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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일꾼(사역자)들 사이
성경 안의 교회들은 극히 지방적이고, 교회들이 연합하는 일은 전혀 없다. 우리는 각지의 모든 형제들과 연합하고 수가 많지만 여전히 한 몸이다. 우리의 연합은 믿는 이들을 단위로 삼는 것이다. 우리는 각 지방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지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다. 이 단위는 지방 교회가 아니라 믿는 이들이다. 지방 교회가 이 땅에 있는 교회의 최대의 조직이므로 그들을 연합케 할 수 없다.
사역자들 방면에 관하여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준 바는 이런 것이 아니다. 사도들에게는 연합이 있다. 사도들은 합해질 수도 있고 합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과거에 사람의 제도 안에 너무 깊게 관여되었기 때문에 교회들이 연합되지 않으므로 사역자들로 조금도 연합되지 말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간의 조직과 사도들 사이의 제도가 다름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와 교회 사이에 연합이 없고 극히 독립적인 것이므로 하나님의 사역자들 사이에도 연합이 없어야하며 또한 극히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상반된 것이다. 교회들 사이에는 연합이 없지만 동역자들 간에는 연합이 있다. 교회는 지방의 성질을 지켜야하기 때문에 다른 지방 교회들과 연합하여 한 단체를 이룰 수 없다. 교회와 교회가 연합할 때 즉시 지방의 범위를 넘어서고 지방의 성질을 변케하고 지방의 한계를 깨뜨리기 때문에 성경은 교회 간의 연합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성경 안에는 사도들의 연합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사도들이 연합하여 한 단체를 이룰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모든 사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모든 사역을 다스리는 것도 성경에 없는 것이다. 성경 안의 사역자들은 연합함으로써 하나의 중심단체를 이루지 않았다. 그런 방법은 로마 천주교적인 것이고 성경적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 안의 사도들에게는 연합함이 있고 또한 연합함으로써 한 무리를 이룬다. 우리는 바울이 그와 함께 있던 누가, 실라, 아볼로, 디모데, 디도와 한 무리를 이룬 것을 분명히 보았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요한, 야고보 등도 하나의 무리를 이루었다. 안디옥에서 나온 자들도 한 무리였고 예루살렘에서 나온 자들도 한 무리였다. 그들은 각각 하나의 선교단체를 조성한 것이 아니다. 각 사람에게 각자의 [동행자들](행 20:34)이 있었다. 그들의 역사를 연구해보면 사도행전에서 그들과 동행한 자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최초에는 예루살렘에서 몇 사도들이 사역하였고, 또 그들이 사마리아로 가고 가이사랴로 갔음을 볼 수 있다. 이후(13장)에 안디옥에서 또 하나의 시작이 있었다. 바울은 바나바와 처음으로 동역하였고 후에 실라와 누가와 아볼로와 디모데 등이 동행하였다. 우리는 바울의 동행한 사람들이 얼마인가를 알 수 없지만 한 무리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사도행전 외에 우리는 당을 짓는 것과 시기와 분쟁으로 사역하는 또 한 무리를 볼 수 있다(빌 1장). 이들 무리는 바울의 무리가 아니고 또 베드로의 무리도 아님이 분명하다. 물론 그들의 동기는 틀렸지만 당시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한 무리 한 무리였음을 증명한다. 바꾸어 말한다면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는 단체가 있다는 것이다. 교회들 간에는 단체가 없다. 교회들 사이에 단체가 있을 때에는 교파가 된다.
어떤 형제는 우리에게 교파의 조직이 없으므로, 사역자들은 응당 흩어진 모래같이 나는 나의 길을, 당신은 당신의 길을 달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 뜻을 좇아 각기 제 길로 가고 모든 사람이 다 자신이 교황이고 자신이 신부(神父)라고 생각한다. 지방 교회가 독립적인 것에는 문제가 없다. 지방 교회 사이에는 마땅히 내가 당신의 일을 간섭하지 않아야 하고 당신이 나의 일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사역에 있어서는 조직적인 단체가 아닌 단체가 있다 교회의 방법과 사역의 방법은 별개의 문제이다. 사역 안에는 단체가 있고 안수와 파견도 있고 안배와 조정과 보내심도 있다. 그러나 지방 교회 사이에서는 상해교회가 남경교회 일에 조금도 관여할 수 없다. 남경 교회도 상해의 일에 관여 할 수 없다. 어떤 지방이 재난을 당했을 때 다른 지방은 서로의 교통을 나타내기 위하여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각 지방 교회의 행정에 있어서는 각각 상관이 없고 각각 행정을 하는 것이다. 사역은 그렇지 않다. 사역에는 계획이 있고 계산이 있다. 그들의 범위는 또한 한 지방만이 아니라 여러 지방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몇몇 교회가 하나로 연합한 것이 없지만, 사도들은 몇몇 사람이 연합된 것이 있다. 단지 여기에는 오늘날의 소위 선교 단체와 같이 전도단 등의 명칭이 없을 따름이다.
