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평동의 기억-조화자전거 김효천(남, 1952년생)씨
2019.06.14.
한국전쟁 피난민이다. 파주에 살던 부친이 전쟁 통에 팽성읍 노와3리에 정착하여 빵장수를 하다가 김씨가 너 댓살 때(1960년 경) 통복동 삼거리 인근으로 옮겨 자전거점을 열었다. 이때부터 부친 김도봉과 김효천, 현재 김효천씨 아들까지 3대에 걸쳐 자전거점을 운영하고 있다.
사장님은 원평동 토박이인가요?
할아버지 때부터 살았으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할아버지 고향은 어디예요?
이북이신데... 아버지는 동인천, 파주 쪽에 살다가 오셨는데. 6.25 때문이니까 전쟁 중에 내려오신 거고. 수용소, 저기 노와리, 노와3리 수용소에 사시다가, 거기서 빵가게, 빵공장, 우유배달 벼라 별 것 다 하시다가 여기로 온 거지. 나는 거기서 태어나고 노와리서 4살, 5살 때 여기로 나온 거여.
그럼 처음부터 자전거 가게를 했던 건 아니네요?
내가 한 것은 아니고 아버지께서 배우신 거지. 원래 이북 사람들이 손재주는 좋거든. 군대서도 공작창에 계셨으니까 눈썰미는 있으신 거지.
부친 함자는?
김도봉, 길 도(道)자 봉우리 봉(峰)자.
평택 나와서는 처음에 빵공장 하신 거예요?
아니 노와리서 먹고살려니까 한 거고. 1959년도 사하라 태풍인가로 지붕이 홀랑 날아가 버리고 여기(통복동)로 나온 거지. 내 기억으로는 처음서부터 자전거 가게를 열었을 거여. 배운 건 없지. 그 때는 누가 가르쳐 줘. 기술자도 없지. 그 때는 그냥 배우는 거여. 전쟁 뒤라 누가 가르쳐 줄 수도 없고. 하동환씨(하동환자동차 사장)도 드럼통 펴서 만들었거든. 다 그렇게 한 거여.
자전거 가게를 낸 시기는?
내가 4살, 5살 때니까 1960년인가 그 전인가 쯤 될 꺼여. 아버지가 3대 독자거든. 그러니까 내가 큰 아들이니까 나를 붙잡고 의지하신 거지. 그래서 아버지 때문에 내가 학교를 제대로 못 다닌 거여. 안 간 게 아니고 못 간 거야. 가족이 7남매나 되니까. 먹고 살려고 학교를 안 보내고 일을 시킨 거지.
어려서부터 아버지 일을 도왔네요?
그렇지, 내 기억으로는 9살 때부터 일했으니까. 내가 학교 들어가면서부터 한 거여. 어려서 용접도 배우고 그랬어. 나도 눈썰미는 있거든.
옛날에는 자전거점에서 자전거제작도 했나요?
제작은 아니고 부서진 자전거들 많으니까. 옛날에는 부속이 없었거든. 그래서 부서진 거 부속 뜯어서 붙여주고 했지. 하부가 이상 있으면 용접해서 만들어주고.
자전거 가격은 얼마였어요?
1960년대 말 경에 1500원쯤 했나. 3,000원도 했고. 쌀 두 가마 반값이라고 했어. 네 가마짜리도 있었고. 그 때는 자전거가 귀했거든.
그 때도 삼천리 자전거가 많았나요?
삼천리 자전거하고, 오성자전거 하고가 가장 많았지. 삼천리는 처음부터 있었던 거고, 기아에서 사장이 떨어져 나왔거든. 오성자전거는 최오성씨가 공장을 차렸지. 우리가 오성자전거 대리점을 했어. 그 당시는 이것저것 다 했지. 자전거 부속이 어디 있어, 다 만들고 용접하고.
오성과 삼천리는 차이가 있어요?
거의 같았지 뭐. 당시는 부속이 없으니께 다 같은 거여. 열처리가 안 돼서 한 번 구르면 체인이 끊어지고, 그러면 다시 잇고. 당시 열처리 기술이 부족했던 거야. 걸음마 수준이니까 탄소가 들어간 걸 그대로 식혀버리니 깨지고 끊어진 거지. 우리는 철에 대해 배우니까 그걸 안 거고.
