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작지만 큰 모임 하나가 만들어졌다. 이름하여 '거목'. 열 댓명의 좀 큰 녀석들이 모였다고 그렇게 지었는지 아니면 사회에 나가 큰 놈 한번 되어보자 해서 그리 지었는지는 모르겠다. 난 늘 외곽 언저리에 있었으니까.
공부한다고 각자 전주와 서울 또는 해외로 흩어졌다 모이고, 직장 또는 사업한다고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모이는 바람에, 30년을 훌쩍 넘도록 끊어진 듯 이어지고, 이어진 듯 끊어지기를 거듭하더니 근래 들어 꽤 활발해졌다. 이제 삶의 화두가 교육과 자립에서 자식의 취직과 혼사, 자신의 퇴직 후로 옮겨가는 시점이니 관계의 소중함이 새삼스럽게 여겨져서일 지도 모르겠다.
사업 차 당진에 정착한 한 친구가 얼마 전에 모임을 주관할테니 오라며 연락을 해왔다. 암~ 가야지. 8월 22일 토요일, 당진 왜목마을을 향해 차를 몰았다. 습관적으로 머스마들만 모이는 편인데 우리 부부가 부부동반 바람을 불러일으켜 한 쌍의 부부를 이끌어냈다.

당진으로 가는 도중, 서해안고속도로에서 화성휴게소에 들어갔다. 건물 앞면에 수세미 울타리가 인상적이다. 서쪽 하늘이 너무 크게 열려있어 한여름 불볕이 무서운 우리집. 집 서쪽에 두 줄로 나무를 심었으나 아직은 품이 왜소해서 그늘이 그늘 같지가 않다. 내년에 오이망을 설치하고 수세미에 더해, 여주 따위를 심으면 안성마춤이겠다. 역시 여행은 부족한 것을 쉽게 채워준다.

덤으로 휴게소가 비치한 꽃다발을 앞에 두고 모시고 간 꽃 한 송이를 찍었다. 꽃다발보다 꽃 한 송이가 훨 낫다.(어~? 웃어요?)

휴게소 옆에 잘 정돈된 공원이 있다. 나무의 가치는 시간 때문이다. 시간이 더 흘러 나무가 무성해지면 공원이 더 깊어질 것이다. 아직은 그저 깔끔할 뿐이다. 휘어진 공원길이 인상적이다. 역시 각기 다른 기능공간 사이를 구분짓는 소재가 있어야 깔끔하다.
우리집 마당과 정원, 정원과 산, 정원과 밭, 진입로와 밭, 진입로와 정원... 가을에 낙옆지면 작업 들어간다. 개울의 예쁜 돌이 제일 쉽게 취할 수 있는 최고의 경계 소재다. 내가 사는 공간을 가꾼다는 것은 나를 존중하는 것이다. 여행의 의미는 이렇게 시작부터 깊어진다.


강원도 홍천 집에서 220km. 평일이라면 넉넉잡아 세 시간이면 되겠다. 토요일이라 일부 구간에서 드문드문 막히긴 했지만 무난했다. 느즈막한 오전 11시에 떠나 오후 4시경에 당진 왜목마을에 도착했다. 마침 갯벌이 가장 넓게 드러난 썰물 때이다.
난 아무래도 원시인 조상의 유전자를 변형없이 간직한 순혈 미개인인 모양이다. 채집, 어로, 채취.... 원시인의 먹고사는 습관이 내게는 더없는 취미다. 이태백 술 좋아하는 것과 비교하는 것은 좀 무리일까? 즉시 작은 돌 두 개를 들고 갯벌에 뛰어가 굴 앞에 엎어진다. 나 못지않게 갯벌에서 엎어져 있는 군상들이 내 뒤로 바글바글하다. 저 사람들로 하여 채취를 끔찍하게 싫어라 하는 초록손이 시선이 덜 따갑다.
굴을 따서 입에 넣으니 찝질한 굴향이 느껴진다. 굴 하나, 굴 둘, 굴 셋, 굴 넷, 호로록 쩝쩝. 조으다 조으다~ 정말 조으다~^^ 하지만, 다섯번째 굴을 입에 넣으니 와락 아린 맛이 느껴진다. 순간, 뱉으려고 했지만 굴은 이미 목구멍을 넘어 식도를 미끄럼타고 있다. 퍼뜩! 생각이 든다. 비브리오패혈증? @_@!
그 때부터 아니겠지~ 아니겠지~ 설마~ 에이 설마~ 하는 끄달림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했기 때문에 거의 잊고 지내면서도 이따금 불쑥.... 36시간을 넘겨서야 비로소 찝찝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글 보는 분들은 나같은 멍청한 짓은 마소~

왜목마을 중심부에 있는 설치물, '오작교'에서 인증샷! 여기서는 여지없이 방향에 대한 자신의 편견이 박살난다. 여긴 서해바다이니 당연히 저녁해는 바다에 가라앉아야 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석양은 바다를 향해 줄지어 서있는 모텔, 횟집 건물들 뒤로 넘어가니 말이다. 오히려 저 바다에서 내일 아침에 해가 뜬다고 한다. 여기가 바다의 일출,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 부부는 일출 볼 생각은 없다. 생각이야 굴뚝같지만 워낙 아침에 헤매는 골골이부부 입장에서는 언감생심이다. 부부가 타입이 같으면 좋은 점도 있다. 아침잠 방해 요인이 없다.


