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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런저런 선택행동에 대해 이런저런 그럴듯하게 합리적인 이유를 갖다 붙이지만, 그런 선택행동을 하도록 만든 진짜 원인에 대해서는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의 선택 행동에서 가장 까다롭고 나 자신도 살면서 가장 당혹스럽고 괴로운 진실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괴상한 일이 인간 뇌의 구조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다.
의식은 탁월한 소설가
신경과학자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선택과 의사결정에 두 가지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 ‘시스템1’과 ‘시스템2’라고 부른다. 시스템1은 이유를 만들어 내는 의식 시스템이다. 시스템2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서 우리의 욕망과 감정, 그리고 의사 결정을 빚어내고 있는 무의식 시스템이다. 두 시스템은 연결되어 있지만, 무의식 시스템 쪽에서 나가는 힘이 훨씬 더 강력하다. 시스템1은 주관적으로 만들어 내는 행위의 동기를 설명하는 이유의 시스템이고 시스템2는 객관적인 원인의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거칠게 비유하자면 시스템2는 자동차고, 시스템1은 자동차의 현재 상태를 표시해 주는 계기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속도나 연료 상태 등을 표시하는 계기판은 말 그대로 현재 상태의 결과를 표현하고 있을 뿐, 계기판 자체가 자동차를 움직이게 하거나 하는 영향력은 없다.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영역이 그런 것이다. 의식은 우리 무의식의 상태나 욕구, 결정을 계기판처럼 표시해 준다. 예를 들어, 내 몸에 수분이 부족하면 의식 아래서 작동하는 무의식 시스템에서 갈증이라는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무의식이 지금 수분이 부족하니 물을 마시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의식이 물을 마셔야겠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의식은 “날이 더워서 그런지 자주 목마르네”라고 이유를 설명할지 몰라도 물론 그 진짜 원인은 체내의 수분부족이다.
임산부들은 평소엔 거들떠보지도 않던 음식들을 강렬하게 원할 때가 있다. 야밤에 남편을 졸라 족발이나 순대를 사달라고 한다든지 하는. 이전엔 징그럽다고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이! 남편은 이렇게 투덜대면서도 어떻게든 그걸 사와야만 한다. 물론 임산부는 갑자기 왜 그런 음식이 당기는지 진짜 원인은 모른다. 우리 몸은 정답을 알고 있다. 족발이나 순대에 들어 있는 어떤 영양분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몸, 즉 무의식은 우리에게 진짜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있고, 그것을 우리가 욕망하도록 만든다. 그 욕망들이 바로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하는 진짜 이유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황에서 시스템1은 시스템2가 왜 그런 욕망을 일으키는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이유를 지어내곤 하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열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창 사랑에 빠져 있는 연인들 사이에서 종종 이런 말들이 오고 간다. “그런데 왜 하필 나를 선택했어? 왜 나를 사랑해?” 왜 하필 그대를 사랑하게 되었냐고? 우리가 정말 그 진정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연인에게서 갑자기 그런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말을 더듬다 결국엔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며 나름 진지하게 설명을 시도한다.
그러나 어떤 이유를 대든, 그런 의식이 갖다 붙이는 이유들은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열정을 불태우게 만드는 진정한 원인은 바로 시스템2의 무의식적 욕망 속에 있다. 특별한 장애가 없는 이상, 다른 모든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사춘기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 이성에 대한 이상야릇한 호기심과 욕망에 휘둘리기 시작한다. 대부분의 동물들은 발정기 동안에만 욕정이 일어나고 짝짓기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인간만은 1년 365일이 전부 발정기다. 성생활에 관한 한 완전한 ‘만인은 만인의 연인’을 실천하며 사는 복된 종족인 보노보 원숭이들에게야 그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소위 문명이니 일부일처제 도덕이니 하는 금기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종에겐 유전자에 각인된 이 가차없고 맹목적인 성욕은 실로 골치 아픈 문제가 된다.
인간도 생물인 한, 짝짓기와 번식 문제는 지엄한 유전자의 명령이다. 마음은 아무리 고상하고 우아한 생각만 하고 싶어도, 이 빌어먹을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유전자 입장에선 칸트나 쇼펜하우어, 니체 같은 고상하지만 번식을 거부하는 독신 철학자들이야말로 최대의 적이다. 모든 인류가 그들처럼 철학을 하느라 번식을 거부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상상해 보라.