옛날에는 비포장도로라 펑크도 잘 났잖아요?
빵구 많이 났지. 엄청 많이 났어. 그 때나 지금이나 무시 고무 있는 거. 무시 고무 있는 게 영국식이었는데, 미국식은 무겁고 튼튼하고, 프랑스식도 있었고. 벨브가 각 나라마다 틀려요. 미제는 무식하지. 크고 무식하게 튼튼하지. 프랑스 것도 마찬가지로 크고 높고. 동양인들은 26사이즈. 옛날 것은 안장이 높았어. 브레이크도 뒷 브레이크였고. 그게 발 브레이크를 썼지. 그게 8호자전거인데 초창기 우편배달부들이 많이 타고 다녔어. 동네 이장들이나 한 대씩 있다는 자전거가 그거여. 자전거 값이 차 한 대 값이었으니.
옛날 자전거는 신사용도 있고 짐자전거도 있고 그랬잖아요?
자전거는 네 가지 정도였지. 아주 단순했죠. 그러니까 농촌에서 타는 표준자전거라고 삽자루를 끼고 타는 거. 짐도 실을 수 있고. 공무원이나 학생들이 타는 것은 로드레샤. 그 때는 핸들이 갈매기처럼 되었으니까. 짐차는 쌀 서너 가마씩 실을 수 있는 거고. 그리고 그것들이 조금 발전하면서 싸이클이 나온 거야. 기본 원리는 그 때하고 크게 변한 건 없지.
싸이클은 많이 발전했죠?
옛날 싸이클은 무겁고 기아도 단순했고 기아 없는 것도 있었고. 3단 기어, 5단 기어 나오면서 좋아졌지. 일본사람들이 타던 3단 내장거어가 간간이 보였었고. 옛날에는 아무리 시원찮아도 기아자전거 타면 값어치가 있었지.
사장님이 자전거점을 물려받은 시기는 언제쯤이었어요?
그냥 자연적으로 물려받은 거지. 서류상으로는 아니어도 아버님하고 계속 같이 했으니까. 내가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했으니까 1973, 4년도 정도였나. 고등학교를 올라가야 하는데 안 보내주는 거여. 충분히 올라갈 여력이 있었는데도. 내가 3대 독자라고 했잖어. 아버지가 나에게 의지했던 거지. 곁에 있어야 하고 도와주는 것이 좋으니까. 서류상으로는 1988년도에 넘겨받았을 거여.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전거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잖아요?
싸지는 않았지만 많이 탔지. 1980년대 까지도 이동수단으로 많이 탔고. 1990년도에도 많이 탔어.
말마차를 운영하던 마방은 화물만 취급했나요?
사람은 안타고 다니고 배추, 연탄, 쌀, 분뇨까지 실어다 줬어. 모래, 자갈, 공사할 때 쓰는 것들도 마차가 싣고 다니고. 1980년대 전까지는 그랬을 꺼여. 삼륜차하고 용달차 나오면서 없어졌거든.
고평(통복동) 쪽에 철공소도 있었다면서요?
철공소는 없었어, 공업사가 있었지. 성씨가 백씨인데 대성공업사인가 뭔가 있었어요. 수문 만들던 데. 김한석씨라고 그 분이 철길 밑에서 남흥철공소라고 했었지. 그 옆에 내가하던 자전거점 하고 대장간도 있었고. 철길 너머에는 신흥목재소도 있었고. 이쪽(통복동 서쪽)은 갯벌을 막아 간척한 거여. 1960년대 말부터 간척해서 1970년대 초에 마쳤을 거여. 내가 중학교 다닐 때도 바닷물이 들어왔거든. 여기 신대동 쪽으로 죄다 염전여. 통복천에 바닷물이 드나들었어. 조그만 통통배도 드나들고 그랬거든. 통복동 신덕포 그 쪽으로 소금배도 드나들고.
자전거 매장을 처음 냈던 곳은 땡땡거리 앞이네요?
그렇지, 거기서 처음 시작한 거지. 그 때도 조화자전거였어.
그럼 지금 위치로는 언제 옮겼어요?
1980년인가 지하도 생기면서. 거기 있던 공장들이 그만두면서 옮길 수밖에 없었지.
