진55컷
해봉산악회(13명)
제24구간 : 경남 양산시 양산읍, 동면
♠참 고
♧양산시[梁山市]
경상남도 동부에 있는 시.
면적 484.13㎢
인구 19만 5721명(2001)
인구밀도 404명/㎢(2001)
가구수 6만 2834(2001)
행정구분 2읍 4면 3동
*시의 꽃 목련 *시의 나무 이팝나무 *시의 새 까치
북동쪽은 울산광역시, 남동쪽은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금정구, 남서쪽은 김해시,
북서쪽은 밀양시에 접한다. 행정구역은 2읍 4면 3동으로 이루어졌으며, 시청
소재지는 양산시 남부동에 있다.
태백산맥의 지맥에서 뻗어난 천성산(千聖山:812m)·원효산(元曉山:922m) 등의
높은 산지가 북부를 차지하며 북고남저(北高南低)의 지형을 이룬다. 서부에는
양산천(梁山川)이 남류 하면서 그 양안(兩岸)에 평야를 발달시키고 낙동강에 합류한다.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연평균기온 15.1℃, 1월 평균기온 -2℃, 8월 평균기온
27℃ 로서 비교적 온난한 편이나 산악지대이기 때문에 온도차가 큰 편이다.
연평균강수량은 1,796mm이다.
*양산시는 신라 때는 삽량주라 하였으며, 고려시대에서는 양주(梁州)라 하였다가
밀양(密陽) 에 합친 뒤 다시 의춘(宜春)·순정(順正)이라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양산군
(梁山郡)으로 개칭 하고, 선조(宣租) 때에 동래(東萊)에 합쳤다가 다시 나누어 양산군
으로 바꾸고 경주진(慶州鎭) 에 예속시켰다.
1896년에 좌이평면(左耳平面)을 동래군에, 그리고 대상(大上)·대하(大下) 두 면을 김해군
(金海郡)에 이속하였다. 1910년 외남면(外南面)을 울산군(蔚山郡)에, 1963년 대저면(大渚面)
을 김해군에 각각 넘겨주고, 울산군으로부터 웅상면(熊上面)을 받아들였다.
1973년에는 동래군의 기장(機張)·일광(日光)·장안(長安)·서생(西生)·정관(鼎冠)·철마(鐵馬)
등의 6면을 양산군에 편입 하였고 1979년 4월 양산면이 양산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12월 기장면이 기장읍으로 승격되었고 1983년 2월 15일 전국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생면을 울주군에 넘겨주었다. 1985년 10월 장안면이 장안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 11월
동부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8년 5월 양산읍 남부동, 중부동, 북부동을 남부리, 중부리, 북
부리로 각각 명칭을 변경하였다.
1995년 3월 동부출장소 관할의 기장읍·장안읍·일광면·정관면·철마면이 부산에 이속되면서
기장군으로 개칭되고, 나머지 서부지역이 1996년 3월 시(市)로 승격되면서 양산읍이 중앙동·
삼성동·강서동으로 분할되었으며, 물금면이 물금읍으로 승격되었다.
2001년 현재 관할구역은 중앙동·삼성동·강서동과 웅상읍·물금읍·동면(東面)·원동면(院洞面)·
상북면(上北面)·하북면(下北面)의 2읍 4면 3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은 오 지호 대원이 촬영했습니다.
♧산행 코스 (24차)
09시24분 원효암 아래 부대정문
09시58분 주능선
10시13분 596봉
10시47분 갈림길안부
11시30분 운봉산,식사
13시16분 유락농원
14시14분 남락고개
14시37분 270봉
15시00분 자두농원
총 5시간36분
♧ 참여 대원(13명)
대장 : 김성수 후미담당 : 하종관,
신철호, 김두호, 오지호, 이종원, 이승우,
백운기, 조숙희, 남상기, 이혜년, 최금영, 김윤근,
☞☞☞☞원효암행 셔틀버스를 타기위해 10분 빨리 출발한다는
김 대장의 전화연락을 받고 평소보다 일찍 나서 지하철을 타고
범일역을 올라서는데 뒤에서 누가 집적여 돌아보니 배낭 을 멘
이 종원 대원이 반바지차림으로 웃으며 인사를 합니다.