저녁 6시가 가까워지자 전국 각지에서 하나 둘,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착한다. 밤 11시까지 횟집에서, 그리고 모래밭에서 먹고, 마시고, 대화나누고, 함께 웃는다. 언제 만나도 반가운 것은 언제나 띠엄띠엄 만나기 때문이고, 어떤 추억도 아름다운 이유는 함께 한 과거이기 때문이다.
옥에 티. 이제는 50대 중반. 또 다른 변화의 길목에서 현재와 미래 이야기 비중이 높아졌으면 싶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과거의 추억공유를 떠나 서로 다른 현재의 처지와 미래의 소망을 들어주고 말하는 가운데 서로 채워질 소중한 것을 위해서. 누구의 삶도 내가 경험해보지 않은, 소중한 길 아닌가?
부부동반을 하면 남자들의 과거추억이 부인네들에게 생소할 터, 저절로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암튼,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얼굴이 반가웠고, 넉넉하게 늙어가는 모습 보는 것이 좋았다.

다음날, 각자 갈 길이 먼지라 아침식사 후 헤어졌다. 부부동반을 한 네명만 따로 당진에 있는 아미미술관으로 갔다. 폐교를 당진시 거주 미술인들이 작업공간이자 전시공간으로 하는 모양이다. 입구 분위기부터가 내 취향이다^^ 자연 속에 있는 삶 또는 예술.


꽃밭, 동산, 소담길 등은 울 마님 초록손이 취향이다. 그래서 초록손이는 모네를 유달리 좋아한다. '모네의 정원'에 가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위시리스트는 아닌 모양이다. 간절함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장거리 낯선 타국 여행에 엄두가 나지 않아서인 듯 싶다. 여기 아래에 대체재인 우리 '머네의 정원' 사진을 갖다놓는다.

오늘 찍은 우리 '머네의 정원' 봉숭아, 메리골드, 백일홍에 이어 과꽃도 피기 시작했다

내 미술 취향은... 나도 잘 모른다^^;; 삶 또는 삶이 있는 자연에 관심이 가는 것 같다. 위 작품은 코르크 나무조각으로 삶의 한 순간을 얼굴에 담았다. 어떤 느낌이 저절로 일어나게 한다.

따뜻한 남녘에 사는 배롱나무다. 내가 강원도에 살면서 결핍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있다면 감나무와 더불어 저 배롱나무다. 저 배롱나무를 보러 강릉에 간 적도 있다. 한 그루 구해다 심어볼까? 늦가을 꽁꽁 싸매주면 되지 않을까? 아무튼 수피, 수형, 꽃 모두 눈길을 떼기 어렵게 한다.

미술관 뒷편에 있는 찻집에서 원두커피를 기다리는데 찻집 주인 아주머니가 찍어준 사진. 우리가 그림 속 주인공이다^^ 우리가 작품이다.

미술관 뒷벽 타일 소품의 집합체이다. 도기 조각에 체험 온 아이들이 그린 작품(다시 유약입혀 구웠겠지?)을 모아 붙인 모양이다. 예술작품은 늘 메말라가는 마음에 감성의 단비를 뿌려주고, 삶은 어떠해야 좋겠다는 영감을 준다.
춘천mbc 건물 야외에서 매년 여는 현대조각전은 이미 끝났을까? 누구 강원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좋은 전시정보를 알고있는 분들의 도움도 받고싶다.
첫댓글 나중에 풀꽃에 있었던 애들과 모여서 모임을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ㅎ/
즐거운 여행이셨던 것 같아요.
이번 미술관도 재미있게 다녀오세요~
모임 정말 즐거우셨겠어요^^ 저희가 나중에 뭉쳤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니 흥미로울 것 같네요.
옛날에 친했던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네요..ㅎㅎ/ 나중에 여기 풀꽃에 있는 5명끼리 함 만나면 좋을 것 같아요.ㅋㅋㅋ
낯선길에서 새 길을 찾다-박지원//저는 다른 애들과 다르게 왜 학교 애들이 생각날까요...여기 있는 애들한테 미안하네요
'거목' 좋은 모임을 만드셨군요. 글을 읽다 보니 두 분께서 다녀오신 곳을 동행 한 듯한 착각이 듭니다. ^^
최고의 찬사에 입을 못다뭅니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