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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정
<연재2–본론1>
Ⅱ. 고향의식의 발현 양상
1. 전통으로서의 고향 — 김상옥
초정(艸丁) 김상옥(金相沃)은 시와 시조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기 때문에 시조시인으로, 시인으로 불리며, 서예가이기도 하다. 시조집으로는 초적(47), 삼행시(73), 향기 남은 가을(89), 느티나무의 말(98), 눈길 한번 닿으면(01) 등을 간행하였다. 시집으로는고원의 곡(48), 이단의 시(49), 의상(53), 목석의 노래(56), 묵을 갈다가(80) 등을 간행하였고, 동시집으로석류꽃(52), 꽃 속에 묻힌 집(58) 등이 있으며, 산문집 시와 도자(75)가 있다.
김상옥은 1920년 음력 3월 15일 경남 통영(충무)시 항남동 64번지에서 출생했다. 갓일을 하시던 아버지 기호 김덕홍金德洪과 어머니 여양 진陳씨 사이에서 6녀 1남의 막내로 태어났으며, 7살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게 된다.
그는 고집이 세고 영특하고 남달리 꿈과 인정이 많았던 소년 시절을 보냈는데, 학교 교육은 별로 수학하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했다. 김상옥의 문학수업에 영향을 준 사람으로는 육학년 때 담임선생이었던 한재현의 격려와 글씨에 뛰어났던 이찬근, 묵죽에 빼어났던 김지옥 선생의 가르침과 함께 영화, 연극, 무용에 일가를 이루었던 노제 장춘식 등이었다.
김상옥은 한때 <남원서점>이란 책방을 경영하였는데, 거기에서「임꺽정전」도 팔고, 독립운동의 아픔과 애절함을 노래한 낭산의 한시를 써붙였다가 영창에 가기도 하며, 우리말의 사용이 금지된 식민치하에서 독학으로 한글 시작을 계속하느라 네 번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7년에는 김용호, 한윤수 등과 함께 시동인지맥(貊)을 창간하고, 임화, 윤곤강, 서정주, 박남수 등이 후일 합류하기도 하였다.
1939년 문장지에 「봉선화」를 발표하였으며, 다음 해에는 동아일보 신춘시에 「낙엽」이 당선되었다. 해방되던 해 2월에는 일경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윤이상과 함께 상경하여 동아일보에 시조로 등단했던 이호우의 집에 기숙하기도 하고, 인장가게서 도장을 파기도 하면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던 이호연, 오세창 선생 등을 만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어 가람 이병기가 군정청의 교과서 편수관이 되자 「봉선화」를 국어교과서에 싣게 된다. 그 해 가을에 전국 효시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해방기념제전’이라는 이름으로 글짓기 대회가 열렸는데, 이주홍, 김정한, 김수돈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내려갔던 젊은 그는 심사위원을 사퇴하고 직접 선수로 시부에 출전해서 매일 다른 시제가 걸리는 3일 동안 계속 장원을 하였다.
이어 삼천포에 내려가 삼천포중학교의 교사를 시작으로 통영중학교, 통영여고, 마산고, 경남여고 등에서 20년 가까이 교편을 잡았으며, 삼천포중학교에서 박재삼, 마산고에서 이제하, 경남여고에서 허윤정 등을 길러내기도 했다.
김상옥은 1947년 첫시집 초적을 발간하면서 직접 닥종이를 고르고, 편집, 문선, 조판, 장정, 인쇄, 제본의 전과정을 혼자서 하였다.
그 후 김상옥은 향리에 다시 돌아와 남망산에 충무공의 시비를 세운다. 이 비문에 새긴 충무공 예찬은 통영을 소개할 때마다 등장하는데 ‘한 민족의 윤리를 일컬어 진실로 한 종교의 교리와 다를 바 없나니, 이로써 충무공은 비로소 그 진리 앞에 성인(成仁)한 교주시니라’는 내용이다.
교사, 인쇄소 직공, 서점 경영, 도장포 경영 등의 직업을 거친 김상옥은 62년 상경하여 인사동에서 표구사를 겸한 골동품가게 ‘아자방亞字房’을 내어 72년까지 경영하면서 동아일보·중앙일보 등의 신춘문예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범부 선생의 신라사 강론을 경청하기도 하고, 옛 고서들을 가까이하면서 백자에 대한 사랑은 구체적으로 이론의 틀을 갖추게 되었고, 국립박물관 초청으로 백자에 대한 사랑과 예술정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한편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그림에도 독학 정진하여 나름대로 일가를 이루었다. 서울, 부산, 대구, 대전, 마산, 진주 등지에서 그림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72년에는 쿄토의 융채당화랑에까지 초청을 받아 일주일 동안 대성황을 이루기도 했다.
1945년 아동 문학지인 참새를 간행하면서, 통영 문인협회를 조직하여 그 회장을 역임했고, 서울로 이주하기 전에는 주로 경남지방에서 작품활동을 했으며, 제1회 노산문학상(76), 제1회 중앙시조대상(83)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김상옥 시인이 자란 시기는 일제시대였고, 그가 문단에 등단한 시기는 일제 말인 1939년이었다. 그가 시조시인으로 더 잘 알려진 이유는 1930년대 우리말의 공백기나 다름없는 시대에, 즉 일제의 우리말글의 말살정책 상황에서 ‘시조’로 등단하였으며, 많은 시조 시인들이 고정관념이나 선입견을 가지고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김상옥은 그것에서 탈피를 시도하여 변혁을 꾀하고 있으며, 현대시조 발전의 한 계기를 마련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문학 속에 나타나는 ‘고향 상실’ 의식은 민족사의 현실과도 관련이 깊었다. 그 이유로는 우리 민족이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고향에서 생존이 어려워 고향을 등지는 유랑민이 많이 생겨 공간적 고향상실감을 느꼈기 때문이며, 한편 근대 사회의 소외의식과 관련된 고향상실감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민족으로서의 시대의식과 허무의식에서 오는 상실감이라고 볼 수 있다. 농민들이 생존이 어려워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농사지을 땅이 없거나, 농사를 지어도 지주에게 소작료로 바치고 나면 먹고 살기 힘들어서이다. 그들은 국외로 떠나 유이민의 길을 떠나거나 국내에서 떠돌며 유랑하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의 그때의 상황을 살펴보자.