시민회관 앞은 바래봉등 철쭉산행코스를 붙여놓은 버스들로
조금은 번잡스럽습니다. 김 대장은 어제 밤 이 진복대원이 친구
들과 과음하여 아직 잠자리에 빠져있다며 승합차는 겨우 9명이
승차하여 출발합니다.
영락공원입구에서 조금 늦게 도착한 오, 김 대원 포함하여 4명이
승차, 빈자리 없이 만원이 되었습니다. 왼편으로 다음구간에 지나
갈 금정산을 바라보며 쾌속으로 달리는 승합차 안은
지난해 5월 12일 매봉산에서 출발하여 꼭 1년이 되었다는 감회어린
소리가 나오는가 하면 한 번도 안 빠진 여장부 조 대원은
“내, 진짜로 오늘 낙동정맥이 아니었으면 안 나올라했다 아이가~~”
합니다.
옆에 앉은 신 고문이 귀띔 해줍니다.
어제 밤 폭탄주에다 새벽까지 마시고 나왔다고.
몇 시간 뒤에 건너올 낙동정맥 지경고개의 고속도로 육교인 녹동교를
바라보며 스틱을 확인 하는 조 대원은 낙동정맥을 종주하며 지금까지
마신 캔 맥주만 해도 엄청나다며 평균 매회 4개를 마셨다 치고 한번
계산해 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번 천성산 코스에서는 맥주약발이 40분을 못가
무척 고전했다며 활짝 웃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속에 많이 알고 있는 한 대원이 원효암 뒤편의 벼락
맞은 부처형상의 바위와 옛날에 원효산을 올라가는 이 코스는 출입금지
지역인데 당시 모 부대장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통행을 허락,
그 부대장이 승진, 영전되고 그 뒤로 관행이 되어 출입이 허가되었다며
이야기해 줍니다.
양산 나들목을 빠져나와
원효암 대석리 주차장에 도착한 게 8시35분.
먼저 도착한 남녀 유산객 10여명이 모여 있습니다.
하루 서너 차례 오르내린다는 중형버스에 편도 2000원을 지불하고 승차,
장부에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으라고 했다가 시간이 없어서인가 회수해 가고
9시4분에 출발합니다.
100여m 올라가다 부대정문 옆에 정차하자 대기 중인 안내군인이 승차, 바로 떠납니다.
꼬불꼬불한 일차선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숨 가쁘게 올라가다
9시21분, 또 다른 부대정문 앞에서 종주대 13명이 하차합니다.
뒤에 안일이지만 원효암에서 이 지점까지 내려오는 코스는 임도를 따라
내려오기 때문에 김 대장이 편법을 썼다고 합니다.
각자 산행준비를 하고
9시24분, 정문 오른편의 시그널이 달려있는 초록색 숲 속으로 내려갑니다.
주능선 길은 부대가 점유하고 있어 8부 능선을 타는데 왼편으로 철조망이
쳐져있고 일정한 간격으로 삼각형의 ‘지뢰’표지판이 걸려있는데 철조망은
계속 이어집니다.
9시30분, 습지를 건너고,
이런 습지가 서너 곳으로 이어집니다.
9시36분, 작은 개울을 건너 올라가고 취나물을 캐며 앞서가든 하 대장이
“여기 심심초가 있네요.
뿌리 한번 씹어 보이소. 웨~하니 억수로 오래 갑니더!”
하며 권합니다.
9시48분, 왼편 철조망은 잠시 시야에서 살아졌다가
9시55분, 다시 나타나고
9시58분, 출발하여 34분 만에 비탈을 오르며 철조망은 살아지고
주능선에 올라서면서 평탄한 오른편으로 능선을 탑니다.
10시, 북행자(北行者)를 위해서인가
부대장명의의 철조망 경고간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키를 넘는 잡목과 풀숲을 거쳐
10시10분, 완만한 오름길의 억새밭을 거쳐 첫 조망을 합니다.
