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의 고목과 변화하는 나목
(枯木-말라죽은 나무, 裸木-잎이 떨어져 앙상한 나무)
2020.12.31.
1. 불편해서 변화하는 바닷가재
바닷가재의 일생은 불편함으로 말미암은 성장의 연속이다. 이 바닷가재는 갑옷처럼 단단한 껍데기로 자신을 보호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을 보호해주는 껍데기에 속살이 꽉 차면서 불편한 시간이 도래한다. 이 때 바닷가재는 선택을 해야 한다. 이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갈 것인지, 위험을 무릅쓰고 더 크고 강한 껍데기를 만들 것인지. 더 크고 강한 껍데기를 만들기로 선택을 한다면 우선 다른 천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은거지를 마련한다. 그 속에서 목숨을 걸고 자신의 껍데기를 벗는다. 그리고 자신의 흐물흐물한 살에서 새로운 껍데기가 돋아나 더 크고 강한 껍데기가 자리 잡기까지 기다린다. 바닷가재는 이 과정을 평생 동안 반복하며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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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편안함에 젖어버려 변화를 멈춘 교회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주신 복으로 인해 어느 순간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을 벗어났다. 이제는 신앙으로 인해 겪는 고통이나 불편함들이 거의 사라진 시대가 되었다. 이 사회의 기득권에 진입했으며 고지론으로 인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각계각층의 지도자가 되었다. 평생을 성장해야 하는 바닷가재처럼 교회는 끊임없이 말씀을 고민하고 사회를 고민하고 사람을 고민하고, 죄와 악을 고민해야 한다. 노예제도를 없애고, 인종차별철폐에 앞장서고, 첩제도폐지에 앞장서고 남녀차별금지에 앞장서서 여자들도 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하고, 사회적으로 외면받던 한센병 환자들에게 다가갔던 교회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사람들의 칭찬에 만족하였다. 만족함은 곧 편안함을 불러왔고, 편안함에 젖어버려 성숙과 변화를 멈추었다. 나는 며칠 전 영화 기생충을 처음으로 제대로 감상하였다.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보는 내내 메스꺼움을 참을 수 없었다. 기생충처럼 사는 송강호씨의 가족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을 외면하고, 무시했던 나 자신에 대한 욕지기를 참을 수 없었다. 왜 나는 그들을 보면서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까? 왜 나는 그들의 고통에 대한 불편함을 가지고 이 사회의 사각지대에서 괴로워하는 그들의 고통을 듣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자족하며 멈추었을까? 끝없이 불편함을 가지고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짐을 짊어지는 사회가 되지 못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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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변화된 삶과 변화하지 않는 우리들
최근 방송인 A양의 도를 넘는 절약에 많은 사람들이 욕을 하거나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나 또한 답답함과 동시에 안타까움이 들어서 기도하기도 한다. A양은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너무 힘든 시기를 보낸 나머지 자수성가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의 재력가 집안의 며느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를 넘는 돈에 집착하는 행동에 행동상담심리치료 뿐만 아니라 심지어 친정어머니까지 방송에 나와서 공식적으로 유년시절의 힘들었던 기억을 버리고 이제는 쓸 때는 쓰자는 유언까지 하지만 말짱 도로묵이 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A씨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그 가난에 대한 충격과 공포가 지금도 그녀를 괴롭게 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과연 A양만의 문제일까? 우리 모두가 정도와 방향만 다를 뿐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가장 흔한 예로 대부분의 집의 냉장고에는 기원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냉동식품들이 있다. 도대체 저것이 몇 년 전에 들어가 있던 생선인지, 고기인지 먹어도 탈은 없는 것이 확실한 지 불분명한 것들이 넘쳐난다. 우리 부모님들은 지금 풍족한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이 불안하기에 다 먹지도 못하고 버릴 것을 알면서도 냉장고에 꽉 채워 넣는다. 우리 모두 삶은 복을 받아 변화했지만 삶의 태도는 변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삶의 태도가 변하지 않는데 삶이 변해야될 이유가 있을까? 그토록 간구하며 복을 받을 이유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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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난은 왜 복일까?
