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8년 고구려는 영양왕이 훙서(薨逝)하고 영류왕이 즉위했다. 중국에서도 수나라(隋)가 망하고 당나라(唐)가 건국되었다. 두 나라 사이에 새로운 형국(形局)이 조성된 것이다. 영류왕은 지루하게 이어 온 전쟁을 끝내기를 원했고, 이제 막 건국하여 내부 수습이 급했던 당나라 역시 당장은 고구려와 전쟁을 이어가기 어려웠으므로 일단 두 나라는 화친(和親)하게 되었다. 국경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두 나라 사이에 포로(捕虜) 교환이 있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영류왕 5년(622)>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당고조가 수나라 말기에 많은 군사들이 우리나라에 붙잡힌 것을 염두에 두고서 임금에게 조서를 보내 말했다.”[1]
“‘다만 수나라 말년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재난이 얽혀, 서로 싸우던 곳에서는 각각 자기 나라 백성들이 유랑민 신세가 되었다. 마침내 부모와 형제들이 헤어지고 남편과 아내가 갈라져서 긴 세월이 지나도록 짝을 잃은 원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제 우리 두 나라가 화친하여 도의에 어긋난 바 없게 되었다. 이곳에 있는 고구려사람들은 이미 전부 조사하여 즉시 돌려 내기로 했으니,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왕이 돌려보내 주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백성을 편하게 하는 정책에 힘을 다하고, 인자하고 너그러운 도리를 넓혀 나가도록 서로 노력하자.’ 그리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중국인들을 전부 찾아 모아서 돌려보냈는데, 그 수가 만여 명에 달했으므로 당고조가 크게 기뻐했다.”[2]
고대 전쟁포로는 대부분 민간인이다. 전투에서 승리하여 점령지를 약탈(掠奪)하면서 민간인, 특히 여자를 잡아가서 노예(奴隸)로 삼았다. 여자는 남자보다 붙잡기 쉬울 뿐만 아니라 노예로 팔기도 쉬웠기 때문이다. 수나라군은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포로로 붙잡은 고구려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대략 수백 명 정도, 아무리 많아도 수천 명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 별동대는 30만이나 되는 많은 병력이 고구려 영토 깊숙이 들어왔다가 대부분이 돌아가지 못하고 포로가 되었으므로 양측 포로 숫자는 비교 불가능할 만큼 차이가 있었다.
당나라는 포로 전부를 돌려보내도 수백~수천에 불과하지만, 돌려받아야 할 포로는 수십만이다. 고구려는 몇 명을 송환하는 것이 타당할까? 균형을 맞추어서 당나라가 송환하는 만큼 송환할 수도 있고, 전부를 송환할 수도 있는데, 고구려는 당나라가 송환한 인원보다는 훨씬 많지만, 실제 보유한 인원보다는 훨씬 적은 만여 명만 돌려보냈다. 당고조는 자신이 송환한 인원보다 훨씬 많은 인원을 돌려받았으므로 기뻐했다는 것이다.
고구려는 언젠가 다시 당나라와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모르는데 당나라보다 인구가 적어서 불리하다. 고대의 국력(國力)은 인구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구려는 국토가 좁고 인구가 적어서 광활한 영토에 많은 인구를 가진 당나라를 대적(對敵)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런데 마침 수십만이나 되는 포로가 고구려 땅에 남았으니 이들을 만약 고구려 백성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국력 신장에 큰 도움이 될 터인데 왜 모두 돌려주겠는가?
당고조 체면을 살리기에 문제가 없을 정도 인원만 돌려주고 나머지는 고구려에서 살게 만들어서 고구려 백성이 되도록 조치했을 것이다. 하급 병사 여러 명을 송환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라도 계급이 높은 장군이나 장교를 송환하는 편이 당고조 체면을 살리는 데에는 더 효과적일 것이다. 현대라고 하더라도 송환 포로가 1000명에서 1100명으로 늘어난 것보다는 1000명 중에 장군 한 명이 포함되어있는 것이 훨씬 더 뉴스거리가 되지 않겠는가?
『자치통감』에 수성도출동군 사령관으로 탁군태수검교좌무위장군 최홍승(崔弘昇)이 적혀 있다. 필자가 최홍승에 관해서 중국 최씨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중국 최씨들이 말하기를 “최홍승은 돌아와 와석종신(臥席終身) 했다.”는데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다. 최홍승은 사령관으로 말을 탔을 것이므로 살아서 돌아갔을 확률이 높다. 또 만약 최홍승이 포로로 잡혀 있었다면 송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송환자 명단에 넣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살수대첩 이후 고구려 땅에는 자그마치 20만도 넘는 포로가 남겨졌다. 이들을 잘 활용한다면 앞으로 당나라와 전쟁에 대비할 좋은 자원이 될 수도 있지만, 자칫 적군(敵軍) 병사를 잘못 관리하면 고구려 백성들과 마찰을 일으켜 사회문제가 발생하거나, 포로들이 뭉쳐서 소요(騷擾)를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자치통감』<태종문무대성대광효황제중지중 정관 15년(641)>에는 “황제(당태종)께서 직방 낭중 진대덕을 고려에 사신으로 파견했다. [직방은 천하의 지도를 관장하는 부서다. 요새와 성곽 그리고 봉화대 숫자를 관리하며, 그 나라까지 거리가 멀고 가까움을 판별하고, 동서남북 오랑캐들의 귀화를 담당하며, 무릇 다섯 방위의 구역을 관장하고, 도읍의 설치 및 폐지와 함께 강역 다툼의 판결 등 업무를 담당한다] 8월 기해일에 진대덕이 임무를 마치고 고려에서 돌아왔다. 진대덕은 처음 고려에 들어가서 고려의 지리와 풍속을 조사하기 위해 도착하는 고을마다 그곳을 다스리는 수령에게 무늬가 있는 고급 비단을 뇌물로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산천 경치 구경을 좋아한다. 이곳 명승지를 구경하고 싶다.’ 라고 했으므로 수령들이 기뻐하며 고을 곳곳을 세세히 안내해 주었으므로, 가보지 못하는 곳이 없었다.”[3]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하기 위해 지리(地理) 전문가를 사신으로 위장 파견해 고구려 전역을 염탐했는데 바로 진대덕(陳大德)이다. 진대덕은 고구려에서는 구하기 어려운 무늬가 새겨진 고급 비단을 지방 수령들에게 뇌물로 주고 고구려 곳곳을 염탐하여 돌아가서 보고서를 작성해 당나라 조정에 제출했다.
* 각주 ------------------
[1] 遣使如唐朝貢唐高祖感隋末戰士多陷於此賜王詔書曰.
[2] 但隋氏季年連兵構難攻戰之所各失其氓遂使骨肉乖離室家分析多歷年歲怨曠不申今二國通和義無阻異在此所有高句麗人等 已令追括尋卽遣送彼處所有此國人者王可放還務盡撫育之方共弘仁恕之道於是悉搜括華人以送之數至萬餘高祖大喜.
[3] 上遣職方郎中陳大德使高麗[職方掌天下地圖及城隍鎭戍烽候之數辦其邦國之遠近及四夷之歸化凡五方之區域都邑之廢置疆場之爭訟擧而正之]八月己亥自高麗還大德初入其境欲知山川風俗所至城邑以綾綺遺其守者曰吾雅好山水此有勝處吾欲觀之守者喜導之游歷無所不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