여기가 596.6봉인가 멀리 금정산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잠시 물 한 모금 마시고 가자든 하 대장이 비닐봉지를 달라며
지금까지 캔 취나물과 심심초를 담아줍니다.
10시11분, 등산로 변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야생화와
노란 금새우란 두 송이를 발견하고 캠코더에 담습니다.
10시15분, 좌로 시계가 트이면서 법기(法基)수원지와
본법마을이 내려다보이고 얼마 후 등산로는 좌로 꺾어져 가면서
짧은 너덜겅과 잡초가 무성한 가운데 철쭉이 시들어가는 등산로를 밟습니다.
본법마을의 최초 형성은 5세기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본격적인 마을 형성시기는 丹陽 禹氏 17세손 등이 임진왜란때
청도및 機張에서 난을 피해 이곳 법기(本義谷)로 이주해 마을
을 이루게 된 것이니 지금부터 약 420년 전이라고 합니다.
10시18분, ‘상수보호구역’이라고 새긴 콘크리트 말뚝이 박혀있고
여기가 지도상에 표시된 서낭당 터인지
오른편으로 폭 7,8m의 방화선이 시작되는 등산로가
벼랑처럼 떨어져 내려갑니다.
거대한 잡초 능선길이
또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데
문득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어차피 자연으로 돌아갈 육신,
언젠가 아내에게 장기기증을 해야겠다고 이야기,
펄쩍 놀라든 일을 떠올립니다.
선두그룹은 이미 된비알의 잘록이 쪽으로 내려가고
그 뒤를 이어...
오른편으로 새마을과 다람쥐캠프장이 보입니다.
이런 특이한 주변을 캠코더에 담으며 왼편으로 급비탈의 등로를 따라
조심조심 내려갑니다.
10시30분, 반쯤 내려갔을까 오른편으로 여기가 경계선인지
‘부산시’라고 새긴 콘크리트 말뚝이 박혀있습니다.
잠시 뒤돌아본
벼랑길의 잡초로 무성한 방화선.
10시47분, 오른편으로 다람쥐캠프장, 왼편으로 법기수원지로 내려가는
사거리 잘록이에 내려섭니다.
방화선을 따라 비탈을 올라가니 상수원보호를 뜻하는지 ‘水保’라고 새긴
콘크리트 말뚝이 박혀있고 잔돌이 깔려있는 방화선 등로를 따라 올라가는데
저만큼 머리위에서 선두그룹의 이 성우대원이 두 팔을 벌리고 어서 올라오라고
소리칩니다.
집행부에서 사정이 있어 워키토키를 준비가 안 되어 최대한 선두 후미간격을
좁혀 산행하겠다는 뜻인 모양입니다.
10시58분, 턱에 올라서니
선두는 출발하고
뒤돌아보니
멀리 천성산에서 원효산과 지나온 능선,
초록방화선의 장쾌한 풍광이
한눈에 들어와 내 눈을 편안하게 해
캠코더에 가만히 담습니다.
그리고 올라가며
이동 촬영합니다.
돌탑과 돌무더기를 거쳐
방화선은 완만하게 뻗어있는데
최 금영 대원이 취나물을 따며
가볍게 올라갑니다.
여기서 취나물에 대해 잠시 글을 옮겨보기로 합니다.
♣취나물은 대부분 국화과에 속하며 100여종이나 되나 우리나라 자생종은
60여종이고, 식용이 가능한 것은 24종이 된다.
취나물 중에서 가장 선호하는 것은 참취, 개미취, 각시취, 곰취, 미역취, 수리취
등이 있는데 그 중에서 참취의 향기가 가장 독특하다. 취나물은 맛과 향기가
뛰어나고 탄수화물, 비타민A 등 다양한 영양분이 함유되어 있어 묵나물, 튀김,
부침용으로 이용되며 감기, 두통, 진통, 항암 등에 효과가 있어 한약재로도 이용된다.