통복지하도는 1981년도에 만들어졌나요?
아마 그 정도 됐을 거예요. 1979년인가 80년인가 그쯤인데. 정확히 알려면 그거 설계한 사람이 여기 살았는데 얼마 전에 죽었어요. 그 사람 설계하고 나한테 욕 많이 먹었어. 왜냐면 쌍용장 서원식씨인가 그 사람이 쌍용장 옆에 대동연탄이 있었단 말여. 그런데 설계를 몇 번 변경하더니 지하도가 삐뚤어졌어. 지금 봐 S자로 바뀌었잖어. 뭔가 비리가 있는 거지. 저게 뭐여 후손들에게 뭐 저런 꼴을 남기고 죽느냐고. 순간의 욕심을 못 참아가지고, 저거 다시 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데.
자전거점을 두 번째 옮길 때는 어디로 갔어요?
저기 38가도 화성이발소 옆에 원룸 지은 데 있죠. 거기서도 한참 (운영)했지. 거기서 하다가 지하도가 나니까 공사 때문에 할 수 없잖아. 그래서 지금 가게 옆쪽으로 옮긴 거여. 여기서도 주인하고 관계가 안 좋으니까 앞쪽으로 옮긴 거고. 옛날 농협 옆에서도 꽤 오래 하고. 그 옆 쪽에 집을 사서 운영하다가 재개발되면서 수용당해서 다시 옮겼어. 대여섯 번은 옮긴 거지. 여기서도 한 20년 했으니까. 내 맘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팽성 가는 버스가 자전거점 앞으로 다녔나요?
옛날에는 요 앞길로 팽성 갔어. 1번국도(원평동 옛 1번국도)로 가서 본정통을 지나갔지. 이 뒤쪽 소금공장 앞으로 지나는 길로는 안중으로 갔고. 화성이발관(통복지하도 입구) 앞이 삼거리였으니까. 서울하고 팽성하고 안중으로 갈라지는 곳이 거기였어.
옛날에 버스가 다닐 때는 장사가 잘 됐겠네요?
그 당시는 여기가 원 평택였으니까, 생활권이 여기였으니까 괜찮았겠지. 우리가 왔을 때는 저 너머(평택동)에 역도 넘어가고 버스정류장이 생기니까 바뀐 거지. 저기 역전 앞이 쓰레기매립장이었어. 6.25 뒤에 자꾸 넘어가니까 쓰레기매립장을 메꿔서 불하를 한 거여. 사람들이 그 위에다 집을 지었지. 거기에 버스 종점이 생기고 집들이 들어서고. 그러다가 평택역도 새로 지은 거야. 옛날에는 쬐그만했거든. 쓰레기 매립장 전에는 논이었고. 지금은 신발가게 옷가게 다 들어섰고. 옛날에는 거기에 목화예식장도 하나 있었고.
매출은 어땠어요?
매출은 들쭉날쭉였어. 실속은 옛날이 나았지. 돈 갚어치도 있지만 그 때는 부품이 없었기 땜에 만들고 고치고 하는 게 실속(이익)이 있었지. 그 때가 수입은 나았어. 지금은 부속이나 교환하지만 옛날에는 다 만들었으니까. 요즘에는 인터넷 땜에 속이지도 못해. 옛날에는 어지간한 부품은 만들었으니까 공임비가 비쌌지.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거였어. 딴 데서 못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어야 손님이 오지. 우리는 딴 데서 못하는 거 여기서는 했어. 자전거에서 이상한 소리 나는 거는 아무나 잡는 거 아녀. 우리는 어려서부터 경험이 많았으니까 문제 없었던 거지. 요즘 사람들은 그게 없어. 그런 경험이 없거든.
아드님한테도 기술이 전수됐나요?
그럼 가르치지. 어디가 소리가 나면 어디를 먼저 보고 그 다음은 어디를 보고 다 나오지. 소리가 다 틀리 거든.
사장님 노하우가 아드님에게 자연스럽게 승계됐네요?
