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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은 순환한다
물질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나무를 태우면 재가 남고 부피가 줄어든다. 옛날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을 관찰하면서 나무에서 무엇인가 빠져나가기 때문에 부피와 무게가 줄어든다고 생각하였다. 나무를 태울 때에 열을 내면서 빠져나가는 그 어떤 것을 열소(熱素:플로지스톤)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금속을 가열하면 무게가 오히려 늘어난다는 현상을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플로지스톤은 상상의 물질로서 정체가 불분명하였다. 18세기에 들어서서 이러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설명한 사람이 프랑스의 화학자인 라보아지에(Lavoisier)였다. 저울은 고대부터 있었으나 단순히 상품의 양을 측정하는 도구로서 사용하였다. 라보아지에는 저울을 이용하여 실험을 하였다.
그는 공기를 포함하고 밀봉된 플라스크 안에서 수은을 약하게 가열하였다. 며칠 후 적색물질(산화수은)이 생성되었다. 플라스크 안에 남아 있는 기체의 무게는 감소하였으며 기체의 성질이 달라졌다. 남아 있는 기체는 촛불을 끄게 하였으며 동물들을 질식시켰다. (오늘날 우리는 남아있는 기체는 질소이고, 공기 중의 산소가 수은과 결합하였다는 것을 안다.) 라보아지에는 적색의 수은 산화물의 무게를 정확히 측정한 후 보다 강하게 가열하였다. 그는 새로이 생성된 수은 화합물과 기체(산소)의 무게를 측정하였다. 그리고 그들 무게의 합은 그가 처음 사용한 산화수은의 무게와 같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더 많은 실험을 한 후에 라보아지에는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표하였다. 질량보존의 법칙 또는 질량 불변의 법칙이란 물질이 화학 변화를 일으키기 전과 일으킨 후에 전체 무게(질량)의 변화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질량 불변의 법칙은 여러 가지로 응용될 수 있다. 우리가 쓰레기를 태우면 10~20% 정도의 재가 남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지만 태우는 과정에서 기체가 발생하여 대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소각장에서 온갖 쓰레기를 태운 후에 남는 소각재는 결국 매립할 수밖에 없으므로, 소각이란 쓰레기의 부피를 줄이는 것이지 쓰레기를 없애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쓰레기를 “태워 없애라”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쓰레기를 태운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쓰레기는 단지 형태를 바꾸어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태계 내에 머물러 있다. 우리는 자연에 존재하게 된 물질을 화학반응, 또는 어떤 형태의 반응에 의해서 없앨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원자력발전소에서 나오는 위험한 방사성 폐기물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없앨 수는 없고, 안전하게 보관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수 밖에 달리 묘안이 없다.
순환하는 원소
지구상에 존재하는 각종 원소들은 생물계와 무생물계 사이를 이동하기도 하며 여러 가지 반응을 통하여 다른 물질로 변하기도 한다. 지구생태계 내에서 이처럼 물질이나 원소가 순환하는 것을 과학적인 용어로는 생물지구화학적 순환(biogeochemical cycle) 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원소의 순환은 물리적인 변화 또는 화학적인 반응에 의존하고 있지만 생물학적인 반응도 매우 중요하다. 사람이 음식물을 섭취하면 소화작용을 통하여 분해되고 에너지로 이용되고, 최종적으로는 오줌과 똥으로 변하게 된다. 사람의 위와 창자에서 영양물질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미생물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대장과 소장에는 수많은 이로운 세균이 영양소를 분해시키며 자기도 이용하고 숙주인 사람이 이용하게 도움을 준다. 이러한 세균이 없다면 분해가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물질의 순환도 가능하지 않게 된다. 쓰레기가 썩는 과정에서도 미생물이 필요하다. 물질이 순환하는 데 기여하는 일등 공신은 미생물이다.
생물지구화학적 순환에서 탄소(炭素: carbon)의 순환은 가장 중요한 기능을 가진다. 탄소는 기체인 이산화탄소(CO2)의 형태로 또는 석유같은 액체, 또는 석탄같은 고체 형태로 존재한다. 이산화탄소는 식물 잎의 기공을 통하여 흡수되고 광합성 반응을 통하여 포도당(C6H12O6)으로 변한다. 포도당은 환자들이 맞는 링거 주사의 주성분이다. 환자들이 먹지 않고 링거주사로 연명할 수 있듯이, 식물도 포도당이 만들어지면 뿌리, 줄기 등 식물체의 각 부분에 전달되어 이용된다. 식물은 호흡작용을 통하여 천천히 영양소를 분해시켜 에너지를 얻는데, 부산물로서 산소를 발생시킨다. 식물이 죽으면 사체가 되고, 미생물의 먹이가 되어 분해된다. 미생물이 식물의 사체를 분해하면서 탄소는 이산화탄소가 되어 대기 중으로 방출된다. 식물을 먹는 동물도 탄소 순환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생태계 내에서 이산화탄소는 저장소인 대기에서 식물과 동물을 거쳤다가 다시 대기 속으로 돌아오는 순환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탄소의 순환은 오랫동안 균형을 유지하며 이루어졌다.
