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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갈라디아서 6:1-6:10
제 목 : 스스로 속이지 말라
0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0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0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0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0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0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0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0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0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1. 기독교의 성격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6:1-10] 말씀을 우리 모두가 다 같이 한 목소리로 합독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마지막 장에 들어와서 그런지 오늘 아침 여러분들의 목소리에서 유난히 힘이 느껴집니다. ‘와, 이제 끝이 보인다. 드디어 종착역이 보인다. 이제 서둘러 내릴 준비 하자.’ 모두가 한마음이신 것 같습니다. 예. 여러분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양도 얼마 되지 않는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무려 6개월을 달려왔으니 얼마나 지치셨겠습니까? 여러분들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고, 저 역시도 끝이 보이기 시작하니까 마음이 아주 뿌듯해집니다.
예. 드디어 다음 주면 오랜 시간동안 달려왔던 갈라디아서 설교를 마치게 됩니다. 그동안 정말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마친다고 해서 정말로 끝이 난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종착역에 도착했으니 이제 기차에서 서둘러 내려도 되는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배울 것 충분히 배웠고, 익힐 것 충분히 익혔으니 이제 하산해도 되는 것이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배우고 또 배워도 끝이 없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익히고 또 익혀도 끝이 없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독교는 단순히 지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성경을 통해 배워 알게 된 것을 성도의 삶 속에서 성도가 먼저 누리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풀어주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즉 죄의 원리가 지배하는 고단한 삶의 현장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으로 하나님의 가치와 원리로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끝이 없습니다.
제가 오래전 다니던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큰 교회입니다. 그 교회의 담임목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큰 교회이기는 하지만 지구상에 전도를 해야 하는 대상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다면 우리 교회는 엄연한 개척교회입니다. 그래서 개척교회라는 정신을 가지고 끝까지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에는 끝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멋진 말씀입니까, 멋지지 않은 말씀입니까? 참으로 멋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냥 멋진 말씀일 뿐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기독교가 끝이 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7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을 다 은혜로 구원하셨다고 해서 기독교가 끝이 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구원받는 것만으로 끝이 나는 것이라면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어떤 곳이어야 합니까? 정말로 완전무결한 곳이어야 합니다. 아무 흠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 경쟁과 다툼이 없는 곳이어야 합니다. 즉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천국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불행하게도 ‘예’라는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거침없이 ‘예’라는 대답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4: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굳이 우리의 목표를 나누어 본다면 두 가지 정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우리의 일차 목표는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일, 이 일은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니고, 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할 수 없다면 누가 해주십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하나님의 아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믿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알게 하셔서 온전한 사람, 즉 죄에서 해방된 자유자로, 죄인의 신분에서 성도의 신분으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예. 일차 목표, 즉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일차 목표를 이루신 분들입니까, 이루지 못하신 분들입니까? 이루신 분들입니다. 어떻게 이루셨습니까? 여러분의 공로로 이루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셨습니다. 예.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일차 목표, 즉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룬 위대한 하나님의 위대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끝이 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이차 목표가 남아있습니다. 그 이차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 이차 목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리 몸에 배어있는 일체의 죄의 습성, 죄의 습관을 벗어버리고 아무 흠이 없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이차 목표입니다.
그런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이 이차 목표는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는 것입니까, 내가 이루어가는 것입니까? 내가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쭈어 보겠습니다. ‘나는 이차 목표를 다 이루었다. 내 안에는 더 이상 죄의 흔적, 죄의 자취라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의 원리로 살아가는 사람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씀하실 수 있는 분, 혹시 계십니까? 계시면 손 한 번 번쩍 들어보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무도 안 계실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기록한 바울조차도 로마서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고 말했을 정도입니다. 왜 이렇게 말을 합니까? 나의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원리와 죄의 습관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 이차 목표,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는 일은 성도 스스로가 세상 생명 다하는 날까지 이루어나가야 하는 성도의 일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끝이 없는 종교입니다. 성경을 읽어서 알게 된 것, 성경을 배워서 깨닫게 된 것을 우리 모두가 살아 숨 쉬는 그 날까지 끊임없이 우리의 삶 속에 적용하고, 실천하며, 구현하는 끝이 없는 종교, 그것이 바로 기독교입니다. 구원받았다고 해서 다가 아닙니다, 지구 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성도가 되었다고 해서 결코 끝나는 게 아닙니다.