성욕과 사랑이 아무리 다른 것이라고는 하지만, 사랑의 뿌리가 성적인 욕망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성적인 욕망과 완전히 무관한 사랑은 우정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오늘날 생물학자들은 인간의 삶을 다른 동물들과 다름없는 생존과 번식을 위한 투쟁의 장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는 남자들이 부와 권력과 지위를 놓고 격렬하게 투쟁하는 것도 알고 보면 더 잘 생존하여 더 좋은 짝을 만나 자신의 유전자를 더 많이 퍼뜨리기 위한 생물학적 본능의 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로 하여금 알 수 없는 이유로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만들고, 사랑에서 황홀한 쾌락을 얻고,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감을 갖게 되는 것은 모두 우리 뇌에서 터져 나오는 몇 가지 호르몬들의 작용이라는 설명이다. 테스토스테론 같은 성호르몬과 도파민 같은 쾌락 호르몬, 그리고 연인이나 부부, 부모 자식간의 정서적 애착을 일으키는 사랑의 호르몬인 옥시토신이나 바소프레신 같은 호르몬의 작용이 그것이다.그 호르몬들은 너무나 강력하여 그것들이 우리 뇌를 덮치게 되면 소위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고 하는 상황이 생긴다. 사랑의 호르몬이 뇌를 흠뻑 적셔 놓으면 이성적인 판단을 관장하는 앞뇌, 즉 전두엽의 활동이 현저하게 위축되어 버린다. 그러면 상대의 허물이나 단점도 보이지 않고 주변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도 불가능하게 되고 만다. 그저 불도저처럼 짝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 젊은 베르테르처럼 그 불 같은 사랑에 장애물이 생길수록 오히려 감정은 더욱 격렬해지고, 마침내는 목숨까지도 바치는 결단도 서슴지 않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사랑에 관해 “인간의 행위 중에 이처럼 신비롭고 진지한 것은 없다” 말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그 모든 것이 하나도 신비로울 것 없는 유전자 설계와 호르몬 작용의 결과임을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이성들 가운데서 왜 하필이면 특정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지에 대한 이유는 사실상 거의 믿을 게 못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물론 시스템1은 온갖 이유를 갖다 붙이겠지만, 깊이 들여다보면 자신도 절대 알지 못한다. 의식은 진짜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를 소설가처럼 지어낼 뿐이다.
인간의 의식은 이유를 지어내는 탁월한 소설가다. 나아가 그 어떤 변호사보다 더 탁월한 변호사이며, 위대한 거짓말쟁이이다. 우리 의식이 얼마나 자기합리화에 능한 거짓말쟁이인지를 보여 주는 실험 결과들도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최면 실험이다. 어떤 사람에게 최면을 건 후, 무의식 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내가 헛기침을 두 번 하면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엽니다”라고 말한다. 이후 피실험자가 최면에서 깨어난 후에 실험자는 헛기침을 두 번 하면 어김없이 피실험자는 느닷없이 일어나 창문을 활짝 연다. 실험자가 갑자기 왜 창문을 열었지요? 하고 물으면 피실험자는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댄다. “여기 실내 공기가 너무 더운 것 같아서요”와 같은.
의식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 무의식은 자기 자신마저 속이는 데 가히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하니까. 이 말은 달리 말해 모든 인간은 자기기만의 천재라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진화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자기기만조차도 우리를 더 잘 생존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육지책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택과 관련해서 본다면 그런 종류의 자기기만은 우리의 삶을 자칫 낭패스런 상황으로 몰아갈 수도 있다. 때문에 심리학에서는 그런 자기기만 시스템을 통칭해서 무의식적 편향이라고 부른다.
착각하는 감정
우리는 자신이 느끼는 감정만은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감정을 타인에게 속일 순 있지만,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결코 속일 수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현대 심리학에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교묘한 방식으로 감정마저 속여 넘긴다는 말이다. 즉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진실한 감정마저도 실은 ‘가짜’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에는 이를 확인해 주는 여러 가지 실험이 있다. 예를 들어 아찔한 다리 효과라는 실험은 우리의 감정이 어떻게 우리를 속여 넘기는지를 잘 보여 준다. 한 무리의 매력적인 여대생들에게 지나가는 남자들을 붙잡아 학교 과제라고 하면서 설문지 작성을 부탁한다. 무대는 두 개의 다리 위다. 한쪽 다리는 작은 개울 위에 걸쳐진 전혀 위험하지 않은 평범한 다리고, 다른 한쪽은 바위 투성이 땅에서 70미터 높이에 설치되어 있는, 아래를 내려다보기만 해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다리다. 여대생들은 두 다리 위에서 남자들이 설문을 작성하게 한 후, 질문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라며 전화번호를 주었다.