성경 안의 사실
사역이 단체적이고 지배함이 있으며 지방을 초월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사역 안에서 발생한 일들을 성경 안에서 보기로 한다.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 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며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를 부탁함을 받고 떠나](행 15:36-40).
[바울이 그(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행 16:3).
[바울이 이(마게도냐) 이상(異象)을 본 후에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에게 복음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단정함 이러라](행 16:6 원문 참조).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행 17:15).
[마게도냐로 다녀 돌아가기를 작정하니 아시아까지 함께 가는 자는 베뢰아 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 사람 가이오 및 디모데와 아시아 사람 두기오와 드로비모라 그들은 먼저 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더라](행 20:3-5).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행선하니 이는 자기가 도보로 가고자하여 이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 바울이 앗소에서 우리를 만나니 우리가 배에 올리고 미둘레네에 가서](행 20:13, 14).
[디모데가 이르거든 너희는 조심하여 저로 두려움이 없이 너희 가운데 있게 하라 이는 저도 나와 같이 주의 일을 힘쓰는 자임이니라···형제 아볼로에 대하여는 저더러 형제들과 함께 너희에게 가라고 내가 많이 권하되 지금은 갈 뜻이 일절 없으나 기회가 있으면 가리라](고전 16:10-12).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되 너희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고후 8:6).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고후 8:16-18).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우리가 여러 가지 일에 그 간절한 것을 여러 번 시험하였거니와 이제 저가 너희를 크게 믿음으로 더욱 간절하니라. 디도로 말하면 나의 동무요 너희를 위한 나의 동역자요 우리 형제들로 말하면 여러 교회의 사도들이요 그리스도의 영광이니라](고후 8:22).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하노니 사랑을 받는 형제요 주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엡 6:21, 22).
[내가 디모데를 속이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위안을 받으려 함이라](빌 2:19).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군사된 자요 너희 사도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빌 2:25).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골 4:7).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14절).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17절).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꾼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살전 3:1-2).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사랑하여 나를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지고 오라](딤후 4:9-13).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20, 21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 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함이니](딛 1:5).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딛 3:12, 13).
사실의 가르침
이상 읽은 성경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사역에는 단체가 있다. 둘째로, 사역 단체 안에는 통제가 있다. 셋째로 사역의 범위는 한 지방만이 아니다.
우리는 사도행전과 서신 안에 있는 인물에 대한 기록을 볼 때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각각 자신이 옳다고 한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체가 있는 것이며 모든 이가 함께 동역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 거하는 그 동역자 무리는 바로 이러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있는 몇 동역자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중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특히 우리가 아는 바이다. 그들은 홀로 무엇을 하지 않았다. 오순절 때[베드로와 열 한 사도가 같이 서서](행 2:14) 있었고 미문에서 사역할 때 베드로는 요한과 함께 있었다. 사마리아로 간 사람들도 그들 두 사람이고 고넬료의 집에 간 것은 베드로와 여섯 형제들이다. 예루살렘에는 사역자의 단체가 있었다. 물론 매번 그들 중 몇 사람만 함께 나간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사역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단체적인 것이다. 그들에게는 나가서 사역하는 동역자들이 있었다. 안디옥에 있는 바울에 대하여 우리는 안타깝게도 바울은 중요시하지만 바울의 동역자들은 별로 중요시하지 않고 있다.
우리는 누가가 드로아에 있을 때 어떻게 그들의 사역 단체에 가입되었으며, 마게도냐의 부르는 소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단정 짓는가를 본다. 후에 마게도냐에 돌아올 때 바울이 어떻게 소바더와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가이오와 디모데와 두기고와 드로비모등 동역자들을 데리고 함께 돌아왔고, 또 후에 아볼로와 부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어떻게 동역자 무리에 가입되었는가를 볼 수 있다. 후에 바울이 또한 어떻게 디모데를 보내고 아볼로를 권하며 고린도에 가도록 디도를 권하였고 후에 또 어떻게 에바브라를 동역자로 얻었는가를 볼 수 있다. 나는 서신 첫 마디인 [바울 및 형제 소스데네], [바울 및 형제 디모데], [바울, 실라. 디모데] 등의 말을 읽기를 극히 좋아한다. 성경은 사역자가 있을 뿐 아니라 동역하는 사람들도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우리에게 사람의 조직이 있을 수 없고 사람이 세운 선교단체가 있을 수 없으므로 사역하는 사람들도 연합할 수 없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틀린 것이다. 몰론 교회는 몇몇 교회가 합해질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연합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우리에게 교파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자들이나 하나님을 위한 사도들이 자유스럽게 행동할 수 없으며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을 홀로 행할 수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그렇지 않다. 교회는 연합하여 교파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전도를 위한 중심 기구를 이루어서는 안 되지만, 그들에게 동역자가 있고 그들의 동역자들과 연합함으로써 한 무리를 이루고 함께 나아가 사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반드시 주의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 단체가 있지만 그들의 단체가 조직적인 단체가 아니라 영적인 단체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차이는 너무도 큰 것이다. 