2. 하나님의 방식
그런데 이런 의문이 드실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내용이 도대체 뭐지? 이차 목표를 이룬다고 하는데 그 이차 목표의 내용이 도대체 뭐지?’ 이런 의문이 드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최근에 보았던 영화와 드라마의 내용을 세 가지 간추려 드리겠습니다. 들으시면서 과연 이 내용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데’ 합당한 것인지, 또 이렇게 하면 하나님 나라가 과연 이 땅에 임하는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부탁의 말씀을 드리기는 ‘오 목사는 틈만 나면 영화를 보나 봐. 틈만 나면 드라마를 보나 봐. 새벽기도회도 하지 않고, 심방도 하지 않고, 아주 시간이 흘러넘치나 봐’ 이렇게 오해하지 않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예. 저도 때때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곤 합니다. 그런데 보는 이유가 뭐냐? 다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한 소재거리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즉 여러분들을 위해서 제가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본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믿으시지요?
먼저 ‘널 기다리며’라는 제목의 영화 이야기입니다. 어린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혼을 한 경찰 아버지와 지하 단칸방에서 외롭게 사는 소녀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으로 침입한 괴한에 의해 경찰 아버지가 칼에 맞아 죽음을 맞이하고, 이 소녀는 이 충격적인 장면을 생생하게 목격하게 됩니다. 다행히 조기에 범인을 검거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범인은 이 사건에 대해서는 별도의 벌을 받지 않고 다른 살인 사건으로 인해서 15년 징역형만을 선고 받습니다. 이때부터 소녀는 지하 단칸방에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범인이 출소하기만을 학수고대 기다립니다.
마침내 15년이 지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이 출소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동료 경찰들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숙녀로 성장한 소녀는 드디어 복수를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사람을 직접 죽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경찰도 스스럼없이 죽이는 살인마를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소녀는 경찰이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후에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놀이터로 유인합니다.
그리고 그 범인이 자신을 직접 살해한 것으로 모든 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네에 자신의 목을 매달아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물론 범인은 꼼짝하지 못하고 현장에서 살인 현행범으로 경찰에 의해 체포됩니다. 즉 소녀는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버리면서까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을 명백한 살인범으로 만들면서 15년 만에 복수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수의 칼날을 갈던 이 소녀가 하는 독백 대사 중에 제게 큰 울림을 준 대사가 하나 있습니다. ‘악이 승리하는 조건은 단 한 가지 같아요.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거.’ 예. 이런 내용의 대사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악이 승리하는 조건은 단 한 가지 같아요.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거.’ 이 대사에 공감이 가십니까? 저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기에, 선한 사람들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기에 악이 퍼져나가는 것이라는 소녀의 대사에 저는 백번도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소녀의 복수, 또 복수의 방법에 대해 찬성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물론 소녀의 입장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아버지가 살해된 지하 단칸방을 홀로 지키는 소녀,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또 얼마나 원한이 뼈 속 깊이 사무쳤겠습니까? 소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의 목숨까지 버리며 복수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이 악을 물리치기 위해서 선한 사람들이 취해야 하는 방법도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의 원한을 풀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의 복수를 완성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궁극적으로 악을 물리친 것인가에는 아직도 의문부호가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악을 물리치기 위해 선한 사람들이 무엇을 한다고 해서 과연 이 땅에서 완전히 악이 사라질 것인가? 악을 물리치기 위해 선한 사람들이 무엇을 한다고 해서 오로지 선만 존재하는 세상이 이루어 질 것인가? 악을 물리치기 위해 선한 사람들이 무엇을 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화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인가? 여전히 의문부호가 남아 있습니다.
사실 소녀의 대사처럼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악을 물리치기 위해 곳곳에서 묵묵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 즉 악을 물리치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 두 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드라마는 두세 달 전쯤 토요일과 일요일 밤에 방송됐던 ‘미세스 캅’이라는 제목의 드라마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김성령이라는 여배우가 강력계 여자 형사반장으로 나왔던 드라마입니다.
미세스 캅은 부하 형사 네 명과 함께 서울시의 강력범들을 잡아들이는 여형사입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들도 있지만 긴급 상황이 발생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한밤중에도 홀로 출동하는 열혈 여형사입니다. 어느 날 미세스 캅은 형사과장으로부터 미제 살인 사건 하나를 배당받게 됩니다. 미제 살인 사건이라고 하니까 미국에서 일어난 미국제 살인 사건이라고 오해할 수 있는 데 그 미제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은 미제, 그런 의미의 미제 살인 사건을 배당받게 됩니다.