참취는 국화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취나물 또는 나물취라 불린다.
'취'는 우리나라의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으나, 물 맑고 깨끗한 강원도 산야에서
자라는 취나물을 최고의 상품으로 꼽는다. 산야의 취나물 잎과 줄기는 솜털로 덮여
손으로 만지면 다소 꺼칠한 느낌이다. '취' 중 에서 식용으로 이용되는 것은 곰취와
참취가 있다.
산나물중에서 취나물의 생산량이 제일 많고 취나물이 식용으로 가장 많이 애용되고
있다. 산야에서 뜯은 그대로의 생채로 이용 되는 것은 곰취와 참취인데, 독특한 향기로
입맛을 사로잡는다.
곰취는 지방에 따라 웅소나물이라 부르기도 하고 태소라고도 한다. 곰취는 국화과의
쌍떡잎식물로 잎이 발달한 다년초로서 산채류중 세서 드물 게 날 것으로 먹을 수 있는
귀한 산나물의 하나이며, 히말라야로부터 중국, 시베리아동부, 한국, 일본에 널리 분포
한다. 우리나에는 전국에 걸쳐 깊은 산중의 나무 밑이나 습하고 비옥한 토지 및 산골
짜기 등의 계곡에서 자란다.
미역취는 주로 식용으로 사용된다. 또한 약리효과도 있어 한약재의 재로도 사용된다.
봄에 채취한 산나물을 끓는 물에 데쳐 햇볕에 말려 1년 내내 즐겨 먹는다. 우리가 흔히
즐겨먹는 상치와 깻잎을 대체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산나물이나, 봄 철 산촌이 아니면
산에서 자란 생채의 산나물을 만나기 힘들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대부분이 재배한
취나물이다. 더구나 말린 산나물(건채류)의 경우에도 값싼 가격의 중국 수입산이 국내
로 반입되어 산에서 채취하여 말린 산나물도 만나기 힘들다.
11시15분, 두 번째 턱에 올라 다시 한 번 뒤돌아보고
장엄한 풍광을 한 번 더 촬영,
평탄한 방화선을 따라 올라갑니다.
방화선의 잡초위에는 여러 종류의 나비와
온갖 곤충이 노닐고 있습니다.
요즘 정가에서 잡초논쟁으로 말썽이 많지만
자연속의 잡초는 많은 생명체의 서식처이자 안식처이고
자연을 살찌게 하는 보고라는 것을
위정자들은 알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정치가들 가운데 잡초보다 못한 독초 같은 인물은 없는지
이번 기회에 잘 살펴보시라고 권유하면서
잡초란 이름을 그렇게 폄훼하면 잡초들도 데모를 안 한다고
어떻게 장담할 것인지도 묻고 싶어집니다.
11시23분, 헬기장을 거쳐 10여m 거리의 오른편으로 빠지는 길이 보입니다.
완만하게 올라가는데 산채를 캐는 아주머니가 하 대장이 한주먹 캔 취나물을
보고 아저씨 좋은 나물 많이 캤다며 부러워합니다.
11시30분, 폴 대와 ‘水保’콘크리트 말뚝이 박혀있고 현대중공업 안전환경부에서 세운
‘운봉산534m’라고 쓴 흰 정상비가 서있는 운봉산 고스락에 올라섭니다.
운봉(雲峰)산은 수많은 운봉산중의 하나인 평범한 산입니다.
대원들이 단체 기념촬영을 합니다.
오른편 숲 사이로 양산대학 캠퍼스가 보이고 그 뒤편 산자락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벌겋게 무참히 깎여나고 있어 내 눈을 아프게 합니다.
방화선은 왼편 아래로 떨어지고
이제 방화선과 헤어져 오른편 등로로 20여m 접어들어 나무그늘아래에서
점심식사를 합니다. 이 성우 대원이 식사를 하면서 한마디 합니다.
“야~ 처음으로 우리 모두 함께 점심 식사하네!”
가벼운 마음으로 느긋한 산행과 식사를 즐깁니다.