그들은 뜻과 길이 같은 사람들로서 함께 한 주님을 사랑하고 함께 그분을 섬기기를 좋아하고 함께 그분의 부르심과 보내심 받기를 원하므로 연합하여 함께 사역하는 것이다. 그들 중 어떤 이는 처음부터 그 안에 있었고 어떤 이는 후에 추가된 자일 것이다. 그들은 확실히 하나의 사역하는 단체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조직이 없고 지위의 안배나 직임의 분배가 없다. 또한 가입된 사람들도 모집함으로 온 자들이나 훈련을 받아서 온 자들이 아니다. 사도들이 전도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안배로 인하여 그들은 서로 만나고 마음을 털어 놓고 서로 동역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는 소위 어떤 시험이나 조건이나 따른 수속이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권을 행사하신 것이고 사람들은 그것에 찬성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 단체 안에서는 누구에게도 일정한 지위가 없고 일정한 직분이 없다. 거기에는 [단장(團長)]이나 [의장(議長)]이 없고 [감독장]도 없다. 다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의 직분을 주님의 보내심에 의해 얻은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한 직분을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위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 단체는 그들에게 어떠한 직분이나 위치를 주지 않았다. 그들 피차간의 관계는 위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들의 연합은 인위적인 조직이 아니라 영적인 연합이다.
이 성경 구절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들 사이에 누구도 누구의 공급을 받지 않기 때문에 누구도 누구의 조정을 받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는 내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누구도 나의 앞길을 간섭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두어 그가 끝내지 않은 일을 계속하게 한 것과 후에 또 [아데마에 두기고를···보낸 것]과 또 그로 하여금 [급히 니고볼리로···오게]한 것을 보아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와 에바브라와 두기고를 사역하도록 몇 차례 보낸 것과 그가 또 디도와 아볼로에게 고린도에 가라고 권한 것에 관하여 우리가 다 잘 아는 바이다. 하나님의 사역 안에서 사역자들에게는 단체가 있을 뿐 아니라 이 단체 안에 우리보다 더 영적인 사람들의 지위가 있다. 동역자는 보내심을 받을 수 있고 떨어 뜨려짐을 당하고 권면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위치적인 권위와 영적인 권위의 차이점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조직적인 단체 안에서의 모든 권위는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위치적인 것이다. 좋은 조직 안에서 권위 있는 사람은 위치적인 권위뿐 아니라 영적인 권위도 가지고 있다. 좋지 않은 조직 안에서 권위 있는 사람에게는 위치적인 권위만 있을 뿐 영적인 권위는 없다. 조직 안에서 그 사람 자신에게 영적인 권위가 있든 없든 권위가 있는 것은 항상 위치적인 것이다. 위치적인 권위라 무엇인가? 위치적인 권위는 어떠한 위치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권위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어떤 위치에 서서 다스린다는 뜻이다. 언제든지 그 위치에 있지 않으면 다스리지 않게 되고 또한 다스릴 수도 없게 된다. 위치적인 권위는 그 사람 본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그 권위를 소유한 자의 바깥에 있는 것이다. 조직적인 단체는 바로 이런 권위로 다른 사람의 길을 지배한다. 의장이나 위원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일을 지휘하는 것이다. 조직적인 단체의 중심은 지위이다. 지위는 조직적인 단체의 생명이고 사람은 이 지위로 그의 권위를 집행한다. 그러나 성경 안에 있는 사역자의 단체에는 조직이 없다. 그 안에 권위가 있지만 그 권위는 위치적이고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그러한 권위는 영적 생명의 성장과 능력의 충만과 교통의 친밀함에서 생긴다. 사도 바울이 다른 사람을 지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위치가 다른 사람보다 높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영적 생명이 다른 사람보다 깊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영적 생명이 깊고 자란 사람이 권위 있는 자이다. 언제든지 사람이 영적 생명에서 실패할 때 그의 권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조직 안에서는 그러한 영적 생명이 있다 해서 반드시 그 위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위치가 있다 해서 또 반드시 그런 영적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경 안에 있는 사역자의 단체는 조직적인 단체가 아니다. 그 안에서 영적 생명이 높고 뛰어난 사람이 지휘할 수 있고 영적 능력이 충만한 사람이 감독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이런 영적인 사람을 청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조직적인 단체 안에서 당신은 복종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영적인 단체 안에서는 당신이 청종하지 않는다면 공식적인 방면에서 당신이 틀린 것이 아니고 영적 생명의 방면에서 틀린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권위 외에 또한 각종 사역(ministry)의 문제가 있다. 주님의 모든 종들은 다 그 사역 안에 있지만 주님 앞에서 그들 개개인이 특유한 사역을 가지고 있다. 이 사역들은 다 같은 것이 아니다. 조직 안에서는 사람이 정한 위치만 있지만 영적인 사역 안에서는 주님이 나누어주신 사역이 있다. 사역이 다르므로 한 면으로 주님을 순종해야 하고 또 한 면으로 서로 순종해야 한다. 그들이 다른 형제를 순종하는 것은 다른 형제에게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사역과 자신에게 맡기신 사역이 서로 관계되지만 또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위치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영적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것을 배우기 위하여 한 단체를 조직화함으로 그 안에서 다른 사역자들을 지휘할 우두머리를 선출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지휘가 영적인 사역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조직 안에 있는 위치에서 나온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행한 것은 그의 사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디도나 디모데나 두기고가 통제를 받은 것도 그들의 사역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늘날 많은 통제가 영적인 체험이 많음이나 사역의 위치가 높은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위로 통제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들의 영적 생명이 어떠한가를 상관하지 않고 사람이 정한 위치만으로 다른 사람을 통제한다. 어떠한 위치만 있으면 어떠한 권위를 갖게 되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인 것을 근거로 삼는다. 성경 안에는 권위가 있지만 그 권위는 위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다. 성경 안에서는 사람에게 영적인 능력과 영적인 위임과 체험과 사명을 요구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그의 지위로 인하여 권위를 사용한다. 이것은 얼마나 다른지!