조선의 ‘완전식민지화’를 하루바삐 앞당기기 위한 목적으로 대한제국의 통감 이등박문이 설치한 ‘동양척식회사’는 청일전쟁 당시 2만여 명에 불과했던 일본인 수를, 1904년 러일 전쟁 직후부터 추진된 ‘일본 내 과잉인구 흡수정책’에 상응하게끔 ‘합방’ 당해연도인 1910년에는 17만 1천 5백 43명, 이른바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된 1918년에는 33만 7천 명으로 급증시켰다. 또한 그 산하에 4만 6천 정보(1914)에 달하는 광대한 땅(가장 비옥한 논)을 소유함으로써, 그 결과 조선 농민은 급속히 분해되었다. 그리하여 소작농·농업노동자로 금방 전락하거나, 화전민·도시노동자로 전환하는 농민들이 대부분이었으며, 국내에서 유리 걸식하는 자, 만주·시베리아 등지로 유랑의 길을 떠나는 이농민 및 하와이·멕시코 지역으로의 값싼 노동이민으로 이주해 가는 이들이 속출하였다. 이같은 대규모 ‘농민이향’의 결과가 당대 농민들로 하여금 국외 유이민으로 전락하게 하거나 도시노동예비군으로 곤두박질치게 하는 비참한 것이었다.
이처럼 일제의 민족말살 정책으로 우리 민족은 희망도 잃고 정체성도 없이 흔들릴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이 시기에 뜻있는 애국지사들이나 문학자들은 어떻게 해야 희망을 잃은 이 민족에게 희망과 자존감을 줄 수 있으며, 어떻게 이 민족의 정체성을 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 민족에게 자긍심을 주고, 민족애를 갖게 할 수 있는 힘, 민족혼을 일깨울 수 있는 힘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했다. 이러한 자각의 일환으로 육당 최남선은 1926년 「조선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를 조선문단에 발표함으로써 우리의 전통 시가인 시조문학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찾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려 노력하였다. 이어 가람 이병기, 노산 이은상과 같은 이들이 시조의 맥을 이어오고 있었다.
이때, 이 민족의 정서와 민족혼을 찾으려는 노력을 김상옥은 시조작품에 기울였다. 정신적인 맥을 찾고 전통을 찾아 민족정서를 지켜 가는 것이 곧 민족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던 것이다. 향토인 조국강산을 일제에게 빼앗긴 상태에서 우리민족의 정신적 뿌리감정인 전통의식, 전통미를 찾는 일은 곧 우리민족의 정신적인 고향을 찾아 주는 일이었고, 일제하에서 할 수 있는 조국사랑과 민족사랑이었다. 잃어가는 전통을 찾아 그 정신을 이어가는 것은 우리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찾아 주는 일이며 고향상실감과 국토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향수란 원래 고향에 대한 사모이지만, 그 고향이란 반드시 유형임을 요하지 않는다’고 볼 때, 우리는 무형의 정신적 안식처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정신적 고향인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찾는 일은 곧 우리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우리 민족이 삼국을 통일하여 현재의 영토를 지녔던 신라 시대부터 찾아보는 일이었다. 문화와 과학이 발달했던 통일신라 시대의 문화적 유물과 역사적 유적을 찾아보고 그들에게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고 사랑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김상옥은 신라의 문화 유물과 역사적 유적들에 관한 시조를 쓰기 시작했고, 그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려 노력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 우리의 지나온 역사와 문화에 관심과 애정을 갖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또 그 내용을 담는 그릇으로써 우리 민족이 가장 오래 사랑해 왔던 문학 형태인 <시조>를 택했다.
그의 첫시조집 초적의 제3부 ‘노을빛 구름’에서는 신라·고려·조선의 유물·유적을 노래하는 한편, 작품「선죽교」등을 통해서는 고려충신 정몽주 등 민족의 위인들을 노래했다. 정신적 뿌리를 찾으려는 그의 의지는 바로 우리민족의 유물·유적·인물에서 정신적 고향을 발견하여 시조로 작품화하고, 그것에 대한 향수를 보여준다.
김상옥의 이러한 고향의식은 훗설의 ‘고향의 의식적이고 형이상학적 측면을 볼 때 그 고향의 본질은 불변하고, 영구적이며, 또 그것은 자연적 공간만이 아닌 것이다.’라고 한 정의와 슈프랑어의 ‘고향의식은 정신적인 뿌리감정(Geistiges Wurzelgefuhl)’이라고 정의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전통문화에의 접근은 자연적·처소적 공간이 아닌 ‘정신적인 고향’을 찾으려는 그의 노력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한계전의 ‘시인들의 정신 밑바닥에 숨겨져 있던 고향의식은 실제 자신이 태어난 구체적인 고향에 대한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그것은 보다 일반적인 것이며, 개인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이 고통스러울 때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져주고 위로해 줄 ‘상상적인 어머니’를 뜻하는 것이다. 물론 이 때의 ‘어머니’ 라는 것은 이미지의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지 현실의 특정한 대상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조국’이라는 남성적 존재와 대비되는데, 조국이 강력한 권력과 이념, 즉 ‘아버지’적인 것을 통해 지탱되는 것과 달리, 이 어머니로서의 여성성은 내밀하며, 뚜렷한 이름도 없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었던 영혼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정신 밑바닥에 놓여 있는 것이다.’라고 한 주장과도 관련시켜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김상옥의 고향의식이 드러나는 작품을 두 가지로 나누어 파악해 보고 분석하고자 한다. 하나는 지정학적인 고향인 통영을 중심으로 한 토속적 공간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인 전통문화유산을 통한 전통정신으로서의 고향이다.
가. 토속적 정서 공간
김상옥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고향의식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지정학적인 고향인 통영의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정서를 나타낸 것들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적인 고향으로서의 이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에 바탕을 둔 고향이다.
향토란 ‘시골, 고향’이란 의미로 사전에는 풀이되어 있다. 흔히 향토성이란 어떤 지방 특유의 정취나 풍습 등을 말한다. 토속성이란 말도 같은 의미로 쓰여 그 지방만의 특유의 습관이나 풍습을 말하고 있다. 향토로서의 고향의식은 1920년대의 김기진 문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20년대 초 팔봉 김기진은 신경향파 문학 전개 과정에서 <역의 예술>을 주장하면서 계급문학의 정당성을 내세웠는데, 그에게서 향토로서의 고향의식이 나타난다.
