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성경책
최 방 식
쓰지않고 버리지 못해 모아둔 오래된 성경책이나 찬송가를 교회에 가져오면 모아서 파기를 하겠다는 광고가 주보에 나왔다. 집에 모아둔 오래된 찬송가와 성경책이 생각났다. 낡은 성경책을 폐지와 함께 쓰레기처럼 버리는 것이 크리스천이 경전을 경건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아 선뜩 버리지 못하고 모아 두었다. 모아둔 책 중에 두껍고 조금 큰 성경책의 표지를 무심코 넘기니 어머니의 주민등록증이 테이프로 단단히 붙어 있었다. 어머니가 쓰시던 성경책이었다. 오랫동안 책꽂이 구석에 방치되어 있다 보니 어머니의 성경책인 것을 몰랐다. 글자도 크고 세로로 씌어 있었다. 맨 뒷장에는 경로우대증도 테이프로 반듯하게 붙어 있었다. 성경책의 발행 일자는 1982년 5월10일, 사십 년 가까이 된 낡은 표지 뒷장에는 아내가 쓴어머니의 이름도 적혀있었다.
어머니의 종교는바닷가 사람들이 그렇듯이 샤머니즘적인것을 믿었다. 아들이 누나와 함께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녀서인지 며느리가 교회를 다녀도 종교적인 마찰은 별로 없었다. 손주들이 태어나자 너무나 좋아하며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아났나,” 행복에 겨워 어르고 노래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손주들이 성장을 하자 한 집에 두 종교를 섬기는 것이 늘 마음에 걸리셨는데 아들 따라 교회를 나오시고 아내가 기념으로 선물한 성경책이었다. 한글은 겨우한자 한자 짚어 가며 읽었고 아내가 옆에서 도와주었을 때 조금씩 진도가 나가 언제부터인지 매일 아침 성경을 읽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소지하고 다녀야 하는증이 왜 성경책에 붙어 있는지 아내에게 물었다. 어머니가 어느 날 새벽기도를 드리려 가는 길에 성경책이 들어있는 가방을 날치기를 당한 적이 있었다. 다음날 교인 중 한 분이 골목길에 버려진 가방이 눈에 익숙하여 열어보니 성경책이 있어 어머니에게 가져왔었다. 그 후 어머니께서 두개의 증을 성경에 붙여 달라고 하여 아내가 앞뒤로 붙였단다. 아마 당시에는 밖에 외출 할 일이 별로 없고 지금처럼 증이 많이 쓰이지 않은 시절 이어서, 만약 성경을 또 분실 한다면 습득하신 분이 증을 보고 찾아주기를 기대하면서 붙였는지도 모르겠다. 검은 양피지 커버의 오래된 성경은어머니 소유라는 표시로 낙관처럼 앞뒤로 각각 붙여 놓았다. 그런데 주민증에 붙은 사진이 젊은 날에 찍어서 그런지 더젊고 예쁘게 보였다. 생년월일은 1916년 생으로 되어있었다.
어머니는 사하구 감천동의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조그만 초가집에서 추운 겨울에 태어났다. 부모님들은 농사를 지으며 가난하게 살았다. 불행하게도 9살 때 엄마가 먼저 하늘나라로 떠났기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와 함께 외동딸로살다가 18세 때 용당동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엄마 없는 딸을 시집보낼 때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 아팠겠는가? 또 딸은 시집을 가고나면 아버지의 조석은 어떻게 해결 할 것인지, 홀로 아버지를 남겨두고 떠나는 마음은 발걸음이 제대로 떨어졌겠는가? 어린 나이지만 생활이 궁핍하여 아버지가 농사지은 채소를 팔기도 했다. 때로는 바닷가에서 조개, 파래, 미역등 해산물을 채취하여 주로 반찬을 만들어 먹었고, 많이 채취한 날에는 멀리 자갈치시장에 까지 가서 팔곤 했다고 한다. 먹고 살기 바쁜 생활에 학교에 가기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야학교에 2년 정도 다녔지만 평생 배우지 못한 것을 한으로 품고 살았으며 이름 석 자만 근근이 쓸 줄 아는 정도였다. 어머니의 꿈은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여 훌륭하게 자라 좋은 직장에 다니고 대청마루에서 신문을 보며 여유로운 삶을 보내는 그것이었다. 이 꿈은 어머니가 무더운 여름날 팔던 소금 대야를 내리고 잠시 땀을 닦다 훔쳐 본, 부자 집 안의 시원한 대청마루에서 모시적삼을 입고 신문을 보고 있는 그 집안의 어른을보고 훗날 내 아들도 저렇게 살았으면 하고 마음에 소원했다고 했다.