원래 기술이라는 것은 사회 통념상 기본이잖아. 기본이니까 무조건 배우라고 했어. 배우면 하다못해 나중에 아들 자전거를 고쳐주더라도 필요하다고 했지. 그랬더니 곧잘 하더라고. 학교 다닐 때도 아들보고 고치라고 하고 품값으로 용돈을 줬지. 자전거 조립하면서 여기는 이렇게 해라 하고 가르쳤더니 자연스럽게 기술이 습득된 거지. 아들놈이 대학교를 가라고 했더니 가면 뭐하냐면서 기술로 승부를 보겠다고 하더라고. 처음에는 장사를 했는데 잘 안 됐어. 발판이 없으니까. 그래서 결국에는 이것을(자전거점) 하라고 했어. 처음에는 객사리에다 점포를 내줘서 잘 됐는데 내가 암 수술을 받는 바람에 여기로 와서 내 밑에서 일하게 됐지. 주주총회도 안 하고 자연스럽게 물려준 거지. 그래도 잘해요. 내 밑에서 10년은 했으니 잘하지. 신식기술은 나보다 습득이 빨라. 기본기술은 좀 떨어져도 새로운 것은 젊은 사람들이 나아.
기술을 말할 때 고정관념을 버리라는 말이 있잖아요?
고정관념은 벗어나야 하는데.... 그럼 기술이라는 것은 안 배운 사람도 새로 배워서 할 수 있는 것도 있거든. 고급기술은 젊은 애들이 낫다고 보거든. 그런 걸 우리도 배워야 하는 데 우리는 옛날부터 배운 경험으로만 해서 문제야. 내가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만 생각하지 말아라. 하나를 보면 둘, 셋을 생각해라, 3차원적인 생각을 갖고 접근해라고 말하지. 그런 건 애들이 빨리 습득하지. 혼자 습득할 수 있는 것 혼자 하고 휠 잡는 것 밸런스 잡는 것은 내가 도와주고.
기술은 손재주만으로는 안 돼는 것 같아요?
그럼 기술이라는 것은 깨달아야 해. 하나만 배워서 쓰면 발전이 안 돼. 요즘 젊은 사람들은 한 가지 배우면 그것만 알아. 자꾸 생각하고 응용해야 해. 편한 것만 생각하고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생각을 먼저 해. 자전거 고치고 하는 것 어릴 때 가르쳐도 돼. 그렇게 해야 나중에 응용을 해서 사용할 수 있지. 우리 가게로 바람 넣으러 오는 애들이 있으면 직접 넣어보라고 해. 그러면 애들이 배워서 할 수 있거든. 그러면 다음에는 알아서 바람 넣고 간다고. 사람들이 안 가르쳐줘서 문제야. 머릿속에 만 넣는 학교 공부를 시키니까 세상을 살줄을 몰라. 요즘 부모들이 학원 이런 데만 돈을 투자하지 말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일에 돈을 투자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는 거 같아. 미국 사람들 봐. 어릴 때부터 자기가 고치도록 하잖아. 용돈을 줘가면서 일한만큼 댓가를 받도록 가르치는 거 우리도 배워야 해.
자전거점 해서 돈 좀 벌었어요?
벌었죠. 벌면 뭐해 그만큼 쓰는 걸. 안식구 아파서 십 몇 년 수발 하다가 심장수술 잘못해서 2015년에 먼저 보냈어. (19)58년 개띠인데. 단대병원에서 심장수술 잘못해가지고 간 거여. 그런데 그 놈들이 인정을 안 하더라고. 결국 조정을 해가지고 치료비 몇 푼 받고 끝난 거지. 심장은 수술해도 점점 나빠지는 거거든. 어쩔 수 없었어. 지금은 문제가 생가면 뉴스 같은 거 발달해서 어떻게 되는데 그 때는 안 되더라고. 하소연할 데가 없어. 법이라는 게 있는 놈들 편만 들고. 변호사도 그러더라고 거기서 하자는 데로 그냥 합의하자고. 수술방 잘못 간 거 탓하는 거지. 서울 큰 대학병원도 수술 잘못해서 문제가 되는데 뭐.
고등학교는 들어갔어요?
옛날 기계공고로 바뀔 때 1회로 입학했는데, 중학교 3학년 졸업한 지 3년쯤 지났을 땐데. 아버지보고 가게 좀 보라고 해놓고 자격증이나 따볼 심산으로 들어갔는데 선생님 기술이 그렇더라고. 집에서 일하다가 한 두 시간씩 기술을 배운다고 갔는데 선생님 기술이 나보다 못해. 그래서 나와 버렸지. 나는 자동차도 만졌고 오토바이도 만졌고 자전거도 하고 기계는 많이 만졌어요. 경운기도 많이 만졌고. 그러니까 학교에서 배우는 게 시시했지.