우리의 향토 -나는 여기서 국가라는 말을 쓰기 싫다- 가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살림이 아니고, 우리의 살림이 우리의 조직- 손에 있지 아니하다. 우리의 살림은 빈객인 저 사람들의 손아귀에 있다. 남산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한강이 우리의 것이 아닌 거나 마찬가지로, 우리의 살림도 우리의 것이 아니요, 앞논, 뒷밭이 저 사람들 것인 동시에 우리 집 마당의 타작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저 건너 이판서나 강참판댁의 노적가리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서 김기진은 현재 우리의 근원적 고향을 ‘향토’라는 개념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남산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한강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앞논, 뒷밭이 저 사람들 것”이라고 하여 김기진이 생각하는 향토의 개념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기진은 30년대 초까지 향토를 중심으로 고향을 인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김상옥의 작품 중에서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공간적 차원으로서의 고향의식이 나타나는 작품들은 곧 향토적, 토속적 정서를 나타내는 것들과 연결된다. 그가 태어난 지정학적인 고향인 통영을 중심으로 회귀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인 어린 날에 대한 그리움과 토속적인 정서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나고 있는 작품들이 여기에 속한다.
눈을 가만 감으면 구비 잦은 풀밭길이
개울물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고
백양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이구요
송아지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도
저녁 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질 것을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로운 꽃찌짐!
어질고 고운 그들 멧남새도 캐어오리
집집 끼니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감았던 그 눈을 뜨면 마음 도로 애젓하요
-「사향」 전문
제명이 암시하듯이 고향의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다. 화자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고향을 떠올리고 있다. 구비가 잦은 풀밭길이 보이고, 개울물이 돌돌돌 길섶으로 흘러가는 모습이 보이고, 백양숲 사립을 가린 초집들도 보인다. 송아지를 몰고 오며 바라보던 진달래는 저녁노을처럼 붉고 아름답게 산을 둘러 퍼져 있다. ‘어마씨 그리운 솜씨에 향그러운 꽃지짐!’이라고 하여 생각은 다시 한번 비약하고, 후각적 이미지 묘사로 생생한 느낌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저녁노을처럼 산을 둘러 퍼진 진달래의 붉은 빛, 그것은 다시 어머니의 그리운 솜씨인 진달래꽃으로 꽃지짐(花煎)을 붙이던 모습으로까지 상상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 어질고 고운 고향마을 사람들은 지금쯤 멧남새(산나물)도 캐어올 것이다. 집집이 끼니때마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 그 고향을 생각하며 감았던 눈을 다시 뜨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은 도로 애젓하게 저려온다.
그는 이 작품에서 향토적인 고향과 토속적인 정서를 그리워하고 있다. 풀밭길, 개울물, 길섶, 백양숲, 사립, 초집, 송아지, 진달래, 저녁노을, 산, 어마씨, 꽃찌짐, 멧남새, 집집, 마을 등 그가 고향을 생각하며 쓰는 소재들은 우리의 고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토속적인 풍경이며 정서다. 이 작품에 대해 나재균은 ‘지금은 잃어가고 있는 소중한 것들을 절실히 그리워 부르는 향수의 노래’라고 하여 잃어가는 것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이라 하였으나 토속적인 정서에 대한 그리움으로 볼 수 있다. “유년 시절의 꿈을 꾸던 당시에도 갈등과 아픔과 시련이 그 꿈과 함께-어쩌면 현재의 삶보다도 더 강도 높게-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회상이라는 여과기에 걸러져 버리고 오로지 비현실적인 회상 가운데 꿈은 행복의 원형으로 나타난다. 시인의 상상력 속에 되살아나는, 그리하여 빛을 발하기 시작하는 꿈은 행복한 이미지만을 이끌어 들이고 불행의 경험을 거부하는 이른바 이미지 중심인 것이다.”
어렵고 힘들었던 기억은 모두가 추억이란 이름으로 걸러지고 좋은 기억들만 남아 있다. 봄이면 가난하여 봄나물을 캐어 힘들게 끼니를 이어 갔겠지만 그것조차 화자에게는 아름답게만 느껴진다. ‘봄을 씹고 사는 마을’이 그것이다. 봄의 생생력적인 힘이 그대로 살아나는 생동감 있는 표현이다. 그리하여 향수는 인간에게 언제나 감초를 씹듯 향기롭고 감미롭게 다가온다.
내 한때 豆滿江(두만강)ㅅ가 邊氏村(변씨촌)에 살았는데
고향을 묻길래 統制使(통제사) 營門(영문)이던 통영
진사립 자개장롱 나는 곳이래도 모르데요.
아메야 에미네야 웃음이 마구 터지는데
가수내 이 문둥이 말끝마다 흉을 봐도
비빔밥 꽃찌짐 얘기는 숨도 없이 듣던데요.
되땅은 하로 아침길 慶尙道(경상도)는 꿈의 나라
동삼 내 눈이 싸여도 한우리의 고장인데
아득한 먼 옛말같은 겨레들이 삽데다요.
-「邊氏村(변씨촌)」 전문
시인의 고향 경상도 통영과 그곳의 특산품인 자개장롱 등의 소재가 나타나는 작품이다. 같은 민족이라 정서는 비슷하지만 조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변씨촌인 두만강에서 더 가까운 곳은 중국 땅이고, 고향인 경상도는 멀리 있어 꿈의 나라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곳에 우리들의 겨레들이 살고 있더라는 내용이다. 그가 중국에 갔을 때 그곳에 사는 우리들의 동포들을 보고 쓴 작품이다.
