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양식(2013.5.5.) 이승희 목사
하늘 교훈을 행하는 삶
요한복음 7:14~24 주일오후예배
“유대인들이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하니 .”(요 7:35)
1. 그람마타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 중반이 지날 즈음에 예수님은 조용히 상경하여 성전에서 가르쳤다. 이 때 유대인들의 반응은 예수님의 학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어떻게 글을 아느냐’라는 질문 속의 ‘글’은 헬라어 그람마타(복수, gravmmata)이다. 이 단어는 신약에 14번 나오는데, 8번은 복수로 사용되며 문자와 글자(letter) 혹 문서(a document) 때로는 학문을 뜻한다. 예수님이 문맹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예수님의 세상에서 가방끈이 짧은 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볼 때 맞다. 그러나 그들이 볼 수 없었던 로고스되신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셨던 분이요, 하나님과 함께 하였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만물이 그로 말마암은 창조의 에이전트라는 것을 몰랐다.
디모데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딤후 1:5) 그람마타를 배웠다.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배운 것은 ‘거룩한 기록들’(타 히에라 그람마타, (ta;) iJera; gravmmata)이었다. 한글성경은 단순히 ‘성경’이라고 번역을 하고 있다(딤후 3:15).
2. 예수님의 성숙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 2:49)
예수님이 12살 때 부모님과 함께 유월절이 되어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복귀할 때 부모와 이산가족이 되었다. 사흘 동안 예수님은 성전에 있는 율법교사인 랍비들과 함께 있었다. 그들과 함께 앉아 랍비들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질문을 하는 토론식 자리를 하였다. 듣는 자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대답에 놀람을 금치 못하였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배운다’라는 말은 훌륭한 랍비 밑에서 개인교수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에서 사도행전에 베드로와 요한을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는 말 또한 같은 의미이다.
예수님이 그동안 유대인들의 가정에서 배울 수 있는 기본적인 교육 외에 따로 랍비 내지 서기관이 되기 위한 조기교육을 받지 않은 이상 예수님의 지혜는 하늘의 지혜이다.
3. 예수님의 전인적 성숙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지혜가 자라고 성숙하면서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성장을 보게 된다. ‘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헬리키아’(hJlikiva)이다. 크게 세 가지 의미로 해석을 할 수 있다.
첫째, 키(stature)다. 삭개오의 키, 즉 헬리키아는 작았다(눅 19:3). 키가 작은 사람은 키 크는 운동을 하면 어느 정도 클 수 있다. 키가 작은 개그맨 허경환에게 키가 작다는 것이 열등감이요 콤플렉스이다. 왜소증(矮小症)에 고민하는 남자들은 키높이 구두를 신는다. 사진을 찍을 때 까치발을 한다. 여자들은 키가 작은 것을 보완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닭벼슬처럼 세운다. 콤로스의 연구에 의하면 17세기 후반의 프랑스 남자들의 키가 흉작과 기근으로 평균 161.7cm로 작았지만 12년 뒤 농업상황이 개선되자 3.8cm 커지는 흥미로운 결과가 발표되었다. 발육단계에 못 먹어서 작은 것이다. 그러나 키를 잴 때 땅에서 재지 말고 천정에서 재면 오히려 크다. 적으면 관리비가 적게 든다.
둘째, 나이(age)다. 염려는 자신의 나이, 즉 수명에 전혀 도움, 영양가를 주지 못한다.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염려하고 고뇌할지라도 자신의 수명을 연장할 수 없다. 오는 죽음을 손사래쳐도 거부할수도 필할 수 없다. 솔직히 히스기야는 나이를 15년 연장함으로 교만하여 성전 곳간을 외국 사사신들에게 자랑하므로 바벨론에 다 약탈당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그 때 태어난 므낫세가 결국 유다를 패망의 지름길을 가게 만들었다.
셋째, 성숙도(maturity)이다. 예수님은 그 지혜와 키가, 즉 성숙한 단계, 온전한 사람의 단계로 자라갔다. 여기의 헬리키아는 NASV, NIV에서 '키(stature)', NRSV에서 '연령(years)'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자라다(increase)'라는 동사로 번역된 헬라어 플로코프토(prokovptw; 진행하다, 진보하다)를 고려한다면, 본문의 헬리키아는 '성숙한 단계' 즉, '온전한 사람의 단계까지 자란다'는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었다(G. Stahlin, TDNT Ⅵ, 712. 이하).