설문을 작성한 남자들 중 어느 쪽 다리의 남자들이 더 많이 연락을 해왔을까? 답은 아찔하게 높은 다리에서 설문을 작성한 남자들이다. 아찔한 다리 위에서는 50퍼센트의 남자들이 연락을 해왔다. 반면 평범하고 안전한 다리 위에서는 고작 10퍼센트.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걸까? 답은 무의식에 있다. 아찔한 다리 위에서 사람들은 신체적인 두려움을 느낀다. 그럴 때 우리 몸은 긴장하게 되고, 아드레날린이 쏟아지면서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그 상태에서 여성과 만나게 되면 우리 뇌는 심장박동을 감정적으로 해석해 버린다. “이렇게 심장이 두근거리는 걸 보면 내가 이 여성에게 호감을 느끼기 때문일 거야” 하고. 또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자꾸 부탁하여 들어주게 만든다. 부탁을 들어주는 사람은 도와주는 행동과 도와주는 것이 내키지 않는 마음 사이에서 인지부조화가 생긴다. 그러면 뇌는 그런 인지부조화를 해소하기 위해 이미 실행한 행동을 합리화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어 버린다. “내가 그 사람을 도와주는 건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이야” 하고.
이것이 바로 착오귀속 효과라는 것이다. 우리 뇌가 신체 반응을 감정적으로 잘못 해석해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무의식은 꽤나 어리숙하고 순진하다고 말한다. 착오귀속 효과가 말해 주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은 몸의 현재 상태나 몸의 행동을 항상 합리화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속된 말로 “몸이 가면 마음도 간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착오귀속 효과의 전형적인 사례다.
왜 몸이 가는 데로 마음이 따라가는 걸까? 착오귀속 효과는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초래되는 불쾌한 감정을 없애 버리고 편안해지려는 무의식의 본성 때문에 생긴다. 뇌 과학자 이케가야 유지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기가 취한 태도가 감정과 모순될 때, 기왕에 실행해 버린 행동은 부정하기에도 이미 늦어 버렸으므로 자기 마음을 바꿈으로써 합리화합니다. 행동과 감정이 어긋난 불안정한 상태를 안정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케가야 유지, 『단순한 뇌 복잡한 나』, 65쪽
그러니 연애를 위해서는 이 착오귀속 효과를 잘 활용해 볼 일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도깨비집처럼 무서운 곳이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드는 공포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같은 데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거나 그곳에서 사랑을 고백하면 성공할 확률이 높아질 터이니 말이다.
착오귀속 효과는 이처럼 내 감정조차도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내 감정은 내 신체반응이나 내가 한 행동을 잘못 해석하거나 부지런히 정당화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이 볼 때는 타인이 지금 착오귀속 효과에 속아 넘어갔다는 게 보일 수도 있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걸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나에 대해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오히려 타인이라는 사실, 이것 또한 씁쓸한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이다.
착오귀속 효과는 우리의 무의식이 갖고 있는 일종의 심리적 편향(bias) 기제 가운데 하나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편향이란, 모든 주어진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 평가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사고하는 생각의 오류를 가리킨다. 대개 무의식이 신속하게 내리는 직관적 사고가 가진 함정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최근에는 이런 직관적 사고의 함정인 편향을 다룬 책들도 제법 나와 있는데, 그런 책들에서 다루고 있는 인간의 심리적 편향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뇌를 가지고 제대로 된 의사결정을 내리는 일이 가능한지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마저 생기곤 한다.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각종 심리적 편향이나 인지 오류들을 살펴보기 위해선 대니얼 카너먼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심리학자였던 대니얼 카너먼은 1970년대 초, 동료인 트베르스키와 함께 불확실한 상황과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판단과 의사결정에 관한 지배적인 경제 이론인 기대효용이론의 전제, 즉 인간의 ‘합리적 판단’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인간이 가진 직관적 판단의 인지적 오류가 합리적 의사결정을 방해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것이 바로 ‘발견법과 편향이론’(Heuristics and Bias)이다.
발견법, 즉 휴리스틱(Heuristic)은 ‘찾아내다’ ‘발견하다’라는 뜻의 그리스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불확실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부딪히는 문제를 가능한 한 빨리 풀기 위해 쓰는 주먹구구식 셈법이나 직관적 판단, 경험과 상식에 바탕을 둔 단순하고 즉흥적인 추론을 뜻한다. 발견법이 의미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 인간은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판단을 내릴 때는 확률이나 효용극대화 이론을 동원하여 복잡한 계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 법칙에 비추어 어림짐작과 같은 지름길을 선택한다는 것. 그리고 이런 지름길은 대개 인지적 ‘오류’를 범한다. 그러한 인지적인 판단 오류를 낳는 심리적 메커니즘이 바로 편향(Bias)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인간은 그런 심리적 편향을 벗어나지 못한다. 즉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아니라 비합리적이고 편향된 사고에 의존해 판단하고 선택한다. 대니얼 카너먼과 트레브르스키를 비롯한 최근의 행동경제학 이론들은 여러 경험적인 실험들로 인간의 비합리적인 판단 메커니즘(휴리스틱)을 밝혀냈다.
쉬운 예 몇 가지만 살펴보자. 첫 번째는 인간의 손실 회피(Loss Aversion) 성향이다. 아래 두 가지의 질문에 대해 속으로 먼저 선택을 해보자.