우리가 연료를 태운다는 것은 탄소를 산화시켜서 이산화탄소를 발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 인류는 석탄과 석유 등의 화석연료를 태우기 시작하였는데, 최근에는 지구촌 곳곳의 발전소와 공장, 그리고 자동차에서 화석연료를 대량으로 태우고 있다. 이러한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은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의 양을 급격하게 증가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가 많아진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 지구온난화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지구온난화는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환경오염 문제가 되고 있다.
물질의 순환은 오랫동안 평형을 유지하였는데, 자원과 에너지의 사용량이 급격하게 증가함에 따라 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생물체의 주요 구성 성분인 C, H, O, N, S, P의 순환은 비교적 속도가 빠른 순환이며 미량원소인 Mg, K, Na, Cl 등과 희귀원소인 Al, B, Co, Cr, Mo, Ni, Zn 등은 순환속도가 느리다. 혈액 순환이 잘 안되면 건강이 나빠지듯이 지구생태계에서 원소의 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나타난다.
호소에 영양분이 많아져서 남조류(藍藻類)가 과다하게 증가하면 이를 부영양화라고 부른다. 바다에 영양분이 많아져서 쌍편모조류가 100~1000배로 갑자기 증가하여 바닷물의 색깔이 붉게 변하는 현상을 적조라고 한다. 토양에 퇴비 대신 화학비료를 많이 뿌리면 토양의 유기물 함량은 점점 감소한다. 흙이 살아 있으려면 토양 중의 유기물 함량이 3% 이상 5%는 되어야 하는데, 현대 농업에서는 토양에서 유기물을 빼앗기만 하고 채우지 않는다. 우리나라 논의 평균 유기물 함량은 2.2%, 밭의 유기물 함량은 1.9%로서 필요한 유기물의 1/2밖에 되지 않는다. 그 결과 어떠한 작물을 심든 양분을 충분히 흡수하지 못하고 근근이 지탱하다 보니 모양은 멀쩡해 보이나 품질 면에서는 크게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토양을 중심으로 유기물의 순환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현대농업의 문제점이다. 생태계에서 원소가 정상 속도로 순환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원인가 쓰레기인가?
전통 농업사회에서는 쓰레기라는 것이 따로 없었다. 식량과 자원이 부족한 가운데서 자연의 순리, 요즘 말로 하면 생태계의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처리해야 할 쓰레기가 따로 없었다. 우리 선조들은 집에서 가축을 기르고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면서 살았다. 음식찌꺼기가 남으면 큰 것은 개가 먹고, 잔 찌꺼기는 돼지가 처분하고, 나머지는 퇴비로 만들어 텃밭이나 논에 되돌려 주었다. 이처럼 농경사회에서는 물질의 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나무를 태우고 남은 재도 버리지 않고 퇴비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강화도에서 발견된 금표에는 ‘기회자 장삼심 기분자 장오십 (棄灰者 杖三十 棄糞者 杖五十)’이라고 쓰여 있는데, ‘재를 버리면 곤장이 삼십대 똥을 버리면 곤장 오십대’라는 무시무시한 내용이다. 요즘 말로 하면 쓰레기 무단 투기에 대한 경고문이다. 내 기억에도 시골에서 학교로 가는 길가 배추밭 옆에는 똥 웅덩이가 있었고, 채소밭에 똥을 뿌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가 있었다.
제주도에서는 똥을 먹이는 똥돼지가 유명하였다. 통시라고 부르는 제주도의 실외 화장실은 사람의 똥을 돼지가 직접 받아 먹는 구조로 만들어서 인간과 가축은 똥을 매개로 공생하는 사이가 된다. 제주도에서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농민들이 대변이 마려우면 똥돼지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 집으로 달려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철학자 도올 김용옥은 인간을 보는 관점에 따라 똥을 자원으로 볼 수도 있고, 쓰레기로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즉 똥을 자원으로 보는 것은 인간을 생산자로 보는 관점이고, 쓰레기로 보는 것은 인간을 소비자로 보는 관점이라는 말이다. 전자를 생태학적인 관점이라면 후자는 경제학적인 관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전통적인 촌락이 성장하여 도시가 되면서 생산자로서의 인간보다는 소비자로서의 인간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되었다. 소비자가 모여 사는 도시에서 똥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쓰레기로 취급되고 있다.
