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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로스(χρόνος)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수직적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5)
여기서 ‘때’로 번역된 헬라어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시간, 특별한 사건의 시점, 올바른 치수, 정확한 비율, 결정적인 순간 등을 나타내는 단어로 ‘지급기일 한도, 시간의 범위, 확정된 그리고 명확한 시간, 시기적절한 시간, 제한된 시간, 기회’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고정되거나 특별한 경우를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확정되고, 명확하며, 시기적절하고 특별한’ 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확정되지 않고 불명확하며 적절하지도 않은 이 세상과 연계하여 생각할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때’는 영원하며 변함이 없고 항상 적절하신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계획, 뜻 그리고 말씀과 연계된 때나 기회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보통 수직적인 시간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평적이고 직선적인 시간으로 이해되는 ‘시간의 간격, 짧거나 긴 시간, (광범위한 의미에서) 개인적인 기회, (함축적으로) 연기, 때, 계절’의 뜻을 가지고 시간의 경과나 과정을 나타내는 ‘크로노스’(χρόνος)와 개념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일찍이 헬라 사람들은 시간을 크로노스(χρόνος)와 카이로스(καιρός)로 나누어서 구분을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시간이 그렇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구분이 되어 등장이 됩니다.
먼저 크로노스(χρόνος)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시간의 뜻을 가진 에트(תע)인데 이걸 파자하면 보이는 것으로 완성이라는 의미로 눈으로 확인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끊임없이 지나가는 것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이 계속 반복되는 계절, 아침이 지나가면 저녁이 오는 때 그리고 오늘도 계속적으로 언제나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크로노스(χρόνος)는 가만히 있어도 그냥 흘러가는 자연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 속 시간을 말합니다. 즉 달력의 시간, 객관적인 시간, 그냥 흘러가는 시간, 연대기적 시간, 수평적 시간. 그것을 크로노스(χρόνος)라 그럽니다.
그 시간은 천문학적으로 해가 뜨고 지면서 결정되는 시간이고,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하면서 결정되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낮과 밤을 알려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알려주고 우리의 육체를 늙게 하고 죽게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가 늙는 거지 시간이 그렇게 만드는 건 아닌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카이로스(καιρός)로 번역된 히브리어가 시간을 정하다, 고정하다, 지정하다의 뜻을 가진 자만(זמן)이며 이를 파자하면 전쟁의 무기인 진리의 말씀을 안으로 간직하다 라는 의미로써 결정된 시간, 지정된 시간 그래서 무언가 의미하고 있는 시간이며 그것은 말씀을 가지고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카이로스(καιρός)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 들어있는 사람에게 포착되는 의식적이고 주관적인 시간을 말합니다. 그분에 의해서 해석되는 시간? 하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로는 구속사(救贖史) 곧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歷史)가 이루어집니다.
끝없이 흘러내려가는 물리적 시간인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 속에서 카이로스(καιρός)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役事) 하나하나의 합(合)이 구속사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의 경우 그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행 l:7)
그러하기에 이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 속에서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에 의해서만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의 일체는 곧 구속사였습니다.