우리는 디모데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가까이하며 충성되이 주님을 섬겼는가를 볼 수 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차례 바울의 보내심을 받았다. 그는 [나 스스로는 사역할 수 없다는 것인가? 복음을 전할 수도 없는가? 나 스스로는 교회를 세울 수 없다는 말인가? 나는 내가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모른다는 말인가?]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그는 다 할 수 있었지만 바울의 명령을 받아 가서 사역했다는 것이다. 영적인 사역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지배를 받는 일이 있다. 바울의 위치가 있지만 디모데의 위치도 있다.
오늘 우리는 한 면으로 동역자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갖는 것과 또 한 면으로 개인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땅히 이 두 방면이 다 유지되어야 하며 균형 잡혀야 한다. 디모데 전후서의 여러 군데에서 동역자들이 어떻게 동역하는 가를 보여줄 뿐 아니라 젊은 동역자가 어떻게 연장(年長)한 동역자를 순종하는 가도 보여준다. 젊은 사역자는 마땅히 한 면으로 성령의 명령을 청종해야하고 또 한 면으로는 연장한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한다. 바울이 디모데를 밖으로 보낼 때나 에베소에 머물라고 권했을 때 디모데는 주 안에서 청종하였다. 이것은 젊은 자로서 사역하는 것의 본이다. 이런 사역은 극히 보배로운 것으로서 한 면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고 또 한 면으로는 동역자들과 좋지 않은 관계를 해소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든 책임을 다 디모데에게 미룰 수 없고 바울에게 미룰 수도 없다. 왜냐하면 권면하는 사람은 마땅히 어떻게 권할 것인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천연적인 것에 의해 자신의 뜻을 좇아 한 사람에 대한 모든 권면과 만유와 보냄은 사람으로 하여금 순종케 할 수 없게 한다. 디모데가 바울과 동역하기를 배워야 하지만, 바울도 어떻게 디모데와 동역해야하는 가를 배워야 하다. 이렇게 할 때 디모데로 하여금 바울을 청종하지 않고 성령만을 따르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하며, 또한 바울로 하여금 주님을 대신하여 말하는 데 이르지 않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문제를 피하기 어렵게 된다.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마땅히 연합을 가져야하지만, 하나님의 종으로 하여금 사람의 지배만을 받는 종이 되게 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수 없게 하는 사람의 조직과의 연합은 무서운 것이다. 이것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어떤 부담을 가졌기 때문에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크고 높은 사람이 지휘하기 때문에 일을 하게 된다. 어떤 이는 이 땅위에 성령의 총무가 필요하다고 생각 하지만 성령이 이미 이 땅에서 주 그리스도의 총무이심을 알지 못한다. 그분에게는 총무가 필요하지 않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통로로서, 다른 사람을 통제하는, 지위가 더 높은 사람이 있는데 있다. 그러나 성경에 따라 본다면, 사람은 연합함으로써 하나의 조직적인 기관을 형성할 수 없고, 하나님 앞에서 개인에게 부담이 있는 가의 여부에 상관없이 명령을 내리는 기관도 있을 수 없다.