고난은 나로 하여금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민하면서 내가 변화한다. 고난을 겪으면서 내가 성장한다. 하나님은 한국교회가 더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모세오경의 권선징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혜서의 지혜를 얻기를 원하신다. 동방의 의인 욥에게도 고난을 허락하셨던 이유를 고민하기를 원하신다. 요나를 통해 악의 상징 니느웨를 용서하고 구원하셨던 이유를 고민하기를 원하신다. 기도하면 복 받는다는 싸구려 복음, 낡은 성공신화의 간증에서 벗어나 하나님 때문에 실패를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신다. 하늘의 복을 받아 땅의 복을 누리는 삶이 아니라 땅의 복을 이용하여 이 땅에서 천국을 실현하며 천국을 살아갈 사람을 찾고 계신다. 지금의 고난은 변화와 성장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비극은 인류의 정신적, 기술적, 사회적 성장을 가져왔다. 고난은 겨울을 맞이하는 나무들이 한 단계 성장하는 나이테와 같다. 고난이 많을수록, 나이테가 많을수록 더 많은 상황과 아픔을 통해 성장했다는 자랑스러운 징표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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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부흥이란 변화를 뜻한다.
기름을 팔아서 아들의 빚을 갚기 위해 이웃들로부터 빌릴 수 있는 그릇이란 그릇은 모두 다 빌려왔다. 그런데 그 그릇들로 인하여 앉을 자리가 없다고, 누울 곳이 없다고 불평한다면 하나님께서 기름을 채워주시지 않을 것이다. 주일학교의 부흥을 기도했다면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교회의 기물들이 부서지고 깨지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부흥을 기도해서 다른 성도들이 온다면 나의 생각과 권리를 내려놓을 생각을 해야 한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조차 서로를 사랑하지만 서로에게 느끼는 불편함을 이해하고 감수하듯 나의 권리와 편함을 내려놓아야 한다. 1907년 평양대부흥 당시 기록에 따르면 어떤 선교사님은 이것이 부흥이라면 나는 부흥을 원치 않는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역사하실 수 있다. 부흥이란 익숙함과의 이별이다. 바닷가재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껍데기를 버리고 더 커다랗고 새로운 껍데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익숙함, 편안함을 포기하는 것이다. 나를 비우지 않고서 채워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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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전통, 트렌드 그리고 온고지신
무조건 변화가 옳다는 것이 아니다. 말씀의 본질과 전통에 기반을 두지 않는 새로움은 짚신처럼 얼마 가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움을 외면하는 것은 옹고집일 뿐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고(故)도 필요하고 신(新)도 필요하다. 그러나 너무 빠른 시대의 변화에 대부분의 교회지도자들과 어른들은 변화된 세상을 이해하기도 어렵고, 적응하기도 힘든 시대가 되었다. 게다가 과거와 달리 장수하는 시대가 되었지만 사회적 기반과 시스템은 그것을 쫓아가기 힘든 시대가 되었고, 그로 인해 사회에서 많은 상처를 받은 교회의 어른들은 부흥의 시대의 주역이었던 자신들이 일군 교회에서 마지막 목소리를 내면서 교회의 변화를 알게 모르게 반대하는 상황이다. 은퇴하고 몇 년 뒤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과거와 달리 은퇴하고 제2의 인생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아직도 자신은 더 일할 수 있고, 아직도 자신은 더 일할 수 있는데 강제로 은퇴를 당한 듯한 아픔과 고통으로 인해 자신들을 위로해줄 마지막 보루로 교회를 사수한다. 그렇기에 사회의 주역인 40~50대가 교회에서는 애들 취급을 받는 것이고, 대부분의 결정을 지혜로운 노인들께서 결정하는 농경사회 문화의 마지막 장소가 교회가 되었다. 대부분의 교회는 복음성가가 80년대 CCM이 90년대에 머물러 있다. 사례비도 80년대에 머물러 있다. 부교역자를 안 온다면서 사례비도 충분한데 시골이라 혹은 사명감이 부족해서 안 온다고 한다. 80년대라면 넉넉한 사례비지만 지금은 최처시급도 안 되는 사례비인데... 그러면 솔로사역자라도 받으셔야 하는데 솔로는 거부하신다. 어른들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하셨고, 지금 한국사회의 노인분들은 지금의 한국경제와 한국교회를 완성하고 사명을 완수한 존경받아야할 어른들이시다. 다만 시대를 잘못 타고나 급격한 사회변화를 쫓아가지 못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으려 하는 부분은 후배들인 우리가 기억했다가 우리가 책임지고 변화를 완성해야할 사명이다.
나는 우리 가락인 판소리가, 국악이 이대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라질 것으로 착각했었다. 한복이 외면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맞춰 한복의 본질을 유지한 채 새로움을 입힌 한복은 세계적인 그룹 방탄소년단이나 블랙핑크를 통해서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게 되었다. 판소리의 새로운 해석인 ‘범 내려온다’는 판소리가 이렇게 신명나고 맛깔나는 우리네 음악인지 처음 알게 해주었다. X세대에게 촌스러운 아저씨, 할머니들의 노래였던 트로트가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장르가 되었다.