바꾸어 말해서 그 카이로스(καιρός)는 영원한 시간, 정말 그 실존적 시간, 진짜 시간, 현재만 있는 수직적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보편적 인간이 육신으로 감지하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그 시간이라는 건 비록 흘러가는 거지만 그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을 때 그 의미 있는 시간을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마가복음 1장 15절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의 이 때는 바로 ‘카이로스’ (καιρός)의 의미를 잘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여기서의 때란 전 인류를 향한 복음의 선포의 시기 즉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결정적으로 전개할 중요한 ‘때’(καιρός)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눈에 보이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 속에서 동시에 진리의 말씀을 품고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 속에 담겨진 생명의 말씀을 보는 카이로스(καιρός)의 때를 살아가는 자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말씀에 의해 하나님과의 그 접촉점이 생성되는 그 시점의 그 실존, 그들에게서 인식될 수 있는 그 의미 있는 시간을 말합니다. 아! 이게 그건 거야? 라고 깨달을 때 그 시간, 그걸 가리켜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카이로스(καιρός)라는 이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그냥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묵시라는 하나님의 영원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 땅에 현상으로, 사실로, 사건으로 나타나는 것 뒤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묵시인데,
그 완성되어 있는 묵시, 거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인 메시지를 우리가 읽어내려 갈 때에 ---거기에서부터 이게 뭔 줄 알아? 라고 우리에게 설명해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막 쏟아져 내려오는데 그걸 우리가 이 크로스의 시간이라는 이 역사 속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경험하고 체험해가면서 감지하는 그걸 우리는 카이로스(καιρός) 시간이라고 그렇게 감지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역사에 의해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니라 이미 묵시에서 완성 되어 있는 그것이 우리에게 부딪치는 걸 시간이라고 그러고 그걸 카이로스(καιρός)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이 시간, 모든 인간 보편이 살고 있는, 인간 보편이 감지하는 이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 속에서 그 진정한 의미, 아! 이게 무슨 의미인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떤 내용인가를 감지하는 그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이 역사 속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이 시간만 살아가게 된다면 그들이 바로 세상 풍조에 묶인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래의 땅에 묶인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만 아래 사람일 뿐입니다. 땅에 속한 자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이 역사 속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이라는 아래의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속에서 그 하늘의 것을 감지해내고 아! 그것이군요! 하고 깨달아 아는 그 사람들이 땅의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을 살면서도 그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삶을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시간이 둘로 이렇게 나누어져서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의 역사 속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을 살면서 그 시간에 종속되고 지배당하면서 사는 게 아니라 그 시간의 의미를 올바로 알고 깨달아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그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만나게 되는 그 사건들을 재해석해서 살게 되면 거기에 그냥 맞아서 절망하고 실망하고 잠시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재해석해서 새로운 세계관,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고 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 즉 하나님의 시간의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때가 차매, 때가 이르매 할 때 ‘그 때’는 전부 카이로스(καιρός), 하나님의 시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그걸 의미할 때 카이로스(καιρός), 때가 차매, 때가 이르매 이렇게 성경에 쓰여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전부 카이로스(καιρός) 시간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어떤 내용의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역사 속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지만 그것이 진짜 사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능력이며 영광이다, 라는 내용을 갖고 있으니까 그걸 ‘때’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걸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고, 그걸 카이로스(καιρός)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제자들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시간 선 속에서의 부활은 이 세대의 마지막 오는 세대의 시작에야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그들 유대인들의 시간선은 이 세대와 이 세대가 끝나고 나면 오는 세대가 온다고 그들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대와 이 세대가 끝나고 나면 오는 세대로 구별이 되는데 이 세상이 끝나고 또 다른 세대, 즉 그들은 세상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세대(에이지)라고 그럽니다.
다른 세상이 올 때 비로소 부활이 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도 부활을 믿었습니다. 단지 사두개인들만 안 믿었을 뿐이지 그 나머지는 전부 부활을 믿었습니다. 근데 그 부활이 언제 일어날 거라고 믿었느냐하면, 이 세상, 이 세대가 다 끝나고 오는 세대가 열릴 때 부활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도 “그래요! 저도 부활을 믿어요! "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입니다.