A. 당신은 150만 원을 딸 확률이 50%, 100만 원을 잃을 확률이 50%인 내기를 하겠는가?
B. 당신은 100만 원을 확실히 잃겠는가, 아니면 50만 원을 딸 확률이 50%, 200만 원을 잃을 확률이 50%인 내기를 하겠는가?
실험 결과 A의 질문에는 내기를 하겠다는 응답자가 거의 없었다. 내기의 기대이익이 25만 원이지만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려 하지 않는다. 이익이 적어도 손실의 두 배는 돼야 내기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B와 같은 질문에는 대부분 내기를 받아들였다. 내기의 기대이익은 75만 원이다. 사람들은 100만 원을 확실히 잃는 것보다는 위험을 안더라도 손실을 피할 수 있는 내기를 택했다. 이익을 위해서는 굳이 위험을 안으려 하지 않던 이들도 손실을 피할 수 있다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려 한다.이런 여러 실험의 결과가 말해 주는 것은 인간의 ‘손실회피 성향’이다. 실험에 따르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손실을 볼 때 느끼는 고통을 이득을 얻을 때 느끼는 기쁨보다 두 배는 더 크게 느낀다고 한다.
또 다른 대표적인 휴리스틱으로는 대표성 휴리스틱(Representativeness Heuristic)이 있다. 이는 두드러지는 어떤 특징이나 속성만을 보고 그것이 속한 대상의 특성이나 본질을 그대로 대표한다고 판단해 버리는 것을 말한다. 부분만 보고 전체를 판단해 버리는 오류다. 일상 생활에서도 이런 대표성 휴리스틱은 쉽게 발견된다. 학과 명칭만 듣고도 그 학과에 다니는 모든 학생들에 대한 대표적인 고정관념을 부여해 버리는 습관 같은 것이다. 철학과는 두꺼운 뿔테안경을 쓴 고리타분한 학생들이고 법학과는 고시에 목매는 공부벌레라는 식으로. 또는 여자친구를 소개해 준다면서 ‘연예인’ 같다고 하면 곧장 ‘예쁜 여자’를 상상해 버리는 식으로.
이밖에 대표적인 비합리적 인지 오류로 가용성 휴리스틱이란 것도 있다. 가용성 휴리스틱(Availability Heuristic)은 맨 처음 머리에 떠오르는 인상과 정보를 사용해서 판단해 버리는 인지 오류다.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것이 ‘최근 자료 효과’다. 예를 들면 복권 관계자는 지난회 1등 당첨자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돈만 날린 대다수 사람들 얘기는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 또 사람들에게 남녀가 반씩 섞인 인명 목록을 제시하여 어느 쪽이 더 많은가를 묻는 실험도 있다. 남자들 이름에 잘 알려진 남성 유명인사의 이름들이 섞인 명단을 제시하면 남자들이 많다고 판단하고, 여성 유명인사의 이름들이 섞인 명단을 제시하면 여성이 더 많다고 판단한다. 첫인상 효과라는 것도 가용성 휴리스틱에 속한다. 사람들은 대개 처음 만났을 때 받은 첫인상으로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해 버리는 경향이 많다. 그 첫인상을 바꾸려면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도 앞부분이 인상적이고 강렬하면 그에 대한 평가를 좋게 내리는 경향이 여기에 속한다. 가용성 편향은 인상이 강렬할수록, 최근에 자주 접한 자료일수록, 쉽게 기억에 떠오를수록 극적인 효과가 있을수록 강렬하고 쉽게 먼저 인상에 떠오르고 사람들은 그런 인상을 토대로 비합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걸 보여 준다.
사소해 보이지만 실제 삶에서 중요한 일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해보자. 결혼해서 살고 있는 부부에게 남편과 아내 중 어느 쪽이 가정생활에 더 많이 기여하고 있는지 그것을 백분율로 나타내 보라고 묻는다. 물론 남편과 아내에게 각각 따로 물어보는 것이다. 남편과 아내가 각기 적어 온 퍼센티지를 합하면 몇 퍼센트나 나올까? 대충 짐작하겠지만 총합은 백퍼센트를 넘는다. 서로가 가정에 더 많이 기여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를 키우고 있는 맞벌이 부부에게 묻는다면, 더더욱 그러리라는 건 불문가지다. 남편과 아내는 사실 어느 쪽이나 공정하게 판단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심리적 편향도 가용성 편향(Availability Bias)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상대방이 한 노력이나 일보다 자신이 한 것에 대한 더 많은 기억과 정보를 갖고 있고, 그런 정보의 불완전한 가용성이 자신의 공헌도를 더 높이 평가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만일 어느 부부가 갈등 상황에 있거나 혹은 이혼소송 중이라면, 이런 가용성 편향은 더 크게 작동하여 분쟁을 심각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이런 편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본다
그러나 선택상황에서 의사 결정을 내릴 때, 우리의 선택을 더 좌우하는 무의식적 선택 편향 중 가장 심각한 것은 ‘확증 편향’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확증 편향은 자신의 신념이나 기대와 일치하는 정보는 쉽게 수용하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그것이 아무리 객관적이고 올바른 정보라도 무조건 무시해 버리거나 거부해 버리려는 심리적 편향이다. 어떤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을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신념이나 생각, 주장을 확인해 주거나 확증해 주는 것으로 보이는 증거나 정보에만 더 무게를 둔다. 뿐만 아니라 그런 증거들을 더 잘 알아차리고, 더 잘 찾고, 더 활발하게 찾는다.
