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기의 대결, 제1회 응씨배 결승5번기 1국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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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늦은 봄, 모 일간지 문화면에 2단으로 실린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바둑 올림픽, 우승상금 40만불, 응창기 재단에서…”
당시만해도 이 작은 기사에 대하여 관심을 표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두 계절이 또 소리 없이 지났다.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한
초겨울, 좀 더 구체적인 내용으로 이 기사는 리바이벌 되었다.
“대만 응창기(중국발음 잉창치) 씨, 세계바둑대회 개최, 100만불 규모, 우승상금 40만불, 4년마다…”
이번에는 의외로 반응이 컸다. 바둑 애호가들 사이의 화두가 되었다. 특히 일본인들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바둑에 관한 한 일본이 세계의 중심이며 그들의 오랜 역사와 전통은 곧 세계의 역사와 전통이라고 믿고 있었다. 얼마 전 치러진 일중 수퍼대항전에서 철의 수문장이란 별명을 얻은
녜웨이핑의 출현으로 일본이 패하긴 했지만, 한번쯤 패배야 해프닝으로 있을 수 있는 일. 아직도 중국은 한 단계 아래이며 적수가 되지 못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100만불 규모에 우승상금 40만불이라니!
자존심이 보통 상하는 일이 아니다. 일본인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바둑 최강국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무언가 해야 했다. 드디어 일본은 1998년 4월,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보다 4개월 앞서 후지쯔배 타이틀 전을 서둘러 개최하였다.
응창기란 생소한 이름의 주인공을 파악하기 위하여 일본 기자들의 대만 방문이 줄을 이었다. 그때만 해도 응창기 씨나 응창기 재단에 대하여 알려진 사실이 별로 없었다.
응창기 씨는 1914년 10월 24일 중국 절강성의 닝보
시지(Cixi, Ningbo, Zhejiang Province )에서 출생
하였다. 어렸을 때는 상하이에 있는 은행에서 점원으로 인생을 시작하였으며, 빠른 속도로 승진하여 30대 초반에는 상하이 시 유명한 은행의 중견 뱅커로 성장했다.
1949년, 그의 나이 35세 때 그는 타이페이로 이주하였다. 그 당시 중국은 국공 내전으로 혼란한 시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페이에 정착 한 후, 사업적 감각이 뛰어난 그에게, 섬유산업은 가장 유망한 사업으로 비춰졌고, 곧 이어 착수한 화학, 식품 사업에서도 탁월한 경영력을 발휘하여 사업가로서의 기반을 튼튼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사업에 정진하면서도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심취하던 바둑에 대한 연민을 좀처럼 버릴 수가 없었다. 8살 때부터 두기 시작한 바둑은 그에게는 또
다른 환상의 세계였다. 바둑에 몰입할수록 기력은 주위의 모든 강자들을 함몰시킬 수 있을 정도로 급성장하였다. 12살이 되던 해, 그는 절강성에서 열린 바둑대회에 출전하여 막강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우승을 하였다.
그는 1997년 8월 27일, 84세 장 암으로 서거할 때까지, 수천년 이어온 바둑의 역사를 가름하는 몇 가지 기록할만한 족적을 남겼다. 특히 1983년, 그의 나이 69세에 응창기 바둑교육재단을 설립, 바둑문화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여 세계화( Globalization )한 것은 특기할만한 업적이다.
l 잉씨룰이란 바둑의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어린이들까지도 쉽게 깨우칠 수 있도록 바둑 보급에 심혈을 기울였다. 집수 계산에 숫자를 모르는 어린이들도 홀수 짝수만 알면 계산할 수 있는 진만법을 창안했다.
l 사용하기 편리하고, 계가하기 편리한 바둑통과 전자 계시기 등을 발명했다.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프로기전을 개최했다.
l 샌프란시스코, 싱가폴, 상하이 3개국에 어린이용 바둑 전문학교를 세웠다.
l 최초로 세계 인터넷 바둑토너먼트 기전을 개최했다.
l 서방 세계의 바둑 보급을 위하여 바둑 애호가와 기관에 매년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
서거 당시 응씨는 60여년을 같이 살아온 부인과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슬하에 두었으며 아들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현재까지 사업을 훌륭하게 승계하여 운영하고 있다.
제1회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는 중국계 (대만포함) 7명, 일본 6명, 한국 1명, 미주지역 1명, 유럽 연합 1명 등 도합 16명이 주최측의 초청으로
1988년 8월 21일 첫 테이프를 끊었다.
한국을 미주지역이나 유럽 지역과 동일한 수준으로 취급하여 한명의
엔트리만을 허용한 것에 대하여 한국 바둑계에서는 극도의 수치심과
분노를 느꼈다. 강력한 항의를 제기하였으나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회 바둑올림픽인 응씨배 4강에 오른 4명의 기사가 대회 창시자인 응창기 (가운데) 씨와 기념촬영. 사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조훈현 9단, 린 하이펑 9단, 응창기 씨, 후지사와 9단, 녜 웨이핑 9단.
1회전을 통과한 대국자는 일본인 4명, 중국인 3명, 한국인 1명, 합계 8명. 8월 23일 치러진 8강전에서는 일본의 후지사와 슈코, 대만의 린 하이펑, 중국의 녜웨이핑, 한국의 조훈현 4명이 통과하였다.
드디어 준결승전, 준결승전은 3번기다. 1988년 10월 20일과 23일에 서울 롯데호텔에서 벌어진 준결승전은 조훈현 대 린 하이펑, 녜웨이핑 대 후지사와의 대국. 결과는 조훈현과 녜웨이핑이 린 하이펑과 후지사와와 사투를 벌인 끝에 각각 2:0으로 신승하였다.
그 해 겨울이 지나고 울긋불긋한 꽃들이 산등성이를 수놓은 계절에 응창기배 세계바둑대회 결승전 5번기의 첫 대국이 중국 항주에서 시작되었다.
1989년 4월 25일 조훈현 국수의 집백으로 시작된 제1국은 반면 5집이 부족하였으나 덤 8집 공제하고 3집 승이었다. 장거리 여행 등 역경 속에 치른 대국으로는 산뜻한 출발이다.
그러나 여건은 조 국수에게 유리하게만 작용하지 않았다. 우중충한 습도 높은 날씨에 기름진 중국 음식, 어디든지 따라다니는 공안원. 섬뜩하게 느껴지는 공산주의 사회의 압박감 등은 하루 이틀 지나면서 조국수의 심신을 조여 오는 알 수 없는 스트레스로 작용하였다.
1989년 4월 28일, 제2국이 조 국수의 집흑으로 시작되었다. 결과는 반면 1집 부족하여 덤까지 9집 패.
제3국은 기차로 5시간을 이동하여 5월 2일 응씨의 고향인 절강성 영파에서 이루어졌다 승리의 신은 이 대국에서도 조 국수를 외면했다. 조 국수의 집백으로 시작된 대국은 집계한 결과 반면 11집 부족, 덤 8집을 받고도 3집이 부족하였다. 분수령이 될 수 있는 제3국을 승리의 신은 끝내 조 국수를 외면한 것이다. 극도로 피로한 심신을 이끌고 귀국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4, 5국에서의 대반전을 기약하면서. <사진/월간바둑>
(3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