자개장롱으로 유명하던 고향 통영에 대한 그리움과 토속적 정서를 그리워하며 또한 두만강가에 살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서 같은 겨레임을 발견하고, 동족애를 느끼고 있다. 같은 핏줄의 겨레붙이인 그들이 고향도 모르고 조국도 잊은 채 살아가고 있는 모습에서 화자는 그들에 대한 애정과 안타까움을 보이고 있다. 종장에서의 간접 화법식의 ‘~데요’, ‘~다요’를 씀으로써 독자와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표현으로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기도 하는 작품이다.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듯 힘ㅅ줄만이 서노나
-「鳳仙花(봉선화)」 전문
이 시조는 1939년 가람 이병기의 추천을 받아 문장지에 실린 작품이다. 그 동안 계속 교과서에 실렸었고, 가곡으로도 만들어졌다. 이병기는 다음과 같은 추천사를 통해 그의 언어구사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 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누나// 하는 것이 얼마나 그립고 놀라운 일이냐. 이런 정이야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마는, 이런 표현만은 할 이가 그리 많지 못할 것이다. 타고난 시인이 아니고는 아니될 것이다. 쓰는 말법도 남달리 익숙한 바 <삼삼이는>과 같은 말을 쓴 건 그 묘미를 얻은 것이다. 항용 말을 휘몰아 잘 쓰기도 어려운 바, 한층 더 나아가 새로운 말법…… 우리 어감(語感), 어예(語例)를 새롭게 살리는 말법을 쓰는 것이 더욱 용하다. 그러나 앞으로 더 양양한 길이 있는 이 시인으로서 다만 봉선화 시인으로만 그치지 말기를 바란다.”
조연현은 “동심에 가깝도록 소박하고 섬세한 감성”을 보여주는 시인이라 보고 있으며, 또 임선묵은 “그의 시어는 맵거나 독하지 않고 원한에 사무쳤거나 비통에 몸부림치고 있지 않다. 순수와 참여가 조화된 본연의 모습을 증시(證示)하고 있는 것이다.”며 시어에 대한 선택이 뛰어남을 지적한다.
작품 「봉선화」의 뛰어남은 위에 지적한 ‘언어의 세련미’외에도 ‘이미지의 선명함’, ‘토속적 소재 사용’에도 근거할 수 있다. 장독간, 봉선화, 꽃, 사연, 누님, 고향집, 손톱, 꽃물, 양지, 실, 하얀 손, 가락 등의 단어가 보여주고 있는 토속적 정서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는 향수를 자아내기에 충분한 소재이기 때문이다.
비가 오고 난 후 장독간에 핀 봉선화 꽃을 소재로 하여 시상이 전개되고 있다. 그 꽃으로 하여 시집간 누님이 생각나고, 자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는 소년의 동심 어린 목소리가 담겨 있다.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누님에 대한 그리움을 시화(詩化)하고 있다. 양지에 앉아서 봉선화 꽃과 잎과 백반을 함께 찧어 손톱에 얹고 손가락을 헝겊으로 싸고 실로 찬찬 매어주던 누님의 모습, 하루쯤 지난 다음 손가락을 풀었을 때 연붉게 물이 들어있던 손톱, 그러나 그러한 유년으로의 회귀불가능한 지금은 꿈속에 본 듯이 힘줄만이 선다고 한다. 유년의 추억만이 힘줄처럼 강하게 선다는 상징적 의미로 볼 수 있다.
‘누나’ 또는 ‘누님’이라는 소재는 우리 시에 많이 등장한다. 김소월의 시 「접동새」를 보면 누나의 이미지는 슬프다. 민간 설화에서 소재를 취했다는 김소월의 「접동새」의 누나는 죽어서도 오랍 동생들을 잊지 못해 집 앞에 와서 ‘접동접동’ 울며 다닌다는 슬픈 존재 양상을 띤다.
접동/ 접동/ 아우래비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든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옛날, 우리나라/ 먼 뒤쪽의/ 진두강 가람가에 살든 누나는/ 의붓어미 시샘에 죽엇습니다.//
누나라고 불너보랴/ 오오 불설워/ 시새움에 몸이 죽은 우리 누나는/ 죽어서 접동새가 되엿습니다.//
아웁이나 남아 되는 오랩동생은/ 죽어서도 못니저 참아 못니저/ 야삼경(夜三更) 남 다자는 밤이 깊으면/ 이山 저山 올마가며 슬피웁니다.//
-김소월의 「접동새」 전문
민간에 전해지는 설화는 의붓어미의 구박을 받고 자란 누이가 혼기가 되어 혼수 장만을 많이 했건만 갑자기 죽게 되어 아홉 오라비는 슬퍼하면서 마당에서 그녀의 혼수를 태웠다. 그런데 의붓어미가 아까워하면서 다 못 태우게 하자, 화가 난 오라비들은 혼수를 태우던 불에다가 의붓어미를 밀어 넣어 죽게 했더니 그 의붓어미는 까마귀가 되어 날아갔다. 죽어서 접동새가 된 누이는 밤마다 오라비들이 있는 곳에 와서 운다. 까마귀는 접동새만 보면 죽이는 습성이 있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접동새는 밤에만 우는데 그러한 생태계의 모습을 보고 만든 설화이며 그것을 김소월은 시화했던 것이다.
김상옥의 「봉선화」에서 누나의 이미지는, 김소월의 시 ‘접동새’에 보이는 정서와는 다른 따뜻한 정감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즉 ‘누나’의 여성성이 자상하고 따뜻한 보호자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때문에 이 작품은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를 그대로 살린 여성적 포근함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회귀불가능한 시간에 대한 향수가 향토적, 토속적 정서와 어울려 한 층 더 애련함을 자아내기도 하고 독자들에게 고향에 대한 보편적 그리움을 더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고향의 의미는 토속적 정서와 함께 따뜻한 모성적 여성성이다.
오오래 바다가에 외따로 살아오며
자나 깨나 물소리만 귀에 익혀 들었거니
바람 잔 고요한 날엔 가슴 도로 설레라
-「물소리」 전문
바다란 그에게 모성과 같은 장소다. 파도소리를 들으며 그것을 자장가 삼아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통영에 대한 그리움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과 동일성을 띤다. 사시사철 물소리에 젖어 산 그에게는 파도소리 그 자체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전이되는 것이다. ‘바람 잔 고요한 날엔 가슴 도로 설레라’의 표현은 특히 심리적인 묘사로서 화자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절실히 드러내고 있다. 자기가 나서 자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김상옥에게 있어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향토애로서의 고향이 더 나아가 조국애가 됨을 알 수 있다. 그가 이 충무공 시비에 쓴 시가 그러하다. 곧 애향정신의 발로가 확대된 결과라 하겠다.