이 무의식적 선택 편향인 확증 편향은 인간이 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해 준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이며 또 얼마나 편견이나 선입견을 고치기 어려운가도 설명해 준다. 이 확증 편향을 프레임 효과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색의 안경을 쓰고 세계를 보는데, 오직 그 안경으로 보이는 세상만 진실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자기는 절대 색안경을 쓰고 있지 않으며 맨눈으로 공정하게 사실만 보고 판단한다고 착각한다.
이 확증 편향은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숨어서 우리를 지배한다. 사사로운 일상생활에서부터 넓게는 삶의 가치관이나 종교, 정치적 판단과 선택에까지 깊게 영향을 미친다. 무엇보다 확증 편향이 과도해지면 공동체의 삶 자체가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한국에서 정치적 확증 편향의 문제는 심각하다. 한국의 정당들은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이 프레임 효과를 이용한다. 국가의 미래와 구체적인 정책을 둘러싼 생산적인 토론은 실종되고 어리석은 색깔론과 이념논쟁만 활활 타오른다. 언론들은 이런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오히려 앞장서서 부추긴다. 이에 덩달아 미디어와 정당들이 주도하는 프레임에 갇힌 국민들까지 가세하여 인터넷에서까지 혼탁한 싸움이 벌어진다. 상생의 정치는 사라지고 증오와 불신을 부추기는 권력 투쟁만 남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정치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더 현명하고 객관적인 판단과 선택을 할 수 있으려면 자기 속에 있는 이 무의식적인 선택 편향을 벗어나야 한다.
인식과 인상
19세기, 그림이라고 하면 자고로 실제와 똑같이 묘사하는 것이라 생각했던 당대의 인식에서 충격적으로 등장한 인상파는 당시 실제 같은 그림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냥 물감 범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일간지 미술담당 기자는 인상파들의 전시회를 두고 “벽지로도 쓸 수 없다”고 혹평할 정도였다. 우리가 선입견이라고 부르는 무의식적 심리편향인 확증 편향은 일상의 영역에서 세계관에까지 깊은 영향을 미치며 우리를 지배한다.
인상, 일출클로드 모네, 1872년
만일 이 선택 편향이 낙관주의 편향과 결합하면, 자기와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에 관해 맹목적으로 낙관적인 판단을 내리거나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어 큰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새로운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추진하는 경우 확증 편향은 큰 실패를 가져올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우리의 선택을 좌우하는 편향들은 꽤 많다. 감정적으로 ‘우리 대 그들’ 프레임에 갇혀 나와 관계된, 즉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집단은 무조건 좋게 보고 우리 밖에 있는 ‘그들’은 모두 타자로 보아 무조건 배제하고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편향도 마찬가지다. ‘우리’에 속하지 않는 조직이나 단체나 종교, 민족, 인종을 차별하는 심리의 뿌리가 바로 ‘우리 대 그들’ 편향이다. 종교갈등, 민족갈등, 인종차별 등이 모두 그런 비합리적인 무의식적 편향에서 나온다. 이런 편향들은 우리로 하여금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고, 우리를 그릇된 선택으로 이끈다.
운전수는 둘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합리적이기도 하고 비합리적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순은 인간이 오늘날과 같은 뇌를 가지도록 만든 진화 과정 자체의 산물이다. 위험천만한 야생의 환경 속에서 생존하고 번식하기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뇌는 오늘날과 같은 독특한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신경 과학자 리드 몬터규(Read Montague)는 『선택의 과학』이란 책에서 생명의 진화과정이란 “살아남는 놈이 살아남는 것이지만, 그렇게 살아남기란 절박하리만큼 힘들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초기 인류는 굶주림의 위협이 지속적인 동기 유발 요인이 될 정도로 상당히 절박하고 힘든 조건에서 생존 투쟁을벌였다. “생명이란 무자비하다. 따라서 생명의 작용은 효율적이기 위해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노획하고, 저장하고, 처리하라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1) 그리고 바로 그런 절박함의 압력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장착된 인간적인 뇌의 효율성이 나왔고,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비합리적인’ 발견법과 편향들조차도, 생존 가치라는 차원에서는 합리적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만일 생존의 차원에서 완전히 비합리적이었다면, 인간이라는 종이 오늘날과 같은 정도의 문명을 이룩하면서 만물의 영장임을 자처하며 생존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진화심리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현재 인류의 뇌는 수만 년 전 원시 시대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개발된 뇌이고 그런 환경에는 합리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거대하고 복잡한 문명 사회에서는 그런 원시적인 뇌가 가진 비합리성이 더 크게 두드러져 보이고, 실제로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을 뿐이다.