농기계도 했나요?
더러더러 있었는데 자전거 하던 사람들은 농기계를 할 수가 없어. 기술이 한계가 있어. 못 쫓아가지. 그건 엔진이니까. 나는 어려서부터 엔진을 많이 만졌으니까 부담감 없이 경운기 보링 같은 거 할 수 있었지. 군대도 안정리 공군부대에서 방위를 했거든. 거기서 차를 봤는데 계급을 떠나서 문관으로 통했어. 거기서 원하는 것을 다 만들어 줬거든. 338이나 TNT 다니던 분들은 다 돌아가셨는데 내가 군대 생활할 때 거기서 부속을 많이 얻어다 썼어. 미군차 부속을 내가 다 만들어 주고. 그 때는 근대도 거지 군대였어. 뭐가 있었나. 6.25 때 타던 차들 50, 60차들 내가 철판을 잘라서 커버 다 바꿔 새차 만들어 놨어. 거게 있던 16대 전부. 군대 나올 때 문관으로 근무하라고 붙잡았는데 뿌리쳤어. 덕분에 휴가는 많이 타먹었지. 대방동(공군본부)에 표창장 올렸는데도 안 주더라고. 그래서 표창장도 못 받고 나왔어. 밭아도 별 건 없지만. 그것도 하고 평택의용소방대도 다니고 많이 했어. 불도 끄고. 대성제지 불났을 때도 끄러 다니고. 옛날에는 불나면 일하다 말고 옷 입고 나갔다고. 그 때는 내가 오토바이 타고 다녔으니까 빨랐지. 돈 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소화기 네 개 다섯 개로 불을 다 껐어. 옛날 미군들 화상 입어서 본국으로 송환되고 기독병원에 입원했다는 것 방송에 나왔을 거여. 가스폭발해서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인가 다쳐서 난리 났던 거. 펑하고 터지니까 다 도망가고 난리였지. 이불에 붙고 연기 펄펄 나고 난리였어.
요 앞(통복지하도 부근)에 연탄공장이 있지 않았나요?
유명한 것은 없었지. 유명한 건 아니고 관 만드는 집은 있었지. 우리 가계 옆 불교사 자리가 옛날 관 만들던 집이여. 요 앞(조화자전거 서남쪽)이 전기회사였고. 한전 있잖아, 옛날 한전자리지. 전에는 전기공사를 많이 했어.
일제강점기 이 부근에 관공서가 많았다는데요?
군청, 경찰서, 소방대, 수리조합이 다 이 근방이었고, 여기 소금공장(경기소금공장)이 수리조합이라고 들었어. 한광학원도 여기(조화자전거 옆)에 있었고. 옛날 쪽대 집, 다다미라고 하는 2층짜리 목재집. 그것이 한광고등공민학교가 되었다가 기생집, 니나노집이 되었지. 그거 유명했지 뭐.
기생집 이름이 뭐였어요?
(자전거점) 주변에 서너 개나 있었어. 우리 아버지도 술 좋아해서 거기 가서 앉아 있었거든. 그러면 데리러 가고 그랬지. 요 주변에 그런 집들 여러 개였어. 우리 아버지가 한학을 잘했거든. 객사리 향교 전교도 했어. 제자들도 많았지. 옛날에는 그런 것들 사진 찍어 놨으면 좋았을 텐데.
시장로터리가 개발된 것은 언제부터죠?
지하도가 생기기 전에는 땡땡거리 너머에 대장간이 있었고 인쇄점, 만화가게, 자전거점, 광주리 만드는 대나무집, 철공소 같은 게 쭉 있었지. 지금 쌍용장 모텔 있는 뒤쪽에.
시장로터리가 옛날부터 번화했어요?
그렇게는 번화하지 않았지. 쌈니도 그대로 였고. 거기에 옛날 기와집이 쪽 붙어 있기는 했어. 여기 철둑 사이로 공터가 넓게 있었고. 그 다음이 사창가여. 그 뒤로는 일자표 연탄공장이 있었지. 여기 원평동 쪽에도 사창가가 있었어. 저기 서부역까지.