요한복음 9:21, 23에 나오는 나면서 소경된 자의 부모가 ‘저가 장성하였으니’라고 할 때 사용된 ‘헬리키아’ 역시 키가 큰이라고 해석하기보다 성숙(maturity)하니 물어 보라는 뜻이다. 에베소서 4:13에서 ‘장성한 분량’에 해당하는 ‘헬리키아’ 역시 ‘성숙’(maturity)라고 번역할 수 있다. 성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3. 율법 vs 예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 7:49)
바리새인들이 생각할 때 예수님은 율법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는 근거를 안식일을 어기는 것을 보아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율법을 알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논리를 전개한다. 율법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 예수님은 율법을 배우지 않았기에 안식일을 어겼다. 고로 예수님은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삼단논법으로 적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무용론을 주장하기보다 안식일을 안식일되게 하였다. 예수님은 오히려 안식일의 주인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정식 랍비 교육을 받지 않은 가운데 논쟁을 훌륭하게 주도하는 것에 놀람을 금치 못하고 있다.
제 16 절 예수님의 가르침의 특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1. 보낸 자의 교훈
요사이 유달리 표절 논란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표절이라 함은 다른 사람의 글이나 논문을 참고할 때 출처를 밝히지 않거나, 고스란히 복사하여 옮겨 쓰면서 마치 자신의 글처럼 쓰고 각주를 달지 않을 때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표절과 거리가 먼 사역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대변자들이었다. 입만 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하게 항상 출처와 각주를 달았다. 유대 랍비들도 이와 동일한 습관을 갖고 있었다. A랍비는 자신의 스승인 B랍비의 가르침을 따라 전하는 것이라 언급하므로 자신의 가르침이 출처가 있고 그래서 권위를 드러내었다. 그리고 자신의 스승 B랍비는 그의 스승은 C랍비였다고 하므로 계속 올라간다. 이렇게 계속 등나무처럼 올라가면 궁극의 자리에 모세가 앉아 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 전한 것이 사실이요 확실한 뿌리가 되기 때문에 대스승인 모세의 글을 따라 자신도 교수와 가르치는 자로서 이러쿵 저러쿵 말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의 화법은 달랐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아니면 아람어 발음인 ‘아멘화법’을 즐겨 사용한다.
2. 보냄 받은 자의 교훈
예수님은 위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 뿐만 아니라 위에 계시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아들이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로서 가르치고 있는 지를 알려면 그의 행하는 것을 보고 판단할 수 있다.
제 23 절 할례 vs 안식일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요 7:23)
1. 할례법 vs 안식일법
요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의 사역에 불신을 드러내는 의도로 크고 작은 고소들을 직면하게 된다. 첫째, 예수님은 사람을 미혹하는 자다(12, 47). 여기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침묵한다. 둘째, 예수님은 율법교사로서 자격이 없다. 그래서 성전에서 가르치는 것은 불법이다. 예수님은 이러한 오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대답을 한다. 첫째 의혹에 대해 답변까지 포함하여 말씀하신다. 자신의 가르침의 내용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나님이 세우신 합법적인 교사라는 점이다. 훌륭한 랍비나 우수한 서기관의 가르침보다 더 권위가 있는 것이다. 셋째,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하므로 율법을 범한 자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모세의 율법보다 안식일법이 우선되므로 할례를 거행할 날이 안식일과 겹쳐지면 할례를 행한다는 것이다. 할례가 언약의 자녀됨의 표시로 신체의 일부를 제거한다면, 예수님이 안식일 치유는 일부분이 아닌 전신을 치유하는 대조를 이룬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죽이고자 한 까닭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의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파괴하기 때문이라는 두 가지를 들어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 가지 모두 근거 있음을 말씀한다. 특히 유대인들은 모세의 자랑스러운 제자들로 자부하는데 모세가 증거한 ‘그 선지자’인 메시야를 죽이고자 하고 있는 것이다.
2. 안식일에 전신 치유
예수님이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전신 치유’에 해당한다. 여기 사람의 전신이라는 말의 전신은 헬라어 ‘호로스’(o{lo")이다. 이 단어는 ‘온’(whole), ‘모든’(all), ‘전체’(totality)를 뜻한다. 요한만이 관사 없는 홀로스를 서술적으로 사용하였다. 목욕한 자는(카다로스 홀로스), '전체가 깨끗하다', 즉 '완전히' 깨끗하다(요 13:10). 요한복음 9:34에는 이와 대조되는 표현이 나온다: "'온전히'(홀로스) 죄 가운데 나서". 요한복음 7:23에서 예수님은 "전신"을 치유하신다: "사람의 전신"(홀론 안드로푸) 치유는 몸의 일부분만 제거하는 할례와 대조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