미세스 캅은 그 살인 사건을 파헤쳐 가던 중 배후에 거대한 규모의 금융회사를 경영하는 젊은 회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젊은 회장이 자신이 회장이 되기 위해 전임 회장이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목 졸라 살해했다는 정황까지 포착하게 됩니다. 젊은 회장은 정치권의 보호를 받으며 요리 조리 잘도 수사망을 빠져 나가고, 자신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미세스 캅을 조롱까지 하면서 악마의 근성을 드러내지만 결국은 미세스 캅에 의해 체포되고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됩니다.
그 드라마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에서 미세스 캅을 비롯한 네 명의 형사들의 독백이 흘러나옵니다.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습니다. ‘어둠의 세력은, 악의 세력은 마치 독버섯처럼 퍼져나가고 있다. 아무리 잡고 또 잡아도 끝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존재 이유이다. 악이 존재하는 이상 그 악을 물리쳐야 하는 누군가도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출동한다.’ 이런 내용의 독백입니다.
여러분 여쭈어 보겠습니다. 세상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잡기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악을 물리치기 위해 자신도 돌보지 않으며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이런 사람들을 과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들이라고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미세스 캅으로 나온 배우의 이름이 김성령입니다. 그런데 그 배우가 그 이름대로 성령이 충만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또 경찰들이 어둠의 세력, 악의 세력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다 잡아들인다고 해서 이 세상이 정말로 깨끗해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이 오로지 선만 존재하는 세상, 그런 세상이 될 수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화를 온전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이 뽑힌 그 자리에 다시 악이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죄가 뽑힌 그 자리에 다시 죄가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예. 모든 악의 세력, 죄의 세력을 잡아들인다고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죄의 원리가 지배하는 죄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동네 변호사 조들호’라는 제목의 드라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조들호 변호사는 검사 출신 변호사입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억울한 사람, 돈 없는 사람의 사건을 도맡아 처리해주는 글자 그대로 동네 변호사입니다. 그런데 조들호 변호사가 검사 시절 자신의 상사였던 검사장과 적이 되었습니다. 대기업 회장과 자신의 장인이었던 국내 최대 로펌 대표와 결탁하여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고, 또 검찰총장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검사장의 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들호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망설이지 않습니다.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맞이하지만 결코 굴하지 않고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말 슈퍼맨처럼 활약합니다. 결국 적이었던 대기업 회장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장인이었던 대형 로펌 대표로부터도 협조를 받아냅니다. 그렇게 해서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지른 검사장,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가지고 놀았던 검사장의 죄를 밝혀내는데 성공하고, 마침내 그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면서 드라마는 끝을 맺습니다.
다시 동네 변호사로 돌아가는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에서 조들호가 이런 독백을 남깁니다. ‘괴물이었던 검사장이 법의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법의 심판을 마치고 감옥에서 출소할 때 그는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그런다고 해서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동네 변호사로 돌아간다. 그것이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조들호 변호사 같은 사람이 딱 열 사람, 아니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정말로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쭈어 보겠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억울한 사람, 돈 없는 사람의 변호를 무료로 맡아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입니까? 물론 자신의 직업에 관한 책임감과 사명감이 아주 투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사람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한 사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 조들호 변호사가 꿈꾸는 것처럼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이 되면 세상이 좋아지겠습니까?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이 되면 세상이 아름다워지겠습니까?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이 되면 세상이 행복해지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법을 만드는 이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추구하는 죄인인 사람이 법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즉 법은 만들어질 때부터 이미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법은 어디에서 만듭니까? 국회에서 만듭니다. 그런데 법이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면, 법이 모든 사람의 유익과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법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면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들이 싸울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싸웁니까?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유익과 이익이 되도록 법을 만들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만드는 법은 태생적으로 모든 사람을 위한 법이 될 수 없고,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이 될 수 없습니다.
영화 한 편과 드라마 두 편 이야기를 해드렸습니다. 들으시면서 조금 혼란이 오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의 복수를 완성한 소녀, 악을 물리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열혈 여형사 미세스 캅,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죽음의 위협까지 무릅썼던 동네 변호사 조들호 그들 모두가 성령 충만한 사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꿈꾸는 세상이 결코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럼 뭐야? 성령 충만한 게 뭐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다고 하는데 그 내용은 도대체 뭐야? 이차 목표를 이룬다고 하는데 그 이차 목표의 내용이 도대체 뭐야?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는 거야?’ 이런 의문이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걱정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를 수 있는 예가 바로 오늘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제가 조금만 수정해서 다시 한 번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느낌인지 잘 생각해 보시면서 들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도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을 잘 살피시길 바랍니다. 서로 남의 짐을 지십시오. 또 각각 자기가 한 일을 살펴봅시다.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던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두게 됩니다. 그러니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다보면 거둘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여러분 느낌이 어떠십니까? 성경 말씀 같습니까, 아니면 국민윤리 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내용 같습니까?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내용 같습니다. TV 교양 프로그램에서 유명 강사가 하는 말과 다를 게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었던 말이고, 또 우리가 우리보다 어린 사람에게 많이 해주는 말입니다. 성경의 내용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습니다.