원평동 사창가는 언제까지 있었어요?
없어졌지. 개발되면서 하나하나 없어지더라구. 한 30년쯤 되었나. 규모는 크지는 않았구. 철길에 담장 안쪽으로 쭉 있었는데, 좌우간 철길 옆에는 사창가라고 봐야 해. 시장로터리로 넘어가면서 말 마차 집도 많았고. 옛날에 말바퀴 수레바퀴를 끼잖어. 거기 대장간에서 마차를 제작하기도 했어. 대장간인데 규모가 있었어. 왜냐면 쇠톱, 전기톱이 있었으니까. 큰 나무를 켜서 쭉 쌓아 놔. 비 맞지 않게 쌓아 놨다가 그거 가져다가 켜서 구멍 파가지고 마차를 만들어. 골조 같은 것도 제작하고 그랬어. 그 아래로 내려가면 제재소도 있었고, 그 옆에 가정집도 하나 있었고. 시장 쪽으로는 대포집이 있었지. 공터가 좀 있었고 이쪽으로는 대나무집이 있었고. 이쪽으로는 대장간이 있었고 그 나머지는 쌈니골목이야. 쌍용장 있는 데는 술집이었고. 다 술집이지 뭐 대포집.
통복고가다리 밑에는 뭐가 있었어요?
고가다리 나기 전에는 건널목 아녀요. 건널목인데 넘어오면서 함석 물받이하고 천장 지붕 하는 거 하는 집이 있었고, 자전거상회도 있었고, 철공소도 있었고. 지금도 철공소는 있을 꺼야. 그 양반도 꽤 오래 했지. 고가다리 밑에 가게도 있었고 술집 있었어. 기차사고(1976년경) 나가지고 버스 홀라당 날아가고, 그 때 많이 죽었어. 아마 몇 십 명은 죽었지. 그 사고난 버스를 내가 절단한 거 아녀. 해체를 내가 했다니께. 군대 가기 전에 공터에서 버스 절단을 내가 했는데.... 그거 하지 못하겠더라고. 그래도 할 사람이 없어 어쩔 수 없이 했는데 기분은 안 좋더라고. 내가 역전 앞에 광고판 그것도 했다니께. 옛날에 역전 광장에 칼국수집 있었고, 우동집이라고 하지 그것도 있었고. 거기다 광고판을 내가 만들었다고. 그거 용접하느라고 혼났어. 돈은 아버지가 벌고 나는 일만 되지게 많이 했지.
사회생활 경험이 다양하네요?
엄청 많이 했지. 오토바이도 옛날에는 번호판이 없었잖아. 헌 것을 사다가 부속 때내서 다 조립해서 새것 만들어 팔았어. 양수기도 무지하게 고쳐주고 안 한 것 없어.
그러면 수입도 많았을 텐데요?
돈을 벌면 뭐해 아버지가 따 까먹은 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3년 내리 상(喪)을 치렀어. 옛날에는 부조가 어딨어. 그냥 상갓집에 오면 3일 동안 밥이고 뭐고 막 퍼 먹어. 그러면 그 돈을 어디서 구해. 쌀값이며 고깃값 하며. 다 빚이잖아. 그걸 1년에 한 번씩 3년을 치른 거야. 중학교 1학년 때 할아버지, 2학년 때 할머니, 3학년 때 엄마. 그래서 내가 중학교 들어갈 때도 어느 반인지 몰랐고, 2학년, 3학년 때도 몰랐어. 꼭 어른들이 음력 정월에 돌아가셨으니까. 세상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무실에 가서 내가 몇 반이냐고 물었다니까. 그래서 키도 작은데 65번이었어. 그 때는 애들 많았어.
그렇게 벌어 놓은 돈 다 까먹었네요?
그렇지. 그리고 누이들 다 시집보냈지, 동생들 다 장가보냈지, 마누라 입원했지. 여동생들 결혼하면 하다못해 농짝이라도 사서 보내야 잖아. 그러다보니까 이제는 나 용돈 쓸 것밖에 안 남았어. 연금 50만원 받고 노후생활 하는 거야.
이 건물은 사장님 것 아닌가요?