한 구비 맑은 江(강)은 들을 둘러 흘러가고
기나긴 여름날은 한결도 고요하다
어디서 낮닭의 울음소리 귀살푸시 들려오고
마을은 우뜸 아래뜸 그림같이 놓여 있고
邑(읍)네로 가는 길은 꿈ㅅ결처럼 내다뵈는데
길에는 사람 한사람 보이지도 않아라.
-「江(강) 있는 마을」 전문
위 작품은 고향의 한 정경을 묘사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 구비 맑은 강은 들을 둘러 흐르는데 긴 긴 여름날이 더욱 고요하다. 이런 고요를 깨고 어딘가에서 우는 낮닭의 울음소리, 그 소리마저 귀에 살풋 들린다. 우뜸 아래뜸 그림같이 놓인 집들이 아름답고, 읍내로 가는 길은 꿈결처럼 아득히 내다뵈는데 길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도 않는다고 표현함으로써 적막만이 흐르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고향 마을의 정경을 나타내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은 마을의 평화이다. 동네 사람들은 안 보이는 어느 곳에서 일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너무 더워 낮잠을 자면서 쉬고 있는지 이 작품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고요한 정서가 나타나고 향토적, 토속적 평화로운 정경이 나타나는 작품이다.
그의 몇몇 작품은 위에서 보듯이 향수를 자아내게 하는 토속적이고 전통적인 정서의 작품에 해당 된다. 우리민족의 향토적, 토속적인 정서 및 생활습관 등을 그리워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고향에 대한 의식, 또는 향수가 거의 토속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는 우리민족의 정서에 잘 부합되어 독자의 공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누구에게나 고향은 그립고, 돌아갈 수 없는 어린 날은 짙은 향수와 함께 다가오기 때문이다.
회귀불가능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있지만, 위 작품들에서 보듯 그의 고향에는 갈등적 요소가 없다. 늘 정겹고, 평온하고 꽃지짐 지지는 냄새가 나는 고향이다. 고향의 풍경도 직선적이지 않고 곡선적이다. ‘눈을 감으면 구비 잦은 풀밭길이’ 보이고, ‘한 구비 맑은 강은 들을 둘러 흘러가는’ 풍경이다. 완만한 곡선의 이미지가 고향에는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 속에 등장하는 화자를 비롯한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邊氏村(변씨촌)」에서는 풍속과 문화적 차이가 남에도 불구하고, 고향의 역사와 향토문화를 내세우는 애향심이 드러나고, 「鳳仙花(봉선화)」에서는 봉선화 꽃을 매개로 하여 시적 화자와 누님이 고향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본다. 앞에서 살펴본 작품 외에도 「비 오는 분묘」, 「입동」, 「만추」, 「누님의 죽음」, 「흰 돛 하나」, 「안개」 등의 작품에 향토적·토속적 정서가 나타난다.
나. 민족정신의 뿌리 공간
김상옥의 시조에는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고자 한 작품이 많다. 그것은 정체성을 잃고 희망도 없이 지내던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상실감을 극복하고자 했던 시인의 의지이기도 했다. 그는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찾고자 우리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족을 구하려고 노력한 위인들을 가려내어 그들을 찬양하는 내용의 작품을 썼고, 또 우리의 전통미에 관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민족얼이 담긴 문화적 유물과 역사적 유적을 찾아 그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찬양하는 작품을 썼다.
빛나는 우리의 역사와 전통과 문화재를 사랑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찾고자 할 때 자신과 민족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질 수 있고, 자긍심과 자존감을 가질 때에만 우리의 정신은 살아나고, 독립에 대한 열의도 생겨 조국독립도 쟁취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래의 초적의 후기와 김동리의 글을 보면 김상옥이 우리의 전통문화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시조 작품화한 이유를 알 수 있다.
“지낸 날 나는 이 겨레와 이 강토를 이 글과 이 말을 마음으로 사랑하였으되 그의 받은 굴욕을 씻기에 분노보다 슬픔이 앞을 가리고 항쟁보다 원망으로 살아 이제 이렇게 오늘을 맞으니 가슴을 이개는 기쁨보다 도로 한되고 마음이 허전해짐을 느끼옵니다
진실로 지낸 날의 그 사랑이 입에 붙은 사랑이 아니면 내 너무 미지근하고 행동함이 없었음을 나는 이제사 뉘우치고 스스로 오장을 찢고 싶은 그러한 불같은 미움을 금ㅎ지 못하옵니다”
“그는 그 당시 이십 오육 세의 청년으로 거진 생리적으로 타고난 듯한 열열한 민족주의자였다. 그는 그의 고향인 통영에서 도망하여(망명) 함흥으로 원산으로 다시 삼천포로 전전 유랑하며 있었고 그의 뒤에는 잔인한 경찰의 손길이 뻗쳐져 있었다. 이렇게 그는 하룻밤도 발을 뻗고 쉬지 못하며…그 불타는 열정과 샘솟는 시혼마저 개나리보따리 속에서 햇빛 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의 시조집 초적에서 그가 즐겨 다룬 시적 대상물이 문화적 유물인 것에 대해 정혜원은
“일제하에서 아직 문화재나 유적에 대한 일반의 깊은 자각이 없던 시절, 홀로 외로운 노래로써 우리 것에 대한 소중함을 깨우쳐준 그의 일련의 시작들은 어떤 드높은 목청의 항일적 노래보다 귀한 것이었다 할 수 있다. …… 실제로 그가 시를 통해 이 땅, 이 겨레의 문화 쪽으로 이끌어 모은 관심의 폭은 어떤 적극적 행동보다도 민족의 혼을 살리는 작업이었다.”
라는 견해를 보임으로써 민족혼을 살리려한 김상옥 시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앞의 글을 통하여 김상옥이 우리의 유물과 유적 등에 가치를 부여하고, 전통과 민족성에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우리민족에게 정신적 고향을 찾게 하고, 애국애족하는 민족얼을 되찾게 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첫시조집 초적에서 보여준 고전적 문화유산에 대한 깊은 관조는 그 이후의 시조집 삼행시까지도 이어진다.
