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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카페 게시글
영양 스크랩 김녕김씨 벽산생가및검산성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28 13.06.23 19: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벽산생가 및 검산성(碧山生家 및 劍山城)
소 재 지 :  벽산생가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298번지, 검산성 : 경상북도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산23외 5필
건축시기 :  벽산생가 : 1700년/검산성 : 1894년
소 유 자 :  김기팔
문 화 재 :  벽산생가 : 경상북도 기념물 제64호, 검산성 : 경상북도 기념물 제65호

건축 이야기
-벽산생가(碧山生家)
벽산생가는 애국지사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이 나고 자란 곳이다. 이 고택은 임진왜란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선조를 호위한 김응상(金應祥, 1532~?)이 1580년경에 건축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85년도 제2회 지방문화재위원회지정 조사보고서에서 “1500년대의 구조와 양식은 찾아볼 수 없고, 대체로1700년대 이후의 건축으로 추정된다. 건물 자체로서는 문화재 가치가 높지는 않지만, 일제강점기 때 혁혁한 의병활동과 우국충절을 실천에 옮겼던 김도현의 생가라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피력하였다.”고 하였다.

- 검산성(劍山城)
검산성은 애국지사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이 개인 재산을 털어서 항일투쟁을 위해 구축한 산성이다.
1894년(고종31) 김도현은 생가 뒤편에 검산성을 쌓아서 다른 의진과는 달리, 더욱 조직적인 의병대열을 이루었다. 이렇듯 대규모의 석성을 쌓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의 경제력과 축성에 필요한 인력을 동원할 수 있었던 능력을 볼 수 있다.
1985년도 조사보고서에서 “검산성의 규모가 작고, 축벽의 상태도 조잡하고 많이 무너졌으나, 한말에 항일을 위해 개인 재산을 들여 구축했고, 또 항일의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인물의 축성인 만큼 비록 축성연대가 얼마 되지 않고, 또 조잡하다 할지라도 지정하여 보존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현재 경상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어 있다.

건축 구성
- 벽산생가(碧山生家)
벽산생가는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생가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3칸 규모의 초가 대문채를 세웠다. 평면은 중문 칸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외양간을 두었고 좌측에는 사랑채를 배치하였다. 좌측 칸의 작은 사랑방은 원래 마루였던 것을 방으로 고쳤고, 작은 사랑방 뒤의 마루방은 온돌방을 고친 것이다. 안채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건넛방과 안방을 두었는데, 안방의 전면에는 부엌을 이었다.

- 검산성(劍山城)

검산성이 있는 청기면은 대체로 500m 이상의 높은 산지로 구성되어 있다. 곧 영양군의 북동단에 위치하는 일월산을 최고봉으로 하여 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내린 곳에 있다. 그 가운데 검산은 해발 약 340m 정도의 그다지 높지 않은 산으로 입암면 소재지에서 북으로 개천을 따라 약 6km 가량 상류에 있다.
동으로는 동천이 남으로 흘러 신사리에서 반변천과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있다. 동천이 흘러가는 동쪽은 절벽을 이루고 있다. 남으로는 하천(霞川)과 구매천(九梅川)이 갈라지는 곳으로 경사가 완만한 대지를 이루고 있다.
검산성은 검산의 유리한 지형을 잘 이용하여 산 정상의 서남쪽에 성벽을 쌓아 올렸고, 급경사를 이루는 동북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으로 삼았다. 성의 전체 둘레는 약 500m 정도로 작은 규모이나 입암면에서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요충지에 있다.

 

문중 이야기
-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 1409~1456)의 충절과 의리
김도현은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 1409~1456)의 15세손이다. 김문기의 초명은 효기(孝起)이고, 자는 여공(汝恭)이며, 호는 백촌(白村)이다. 시호는 충의(忠毅)이고,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1426년(세종8)에 문과 급제한 뒤,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사간원 좌헌납(司諫院左獻納)·함길도 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공조판서(工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김문기는 함길도 도절제사로 재직 중에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세조를 제거하는 일이 충일뿐만 아니라, 평생 배운 유학의 의리를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삶과 죽음을 떠나 의거를 단행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1455년(세조1)에 그는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제수되었다. 그해 8월 사육신이 모두 서울에 모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의거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456년(세조2) 6월에 공모자 가운데 한 명인 김질(金?, 1422~1478)이 위험을 느낀 나머지 세조에게 밀고하여 사육신사건이 발생하였다. 세조가 직접 국문을 시작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세조의 심문에 응하였지만, 김문기만은 일체의 심문에 응하지 않고 죽었다.
- 가세 확장
김도현은 세조 때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충의공(忠毅公) 김문기의 15세손이다. 단종복위가 실패함에 따라서 온 집안이 화를 입게 되어 장자인 김현석(金玄錫)과 둘째 김인석(金仁錫)도 따라서 순절하였다. 김인석의 부인 정씨(鄭氏)는 화를 피해 어린 아들 김광필(金光弼)을 업고 영양의 간곡(艮谷)으로 들어왔다. 김광필은 김도현의 13세조로, 입향조이다. 그 후 자손들은 대대로 영양에 거주하다가 김도현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에 와서 경제력을 갖추게 되었다. 동네 촌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상청(上靑)일대의 평야가 과거에 벽산가의 소유였다고 한다. 동네 주민들이 벽산가를 ‘천석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경제력을 갖추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경제력은 김도현의 덕망과 지도력과 합치되어 훗날 김도현의 항일 의병 투쟁을 벌이는데 기반이 되었다.