건물 내 것 아녀. 전세로 살고 있는 거여. 이거 못 산 것도 우여곡절이 있지. 소개하는 사람 잘못으로 못 샀어. 필리핀에서 세 모녀가 강도들에게 난도질당해 죽었다는 사건 있잖어. 이 건물 주인이 그 아줌마인데 죽은 뒤 건물이 아들 앞으로 넘어간 거여. 그것을 사려고 한 건데 그 사람이 사채빚을 많이 져서 넘어가는 바람에 매입을 못했지. 건물하고 인연이 안 돼서 그래. 지금 매입할 상황도 아니고.
재밌는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아직도 할 얘기가 많이 남았는데. 여기 기흥빌라 자리가 옛날 아이스케키 공장이었어. 아이스케키 만들다가 쭈쭈바가 나왔잖아. 그 양반 죽고 아줌마가 쭈쭈바 봉지공장 하다가 나중에 와리바시(나무젓가락)도 하고 젓갈 공장도 했어. 하드공장 잘 됐는데 크라운인가 뭔가 타고 서울 가다가 교통사고 나서 객사했지.
소주공장도 있었다는데요?
소주공장이 어디냐면 주민교회 옆에 현대목욕탕 있어. 그 자리가 소주공장 자리여. 25도짜리 희석식 소주를 만들었지. 나중에 공장은 안 하고 굴뚝만 남았다가 해체되었고.
언제 없어졌어요?
1970년대까지는 있었던 것 같아.
단위농협 자리는?
단위농협은 여기 우리 가게 앞(삼거리 서쪽) 족발집 자리야. 거기서 단위농협 처음 생겼다가 길(옛 1번국도) 확장하는 바람에 헐리고 지금 자리로 갔지.
윤응구씨 방앗간, 영단방앗간은 언제까지 있었어요?
글쎄 내가 군대서 제대할 때까지 있었으니까 1979년, 80년까지는 있었을 거여. 1981년도에는 가동은 안 했던 거 같어. 내가 거기 둑방(객사리 가는 길) 옆에서 셋방 살았거든. 1979년도에 결혼했는데 거기 살 때 물난리 나고 미군 차 떠내려가고 했던 거 아녀. 1980년인가 물난리 크게 났잖어. 그 때 군문리가 두 번인가 세 번 물이 찾지.
(사장님이 지나가는 아주머니 붙잡고) 옛날에 너희 아버지 조진행씨 공업사 하시던 그 옆에는 뭐가 있었지?
전파사 있었고, 목공소도 있었고... 우리가 1970년인가 69년인가 왔어요.
(사장님)호두빵집이 제일 오래 있었지?
우리는 원평동 동사무소 앞에 살다가 185번지, 거기 살다가 왔는데. 여기(사장님)는 서울방앗간 옆에서 사셨고. 옛날 공업사 했던 조진행씨라고 키가 작달막하고 성질이 대단했던 분 딸인인데.
1960년대에는 TMO에서 물건 빼내고 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들 다 죽었어. 하나나 둘만 남았을 거여. 나보다 선배들인디 어디 사는 지는 몰러. 60트럭 같은 거 지나다가 땡땡거리 앞에 서 잖아. 그러면 살살 뒤쪽으로 기어 차에 올라타서 물건을 마구 집어 던져. 미군 차는 철길 넘어 가면은 그만이거든. 그러다가 걸리면 골목으로 튀는 거여. 대지여관 골목이 좁아서 튀면 어떻게 잡아. 벼라 별 것 다 있어. 테이프하고 작기라고 자동차 드는 거, 연장, 스패너 이런 거, 통조림. 무조건 뭔지도 모르고 던지는 거여. 나중에 트럭이 철길 넘어가면 주섬주섬 줏어다가 냅다 뛰는 거지.
그럼 그 물건들이 미군기지 들어가는 보급물자였네요. 이런 물건은 어떻게 팔아요?
그 당시는 미군부대 물건 전문적으로 사는 사람들 있었어. 장물아비지. 미군부속 파는 거는 그 때만 해도 전문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고. 부속팔고 연장팔고 하는 사람들 중에 지금 살아 계신 분들도 있어. 나중에는 미제 연장 파는 집들도 생겼고. 휘발유도 팔아먹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