이 내용을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성경 속 이야기라고 하면 ‘성경이 뭐 이래? 세상 속 좋은 말과 다를 게 전혀 없잖아?’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예. 겉으로 봐서는 오늘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내용, 즉 우리가 이루어가야 할 이차 목표의 내용이 세상 속 좋은 이야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 우리가 행해야 하는 내용이 세상 속 좋은 이야기와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완벽하게 다른 내용이라는 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어떻게 다릅니까? 우선 세상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 하는 이유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세상에서도 서로 사랑하라, 서로 도우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선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착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라, 서로 도우라고 말을 하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선한 것이고, 누구에게 착한 것인지 기준이 없습니다. 누구에게 유익과 이익이 되는 것인지 기준이 없습니다. 그냥 선하다고 하니까, 그냥 착하다고 하니까, 그냥 사람의 도리라고 하니까 그냥 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기준에 입각해서, 나의 방식대로 사랑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서로 도와주는 방식이 다 다릅니다. 나는 분명히 사랑한다고 하는데, 나는 분명히 도와준다고 하는데 상대방은 불편을 느끼고, 상대방은 모욕을 느낍니다. 예. 아무리 좋은 내용도 세상 속에서는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조금 전 세상은 나의 기준에 입각해서 나의 방식대로 사랑하고 도와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세상 속 나의 기준, 나의 방식이 누구의 기준이고, 누구의 방식입니까? 세상은 그것을 상식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식적 기준에 입각해서 상식적 방식으로 사랑을 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이 말하는 상식적 기준, 상식적 방식, 그것을 기독교에서는 뭐라고 부릅니까? 기독교에서는 그것을 죄의 기준, 죄의 방식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보편적 사람들이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즉 좋은 말의 내용은 똑같지만 세상에서는 죄의 원리에 따라 죄의 방식으로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다릅니다. 오늘 바울은 여러 가지를 권면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권면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도와주고, 서로 짐을 나누어지라고 권면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 근거가 바로 지난주에 살펴본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고 성령을 보내주셔서 이제 너희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소유한 존재가 되었으니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기준 삼아 하나님의 원리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능히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 그리 하라는 것입니다.
예.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무턱대고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강제로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억지로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명령만 될 뿐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는 게 아니라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 놓고 이제 너희가 그렇게 행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으니 그리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예.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오늘 말씀 초반부에 [에베소서 4:13] 말씀을 근거로 온전한 사람을 이루는 것이 우리의 일차 목표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일차 목표를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셨으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의 열매라는 선물을 주셨으니까 이차 목표,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일을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능히 이루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똑같은 권면의 내용이지만 세상은 죄의 원리로 죄의 방식에 따라 내가 해내는 것이고,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원리로 하나님의 방식에 따라 내가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3. 신령한 너희는
이 내용을 기억하시고 오늘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갈라디아서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살펴볼 표현이 ‘신령한 너희는’이란 표현입니다. ‘신령하다’, 이런 표현이 나오면 우리는 먼저 흥분부터 합니다. 방언을 하고, 통변을 하고, 예언을 하고, 꿈을 꾸고, 꿈을 해석하는 일종의 은사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런 능력을 지닌 사람들을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신령한 사람이란 그런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 바울은 ‘신령한 너희는’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왜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합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성령의 열매를 품은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를 품은 성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쭈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신령한 분들이십니까, 신령하지 않은 분들이십니까? 여러분들은 당연히 신령한 분들이십니다. ‘이 같은 것, (즉 성령의 열매를)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예. 여러분들은 최상, 최고의 가치인 성령의 열매를 품은 신령한 분들이시라는 것을 꼭 기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품은 신령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큰 잘못을 범한 사람을 만나도 온유한 심령으로 그들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꾸짖고, 비난하고, 책망하고, 정죄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온유한 심정으로 그들을 바로잡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보면서 혹시 나는 괜찮은지, 혹시 나는 잘못을 범한 것이 없는지 나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계기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2절,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라고 기록합니다. 어떤 마음이 있어야 남의 짐을 질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남의 짐을 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내가 남의 짐을 져도 전혀 무겁게 느끼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글자 그대로 짐만 될 뿐입니다. 성도는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품은 존재이기에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고 권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 즉 사랑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3절,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2절과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너희가 서로 짐도 져주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했다고 생각한다면 너희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셔서 성도 삼아 주셨으니 이제는 그 성도라는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아달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사랑도 베풀지 못하면서 ‘나는 성도야’라고 말만 하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4절로 5절,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이 말씀이 무슨 내용입니까? 이런 내용입니다. ‘모든 사람 각자에게는 자신의 역할과 자신의 책임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 일을 잘 해내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그 일을 잘 해냈다고 해서 남에게 자랑하지는 마십시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것까지는 괜찮겠지만 절대로 남에게 자랑하지는 마십시오. 그 일은 어차피 당신이 해야 할 당신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의 내용입니다.