보면 깨끔하고 만지면 매촐하고
神(신)거러운 손아귀에 한줌 흙이 주물러져
千年(천년)전 봄은 그대로 가시지도 않았네
휘넝청 버들가지 포롬히 어린 빛이
눈물 고인 눈으로 보는듯 연연하고
몇포기 蘭草(난초) 그늘에 물오리가 두둥실!
高麗(고려)의 개인 하늘 湖心(호심)에 잠겨 있고
숙으린 꽃송이도 향내 곧 풍기거니
두날개 鄕愁(향수)를 접고 울어볼줄 모르네
붓끝으로 꼭 찍은 오리 너 눈동자엔
風眼(풍안) 테 넘어보는 할아버지 입초리로
말없이 머금어 웃던 그 모습이 보이리.
어깨 벌숨하고 목잡이 오무속하고
요조리 어루 만지면 따스론 임의 손ㅅ길
千年(천년)을 흐른 오늘에 상기 아니 식었네
-「靑磁賦(청자부)」 전문
첫째·둘째 수에서는 외형을 묘사한 부분이 있지만, 셋째·넷째 수에선 사실적인 외형묘사와 함께 상상적인 요소가 등장한다. 다섯 째 수에서는 화자는 이 도자기를 만든 조상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때문에 이 작품은 정혜원의 지적처럼 “대상을 하나의 정물로서 바라보며 외적인 형상미를 추구하는데 골몰했다.”고 보기만은 어렵다. 이 작품은 단순한 청자의 외적 형상미만 추구한 건 아니다. 거기엔 역사와 철학과 민족의 전통적 정서가 들어있다.
벌숨한 어깨와 목잡이가 오무속하다는 것으로 보아 고려청자 중에서도 청자상감병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따뜻한 임의 손길’이란 천년 전 도공의 솜씨가 오늘까지도 따뜻한 느낌으로 우리 민족에게 전해 오는, 강렬한 조상의 숨결을 말하고 있다. 화자는 고려시대의 청자에서 천년 전의 도공의 숨결을 느끼고 천년 전의 봄의 모습을 보고 있다. 천년 전 흙을 빚던 도공의 마음을 생각하고 그 청자에 그려진 버들가지와 난초와 물오리의 모습에서 고려의 호심도 읽어내고 난의 향기도 맡을 줄 알며 오리의 눈동자와 대화할 줄도 안다. 눈으로 보면 깨끗하며 아담하고 손으로 만지면 매끄럽고 말쑥하여 눈과 손 어디로도 흠잡을 데 없는 깨끗하고 부드러운 고려청자를 말하고 있다.
중국 송나라 때 태평노인이라는 학자가 쓴 수중금이라는 책을 보면 천하제일이라는 대목 속에 ‘監書內酒 端硯 洛陽花 蓮州茶 高麗秘色(고려청자), 皆爲天下第一’이라고 하여 당시의 중국 지식인 사회에서 천하제일로 치는 명품 중에 고려청자가 한몫 꼽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 인종 원년(1123)에는 송나라 휘종황제의 사절단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의 저서 고려도경에도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을 꽤 자세히 묘사한 대목이 있다고 하니 이미 송나라 지식인들 사이에 고려청자의 아름다움에 대한 정평이 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청자는 당시 귀족 사회의 유장한 생활 감정과 불교적인 고요의 아름다움이 곁들여 만들어진 미(美)이다. 중국 청자의 ‘비색(秘色)’과 분별하기 위해 스스로 이름지어 ‘비색(翡色)’이라고 자랑삼아 불러온 이 고려청자의 푸른 빛깔은 해맑고도 담담해서 깊고 조용한 맛이 나는 그야말로 한국적인 색감이다. 비색 청자의 맑고 푸른 빛깔과 길고도 연연하고 또 부드러운 몸체 곡선의 아름다움 속에 촉촉히 스며져 있는 것이다.
이 도자공예를 소유한 것은 귀족 상류사회였고, 이것을 창조해 낸 것은 ‘점한’이니 ‘점꾼’이니 또는‘뺑뺑이꾼’이니 해서 사회에서 항상 천대만 받아오던 고려 무명도공들이었으나 그들의 조형 역량과 안목이 뛰어남을 고려청자를 통해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고려청자에는 고려인이 가졌던 미적 감각과 정서가 깃들어 있다. 그것은 곧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미감과 정서이고, 그러한 미감과 정서가 쌓여 우리 민족의 전통미가 되었다. 김상옥은 섬세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전통미를 고려청자에서 찾아낼 줄 알았고 우리 문화의 가치를 읽어낼 줄 알았다. 그것은 곧 전통미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다. 우리 민족에게 우리의 전통적 미와 가치를 발견하게 하여 우리 민족 스스로가 자긍심을 갖고, 민족의 정신적 뿌리 찾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시인의 의지를 드러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이런들 어떠오리 저런들 어떠하오리 술을 딸아 권하오거날
百死歌(백사가) 읊으오시며 그 盞(잔)을 돌리오시다
그 몸이 아으 죽고 또죽고 千萬(천만)번을 고치오셔도 한 번 肝(간)에다 사기온 뜻은 굽힐길이 없드오이다
아으 그 노래 읊으온뒤에 半千年(반천년)도 하로온양 오로다 王氏 李朝(왕씨 이조)도 한길로 쓸어져 꿈이도이다
임 한번 베오신 피가 돌이 삭다 살아지오리
돌欄干(난간) 마자 삭아지어도 스며드오신 붉은 그 마음은 흐릴길이 없으리오이다
-「善竹橋(선죽교)」 전문
김상옥의 첫시조집 초적에 실려 있는 단 한 편의 사설시조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의 형식에 대해서 임선묵씨는 “사설로 보기에는 중장이 너무 가즈런하고 엇시조로 보기에는 통설에 적용하기 곤란하다”라고 하며 변조로 다루고 있다. 정혜원은 “사설시조의 리듬감을 살리면서 어구의 제약에 얽매이지 않는 시형에 대한 모색은 이 시인에게 있어 일찍부터 싹텄던 것으로 보인다. 초적에 실린 「선죽교」형식에서 이미 시조 특유의 호흡을 살리면서도 자유롭게 시상을 전개하려는 파격의 시조형이 조심스럽게 시도되었음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이와같이 임선묵, 정혜원은 「선죽교」를 엇시조도 사설시조도 아닌 변조로 생각하고 있으며, 이후의 三行詩(삼행시)에 나타나는 장형 13편을 사설시조라고 보기에도 곤란하다고 판단 보류를 하고 있다.