오늘 시간도 넉넉하고 산행도 수월하니 금정산 고담봉까지 가는 게 어떻겠느냐.
이어서 호남정맥을 타는 게 어떤지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식사가 끝나자 곧 일어나
출발 준비를 합니다.
11시53분, 아무른 결론도 없이 자리를 떱니다. 평탄한 등산로를 따라가다
11시56분, 좌로 꺾어지고 얼마 내려가지 않아
11시58분, 된비알 끝에 전망바위가 보이고
전망대바위위에서 햇살을 받아서인지 그렇게 선명하지 못한 전면에 펼쳐진
금정산을 조망합니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산지마을 언저리가 보이는데 마을형성은 임진왜란때 이씨
(이종호씨 의 선조)가 피난와서 정착한 것이 최초로 거주한 것으로 구전되어
오고 마을명은 마을 뒤에 가모산(해발 480m)이 우뚝 솟아 있어
"뜻이 있고 멀리서 보면 아름답다"
고 하여 산지(山旨)라 이름 하였다 합니다.
등로는 오른편으로 꺾어지며 갈지자로 떨어집니다.
남락리에서 올라온다는 첫 등산객과 조우하며 인사를 나누고
12시5분, 콘크리트 임도 운봉재에 내려섭니다.
그리고 오른편으로 비탈에 걸려있는 숲길 등산로로 올라갑니다.
12시16분, 턱을 넘어서고
12시19분, 곧게 멀쑥하게 자라고 있는 참나무와 소나무 숲을 거쳐 완만한 오름에
12시29분, 왼편으로 한대지방 같으면 수목이 동파되는 듯한, 수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은 고압송전철탑에서 약1분 간격으로 굉음을 내는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꺾어지며
평지 능선을 걷습니다.
구비치는 평지능선 길에서 돌탑이 나타나고 이어서
또 다른 작은 바위에 의지한 돌탑을 지나칩니다.
좌로 꺾어져 내려가면서 바위와 짧은 너덜겅이 나타나
무릎에 신경을 씁니다.
12시47분, 좌로 송전철탑 옆을 거쳐 평지 자갈길을 지나고
12시54분, 또 다른 송전철탑을 거칩니다.
12시57분, 평탄한 등로 위에 지도상의 299.4봉인가,
표지석(409재설 건설부75.10.5.)을 촬영하고 통과합니다.
13시6분, 임도에 내려서는데 잠시 유락농원으로 착각한,
차량이 보이는 지점에서 임도를 따라 오른편으로 내려갑니다.
잠시 전면에 금정산이 보이고
13시12분, 남락리(南洛里)와 산지(山旨)마을로 연결된 아스팔트 일차선
포장도로에 내려섭니다.
전면의 비탈에 양산시장의 ‘산불조심합시다’간판이 보이고 그 뒤에 작은
목간판(농원출입금지) 이 눈에 뜨입니다.
오른편으로 석축을 쌓은 고개가 눈에 뜨이고,
왼편으로 내려가는 비탈에 시그널이 보이는 사유지로
종주대와 시비가 분분했다는 ‘유락농원‘인 모양입니다.
시그널을 따라 풀숲으로 들어가 치고 올라갑니다.
오른편으로 녹 쓴 철조망이 보이고 비닐장판 이면에 쓴
‘등산로안내’판이 보이지만 길은 보이지 않아 비탈을 그냥 올라가니
13시27분, 폐비닐장판 이면에다 매직 팬으로
‘등산로 안내 →아래묘지부근등산로 이용 바람 낙동정맥 백두대간...’
이라고 쓴 걸 철조망에다 걸어놓았습니다.
어느 낙동정맥 종주 산꾼이 농장주와 시비를 하다 그를 이해하고 뒷사람을
위해 수고를 한 모양이다. 희미한 등산로에 밑동이 고사한 오리나무 윗부분
에 파란 잎이 돋아난 강인한 생명력을 보고 하 대장이 경탄합니다.
13시33분, 짙은 숲길에 앞서가든 하 대장이 깜작 놀랍니다.