요 11: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이게 에스카토스, 종말의 날에 이니까 이 세대의 마지막 날에 부활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셨는데도 이 세상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잠깐 어두워졌다가 금방 환해졌습니다. 그리고 일상은 여전히 그대로 돌아가게 됩니다. 해는 다시 뜨고, 달은 다시 뜹니다. 바꿔 말하면 이 세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종말은 커녕 예수님을 죽인 이 세대가 버젓이 활기차게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유대교의 시간 선은 그러했지만 기독교의 시간 선은 유대교의 시간선과 완전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시간 선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점으로 해서 나중에 오는 세대가, 이 세대 중간으로 뚫고 들어와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점부터 시간선이 겹쳐지는 것입니다. 오버랩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신자들은 이 세대 속에서 오는 세대를 사는 이상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굉장히 비현실적인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기독교신자들은 이 세상 역사 속에서 비현실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맞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대 속에서 오는 세대를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시간선 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세상이 건재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 유대인들은 아직 오는 세대가 안 왔다고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을 믿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의 부활의 개념은 오는 세대 속에서 일어 난다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옥캄의 면도날이라는 논리의 사유에서 말하고 있듯이 논리적이지 못한 것은 과감하게 다 잘라버려야 한다고 주창을 했던 옥캄의 논리는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니만큼 그 사유의 면도날을 잘 사용을 해서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생각되는 것이 있거든 가차 없이 베어 버려야 한다고 웅변 했던 것처럼,
오늘날 기독교인들 또한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하늘의 세계(피안의 세계)를 인간의 이성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이해하고 알 수 있다고 하니까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하냐고 말하는 어떤 기독교인과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 성령의 내주함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반응하고 있는 우리 신자들은 오는 세대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로 이 땅에 뚫고 들어온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침노해 들어온 거라고 말씀 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 또한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게 아니라 거기 수동태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게 거기서 쓰여진 게 능동으로 번역해야 되는 헬라어 데포넌트 동사입니다.
그러니까 천국이 뚫고 들어온 거지, 우리가 천국을 침노하는 거 아니라는 뜻입니다. 천국이 우리를 침노해 들어왔습니다. 불가항력적으로? 언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과 함께?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나라는 되게 좋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 속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가 맨날 속고, 당하고, 가난하고, 가슴아파하고 이런 현실적인 삶의 연속이 되어지기 때문에 실감을 못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것처럼, 이 세상 역사 속에서 풍성하게 주어지는 것으로 희로애락을 말하는 그런 곳을 하나님 나라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에 온전히 순복하는 자들이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 있는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하기에 기독교신자인 저와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에 의해 코가 꿰어서 완성의 자리로 끌려가고 있는 중이므로 그걸 하나님 나라를 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자유가 일단 저와 여러분에게는 구속으로 체감이 돼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찬가지로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은 이 땅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때로는 빈곤함으로 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그러십니다. 내가 마귀를 묶어놓고 그의 세간을 늑탈하여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라고 그러십니다. 즉 마귀의 통치에서 벗어나는 그 상태?
그래서 하나님이 이끄시는 십자가의 삶의 원리 속으로 계속 가야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기 싫어 죽겠는데, 그냥 들어가게 되는 그 상태를 하나님 나라를 산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예수 믿으면 이 세상에서 뭔가 굉장히 평안하고 기쁘고 행복할 줄 알았는데,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그 옛 사람적인 본래적 육적가치를 추구하며 붙들며 살았던 이 세상에서의 나의 비전과 야망과 뜻이 계속 무참하게 폭격당하여 삭제 당하는 것이, 자기부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 잘 가는 것이니까요?
이런 맥락에서 그 비전과 야망과 뜻은 우리의 일상에서 그대로 실현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 우리의 일상이 계속 폭격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진짜 하나님 나라 안에 사는 자의 삶의 형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반하는 자꾸 반대방향으로 갈려고 하는 그 싸움, 그것 때문에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그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살아 있는 신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속적인 패턴으로, 이 세상의 힘의 논리적인 선악구조로, 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자꾸 뭔가를 판단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꾸 그거 아니라고 딴 데로 나를 끌고 가니까 그래서 지금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옛사람의 죽음, 그 상태에서 최고의 선, 선의 근원이신 그분이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그 지점으로 나를 끌고 갈 때 그 삶이 얼마나 행복 하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그 지점으로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는 내가 괴롭고 힘드는 것은, 단지 이 세상 속에서 내가 원하는 어떤 것들이 잘 안되어서 힘들어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부활하시자 마자 무덤이 열리고 죽어있던 성도들이 벌떡 일어나서 성안에 막 걸어 다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오는 세대가 이 세대에 지금 겹쳐 들어 왔다 라는 걸 상징적 의미를 부여 해 주시고자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물론 그건 실제 사건임과 동시에 하나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성경의 독자들인 성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오는 세대가 이 세대 안으로 뚫고 들어와서 부활의 첫 열매가 맺혀졌음과 동시에 그 첫 열매의 열납으로 말미암는 나머지 열매들의 필연적 열납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이삭이 드려지면 합격이 되기 때문입니다. ks마크?