그러나 나재균은 “이 작품은 2수 1편으로 된 사설시조다. 사설시조로 중장은 평시조적 자수율을 지키고 있는데 반해, 초·종장이 길어진 형태를 보여준다. 길어진 초·종장에서의 표현은 시적 율격을 가지기보다 다분히 산문적이다. 이러한 「선죽교」적 사설성은 그의 후기 작품에 많이 나타난다.”고 하여 2수 1편으로 된 사설시조로 보고 있다. 사설시조에 대한 지금까지의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설시조는 초·중·종장에 두 구절 이상 또는 종장 초구라도 평시조의 그것보다 몇 자 이상 되었다. 그러나 초․종장이 너무 길어서는 안 된다. (이병기, 국문학개론 117쪽.)
2)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여 초·중·종 삼장 중에 어느 장이 임의로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히 말하면 초장은 거의 길어지는 법이 없고 중장이나 종장 중 에 있어 어느 것이라도 마음대로 길어질 수 있다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대개는 중 장이 길어지는 수가 많다. (조윤제, 국문학개설 112쪽.)
3) 초·중장이 다 제한 없이 길고 종장도 어느 정도 길어진 시조다. (고정옥, 국문학요 강 396쪽. 김사엽, 이조시대의 가요연구 254쪽.)
4) 사설시조는 초·중·종 3장의 구법이나 자수가 평시조와 같은 제한이 없고 아주 자 유스러운 것으로 어조도 순산문체로 된 것이다. (김종식, 시조개론과 시작법 89쪽.)
5) 초·중·종장이 다 정형시(定型詩)에서 음수율의 제한을 받지 않고 길게 지어진 작품 을 사설시조라 하며…… (김기동, 국문학개론 115쪽.)
6) 단시조의 규칙에서 어느 두 구 이상이 각각 그 자수가 10자 이상으로 벗어난 시조 를 말한다. 이 파격구는 대개가 중장(제2행)의 1, 2구다. 물론 종장도 초장도 벗어 나고 3장 각각 다 벗어나는 수도 있다. (리태극, 시조개론 69쪽.)
7) 사설시조는 시조 3장 중에서 초·종장은 대체로 엇시조의 중장의 자수와 일치하고 중장은 그 자수가 제한없이 길어진 시조다. (서원섭, 시조문학연구 32쪽.)
8) 종장의 제1구를 제외한…… 두 구절 이상이 길어진 것을 장형시조 또는 사설시조 라고 한다. (정병국, 편저 시조사전, 시조문학의 개관.)
고시조 쪽의 사설시조는 주로 중장이 길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위 작품 「선죽교」는 중장은 기본율에 잘 맞고 초장과 종장이 길어져 있다. 위에 나열한 사설시조 정의로 보면 「선죽교」는 김기동, 김종식, 리태극, 정병욱의 사설시조 개념에 맞는다. 본고에서는 위 작품 「선죽교」를 초·중장이 길어진 한 편의 사설시조로 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이 작품은 위에 열거한 몇몇 학자의 사설시조의 개념에 일치하며, 두 번째 이유로는 이 작품이 시조집에 실려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또 이 사설시조는 그가 자유시를 쓰기 시작하는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47년 시조시집인 초적을 상재한 다음해인 48년에는 고원의 곡, 49년에는이단의 시등의 자유시집이 계속 출간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 시조는 시조와 자유시의 과도기적 성격을 지닌 작품으로 볼 수 있다.
김동리가 초적을 소개하면서 “팔일오 해방의 종소리는 드디어 그의 개나리보따리 속에까지 비치게 되어 잃었던 풀피리(草笛) 삼십구곡의 순박(淳朴)하고 염절(廉絶)하고 신묘(神妙)한 운율을 다시금 세상에 들려주게 된 것이다.”라고 하여 「선죽교」를 제외시키고 39곡이라고 하였던 것이라 짐작된다. 시조집초적에는 위 작품까지 포함하여 40편이 상재되어 있다.
그러나 후의 그의 시조집 삼행시에 보이는 장형의 경우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시조의 새로운 형을 모색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위의 김종식, 김기동, 리태극, 정병욱의 사설시조의 정의에 공감하여 본고에서는 사설시조로 보고자 한다.
「선죽교」내용은 고려 충신 정몽주의 충절에 관한 작품이다. 선죽교(善竹橋)는 원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으나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 대나무가 났기 때문에 선죽교로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돌다리에는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하며, 충절의 상징물로 여겨지고 있다. 조선을 건국할 때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 방원이 초장에 인용된 부분인 시조 「하여가」를 지어 정몽주에게 들려주며 넌지시 의향을 떠보았다. 그러자 정몽주는 중장에서 말하는 ‘백사가(百死歌)’, 즉 일백번 고쳐 죽어도 일편단심의 충절은 변할 수 없다고 답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방원이 보낸 조영규 등 4·5인의 철퇴에 맞아 피살된다. 정몽주의 충절을 ‘돌난간에 스며든 붉은 피’로 상징하고 있다. 왕씨 고려도 이씨 조선도 다 망하여 모두가 지나간 꿈이지만 임의 충절은 아직도 살아 있음을 강조한다.