가용성 편향이나 확증 편향, 착오귀속 편향, 우리 대 그들 편향 같은 부정적인 편향들은 스스로 감시할 필요가 있지만, 일상의 사소한 문제까지 그 원인을 심사숙고 한다면 나는 일상생활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을 것이다. 사실 우리의 무의식, 즉 시스템2는 진화적으로 우리가 좀 더 잘 환경에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도록 최적화된 시스템이기도 하다.
시스템1을 관장하는 의식은, 판단은 느리되 더 정확하다. 시스템2가 즉각적이고 빠르게 반응하는 대신 부정확한 판단을 하기 쉽다면, 시스템1은 반응은 느리지만 정확하다. 길쭉한 무언가를 보고 행여 뱀일까 놀라 무조건 피하는 게 시스템2라면, 일단 피하고 나서 그 길쭉한 걸 자세히 주의 깊게 관찰하여 정확하게 판단하는 게 시스템1이다. 주의를 기울여 본 결과 그것이 뱀이 아니라 새끼줄일 때, 마침내 우리는 후유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은 우리 뇌의 두 시스템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기가 막히게 잘 협력하면서 우리를 조종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자동차라면, 두 시스템은 서로 협력하여 우리가 죽지 않고 환경에 잘 적응하며 살아가도록 운전대를 잡고 있는, 완벽하진 않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운전수들이다. 이젠 습관이 되어 굳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동적으로 처리해도 되는 과정들은 전부 시스템2의 무의식이 맡고, 주의 깊게 심사숙고 해야 할 문제나 낯선 상황에 대처해야 할 때는 시스템1이 작동하여 적응에 실패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이중적인 선택 전략을 사용한다.
거친 비유를 사용해서 시스템1은 사실상 계기판에 불과하고 진짜 운전수는 시스템2인 것처럼 말했지만, 이제 그 비유를 대폭 수정할 차례다. 우리를 조종하는 운전수는 둘이다. 그때그때 상황마다 두 운전수가 번갈아 가며 우리를 조종한다. 현명하고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는 시스템1 운전수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인간의 지성적인 능력은 실험과 관찰을 통해 시스템2가 갖고 있는 수십 가지에 이르는 인지-선택 편향들을 밝혀냈다. 그런 인지-선택 편향이 일어나는 ‘원인’이 바로 우리 뇌의 시스템2의 작용 때문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병의 증상이 있고 원인을 밝혀내면 병을 고칠 수 있듯이, 우리 자신이 나쁜 선택을 하게 되는 원인들을 명료하게 인식하고 오류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한, 그런 편향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편향에 빠지지 않고 공정하고 객관적인 판단과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지성의 능력을 활용하며, 독단을 경계해야 한다.
운전 면허증만 있으면 누구나 차를 몰 수 있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동차의 구조나 시스템에 대해 더 깊이 공부하여 자동차에 대해 더 잘 알면 알수록 여러 상황에 더 잘 대처할 수 있고, 자동차를 더 잘 관리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뇌의 시스템1을 더 잘 활용할수록 우리의 삶도 더 좋아질 것이다. 시스템1은 비록 느리고 신중하지만 더 정확하고 조금 더 공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할 능력을 갖고 있다. 두 시스템 모두 우리가 갖추고 있는 장치라면, 기왕이면 어느 시스템이든 간에 그 기능과 성능을 최대한 잘 발휘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맛볼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또 우리가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여러 가지 비합리적인 휴리스틱과 인지 편향을 깊이 의식하면서 그것을 선택상황에서 신중하고 주의 깊게 활용한다면 적어도 조금은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무에 대한 스케치, 그림 없는 초안
당신은 당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잘 ‘알고’ 있는가? 우리가 직면하는 각각의 선택상황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선택의 주관적 측면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는데 무언가를 선택할 수는 없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혹은 원해야 하는지를 알기 위해선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과연 스스로의 욕망과 소망, 재능이나 능력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이것은 각자의 정체성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작가 소프클레스가 쓴 희극에 나오는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한 인간이 주관적으로 자신에 대해 갖는 이미지나 정체성과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정체성 사이에 얼마나 큰 괴리가 있는지, 그것이 시간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객관화되는지를 오이디푸스 이야기만큼 잘 드러내주는 이야기는 없다.