또 한 방면에 있는 또 하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며 하나님의 공급과 인도하심을 받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의 길을 가고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은 한 면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역자를 지배하는 사람의 조직을 허락하지 않고, 또 한 면으로 사역자들 간의 영적인 사역과 영적인 권위를 순종함으로 마음을 같이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여러 본(本)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조직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역 안에서 사도와 사도 간에 다소의 연합과 합일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적인 사역 안에서 개인의 단독적인 행동이나 교파 안에 있는 단체적 조직적인 선교 단체들은 다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우리 개인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하고 또한 몇 사람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뜻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바울과 바나바가 부르심을 받은 것은 이것의 예이다. 하나님 앞에 있던 사람들은 두 선지자와 교사가 아니라 다섯 선지자와 교사들이었다. 사도행전 13장은 사역에 단체가 있다는 좋은 본을 이미 남겨 두었다. 이 단체는 크고 작은 지위로 연합된 단체가 아니라 크고 작은 사역들로 연합된 단체이다. 함께 사역하는 우리들은 서로 관계가 있다. 우리가 받은 인도하심에나 다른 형제들이 받은 인도에는 서로의 확증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안디옥에 있는 몇몇 선지자와 교사들과 같은 서로의 연결이 있어야 한다. 이는 지나치게 빠른 사람으로 하여금 한 걸음 멈추게 하고 너무 느린 사람을 한 걸음 전진하도록 밀어주다. 그들 서로에게는 조직적인 관계는 없지만 생명의 영적인 관계는 있다.
또 한 면으로 우리는 그들이 사역하는 범위가 매우 넓었음을 본다. 어떤 이는 에베소로 보내고, 어떤 이는 바울에게로 와야하고, 어떤 이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어떤 이는 밀레도에 두었고, 어떤 이는 그레데에 떨어뜨려 두었고, 어떤 이는 데살로니가에서 돌아오고, 어떤 이는 갈라디아로 가고, 어떤 이는 달마디아로 가야 했다. 이것이 사역이다. 교회는 한 지방 범위내의 일만을 관여하기 때문에 이 여러 가지 활동들은 교회의 일이 아니다. 에베소는 에베소의 일만을 관여하고, 골로새는 골로새의 일만을, 로마는 오직 로마의 일을 관여하는 것이다. 지방 범위 내의 일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다. 에베소는 골로새에 사람을 머물게 할 필요가 없고 골로새는 로마에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역은 지방을 초월한 것이다. 에베소, 골로새, 로마는 다 사역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하나님의 사역자는 주님께서 그들에게 분배하신 지방들을 그들의 [교구(敎區)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지방들은 사역자들이 함께 상의하여 조정하며 안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방 교회는 지방 범위 내의 일만을 관여할 뿐 이렇게 수 없다. 사역 안에서 주님의 보내심 받은 모든 사람이 각지의 모든 사역의 책임을 서로 짊어지는 것이다.
사역자들 사이에 통일된 지배가 없음
우리가 마땅히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실이 있다. 첫째로 지방 교회는 믿는 이들의 최대의 단체이므로 다른 교회들과 연합함으로서 하나의 큰 단체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역자들이나 사도들은 연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디옥에 거하는 사도든 비시디아 안디옥 거하는 사도든 그들은 연합 할 수 있다. 세 째로 성경 안에서는 모든 사역자들을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큰 단체를 이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이 이것을 분명히 나타낼 뿐 아니라 고린도서에도 똑같은 계시가 있다.
고린도 후서 11장 12절부터 13절:[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이 그 기회를 끓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함 이로라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22절부터 23절:[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여기에서는 고린도의 믿는 이들을 미혹하여 바울을 사도가 아니라고 말하는 한 무리의 거짓 사도가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을 바울보다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자들에게는 행정상 통일된 조직이 없기 때문에 바울이 행정에 있어서 그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음을 우리는 본다. 만일 영적인 사역에 통일된 조직이 있다면 자격증 없는 사람은 전도할 수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이 자격증을 가지고 있어야 만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면 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연합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또 한 무리의 거짓사도가 나온 것이다. 모든 사도들이 연합함으로써 한 단체를 이루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 이렇게 모아짐으로 발생한 폐해는 거짓 사도보다 수천 배나 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분이 보내신 몇몇 사역자들이 똑같은 위임을 가지고 있을 때 모여서 하나님의 단체를 이루는 것만을 허락하셨다.
갈라디아서 4장 17절:[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6장17절:[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여러분은 이 두 성경 구절의 부합점을 보았는가? 어떤 이들이 갈라디아에 가서 온갖 수단을 사용하여 그들을 농락함으로 그들에게서 뭔가를 얻기 바랐다. 그러나 바울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바울은, [나는 참으로 주의 일을 하는 자이니 너희들은 내게 그러한 수단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이것을 처리할 만한 어떤 정권이 없었다.