또 어머니는 아버지가 화투, 장기등 도박이나 오락을 즐기다 보니 어머니가 유산으로 받은 감천의 밭 2마지기를 화투판에서 날려 버렸다고 원망하며 그 땅만 있었어도 살기가 조금 나아졌을 텐데 하며한 맺힌 말로 한 번씩 나에게 이야기 하곤 했다. 내가 친구들과 놀이삼아 마작이나 트럼프를 하고 늦게 들어오면 화난 얼굴로, “애비 얼굴도 보지 못한 자식이 지아비를 닮아서 놀음을 한다.”고 꾸짖곤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마음 아프게 해드린 못난 아들이었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어려서부터 갖은 고생을 하며 남편마저 일찍 사별한 복 없는 한 많은 여인이었다. 아버지가 갑자기 운명하시고 얼마나 가난 했던지 나를 낳고 끼니를 이을 쌀 한 톨이 없었는데, 아버지 친구의 도움으로 쌀을 두 되 가량 구해 주어 죽을 끓여 먹었다고 한 맺힌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 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허리를 동여매고 그 작은 몸에 젖먹이 어린 나를 등에 업고 머리에 이고 간 물건들을 팔았다. 다 팔고 나면 비로소 업힌 아들이 무더운 여름철에 더위를 먹지 않았는지 걱정을 하며, 감만동 차상네(친구 차용규의) 집 마루에서 수건 띠를 풀고 더위를 식이며 시원한 물 한 컵 들이키곤 어머니들 끼리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땀을 식혔다. 쉬다가 원기를 회복하면 집으로 왔다고그 당시 친절하였던 용규 부모님들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고 가끔 이야기했다. 초등학교 동창회에서 용규를 만나 어린시절 어머니가 들려주던 그 고마움을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친구는 처음 듣는 이야기라 한다. 아마 용규 어머니는 고생하고 어렵게 생활한 상황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 같았다.
어머니는 물건들을 머리에 이고 팔다보니 머리 정수리에는 머리카락이 없어 가르마 길이 훤히 보이는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생활력은 강하여 고기를 받아서 팔거나 분개고개(용호동)를 넘어 소금을 싸서 대연동, 우암동, 감만동 문현동을 거쳐서 때로는 초량까지도 가서 팔고 올 때에는 비료나 잡화를 이고 오며 가며 팔았다.
양식이 적어 밥을 지어 아이들만 주고 빈 그릇을 뚜껑을 덮어 부엌에서 먹겠다며 나간 어머니는 찬 물 한 그릇을 들이키고 밖으로 나갈 때 누나가 뚜껑을 열어보니 빈 그릇이더라고 하던 이야기는 내내 찡한 맘으로 남는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직전부터는 루삥 지붕 판잣집에 동네 최초로 우체통을 설치하여 우표와 담배, 박하사탕 등 잡화를 팔았다. 이때부터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이 골목 저 골목 외치고 팔지 않았으니 고생스러움은 많이 줄어든 것 같다. 몇 년 뒤 구멍가계를 조금 확장하여 과자류는 팔지 않고 생선회를 팔기 시작했는데 여인의 몸으로 생선 횟집을 하면서 애환도 많았다.
어느 해인가 내가 초등학교 5학년으로 기억 된다. 여름철 루삥 집이 너무 더워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흘러 집에서는 장사를 할 수가 없었다. 큰 선창 옆 바닷가에 천막을 치고 평상을 놓고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손님이 많이 와서 바쁜 가운데 심부름을 시켰으나 친구들이 보고 있어 심부름을 하지 않고 도망 가버린 것이 지금도 마음 아프게 남아 있다.
저녁이 되면 팔다리가 아픈지 가끔 다리와 팔을 주물러 드렸다. 안마를 하며 어머니의 손을 만져보면 손마디가 거칠고 지문은 닳아서 없어진지 오래며 손가락 마디마디 마다 갈라져 반창고를 감았고 금방이라도 피가 날것 같이 보였다. 겨울철 저녁에는 글리세린을 듬뿍 바르고 그 위에 손 크림을 바르고 면장갑을 끼고 잠을 청하곤 했는데 엄마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리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해상사고로 청천 벽력같은 비보를 전해 들었을 때 숨이 멎는 것 같았을 것이다. 유복자인 나를 낳았을 때 어머니는 삼십대 중반 이었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희망이 없었고 눈물이 앞을 가리었을 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자하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어린 사남매를 보며 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모성 본능 앞에 그 마음이 잦아들었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에게 험한 비바람을 막아주는 여장부였다. 이렇게 다져진 삶은 야무지고 생활력이 강하여 자식들을 남편 없이 가르치고 남부럽지 않게 키우셨다. 감사한 것은 고생하신 어머니가 다행히도 십 여 년 간 예수님을 믿고 떠나신 것이 가장 큰 위안이 된다.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가신지 30년이 지났지만, 부지런하고 억척같은 삶을 살았던 어머니의 유품이라고는 이사를 할 때 모두 다 버리고 성경책과 아끼던 파라솔, 그리고 손수 만들어 허리에 찾던 빨간 돈주머니가 빈 주머니로 남아있다.
인생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인 것을 생각하며 성경책 속의 어머니가 그리워 다시 추억해 본다. 어머니의 체취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은 손 때 묻은 성경책은 다시 책장에 진열되었고 다른 성경책도 추도 예배 때 필요로 하기에 책장에 그대로 두었다. 다만 시와 찬미 찬송가 3권만 책장을 떠났다.
첫댓글 어머니의 사랑, 헌신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한 많은 삶이 였지만
자식에겐 귀감이 되고 기둥 되었든 모친의 사랑이였군요
숙연 해 집니다
그 시대의 많은 어머니들의 자식들을 위해 온 몸을 던져
희생 하셨지요.
어머니라고 불러만 보아도 가슴이 아려 옵니다.
카페지기님, 재로님 설 명절 잘 보내시고
늘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