따라서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시간을 감지하는 그들은 하나 같이 이 크로노스(χρόνος) 역사 속에 그들의 과거나 미래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과거를 두려워하거나 그 과거의 일 때문에 상처받고, 그걸 아직까지도 상처로 갖고 있는, 더 나아가 미래의 어떤 것들이 불안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이렇게 사는 이 세상 사람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들이 이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을 살면서 과거나 미래에 묶여 살고 있기 때문에 과거를 두려워하고 그 과거의 일 때문에 상처받고, 그걸 아직까지도 내가 상처로 갖고 있고, 미래의 어떤 것들이 늘 불안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고, 이렇게 사람들이 살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 인간이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 속에서 살고 경험하고 부딪치고 느낀 이 모든 사건들을 나타난 모양대로 그냥 나열을 하면 그건 전기가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와 반면에 그러한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나를 이끄신 하나님의 손길을 포착한 이들이 아! 그건 그런 의미였지! 내 인생에서 그것은 이런 의미를 가졌던 거였지! 라고 이렇게 그 하나님의 손길, 은혜의 손길을 중심으로 다시 그 시간이 가진 의미를 이렇게 풀어놓으면 그걸 간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간증이란 말은 사실 좋은 말은 아니지만 굳이 나누자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죽도록 고생을 했던 시간들이 아! 하나님이 나를 이 자리로 이렇게 끌고 오려고 했던 그 시간들이었구나! 라고 생각되면 그 고생되었던 순간들이, 시간들이 나에게 가치 있는 시간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 때 나는 이 역사 속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을 고통스럽게 살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시간의 역사, 카이로스(καιρός)의 그 가치로 살았다! 라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을 사는데 어떤 이들은 그 시간을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καιρός)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역사의 시간이 카이로스의 역사의 시간으로 이해되어지면 그 어떤 순간도 가치 없는 순간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시켜 선을 이루어 가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있어서는 모든 인생사가 우연이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필연적인 만남이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선을 이루기 위한 가치 있는 것들이었구나! 라고 깨달으면 그때 그를 항상 기뻐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거였어! 그렇게 깨닫는다면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감정적으로 항상 기쁠 수 있겠습니까? 때로는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서 울적해 하고, 화도 나는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라는 것은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비록 이 세상 역사 속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삶 속에서는 우울하지만, 반면에 카이로스(καιρός) 시간 속에서 말씀의 은혜로 깨달아 짐으로 말미암아 올바른 이해의 차원에서 자신의 내적인 것으로 나타나는 그 상태, 그건 기쁨이었지! 그게 환희였지! 그건 나에게 행복이네! 라고 깨달아 알게 되면 그게 항상 기뻐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슬픔과 고통과 눈물과 아픔으로 가득 차 있는 이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이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로 올바로 이해되어질 때 그 사람은 그 속에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과 행복을 동시에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모든 시간이 영원이요 그것은 곧 언제나 현재이며 지금이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는 자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자들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웃다가 울다가, 울다가 웃다가 이렇게 변태 같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삶을 산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 상황에서 저 사람은 찬송을 하지? 이렇게 바라보는 것...감옥에서 저 바울과 실라는 뭐가 좋다고 찬양을 하고 있지? 이런 거...
쇠사슬에 매인 베드로는 내일 죽을 지도 모르는데 감옥 안에서 주의 사자가 옆구리를 툭툭 찰때까지 잠만 쿨쿨 자고 있었지! 이런 것...이런 사람들이 이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삶을 지향하며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눈에 보이는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 속에서 동시에 진리의 말씀을 품고 크로노스의 시간 속에 담겨진 생명의 말씀을 보는 ‘카이로스’(καιρός)의 때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도 그냥 주어진 크로노스(χρόνος)의 시간들 속에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와 더불어 하나님의 카이로스(καιρός)의 은혜의 시간 선상으로 그 접촉점이 발휘되고 지향되는 삶의 자리로 그냥 잘 살아내시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