성경 안에는 왜 보편적인 조직이나 지배가 없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조직력으로 성령의 능력을 대치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통일된 지배가 없고 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순종한다면 모든 것을 잘하게 될 것이다 .언제든지 사람이 성령을 좇지 않고 혈기를 좇아 일을 할 때 사역은 곧 실패한 것이다. 많은 때에 엄밀한 조직이 영적인 능력을 대치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내적 생명의 능력은 사라졌어도 외적 조직의 골격이 붙들어 주기 때문에 사역은 여전히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언제든지 영적인 능력을 잃어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역이 무너지고 존재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날 때 하나님께서는 돌 하나라도 돌 위에 남아 있기를 원치 않으신다. 많은 때 내적으로는 다 메말라 있지만 외적 조직의 골격이 남아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나의 실제적인 상태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밖과 안이 똑 같기를 원하시고 그분이 본 것을 사람들도 보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사역이 무너질 때 우리가 겸손히 그분의 얼굴을 다시 찾기를 원하시고, 사역이 무너질지라도 거짓된 지탱물이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또한 통일된 지배의 폐해는 얼마나 큰 것인지 모른다. 통일된 지배의 조직은 하나님의종 아니 자를 그 안에 섞여있게 하며, 또 오늘날 교화의 지위를 가져오기 쉽다. 통일된 조직이 있을 때 사역은 세상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의 종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역자들에게 단체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역자들이 통일된 단체를 조성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사역자들 간의 협력
어제 사역자 단체 안에서 어떻게 서로 협력해야 하는 가의 문제가 있다. 하나님께서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주신 특별한 일이 있고, 또 한 무리에게도 그들에게 주신 특별한 사명이 있다. 이 두 무리는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가? 베드로에게도 한 무리의 동행들이 이었고 바울에게도 한 무리의 동행들이 있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이 두 무리를 합하여 같이 협력하게 하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그들은 서로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가? 단체는 한 무리, 한 무리이기 때문에 통일시키는 것은 틀린 것이다. 이 사역자들과 단체들은 서로 협력해야 하는가?
이제우리는 사역자들이 사역하는 요점을 보기로 한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역이 무엇이고 자신이 특별히 해야 할 것이 어떤 일이든 간에 모든 사역자(단체 안에서)가 지방교회 없는 지방에 갈 때 첫 번째 일은 먼저 그 지방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둘째로, 지방 교회가 있는 지방에 갈 때는 그는 그의 교리를 공헌함으로 교회로 하여금 그의 유익을 얻게 할 수 있을 뿐 그 교회를 그의 교회나 그의 단체적의 교회로 만들 수 없다.
만일 어느 사역자간 몇몇 사역자들이 교회 없는 지방에 가서 그의 교리를 지키는 [교회]를 세운다면 그곳에서 종파를 세우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그와 협력할 필요가 없다. 만일 어떤 사역자나 몇몇 사역자가 지방 교회가 있는 어떤 지방에 가서 그의 교리로 공헌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그의 단체의 지회로 변케 하려고 한다면 그도 거기에서 종파를 세우는 것이므로 당신은 그와도 협력할 필요가 없다. 사역하는 사람이 가장 피해야 할 것은 지방에 있는 단체를 자기 단체로 만들려 하고 지방 교회를 세우지 않거나 지방 교회를 건축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일하는 방법은 다 성경이 허락하는 바이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고린도로 갔었다. 고린도에서 그가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받은 사람이 있었고 믿는 이들의 단체가 일어나게 되었다. 고린도에서 바울이 세운 단체는 어떠한 단체였는가? 고린도에 있는 교회였다. 고린도에서 그는 안디옥 교회의 지회를 세운 것이 아니다. 그가 이렇게 행한 것은 옳은 것이다. 얼마 후 베드로도 고린도에 와서 복음을 전함으로 한 무리를 얻었다. 베드로가 바울에게, [당신은 안디옥에서 왔고 나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왔으니 나는 다른 단체를 세우겠다.]라고 하거나, [나는 따로 예루살렘 교회의 지회를 세우겠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베드로는, [바울이 세운 것도 고린도 교회이기 때문에 내가 얻은 사람들도 그 교회에 둘 수밖에 없다.]고 말할 것이다. 베드로가 이러했을 뿐 아니라 후에 온 아볼로도 이렇게 했다. 그들은 사람들을 구원한 후 지방 교회 안에 두었다. 이리하여 고린도에는 어떤 나누어진 종파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교회만 있었다. 만일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을 얻은 후, [나는 안디옥에서 왔기 때문에 고린도에 안디옥 교회 지회를 세우거나 바울 지회를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면 베드로가 왔을 때 무어라고 말했겠는가? 그는, [바울 당신은 안디옥 교회의 지회를 세웠다. 나는 안디옥 교회와는 아무 관계가 없으니 사람들을 당신의 지회에 둘 필요 없다. 나도 여기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회를 세우겠다.]라고 말할 것이다. 얼마 후에 아볼로가 와서도 아볼로 지회를 세울 것이다. 당신이 하나의 지회를 세우고 나도 하나의 교회를 세운다면 이로 인하여 자연히 종파가 세워지는 것이다. 이럴 때 그들은 그 지방에 지방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단체의 지회를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나온 단체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이럴 때 협력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사역자나 사역자 단체의 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나가서 사역할 때 내가 간 지방에 전에 내가 소속해 있던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지방 교회를 세우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소속했던 지방의 교회를 내가 가는 지방에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방에 가서 그 지방에 있는 교회를 세워야 한다. 예루살렘과 안디옥의 지회는 없다. 모든 교회가 다 지방적이다. 우리는 한 지방 교회를 다른 지방으로 확장시킬 수 없다. 다른 지방에서는 그 지방에 있는 지방교회를 세워야 한다. 사도가 에베소에서 세운 것은 에베소 교회이고 빌립보에서 세운 것은 빌립보 교회이다. 그들이 기타 수많은 지방에서 세운 것도 그 지방들에 있는 교회들이다. 우리는 그들이 다른 단체를 세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교회를 확장시킬 수는 있어도 우리가 소재하고 있는 지방의 하나님의 교회를 확장시킬 수는 없다. 우리가 가는 지방에 따라 우리가 세운 교회도 그 지방의 교회이어야 한다.