“아이구! ...너플떼기 한 마리가 내 앞에서 도망쳤어에...
지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너플떼기가 뭔데?”
“꽃뱀 있잖아에...”
밀양에서는 그렇게 부르는지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하 대장은 다시 올라갑니다.
13시37분, 공터를 지나
13시40분, 임도에 내려서고 건너편 우측으로 보이는 시그널을 따라
등산로를 타는데 왼편, 다시 송전철탑 옆을 지나칩니다.
얼마 올라가지 않아 돋아 난지 몇일 되지 않은 여린 둥글래가 가녀린
꽃 네 송이를 수즙은 듯 늘어뜨리고 있는 걸 캠코더에 담습니다.
13시44분, 처음으로 작은 거미가 만든 피라미드형 거미집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솔가리가 온통 덮어있어 등산로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의 코스를 거쳐
13시50분, 갈림길에서 직진합니다.
13시54분, 임도를 따라 왼편으로 내려가다
옛날 행정구역을 나눌 때 구역별로 나누다 이 3개 마을(영천, 남락, 산지)이
남았는데 딱히 붙일 이름이 없어 강 인근에서 나누고 남은 곳이라 하여
여락리(余洛里)로 지었다는 여락리 인근을 지나쳐
오른편 비탈길 숲 속으로 올라섭니다.
14시5분, 225봉은 너도 나도 모르게 넘어서고 고속도로의 굉음소리를 들으며
앞이 트이면서 저만큼,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인 270봉이 손짓하고
오른편으로 멀리 차기에 올라갈
금정산이 가까이 보입니다.
14시10분, 좌로 콘크리트 임도에 내려 멀리 낚시터가 보이는
남락(南洛)마을에 당도합니다.
남락마을은 이곳에서 출토되는 동편 및 와편, 성터, 군락지 등으로 보아
삼한시대 이전에 생긴 것으로 추정되고 남락이란 마을이름은 마을의 끝
지역이 급경사를 이루어 있어 남동쪽으로 떨어졌다는 뜻으로
남락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 같습니다.
특히, 여락리 석곽묘와 (갓안)등에 있는 환호 군락지의 형태로 보아
마을의 유래가 삼한시대 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고증되고 이 마을의
집중적인 성촌 시기는 1500년대로 추정, 김녕 김씨(영천마을 김홍수씨 집안)의
조상인 16대조 묘가 있고, 경주 이씨의 13대(백천)에 이어, 남평 문씨의 7대조가
이 마을에 정착하면서 촌락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14시14분, 각종차량이 고속으로 질주하는
4차선 도로인 남락고개에 당도합니다.
좌우를 아무리 살펴봐도 건널목도 육교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지난, 16차 때 건너왔든 안강의 시티재와 같이 살벌한 상항입니다.
앞에는 높이 1m가 넘는 중앙분리대가 버티고 있고
건너편에 시그널도 보이지 않아 하 대장이 핸드폰으로 김 대장과
통화를 하는데 건너편 콘크리트임도 변에 시그널이 희미하게 보입니다.
좌우를 살피고 하 대장과 함께 바짝 긴장하여
앞서 간 사람들처럼 모험을 할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낙동정맥종주대가 계속 이어지는 한
지방자치단체에서 안전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아
지난번 경주시청에 건의한 것 처럼 기장군에도
안전시설을 당부드립니다.
10여두의 젖소가 보이는 농장(형제농장?)을 가로질러 콘크리트길을 따라
올라가다 왼편 차고 옆의 밭둑으로 내려, 올라갑니다.
우측으로 축사와 관상수,
좌로 송전탑 사이를 타고 올라가니 등산로가 보입니다.
14시26분, 가시 돋친 탱자나무 옆을 지나
올라가다 산허리를 돌아가는 가 했는데
오른편으로 꺾어지면서 요놈 맛 좀 보라는 듯이
된비알로 돌변합니다.
