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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거대 담론 : 도(道)와 덕(德), 그리고 이 시대의 정의>
공자의 사상이 인(仁)과 예(禮)라면, 노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도(道)와 덕(德)입니다. 노자는 공자의 인위적인 규범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하며 자연의 순리를 강조한 사상가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 곳곳에서 이토록 인문학 열풍이 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식정보화 사회의 노도질풍과 같은 변화와 속도 속에서, 인간 고유의 깊은 ‘생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마음 한구석에 형언할 수 없는 허전함을 안고 살아갑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진정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불행히도 현대인의 생각은 대부분 ‘나’ 중심의 이기적인 것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라는 관계는 한없이 삭막해지고, 사회 전체는 피폐해져 가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 사회적 격변 속에서 언론에 비친 지도층의 모습을 보며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온 국민을 대상으로 너무나 뻔뻔하게 거짓말을 일삼는 행태를 목도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이란 곧 깊은 생각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이 ‘생각’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하게 되었을까요? 인간의 생각이 작동하여 자연에 변화를 주고, 그로 인해 나타난 인류 정신과 물질의 총체를 우리는 ‘문화(Culture)’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문화의 양식이 보편화되어 세계적 규모를 갖출 때 비로소 ‘문명(Civilization)’이라 일컫습니다. 일찍이 백범 김구 선생께서도 우리가 높은 수준의 ‘문화민족’이 되어야 한다고 간절히 주장하셨습니다. 최근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컬처(K-Culture)의 열풍은 참으로 반갑고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문화는 곧 한 민족의 정신이자 이념이며, 거대한 철학이기 때문입니다.
인류학자들의 보편적인 견해에 따르면, 동아시아 대륙에서 문명이 싹튼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인간이 ‘불’을 사용하면서부터입니다. 약 50만 년 전 고인류가 불을 사용한 구체적 흔적은 중국 베이징시 팡산구 저우커우뎡의 룽구산 동굴에서 발견된 <베이징 원인> 화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불에 탄 재와 다량의 동물 뼈, 그리고 가공된 석기들이 함께 발견되면서 인간이 불을 지배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불을 알기 전의 인간은 여타 맹수들과 다를 바 없는 나약한 동물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불을 사용하면서부터 인간은 다른 동물을 압도할 무기와 도구를 만들 수 있었고, ‘생각’을 키워갈 물질적 터전을 마련했습니다.
생각의 중추는 뇌입니다. 생고기를 소화하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됩니다. 하지만 불을 발견하여 음식을 익혀 먹으면서 소화에 드는 에너지가 획기적으로 줄어들었습니다. 날것을 먹을 때 소모되던 잉여 에너지가 몸 안에 비축되었고, 이 에너지가 인간의 뇌를 다른 동물보다 훨씬 크고 정교하게 발달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단단하고 질긴 생고기를 씹을 필요가 없어지자 턱뼈와 근육은 얇아졌고, 상대적으로 두개골 내부의 공간이 넓어져 뇌가 자랄 수 있는 자리가 생겼습니다. 구강 구조 또한 넓어지면서 혀가 자유롭게 움직이게 되었고, 이는 언어의 발달을 가속화했습니다. 결국, 뇌의 용량이 커지면서 인간의 사유 능력도 연동하여 발전했다는 것이 인류학계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뇌가 발달함에 따라 인류는 구석기에서 신석기 시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큰 돌을 깨뜨려 파편을 쓰던 구석기 시대를 지나, 약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에 접어들면서 돌을 정교하게 갈아서 도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바야흐로 마제석기(간석기)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선사시대의 정수인 아슐리안형 주먹도끼가 우리나라 연천 전곡리 등에서도 발견되어 세계 고고학계를 뒤흔들었던 역사도 있습니다.