전도의 일의 목적은 본래 죄인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간 지방에 교회가 생기게 되었다. 목적은 세상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었지만 결국은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의 위험은, 사람들은 자신이 구원시킨 자들을 자기 단체의 지회로 편성하고 그들로 하여금 그 지방에 있는 교회를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서로 속하여 있는 단체가 다르기 때문에 한 지방에 여러 가지 다른 단체와 지회가 세워져 많은 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사역의 목적에 대하여는 전혀 충돌하지 않는다. 누가 복음을 전해서 사람을 구원하려 하지 않겠는가? 누가 복음을 전해서 주님으로 하여금 몇 사람을 더 얻으시게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역의 결과에 대하여는 조금 다르다. 어떤 이들은 그 지방의 교회를 세우기 위할 것이다.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교파를 확장시키거나 자신의 선교 단체를 확장시키기 위해 일한다. 바로 이점에 대하여 내가 나의 동역자 및 같은 무리의 친구들과 논쟁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난 100년 동안 중국에 많은 충성된 종을 보내시어 복음을 전파케 하심으로 어두움에 앉아 있는 많은 중국인들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을 그분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들의 희생과 고난과 경건과 부지런함은 참으로 우리의 본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 눈을 들어 중국 내륙에서 나온 선교자들의 고난 받은 얼굴을 볼 때 우리 마음이 감동을 받아 [주께서 또한 나로 하여금 그와 같을 수 있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게 된다. 주께서 그들을 축복하시고 보답해 주시기를 원한다.
우리 형제들의 복음 전파 방면의 일에 대하여는 실로 우리가 비평할 것이 없고 사모함만 있을 다름이다. 우리는 본래 때가 차지 않고 태어난 자같이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없었지만,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서, 또 그분의 일을 하도록 그분의 부르심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추구하고 충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연장(年長)하신 형제들의 복음 전하는 일에 대하여 참으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열매 곧 구원받은 사람을 처신시키는 방법에 대하여는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지난 백년의 사역 동안 주 안에 연로하신 형제들은 그들이 간 지방의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라 그들의 선교 단체의 지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볼 때 이것은 참으로 성경의 진리에 부합되지 않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간 지방의 지방 교회를 세웠을 뿐 기타 다른 교파를 세운 일이 없다. 만일 내가 잘못 말하였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여주시기 원한다!
사역의 결과가 지방 교회인가, [00교]인가
여러분은 내가 어떤 개인의 일을 언급하는 것을 용서하여 주기 바란다. 작년 상해에서 나는 00교 선교사 한 분을 만났는데, 그는 아에게 00교와 협력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어떻게 답변해야 할지 몰라 즉시 답변하지 않았다. 그면 운남(雲南)의 곤명(昆明)에서 또 그를 만났었다. 그는 또 나에게 00교와 협력할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답변하였다. [00교의 선교 단체에 대하여 나는 감히 반대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교회가 선교단체를 가리켜 말하는 것임을 안다. 당신들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00교의 선교 단체를 세우고 주님을 사랑하는 외국형제들의 한 무리로 하여금 손쉽게 중국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사역하게 하였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조금도 비평하지 않는다. 당신의 선교 단체에 대해서는 나에게 약간의 이의(異議)도 없다. 왜냐하면 성경 안에서 사역에는 단체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들에게 조직이 필요하고 어떤 명칭이 있어야 하다는 느끼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당신들 자신이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내가 누구이관데 주님의 종을 감히 비평하겠는가? 단지 나 자신에게는 하나님의 그러한 인도가 없기 때문에 감히 그런 일을 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나는 00선교 단체에 대하여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리고 나는 당신들의 창시자의 전기를 읽음으로써 얻은 영적 도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나의 마음은 벌써 당신들과 하나 되었다. 그러나 00교의 이런 교회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
[선교하는 무리인 당신들에 대하여 우리는 조금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당신들의 선교로 얻은 열매들을 당신들이 어떻게 하였는가가가 문제이다. 우리는 00교에 대하여 감히 무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00교의 열매가 도대체 어떻게 되었는가를 묻겠다. 만일 00교가 단지 하나의 선교 단체라면 우리는 감히 비평하지 않는다. 그러나 00교가 교회가 되어 버린다면 그것은 문제가 된다. 당신 자신들은 00교이지만 당신들이 구원시킨 사람들은 어떤 한가? 그들로 하여금 00교의 교회가 되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로 그들이 소재하고 있는 지방의 교회가 되게 할 것인가? 중국에 와서 복음을 전한 [선교사]의 한 무리인 당신들은 00선교 단체이지만, 당신들에게는 각지에서 열매를 얻은 후 그 열매들을 00교회로 만들 권위가 없다. 당신 자신들은 00선교 단체가 될 수 있지만 당신들이 그들을 00교회로 만드는 것은 안 된다. 성경은 00선교 단체를 세우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지만 00교회를 세우는 것을 금지한 적이 있다!]