교회는 어떤 곳인가 하늘의 언어를 땅의 언어로 전하는 자이다. 현대문화는 마카비 왕조를 출현시켰던 헬라문명의 습격이 아니다. 우리는 충분히 문화를 정복할 수 있고, 다스릴 수 있고, 이용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땅의 언어로 변환하여, 땅의 문화를 이용하여 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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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낀대(끼인 세대)가 변해야 사회가 변한다.
학창시절 선, 후배들과 항상 하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학교는 꼭 내가 졸업하면 좋아지더라. 초등학교를 졸업했더니 강당이 생기고, 중학교를 졸업했더니 잔디구장이 생기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더니 도서관이 생기고, 대학교를 졸업했더니 미남미녀 후배들이 넘친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사회가 바뀌는 것이 정말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싶다. 내가 졸업한 학교들이 더 좋아져야 내 동생들이 더 좋은 학교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내가 제대한 군대가 더 이상 폭력이 없고, 갈굼이 사라지고 보급품이 좋아지면 내 자녀를 군대에 보낼 때 안심하고 보낼 수 있지 않을까?
급격한 사회 발전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모든 세대는 끼인 세대가 되었다. 어른들도 농경사회 문화에서 산업사회를 뛰어넘어 첨단시대를 살고 계시며 너무 힘드시다. X세대는 요즘 회사에서 끼인 세대, 젊은 꼰대가 되었다. 집단문화의 마지막 세대이자, Y세대, Z세대를 직접 상대하면서 젊은 꼰대 세대가 되었다. 어린 학생들도 5년만 차이나도, 아니 2-3년만 차이나도 확연한 생각과 추억의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끼인 세대들이 희생할수록 사회는 점점 좋아지고, 끼인 세대가 희생하지 않을수록 사회는 고착화된다. 내가 아는 제자는 중학교에서 짱이 되어 학교폭력이나 일진문제를 해결했고, 신학교 후배는 후임병때 고참들에게 폭행을 당했지만 본인이 병장이 되고서는 폭행을 멈추었다. 내가 아는 권사님은 힘든 시집살이를 겪었지만 본인이 시어머니가 되고서는 남녀구별 없이 집안일을 시키고, 명절음식도 남녀구별 없이 장만하고, 설거지를 시킨다.
학교가 점점 좋아지고, 군대가 점점 좋아지고 사회가 점점 좋아지고 교회도 점점 좋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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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목(枯木)과 나목(裸木)
한국사회는 교회가 이제 성장 동력을 잃어버려 곧 있으면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말라 죽어버린 나무처럼 곧 있으면 죽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교회가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말라죽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영적인 겨울을 맞이하며 잎사귀가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있을 뿐이다. 추운 겨울 고목과 나목은 쉽게 구별이 가지 않는다. 꽃이 피는 봄이 와야 비로소 죽은 나무였는지, 겨울을 나는 나무였는지 구별이 된다. 비록 이 시간이 교회에게는 추운 겨울이지만 교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죽지 않는다. 죽은 것처럼 보일 뿐이다. 다만 이 시간을 통해서 영적인 나이테가 하나 더 새겨지는 것이다. 온고지신의 과정은 마치 탈피(脫皮)와 같고 환골탈태(換骨奪胎)와 같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왕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잘린 나무 밑동에서도 새싹이 돋아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오히려 이 시간을 통해서 더 강력한 부흥과 하나님의 역사가 도래할 것이다. 영적인 나이테가 많아질수록 더 견고해진다. 더 강력해진다. 왜냐하면 영적인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기 때문이다. 성장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간은 한국교회가 그동안 편하게 느껴왔던 껍데기를 벗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더 크고 단단한 껍데기를 입고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바닷가재처럼 이 고난과 고통의 시간 동안 한국교회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더 커질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교회는 많은 도전을 받아왔다. 그러나 그 시간마다 교회는 탈피하는 나비처럼 기존의 열매와 잎사귀를 포기하고 새로운 열매를 맺었다. 바닷가재처럼 나이테가 생기며 더 견고하고 넓은 몸을 형성하였다. 한국 교회는 처음 맞이하는 진통과 내려놓음의 시간이지만 하나님의 몸된 교회는 이미 수도 없이 겪었던 과정이다.
2020년을 보내며 어린 시절의 생각도 같이 떠나보내고 다가오는 2021년 더 넓고 깊은 생각과 신앙의 갑주를 입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