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몰랐다
그때는 몰랐다. 학창시절이 내게 젤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풀룻에 매료돼서 밴드부에 들어갔다. 경쟁율이 크다보니 클라니넷으로 바꿨다. 우리 때 제일 인원이 많았다. 왜냐면 전국체전이 춘천에서 개최되었는데 우리 강릉여고가 참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중후하고 멋진 김중철 쌤과 함께 하고픈 마음이 더 컸는지 모르겠다. 여름 송정에서의 합숙훈련 젊은 조교 쌤이 있었는데 기억은 없다. 단지 인기가 많았다는 거 외에는 한창 사춘기여서 그런가! 매일 두근거림에 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전국체전 하러 춘천에 갔을 때 아마도 수련원 같은데서 숙박을 한 거 같은데, 얼굴 탔다고 얼굴에 오이 바르고 그냥 자버렸던 기억도, 쌤 몰래 외출해서 강원고 남학생들이랑 미팅했던 기억도, 거리를 퍼레이드 하다가 지나가던 남학생들 쪽지 날라 다니던 기억들, 가물가물 하지만 지나간 옛추억들이 스쳐지나간다.
목련음악회를 하면서 누구보다 주인공인 듯 황홀했던 기억들, 미술전시회 때 내 작품에 꽃다발을 올려놓은 이가 누굴까? 혹 남자일까? 알고 싶어 했던 그 시절, 그때는 친구도 많았는데, 야간자율시간 전에 동부시장 2층에 가서 떡볶이랑 만두 즐겨먹던 친구들, 옥천동 조화분식점에서 즐겨먹던 우동사리, 지금에는 찾을 수도 없는 그때 그집 그맛 그립다.
고3 한창 공부해야 할 때, 체육관 쪽으로 가지 말라고 했는데, 자주 바바리맨이 출몰한다고, 꽈악 비명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여고시절만 해도 "나" 존재감이 있었는데 말이지.
30대, 40대는 "나"를 버리고 살아왔는데, 나의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니 친구가 생각나더라. 그래서 여고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했는데, 내성적이고 다가가는 걸 모르던 내가 어쩌다가 총무를 맡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책임을 다하다 보니 친구들이 저절로 내게 오더라. 왜 몰랐을까? 왜 진작에 먼저 다가가지 못했을까?
여고 졸업 20주년부터 43기 모임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엊그제 30주년을 지나면서 회장단도 많이 바뀌면서 지금까지 끊기지 않고 쭉 이어온 강여인이여, 참 고맙고, 한 명, 한 명 강릉여고인의 자부심과 긍지로 이루어진 43기 동기들, 정모에서는 추억속에 여고시절로 돌아간 듯 이야기 거리도 공유해 가면서 사는 얘기, 정치얘기, 문화얘기, 강릉여고인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색깔이 있기에 이 모임이 참 좋다. 재잘재잘 밤12시가 지나도 못 끝날 이야기, 그렇게 십여 년이 또 갔는데도 우리의 얘기는 끝이 없다.
나는 두 딸이 모두 강릉여고를 나와서 자랑스럽다. 큰딸이여고 1학년 때 "엄마는 동문체육대회 전야제 안가?" 그 소리에 첨으로 전야제 및 체육대회에 참가했는데, 우리 43기가 상을 받고 포상금도 받아서 안목 어디선가 밤새 즐기고 놀았던 기억도 지금은 추억거리다. 나는 추억거리가 참 많다. 2012년인가 송년회 25명 정도 참석했던가 밷드 불러서 가무도 즐기면서, 세프 울친구 김은주가 직접 요리해서 준비한 뷔페에, 아마도 그때가 최다 참석인 듯하다. 그렇지만 모임에는 다수 참석이 다는 아니다 " 나 한 명 정도야 안 나가면 어때?" 보다 "나 한명이라도 참석해야지!" 라며 강여인의 긍지를 보여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43기 모임이 참 좋다.
동기들과 함께 했던 독서클럽, 체육대회, 호프집에서, 전집에서, 레스토랑에서 커피숍에서, 문숙이네 일일 와플 와인투어, 라이브 콘서트, 3학년 9반 반창회, 50줄에 좋은 짝을 만나 싱글을 졸업한 가현이 늦깎이 결혼식장, 요트 타고 안목 바다를 누비던 그때 그날 훗날 추억의 한 페이지다. 특유 색깔을 나타내지 않으며 묵묵히 자리매김을 해주는 한 명 한 명, 43기 동기들이 있어서 참 좋다. 많은 친구들이 앞으로 함께 하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