관련유물
- 창의순절기념비(倡義殉節記念碑)
이 비는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을 중심으로 펼쳐진 한말 의병항쟁의 업적을 기리고 1988년 광복절에 세웠다.
- 애국지사양우김녕김공항일공적비(愛國志士陽愚金寧金公抗日功績碑)
이 비는 김동현(金東鉉)의 애국충절(愛國忠節)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 벽산김도현선생유허비(碧山金道鉉先生遺墟碑)
이 비는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의 애국충절(愛國忠節)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영양 > 영양청기권 > 청기면 상청1리
- 항일의병들의 피땀이 서려 있는 상청리
상청리는 본래 영양군 청초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소청·소사·장평동의 일부를 떼어다 합하여 청기면에 들게 하였다,
소청(小靑)은 옛날 소청현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신라 때 오늘의 청기면 일대가 대청 부곡이라 불렸고, 소청 일대를 소청부곡이라 하였는데, 일제가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윗마을을 상청이라고 하였다. 그 후 윗마을·아랫마을을 합하여 소청동으로 불렀다.
신당(新塘)은 상청의 윗마을에 있어서 소상동(小上洞)이라고 하였는데, 새 못이 생겨나고서 신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마을에서 1km 정도 떨어진 뒷산 꼭대기에 자연석에 음각된 ‘영봉대’라는 비석이 서 있는데, 옛날 이 곳에서 백일장을 열기도 하고 기우제도 지냈다고 한다. 또 이곳은 청기면 13개 마을이 보이는 높은 곳으로, 그 옛날에는 봉화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마을에서 널리 알려진 것은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의 생가와 그가 개인 재산을 털어서 항일투쟁을 위해 구축한 검산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당나무를 들 수 있다. 당나무는 상청리 앞에 있는 느티나무를 말하는데, 그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며, 매년 정월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이 나무에 제를 올린다.

 

벽산 김도현선생

성명 : 김도현(金道鉉) , 1852년 ~ 1914년
본관 : 김녕(金寧)
: 명옥(明玉)
: 벽산(碧山)
출생지 : 영양(英陽) 청초면(靑初面)
영특한 유년기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 1852~1914))이 8세 때에 개울 가운데에 돌을 둘러서 성 모양을 쌓고 ‘수중기일성(水中起一城: 물 가운데 성 하나를 쌓다)’이라고 하자 그의 조부가 칭찬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어렸을 적에 총명하여 조부의 총애를 받았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청년기의 의병활동
김도현의 생애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의병 활동시기이다. 을미의병(乙未義兵) 바로 전해인 1894년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때 생가 뒤편에 동학군의 침입을 막기 위한 석성(石城)을 쌓았다. 이것은 인근 주민들의 협조에도 힘입은 바 컸으며 그의 마을이 김녕김씨의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고, 벽산이 김녕김씨 익창파(益昌派)의 종손이었으므로 문중사업의 성격을 뛰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설도 있다.
이후 을미의병은 1894년 7월 이후 안동의 서상철(徐相轍)을 비롯하여 김원교(金元喬)등이 봉기를 준비하였다. 그 후 을미년에 왕후민비를 시해한 을미사변과 그해 발포한 단발령에 반발하여 전국각지의 유생이 중심이 되어 의진(義陣)을 형성하였다.

김도현이 의병을 일으키기를 결심하게 되는 것은 을미년 11월에 사촌 아우 김한현(金漢鉉)으로부터 일제가 단발을 강요한다는 급보를 받으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1895년 12월 친구인 권한모(權翰模)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론하였지만, 권한모가 급박한 형세를 들어 어려운 상황에 의병을 일으키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표명함에 따라 벽산은 동년 12월 9일에 읍으로 나아가 글을 띄우고 이튿날 고을 선비들과 한자리에 모여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론하였다. 이때 안동과 예안을 다녀 온 뒤 거사하기로 하였으며 그는 조영기(趙永基)와 함께 안동과 예안의 의병 대열을 살펴보았다.

이후 청량산에서 의병을 일으킨 김도현의 의병대는 조직을 정비한 후, 먼저 봉화군을 점령하고 군수의 지원을 받아 동헌에 진을 쳤다. 3월 16일에 1차 공격이 있었으나 이에는 패전하게 되었고, 이후 여러 고을을 순회하면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잠시 집에 들렀다. 그러나 일본의 방화로 인하여 괴암서당(槐巖書堂)과 주위의 민가가 소각 당하였고, 부친은 아우의 집으로 피신하는 등 가족고 마을의 암담한 상황을 목격하였다. 이후 후일을 기약하는 강한 의지를 남긴 채 의병을 해산하게 된다.