6절,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우열을 가리는 경우가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높은 자가 있고, 낮은 자가 있습니다. 가진 자가 있고 못 가진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가 있고 약한 자가 있습니다. 그런 관계에 모두 해당되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단순히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 사이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즉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 존귀하게 대우해 주라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4. 스스로 속이지 말라
7절로 8절,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오늘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사람이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을 향하여 오늘 바울이 가장 하고 싶은 말입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콩을 심으면 무엇이 나옵니까? 콩이 나옵니다. 팥을 심으면 무엇이 나옵니까? 팥이 나옵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 무엇이 쌓입니까? 지식이 쌓입니다. 운동을 많이 하면 무엇이 좋아집니까? 건강이 좋아집니다. 노래 연습을 많이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노래 실력이 좋아집니다. 그림 연습을 많이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옵니까? 그림 실력이 좋아집니다. 예.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다시 여쭈어 보겠습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기도 실력이 좋아집니다. 금식을 많이 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배가 고파지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 줄어드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봉사를 많이 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나로 인해 즐거워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예. 이것이 진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유대 율법주의자들, 그리고 오늘날 교회는 뭐라고 말을 합니까? 기도에 힘을 쏟으면, 금식에 힘을 쏟으면, 구제에 힘을 쏟으면 하나님께서 큰 복을 주신다고 말을 합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주일성수를 하면 하나님께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로 갚아주신다고 말을 합니다. 나의 세대가 아니면 자녀 세대에서라도, 현세가 아니면 내세에서라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주신다고 말을 합니다.
이런 유대교의 행위, 이런 교회의 행위를 두고 바울이 하는 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게 바른 이치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너희는 너희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게 하나님의 이치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너희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입니다. 죄의 원리를 심으면 죄의 결과를 거두고 하나님의 원리를 심으면 하나님의 원리를 거두니 하나님의 원리를 심는데 힘을 쏟으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사랑을 심으면 더 많은 사랑을 거두고, 화평을 심으면 더 많은 화평을 거두고, 자비를 심으면 더 많은 자비를 거두고, 온유를 심으면 더 많은 온유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결말이 무엇입니까?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입니다. 하나님의 원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땅에서 모든 성도가 하나님과 더불어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자유롭게 살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5.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그래서 바울이 결론적으로 하는 말이 9절로 10절,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입니다. 별로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그런데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는 내용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말을 합니까? 믿음의 가정은 뭐가 더 특별합니까? 믿음의 가정은 뭐가 더 위대합니까? 자칫 잘못하면 핵심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여쭈어 보겠습니다.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고 바울이 말하는데 이 말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가 믿음입니까, 가정입니까? 가정입니다. 워낙 교회에서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까 믿음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핵심은 믿음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그런데 가정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가정의 기초는 부모와 자녀입니다. 예. 지금 바울은 자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라는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리 할지니라’라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성도 삼아주시고, 성령의 열매를 주셔서 사랑할 줄 아는 이로 만들어 주셨는데 우리도 하나님처럼 우리의 자녀에게 그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원리로, 하나님의 방식으로 자녀들에게 먼저 본을 보이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가 자녀에게, 또 그 자녀가 자녀에게 그리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원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땅에서 모든 성도가 하나님과 더불어 기쁘고, 즐겁고, 신나고, 자유롭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 악한 자들을 다 잡아들이는 것, 법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것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물론 반짝 효과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글자 그대로 반짝 효과일 뿐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 즉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원리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마음을 주셔서 우리를 온전한 사람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더 잘 가꾸고 더 잘 성장시켜서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차 목표를 이루는 것입니다. 능히 이루어 가실 수 있는 우리 다누림의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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