대략 기원전 5000년에서 2500년 사이, 황하 중류를 중심으로 번성한 신석기 문화를 ‘양사오 문화(仰韶文化)’라고 합니다. 베이징 원인 발굴에 기여했던 스웨덴의 지질학자 요한 군나르 안데르손이 1921년 중국 허난성 몐츠현 양사오촌에서 이 유적을 발견했습니다. 이 시기의 인류는 모계사회를 이루고 살았습니다. 여성을 중심으로 가족을 구성했던 시절입니다. 남성들은 종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위험한 수렵과 어로에 종사했고, 여성들은 집안에서 아이를 돌보며 정착지의 텃밭을 가꾸었습니다. 이 시대는 난혼이나 일처다부제적 성격이 짙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공간지각 능력이 발달한 것이나, 여성이 자신을 아름답게 치장하려는 본능의 뿌리도 이 모계사회적 생존 전략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건강한 자손을 생산하기 위해 우수한 유전자를 선택하는 것은 생태계의 불변하는 종족 보존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기원전 3000년에서 2000년 사이에는 황하 하류를 중심으로 ‘룽산 문화(龍山文化)’가 일어납니다. 신석기 후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류가 철기를 발견하면서 농업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사회는 거대한 변혁을 맞이하게 됩니다. 우리 한민족의 철기 문화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천연자원 중 하나가 바로 소나무입니다. 소나무는 송진을 함유하고 있어 화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에, 철광석을 녹여 단단한 철을 추출하는 데 최고의 연료가 되어 주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불과 철의 발견을 인류 발달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도약으로 꼽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농업과 철기 문명의 발달로 생산물이 축적되자, 마침내 ‘소유’의 문제가 대두되며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탄생했습니다. 그 이전의 공동 생산, 공동 분배의 평등 사회가 종말을 고한 것입니다. 농경 사회가 본격화되면서 거친 채집 시기에 비해 남성의 거대한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졌고, 이에 따라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관념이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사유재산을 상속하는 문제 역시 남성 주도로 흘러갔습니다. 남성이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았다고 확신하는 아들에게 재산을 온전히 물려주기 위해서는 오직 한 여성을 독점해야만 했고, 이 강력한 필요에 의해 일부일처제라는 제도가 정착되었습니다.
이처럼 농업의 발달, 사유재산의 출현, 남성 중심 사회로의 이행은 필연적으로 계급 사회를 낳았고 도시를 출현시켰습니다. 중국 상(은)나라 때 남성적 왕권을 중심으로 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부상한 씨앗이 바로 이때 뿌려진 것입니다. 이것이 훗날 종법제도(宗法制度)의 태동이 됩니다. 종법제도의 시작은 인간 ‘생각의 변화’를 극적으로 대변합니다. 혈연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인간이 자신의 존재 근거와 행위의 정당성을 제도적으로 확인하려는 시도였기 때문입니다.
상나라 사람들이 남긴 갑골문자를 풀어보면, 그들이 조상신과 하늘의 신을 절대적으로 숭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최고의 신인 ‘상제(上帝)’의 뜻, 즉 천명(天命)을 받아 나라를 세웠으므로 결코 멸망하지 않고 영원하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상나라는 결국 주나라에 의해 무너지고 맙니다.
피정복민이었던 주나라는 상나라를 정벌한 후 커다란 명분적 딜레마에 빠집니다.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던 상나라를 우리가 왜 멸망시켰는가’에 대한 정당성을 증명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뇌의 과정에서 출현한 위대한 개념이 바로 ‘덕(德)’입니다.
하늘의 뜻인 천명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오직 ‘덕이 있는 자’에게만 머문다는 사상입니다. 덕을 잃으면 천명도 언제든 떠나갈 수 있다는 준엄한 각성이 지배자들을 휩쓸었습니다. 주나라는 바로 이 ‘덕치(德治)’를 앞세워 건국의 정당성을 확립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중대한 국가 대사는 신에게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제사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고 인간의 염원을 전달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신과 소통하는 주관자(제주)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극도로 정결히 해야 했습니다. 이 제사의 거룩한 절차와 규범을 일컬어 ‘예(禮)’라고 불렀습니다.
훗날 공자가 집대성한 ‘예(禮)’의 뿌리가 바로 여기서 출발한 것입니다. 공자의 어머니가 무속에 종사했던 배경을 상기해 볼 때, 공자가 어린 시절부터 제례의 엄숙함과 경건함을 몸소 보고 자라며 그 중요성을 철저히 내면화했을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오늘날 우리의 제사 전통 역시 이러한 깊은 역사적 유래 위에 서 있습니다.