가족이야기

: 김하술(金夏述)
생부 : 김성하(金性河)
: 한양(漢陽) 조씨(趙氏)
집안 이력
김녕김씨(金寧金氏)의 시조는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 김시흥(金時興)이다. 김시흥은 고려 때 묘청의 난을 진압하면서 공적을 세웠으며 명종 때 김녕군으로 봉해졌다. 김녕은 김해의 옛 지명으로 김해김씨와 혼돈이 있어 김녕김씨를 후김(後金)으로 불렀다가 조선말 고종의 왕명에 의해 김녕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시대에 평장사 김향(金珦), 병부상서 김정병(金挺丙) 및 판도판서 김광저(金光儲) 등이 배출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판서 김익생(金益生)·김윤달(金潤達)·김문기(金文起), 좌찬성 김인찬(金仁贊), 한성판윤 김종남(金從南)·김응수(金應壽), 그리고 방어사 김언공(金彦恭) 등이 있다.
김도현은 김시흥의 23세손이고, 세조 때 단종복위(端宗復位)를 꾀하다가 순절한 충의공(忠毅公)의 일가가 화를 입게 되어 충의공의 장자인 김현석(金玄錫), 차자(次子) 김인석(金仁錫)도 따라서 순절하였다. 그리하여 인석의 부인 정씨(鄭氏)는 화를 피해 어린 아들 김광필(金光弼)을 업고 영양(英陽)의 간곡(艮谷)으로 들어오는데 이가 김도현의 13세조 되는 분으로 입향시조(入鄕始祖)가 되었다. 그 후 김광필의 자손은 누대(累代)로 영양에 거주하였다.

 

학문이야기

학파 : 퇴계 학파
교유인물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권세연(權世淵)
가학(家學)으로 성장한 김도현
유년시절에는 집안에서 조부인 괴암(槐巖) 김하술(金夏述)에게서 배웠다. 촌로들의 증언에 의하면 벽산 생가 처소에 조부가 세운 괴암서당(槐巖書堂)이 있었고, 여기에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대로 벽산이 8세 때에 개울 복판에 돌을 쌓고 ‘물 가운데 성 하나를 쌓다’라고 하자 그의 조부가 칭찬하였다는 일화로 어렸을 적에 총명하여 조부의 총애를 받았던 것을 수 있다. 이후 그는 권세연(權世淵),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 등 이 지역 유림들의 학풍에 영향을 받으며 학문을 닦아 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을미년(乙未年)에 의병을 일으키고자 계획할 때 안동과 예안에 다녀 온 뒤라야 일이 되겠다고 벽산 자신이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 지방에서 퇴계학통을 대표할 만한 유학자들로서 명망이 높았던 안동의 권세연, 예안의 이만도 등 거유(巨儒)들의 거취를 알아 본 연후에 결정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들은 김도현보다 연장자였고 학문이 뛰어났으므로, 김도현의 학통이 의병활동의 활약으로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고도 볼 수 있더라도 이들의 영향을 받고 학업을 쌓았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만도가 순절했을 때, 김도현 즉시 조문하였던 일과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서도 살펴 볼 수 있다. 즉 안동지방의 학풍인 퇴계학통을 정신적인 지주로 사상이 형성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벽산선생문집(碧山先生文集)』
근대의 의병장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의 시문집이다. 이 문집은 1964년 증손 기팔(奇八)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는 나라를 위한 감정과 충심이 어린 강개한 것이 많다. 소(疏) 중 「의상팔조소(擬上八條疏)」 는 1897년에 올린 것으로 나라가 없으면 집을 보존할 수 없고 임금이 없으면 자신도 존재할 수 없음을 밝히고 1895년 8월에 있었던 참화와 11월에 선언한 독립국가의 처사는 부당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명칭은 독립이라 하지만 그 실상은 망국의 전철을 밟은 것이므로 역적을 토멸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는 등 8개 조항의 시행을 청하였다. 「의청토적복수소(擬請討賊復讐疏)」에서는 일본의 본을 떠서 개화라는 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은 망국의 시초가 됨을 지적하고, 1905년 12월에 체결한 조약은 망국의 행위임을 규탄하면서 이완용 등 5명의 역신을 주륙하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청하였다. 서 중 「답병대장(答兵隊長)」에서는 국가의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국방의 책임을 진 사람으로 자기의 소임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옳은 일임을 강조하였다. 「여국내동포(與國內同胞)」에서는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 89세의 노모 때문에 목숨을 버려 나라에 충성하지 못함을 한탄하면서 국민 모두가 궐기하여 빼앗긴 국권을 찾고 자주 된 나라를 이룩하고자 호소하였다. 「창의전말(倡義顚末)」은 1895년 8월 11일 국모의 시해에 분기하여 이듬해 9월에 의병을 일으켜서 항쟁한 기록을 일기체로 적은 것으로 한말 의병항쟁사의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그밖에 고종의 밀조를 받고 그 사실을 삼남지방에 알리고 의병에 참가할 것을 권유한 「의격고삼남각군문(擬檄告三南各郡文)」과 「격고제도문(檄告諸道文)」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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