그런 다음 나는 그에게, 사도의 본을 지적하여 보여 주었다. 사도들은 어디에 가서 사역하든지 그들의 열매를 그들이 있던 그 지방 교회의 것으로 삼았고 그들은 각지에 있는 열매들을 그들 자신의 단체의 지회로 삼은 적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당시의 교회는 벌써 수 없이 갈라졌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여러 사도들이 한 지방에 갔을 때 그 지방에 있는 교회를 세우지 않고 그들이 나왔던 교회를 확장시켰다면 그 지방은 어떠한 상태로 변하였겠는가?
나는 또한 그에게, 대리(大理)에서의 일은 당신들이 그곳에서 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러나 00교의 당신들이 대리(大理)에서 구원시킨 사람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만일 그들이 대리(大理)교회라면 나는 대리에 갈 때 그 안에 투실 한 것이다. 나는 그 교회의 영적 상태가 어떠하고 내적인 조직이 어떠한가에 상관하지 않고 반드시 그 안에 투신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종파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들이 그들을 00교회로 삼는다면 당신들은 대리(大理)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대리에 있는 00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그러한 [교회]에 가입할 수 없고 할 수 없이 대리에서 대리교회(우리 교회가 아닌)의 출현을 위하여 따로 사역하겠다.]고 말했다.
성경 안에서 전도하는 단체는 그들 단체의 지회를 세운 적이 없고 다 지방 교회를 세웠다. 만일 우리가 다 나가서 지방 교회를 세운다면 완전히 협력할 수 있게 된다. 00선교 단체는 있을 수 있어도 00교회를 세우는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을 생각해보라. 만일 당신의 00교가 대리(代理)에 와서 00교회를 세우고 오순절파는 대리에 와서 오순절 교회를 세우고 성공회는 대리에 와서 성공회를 세운다면 이들은 모두가 그들이 본래 속해있던 단체를 세우는 것이다. 이렇게 행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바울이 그의 지회를 세우고 베드로도 그의 지회를 세우는 것과 같기 때문에 여기에는 우리가 협력할 수 없는 바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 안에서 그분이 남긴 본을 따라 각지 지방 교회를 세우기를 원하심을 우리가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지방에 가서 교회를 세울 때에는 결코 어떤 색깔을 띠지 말고 극히 지방적이어야 한다. 당신이 대리에 올 때 대리 교회를 세우고, 내가 대리에 와서도 대리 교회를 세우고, 오순절파가 와서도 대리 교회를 세우고 성공회가 와서도 대리교회를 세워 어떤 선교 단체에 속하든지 대리 교회를 세울 목적을 가지고 있다면 종파가 산출될 가능성은 없게 된다. 나는 00교의 선교 단체가 틀렸다고는 감히 말하지 않겠다. 그 이유는 그들도 하나님의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각지에 가서 00교의 지회를 세운다면 그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단체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는 모든 사람과 동역할 수 있지만 자신들의 단체를 확장시키는 사람들과는 협력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각지에 가서 지방 교회를 세우는가의 여부에 따라 우리는 협력할 수 있는 가를 결정할 수 있다. 만일 그들이 한 면으로 복음을 전하면서 또 한 면으로 그들 자신의 단체를 세운다면 우리는 그들과 협력할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의 목적을 따라 사람의 단체를 확장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어떤 선교 단체의 사람이든지 어떤 지방에 가서 자신들의 교회를 세우지 않고 지방교회를 세운다면 그들과 우리는 협력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어 우리로 하여금 교회가 지방적인 것임을 철저히 보게 하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의 교회가 각지에 세워질 수 있도록 분열의 과오에서 우리를 구출하시기를 하나님께 구한다.
첫댓글 모든 사도들이 함께 연합하여 모든 사역을 다스리는 것도 성경에 없는 것이다. 성경 안의 사역자들은 연합함으로써 하나의 중심단체를 이루지 않았다. 그런 방법은 로마 천주교적인 것이고 성경적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