14시35분, 예비군 훈련용인 참호가 있는
턱에 올라 마지막 능선,
왼편으로 돌아가는데 저만큼 산불감시탑이
뼈대만 앙상하게 녹슨 체 서있고
그 위에 270 암봉이 버티고 있습니다.
14시37분, 바위 위에 올라섭니다.
높이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송곳처럼 오뚝 솟은 바위위에서
기막힌 조망을 만끽합니다.
먼저 멀리 장군봉과 가까운 계명봉에서
왼편으로 훑어 내려오면
멀리 영도에서 황령산과 부산시가지 일부와
노포동 전철차량기지가 보이고
발아래 부산컨트리클럽, 경부고속도로상에
무수한 차량들이 굉음을 내며
총알 같은 속력으로 달리고,
뒤돌아 지나온 능선과 남락고개가
한눈에 들어오는 걸 캠코더에 담습니다.
14시40분, 후미로서 너무 쳐진 것 같아 바위사이를 거쳐
이제 잰걸음으로 본격적인 하산 길로 접어듭니다.
잡목과 산죽 사이 길로 빠져
14시53분, 오른편으로 무덤을 바라보며 저수탱크를 지나
14시55분, 고속도로확장공사로
행정구역 경계선에서 따온 지경[地境]고개가
양쪽으로 더욱 깎여나가는 벼랑 끝에 당도합니다.
건너편 자두농원 입구에는 승합차와 대원들의 모습이 보이고
왼편 육교 쪽으로 돌아
된 내림을 탑니다.
내려선 왼편으로
부산컨트리클럽의 녹색 잔디가 보이고
경부고속도로 위의 녹동육교를 건너
1077번 지방도를 오른편으로 따라가다
15시, 자두농원 입구 당도.
5시간36분의 산행이 끝납니다.
김 윤근, 이 종원등 두 대원은 오늘 거리가 너무 짧다며
계명봉으로 올라갔다하고
아이스박스에서 내어주는 시원한 캔 맥주 서너 모금으로
24차 종주를 마무리 짓습니다.
남은 두 대원의 캔 맥주를 정이 많은 조 대원이 근처 공사장에서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기사에게 건네주려는데 근무 중에는 술을
안 마신다고 했는지 그냥 되돌아오고 주변을 깨끗이 청소,
15시14분, 부산으로 출발합니다.
통상 금정경찰서 근처의 사거리에서 하차하는데 오늘은 기분이 무척 좋은
신 고문이 시간이 너무 이르다며 몇몇 대원들에게 ‘허심천’으로 초대하고
심지어 집에 있는 정 대장 부부를 부른 뒤,
‘이 돈가스’에게 전화, 이제 일어났다는 소리에 전화를 바꾼 조 대원이
거뜬히 완주했다며 많이 약하다고 퇴박을 주고 활짝 웃습니다.
웃고 있는 조 대원에게 웃으며
“아무리 체질적으로 술에 강하더라도 누구나 한계가 있으니
지금 자제할 수 있을 때 통제하는 게 좋습니다.”
며 진심으로 우정 어린 충고를 했는데 과연 얼마나 새겨들었는지...
운전기사님의 호의로 온천장 지하철 입구에서 전원이 하차하고
혼자 남아 시내로 달립니다.
지난번처럼 구 침례병원 옆에서 하차하여 막내 동생의 목욕탕을 찾아
넓은 욕탕 속에서 하 대장의 취나물과 잡초산행을 회상하며
캔 맥주로 얼큰히 올라 심신이 부자 된 기분에
마침 목욕하러온 조카의 등 밀기 봉사를 받는데
“큰아버지 하산해서 한잔 했습니까?”
며 웃습니다.
“그래, 캔 맥주 한개 들었는데...표가 나나?”
했더니 술 냄새가 난다고 합니다.
비록 적은 인원이지만 자연속의 잡초에 덮인
낙동정맥을 묵묵히 걸으며
온갖 생명체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며
캠코더에 담아온 소중한 자연에 흠뻑 취한...
행복한 내 기분을
아무리 후각이 예민한 조카라도
눈치 체지 못했을 겁니다.
산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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