오이디푸스 왕, 인간의 지혜와 운명의 심연 사이
오이디푸스의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이 결국 그토록 아이러니하고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만다면, 도대체 산다는 건 무엇인가? 우리가 내리는 선택이란 무엇인가? 시간과 운명 앞에서 이토록 무기력한 것이 인간 삶의 근본적인 조건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며 몸부림쳐도 패배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다만 그저 열심히 시간과 운명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투쟁했다는 그 사실만이 남을 뿐.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프랑수아 자비에 파브르, 1806-08년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 우리가 결코 알지 못하는 숨은 저격수 같은 무수한 불행과 고통, 재앙들이 도사리고 있어 우리를 덮칠 순간을 대기하고 있다면, 그리고 무서운 저격수들이 다름 아닌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결정에 마치 동전의 뒷면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고 어떤 지혜로도 그것을 간파할 수 없다면, 도대체 우리의 삶과 우리가 내리는 선택과 결정은 다 무엇인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시간과 운명 앞에서 이토록 무기력한 것이 인간 삶의 근본적인 조건이라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며 몸부림쳐도 패배의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다만 그저 열심히 시간과 운명에 격렬하게 저항하며 투쟁했다는 그 사실만이 남을 뿐.
선택 문제에 직면할 때 우리가 당황하는 이유는 우리가 매 순간 맞닥뜨리는 선택상황이 늘 생애 최초의 상황이라는 점이다. 우리 모두는 이번 인생을 처음 살아 보는 것처럼 살아간다. 매 순간 닥치는 선택의 상황 역시 생애 처음으로 맞닥뜨린 상황이다. 더욱이 우리가 직면한 선택의 상황은 대부분 모호하고 복잡미묘한 ‘근본적인 불확실성’을 갖고 있다. 때문에 그 상황이 품고 있는 잠재적인 위험과 기회를 그 순간엔 절대로 미리 알 수 없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앞 장에서 말한 것처럼 (3장. 합리와 비합리 사이 참조) 그러한 모호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선택에 직면해 있는 나 자신이 정작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 자신조차 잘 모르는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또 설사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실행 가능한 선택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도 어렵다. 이러한 복잡함과 어려움이 바로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선택상황의 기본 논리다. 나아가 때로 아예 선택이 너무 어려워 차라리 선택을 포기해 버리게 되는 상황도 있다. 흔히 하는 말처럼 시간이 알아서 선택해 주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
한 남자를 떠올린다. 이름은 토마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이다. 토마스가 직면한 상황에서 우리는 상황 속에 처한 한 인간 실존이 직면한 선택상황의 복잡함과 합리적 선택의 어려움을 본다. 토마스는 지금 자기 집 창가에 서서 안마당 너머 건너편에 있는 건물들을 바라보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혹감에 빠져 있다. 그는 지금 테레사라는 이름을 가진 한 여성을 떠올리고 있다. 약 3주전 그는 한 시골도시의 카페에서 여종업원으로 일하던 테레사에게 명함을 한 장 건네 준 적이 있다.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던 토마스에게 그건 일종의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매력적인 시골 아가씨에게 혹시 프라하에 들를 일이 있으면 연락하라고 건넨 명함 한 장. 고작 한 시간 정도 얼굴을 본 게 전부였다. 그런데 열흘 후 그녀가 그를 찾아왔고 바로 그날 그들은 사랑을 나눴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날 밤 그녀가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독감 탓에 그녀는 일주일을 그의 집에서 머물렀다.
의사인 토마스는 몇 년 전 첫 부인과 이혼한 이후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기면서 나름의 원칙을 정했다. 어떤 여자와도 절대로 같이 밤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 그는 항상 핑계를 대고 자기 집에서 쫓아내거나 여자의 집에서 나오곤 했다. 그러나 테레사는 심하게 앓으면서 토마스의 침대를 점령한 채 끙끙 앓고 있다. 자유분방하지만 동정심은 많은 남자였던 토마스는 자기 침대에서 앓으며 잠들어 있는 테레사를 보면서 갑자기 형언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녀가 마치 강보에 실려 강물에 떠내려 온 가엾은 아기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 갑자기 그는 그녀가 죽은 뒤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으리라는 기이한 확신이 들었다. 그녀 곁에 누워 그녀와 함께 죽고 싶었다.