김상옥이 이 작품을 통해 역사적 인물의 충절을 기리는 이유는 우리민족에게 나라에 대한 사랑, 즉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다고 볼 수 있다. 절개가 굳은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 굽히지 않는 애국심으로 일제에게 저항하여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숨은 뜻이 들어있다고 보아야 한다. 민족 말살과 한글 말살의 시대이며 변절을 쉽게 하는 시대에 나라를 사랑하여 굽히지 않는 절개를 가졌던 정몽주 같은 인물을 그리워함을 알 수 있다. 한글로 작품을 쓰며, 네 번이나 일제에게 투옥되었던 그의 열렬한 민족주의와 독립정신을 생각해 보면 그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결 깊숙해라 松籟(송뢰)소리 그윽하고
다만 무덤 앞에 엎드린 돌거북은
아득한 鄕愁(향수)를 안고 임을 외로 뫼시다
오랜 비바람에 띠은 아직 푸르르고
널리 흩인 겨레 한우리에 들이고져
애쓰던 임의 白骨(백골)은 여기 고이 쉬신가
칠칠한 숲속으로 저문빛이 짙어오고
골안개 풀리는양 눈앞이 흐리는데
벌끝에 갈가마귀 떼만 어지러이 날러라
-「武烈王陵(무열왕릉)」 전문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654~661)의 능은 사적 제20호로 경주시 서악동에 소재한다. 본명이 김춘추인 태종무열왕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서, 왕비는 김유신의 동생인 문명 부인이며, 김유신 장군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의 완성은 그의 아들인 문무왕 때 이루어졌다. 능 앞 비각에는 국보 제25호로 지정된 신라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는데,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난 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비문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은 비신은 없어지고 비신을 받치고 있었던 귀부(龜趺)와 비신의 머리를 장식하였던 이수(螭首)만 남아 있다.
소나무소리 그윽하고 깊은 곳, 무덤 앞에 엎드린 돌거북만이 아득한 향수를 안고 외로이 무덤을 지키고 있다. 이 때의 돌거북은 ‘태종무열왕릉비’를 받치고 있었던 귀부를 말한다. ‘송뢰소리’의 소나무의 원형상징은 ‘변함없는 영원성, 푸르름, 절개’ 등이다. 첫째 수에서 보여주는 것은 무열왕에 대한 변함없는 향수이다. 둘째 수에서는 그의 업적을 찬양하고 있는데 ‘널리 흩인 겨레 한우리에 들이고져’라고 하여 겨레를 통일하고자 애쓰던 살아 생전의 김춘추의 모습과 노력을 찬양하고 있다. ‘칠칠한 숲속으로 저문빛이 짙어오고’라고 하여 저녁 시간을 말함으로써 ‘어둡고 암담해지는 현실’을 상징하고, ‘골안개 풀리는양 눈앞이 흐리는데’라고 하여 더욱 희망이 없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암담함이 ‘갈가마귀 떼만 어지럽게 나는’ 상황으로 상징 표현되고 있다.
이 시조에는 신라의 통일을 위하여 애쓰던 김춘추의 애국심을 그리워하고 조국의 현실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는 화자의 마음이 나타난다. 일제하의 어지러운 때에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위대한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그리고 우리 민족이 이러한 유적을 돌아보고, 애국심을 고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라 볼 수 있다. 삼국을 통일하고 외세를 몰아냈던 신라인의 민족정신으로 일제에게 저항하고 싶은 화자의 의지가 잘 드러나고 있는 작품이다. 무덤 앞 돌거북만이 그 무열왕의 애국심에 대한 아득한 향수를 지니고 임을 혼자 모시고 있다고 보는 표현 속에는 우리의 지나간 역사와 유적들을 돌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도 들어 있다.
옛城(성)에 올라서서 드멀리 바라보니
안개만 자욱하고 山河(산하)를 모를노다
그전날 임의 龜船(귀선)이 煙幕(연막) 펴듯 하여라
검은 구름떼는 소내기를 묻어오고
저 불칼 휘둘으는 번개와 우뢰ㅅ소리
壬亂(임란)을 다시 치는양 눈에 彷佛(방불)하여라
-「艅艎山城(여황산성)」 전문
여황산성은 통영성의 북쪽에 있는 산성이다. 옛 산성에 올라 민족의 영웅 이순신을 그리워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장군, 민족의 등불로 빛나는 장군. ‘그전날 임의 귀선이 연막 펴듯 하여라’라고 하여 안개 자욱한 모습을 거북선으로 연막을 피는 듯하다며 이순신을 떠올린다. 그가 만든 거북선을 생각하고, 소나기를 몰아오는 번개와 우뢰소리가 임이 용감하게 싸우던 임란을 방불케 한다며 임진왜란 당시를 회상하고 있다. 이 작품 역시 어려운 전쟁에 처해서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했던 민족의 영웅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일제 강점 하에서, 350여 년 전 일본과 용감하게 싸워 나라를 구했던 이순신을 생각함은 우리 민족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순신에게서 위대한 민족정신을 발견하고, 누군가가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처럼 활약하여 일본을 패망시키기를, 그리하여 그 동안 우리 민족이 당한 억울함을 설욕하고 하루 빨리 조국이 독립되기를 바라는 화자의 의지가 행간에 숨어있는 작품이다. 오(吳)나라 임금이 지극히 아끼던 화려한 배 여황(艅艎)을 적국 금(楚)에 빼앗겨 애통해 하다가 결국 이를 되찾아 설욕했다는 전사(戰史)처럼 말이다.
김상옥의 고향의식이 나타나는 작품 중에서 전통문화유산을 통한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찾으려는 작품들을 살펴보았다.
유물·유적들을 찬양하는 작품과 애국지사들을 찬양하는 작품으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앞의 토속적 정서의 고향의식과 비교해 보았을 때 유적·유물에 대한 작품에서는 토속적 정서의 고향의식에서와 마찬가지로 갈등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애국지사들을 찬양하는 작품에서는 약간의 갈등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한민족으로서 나라를 위해 굽히지 않는 절개와 애국심이 절실히 필요하고, 그러한 지사들의 유적들에 대한 보호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 당위성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우리가 갖는 애국심이나 절개의 미흡함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들 유적에 대한 미보호에서 오는 갈등이다. 존재에 대한 당위성과 그렇지 못한 현실 사이에서 오는 갈등이라고 볼 수 있다.
위 작품들은 우리나라의 최초 통일국가인 통일신라까지 거슬러 올라가 맥을 닿고 있으며,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유물·유적들과 애국지사들과 정신적 문화유산을 찬양하고 이들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를 찾고자 하는 작가의 의지를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작품에서는 우리 민족의 정신적 뿌리, 정신적 고향인 전통적 정서가 나타난다. 우리의 문화적 유물과 역사적 유적의 전통미를 발견하고 찬양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찾고 우리 것을 스스로 사랑하고, 자존감을 지키는 일은 곧 우리의 민족의 정신적 뿌리, 즉 정신적 고향을 찾는 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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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 원문보기 글쓴이: 김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