덕을 겸비한 제주가 예를 다해 제사를 지낼 때 비로소 천명을 움직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덕을 갖춘다’는 것은 신과 온전히 소통할 수 있는 내적인 마음가짐이며, 인간 고유의 선한 본성을 회복한 정화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즉, 인간이 하늘의 뜻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내적인 주체적 힘을 ‘덕’이라 규정지은 것입니다. 주나라를 지탱한 두 축은 천명과 덕이었습니다. 천명이 ‘하늘(天)’의 영역이라면, 덕은 순전히 ‘인간’의 책임이었습니다. 이 합리적인 이데올로기 덕분에 인류는 더욱 이성적이고 주체적인 사유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덕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은 비로소 신과 책임을 나누어 가지며, 스스로의 존엄성을 키우고 자존감 있는 존재로 우뚝 서게 된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송나라의 대철학자 주희(朱熹)는 우주와 인간 사회가 어떤 근거로 움직이는지를 집중적으로 탐구했습니다. 그는 노장 사상이나 불교의 핵심 개념이었던 형이상학적 ‘원리’를 끌어와 유교의 도덕 원리와 결합함으로써 사상적 대전환을 이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리학(朱子學)입니다. 성리학은 우리 조선 500년 역사와 정신세계를 지배한 결정적인 사상이 되었습니다.
고려 말, 국운이 쇠하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선비 안향(安珦) 선생이 있었습니다. 몽골(원)의 간섭기 속에서 국권이 유린당하던 시절, 안향 선생은 원나라에서 주희의 저작을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책들을 정성스럽게 필사해 국내로 들여왔고, 이것이 이 땅에 주자학이 태동하는 위대한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주희의 핵심 주장은 세계가 일정하게 정해진 우주의 근본 원리, 즉 ‘리(理)’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고 실천하려 했던 학자들을 우리는 사림파(士林派)라고 부릅니다. 이 사림의 도통(道統)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등으로 면면히 이어졌으며, 그 학맥의 전환점을 마련한 중심인물로 김종직 선생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논어》 〈이인(里仁)〉 편에 ‘덕불고필유인(德不孤必有隣)’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외롭지 않으니, 반드시 뜻을 같이하는 이웃이 있기 마련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환경에서 진정 덕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공자의 말처럼 주변에 좋은 이웃과 친구가 많은 사람일 것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타인에게 덕을 베풀기란 결코 쉽지 않으며, 진정한 이웃과 친구를 두는 것 또한 어려운 일입니다. 내가 좋은 이웃이 되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먼저 덕이 배어 나와 상대에게 전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논어》 〈양화(陽貨)〉 편에서 덕의 상실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도청이도설, 덕지기야(道聽而塗說, 德之棄也)’, 즉 “길거리에서 들은 얕은 소문을 깊은 사유 없이 그대로 길거리에 옮기고 다니는 짓은 자신의 덕을 스스로 버리는 짓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를 살면서 덕을 갖춘 사람이란 과연 누구이겠습니까?저는 정직하고, 말을 조심하며, 정제된 언어를 골라서 쓸 줄 아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덕을 갖춘 이 시대의 현자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
《사기》에는 ‘일언구정(一言九鼎)’이라 하여, “말 한마디가 가마솥 아홉 개(천하의 무게)보다 무거워야 한다”고 했습니다.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우신 고(故) 김용기 교장 선생님께서도 “사람은 모름지기 자신의 한마디 말이 약속어음을 대용할 수 있을 만큼 신용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돌아보면 인간관계의 모든 화(禍)와 복(福)은 ‘말’에서 비롯됩니다. 말이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고, 비수가 되며, 종래에는 철천지원수를 만들기도 합니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이혼 소송으로 법정을 찾는 이들이 급증한다는 서글픈 뉴스를 접합니다. 이 또한 가장 가까운 가족끼리 서로 말 조심을 하지 않아 빚어진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역사적으로 그 어떤 나라보다 성실하고 정직하며 정의를 숭상하는 민족이었습니다. 신의와 절개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육신의 역사가 이를 증명합니다.
지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의 만행으로 목숨을 잃은 중국인의 숫자는 우리 한민족의 백 배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일제의 수뇌부를 직접 단죄한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반면 우리 민족은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원봉, 유관순 등 수많은 애국지사가 기꺼이 목숨을 바쳐 일제의 심장부에 거룩한 폭탄을 던지고 저항했습니다. 가까이는 현대사의 비극이었던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도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민족의 기상이 그대로 발현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민족은 가슴속에 뜨거운 정의를 품고 있었으며, 나라와 공동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언제나 스스로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졌습니다.
그 어떤 선진국도 피 흘림과 진통 없이 민주주의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우리 한민족은 위대한 저력을 지니고 있기에, 머지않아 오늘의 이 극심한 사회적 진통과 갈등을 슬기롭게 극복해 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계인들이 우러러보는 진정한 문화민족, 품격 있는 선진 국민으로 다시금 당당히 설 것을 확신합니다.
2026년 장마의 한가운데서, 여초 삼가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