토마스는 창가에 우두커니 선 채로 바로 그런 기이한 감정이 엄습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다. 그러나 테레사는 일주일 후 다시 시골로 내려갔고, 지금은 혼자다. 그는 고민에 빠져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테레사를 데리고 올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일회성 연애로 치부하고 넘어갈 것인가? 그는 그때 자신의 감정을 되돌아본다. 그때 느꼈던 것이 사랑의 감정이 아니고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것이 정말 사랑일까?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었던 느낌은 명백히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그때 그녀를 자기 삶에서 겨우 막 두 번째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히스테리가 아니었던가? 자기 마음의 밑바닥에서는 자기가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도 자기를 속여 이것이 사랑임을 믿도록 하기 시작한 인간의 히스테리 말이다. 이때 그의 잠재의식은 너무도 비겁하여 자기 희극을 위해 근본적으로 자기의 삶에 뛰어들 기회가 전혀 주어져 있지 않은 지방 출신의 이 가련한 식당 종업원을 하필이면 선정했던 것이다!
토마스는 창가에 서서 심사숙고를 계속하지만 끝내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한다. 그는 그것이 히스테리인지 아니면 사랑인가를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만 깨달을 뿐. 또한 테레사와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인지도 그는 결코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미래 상황에 대해서 그는 아무런 예측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황은 너무나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더 나쁘게 토마스는 자기감정의 진실조차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기가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모르겠다는 것, 토마스는 이중의 딜레마에 빠져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감정은 얼마나 자주 우리를 속이는가? 결정 불능 상태에 빠진 토마스는 결국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테레사와 사는 것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혼자 있는 것이 나은 것인지, 어떤 결단이 올바른 것인가를 검토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비교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직접적으로 체험한다. 최초로, 준비없이 체험한다. 미리 앞서 연습도 해보지 않고 무대에 등장하는 배우와 같다. 하지만 삶을 위한 최초의 연습이 이미 삶 자체라면 삶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런 근거에서 삶은 언제나 스케치와 같다. 스케치 또한 맞는 말은 아니다. 스케치는 언제나 어떤 것에 대한 초안, 어떤 그림의 준비인 데 반해 우리 삶의 스케치는 무( 無)에 대한 스케치로서 그림 없는 초안이기 때문이다.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 라고 토마스는 자신에게 말한다. 여하튼 우리가 단 한 번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가 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야기는 어떻게 되었는가? 창가에 서 있던 남자 토마스는 결국 선택을 포기한다. 토마스는 선택을 포기했지만 소설의 다른 주인공 테레사는 결코 선택을 포기할 생각이 없다. 토마스는 그날로부터도 거의 보름 이상을 주저했고, 안부 엽서 한 장 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느닷없이 테레사가 다시 토마스 앞에 나타났다. 가슴에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리나』를 안고, 그리고 하필이면 토마스 면전에서 터져나와 그녀의 영혼을 질겁하게 만든 뱃속의 꾸루룩 하는 소리와 함께.
사실 엄밀하게 말해 토마스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선택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토마스에게도 남은 선택의 여지는 있었다. 테레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밀란 쿤데라가 ‘위험한 메타포’라고 불렀던 하나의 메타포 때문이었다. 즉 토마스는 테레사를 누군가가 까맣게 콜타르 칠을 한 바구니 속에 넣어 강물에 띄워 버린 아기라는, 언젠가 불쑥 자기도 모르게 떠올렸던(하필이면 왜 그런 메타포가 떠올랐는지는 토마스 자신은 결코 알 수 없다. 그건 그의 무의식 속에서 일어난 사건인 탓이다)하나의 시적 은유, 메타포로 이해해 버린 것이다. 그는 아기가 담긴 바구니를 매정하게 강물에 휩쓸려 가버리게 할 수는 없었다. 토마스의 사랑은 동정이라는 감정을 위험한 메타포에 실어 버림으로써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의 드라마로 끌려들어가고 마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토마스의 관점에서는 도저히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자기 대신 시간이 알아서 선택해준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그 순간의 내 삶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시간’이 된다.
테레사와 함께 살기로 결정한 그 순간에도 토마스와 테레사 두 사람 모두 그들의 운명이 어떤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엮어 가게 될지 추호도 예측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선택과 선택상황, 그리고 어떤 선택이 빚어내는 결과 사이에는 다른 많은 요소들이 개입하게 될 것이며, 특히 시간과 우연이라는 판관이 그 선택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는데 이 무자비한 시간의 권력 앞에서 개인인 우리 인간의 판단력은 극도로 무력하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가 인간의 삶에 관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한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한 번은 없는 것과 같다, 우리가 단 한 번만 살 수 있다면 그것은 도대체가 살지 않는 것과 같다는 말은 우리의 삶의 매 순간이 눈 깜빡 할 사이에 영원히 지나가 버리는 것이기에, 거기에 의미라고는 깃털만큼의 무게도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깃털만큼의 무게도 없는 가볍디 가벼운 것이라 하더라도 삶을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다. 토마스가 선택 불가능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조차 시간은 흐르고 새로운 상황이 그를 다른 삶으로 몰아가듯, 우리의 삶도 삶 자체의 의미와 무의미와는 무관하게 시간의 강물 속에서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흘러간다. 때로는 선택하고. 때로는 선택 당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