예전에는 똥은 농사에 필요한 소중한 자원이었다. 그러나 현대 문명에서는 똥은 쓰레기로서 똥을 치우는데 엄청난 돈이 든다. 분뇨처리장은 꼭 필요한 환경기초시설이지만 사람들은 혐오시설이라고 하여 기피한다. 최근에는 비데를 설치하여 똥을 치우는 비용과 에너지를 증가시키고 있다. 생태적으로 보면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남는 음식물도 대처하기에 따라 쓰레기가 될 수도 있고, 자원이 될 수도 있다. 음식물 찌거기를 분리수거하여 잘 이용하면 퇴비로 만들 수도 있고, 그냥 섞어서 버린다면 처리해야 할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종이와 유리병, 플라스틱, 캔도 분리수거하여 재활용한다면 쓰레기가 아니고 훌륭한 자원이 된다. 쓰레기종량제와 재활용정책은 1995년부터 도입되었는데, 다행이 국민들이 잘 협조하여 성공한 대표적인 환경정책이라고 평가된다. 미국 뉴욕시에서는 분리수거정책을 유지하다가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이제는 포기하고 모든 쓰레기를 매립하는 정책으로 되돌아갔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우리가 모두 본받을 필요는 없는 좋은 예이다.
반야심경의 지혜
불교의 의식인 예불에서 마지막으로 외우는 경전이 모두 256 글자로 구성된 반야심경(般若心經)이다. 기독교로 말하면 예배를 주기도문으로 끝내는 것과 비슷하니, 반야심경은 불교의 핵심 경전이라고 볼 수 있다. 반야심경의 중심사상은 공(空)인데, 공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텅 빈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공의 참 모습에 대한 설명이 반야심경의 중간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모든 법의 공한 모습이 ‘불생불멸’이라는 것은 라보아지에의 질량불변의 법칙으로 설명된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종이를 태우면 재와 에너지로 바뀌지만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주 공간의 어느 곳에 존재하며 완전히 없어지지 않으니 ‘불멸’이다. 또한 그 어떤 작은 물질도 새로 만들어 낼 수 없으니 ‘불생’이다. 아무리 신소재라고 해도 그것은 이미 있던 물질을 화학적 반응으로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받는데, 우리가 보는 현재의 모습으로 잠깐 나타났을 뿐이다.
‘부증불감’은 “더한 것도 아니고 덜한 것도 아니다”는 뜻인데, 이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세상의 저쪽에서 아무리 큰 홍수가 일어나도 지구 전체의 수분 양에는 변함이 없다. 부산 사람이 서울로 이사간다고 해도 우리나라 인구가 늘어난 것이 아니며 변동이 없다. 마찬가지로 쓰레기를 처리한다는 것은 집안에 있는 쓰레기를 실어다가 매립지로 옮겨 놓는 일이다. 물질의 총량은 늘지도 줄지도 않았다.
물질세계에서 원소는 적절하게 순환되어야 생태계가 건강하게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한 부분에서 쌓이면 문제가 발생한다. 인체에서도 피가 잘 순환되어야 산소와 영양분이 골고루 공급되어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한 곳에서 막히면 여러가지 질병의 원인이 된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고 아우성인데, 경제도 마찬가지이다. 경제가 좋아지려면 돈이 돌아야 한다. 한국은행에서 찍어낸 화폐가 부유층과 중산층, 저소득층 사이를 적절하게 이동하여야 한다. 돈이 부자의 금고와 통장 속에 쌓여만 있으면 경제는 좋아질 수 없다. 돈이 순환하지 않으면 빈부격차, 양극화가 심해지고 사회는 불안해지며 범죄나 자살 등의 각종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다. 돈을 더 찍어내지 않아도 돈이 잘 순환하여야 소비도 살아나고, 공장도 돌아가고, 일자리도 늘어나고 경제가 좋아질 것이다.
반야심경은 생태계의 원리를 담고 있다. 물질의 총량은 변하지 않고 순환된다는 생태계의 기본 원리를 반야심경에서는 “불생불멸 부증불감(不生不滅, 不增不減)”이라는 8글자로 아주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불교 사상 중에 독특한 것이 윤회 사상이다. 윤회란 인간이 죽으면 없어지는 존재가 아니고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거쳐서 지구생태계 속에서 순환하고 있다고 보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윤회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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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추천시: 한세상 산다는 것/이외수
한세상 산다는 것도
물에 비친 뜬구름 같도다
가슴이 있는 자
부디 그 가슴에
빗장을 채우지 말라
살아있을 때는 모름지기
연약한 풀꽃 하나라도
못 견디게 사랑하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