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쳤다. 찬바람까지 몰아치며 멀게만 느껴지던 한겨울 날씨에 사람들의 발걸음도 잔뜩 움츠려진 모습들이다. 이런 날에는 따뜻한 연탄불이 그립다고 할까. 마침 도서관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갑작스런 추위이다 보니 난방을 가동하여 주는 덕분에 수업하는 데에는 춥지 않아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한낮인데도 어찌나 바람이 차고 추운지 어서 집으로 가야할 것만 같았다.
도반들 몇 명과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중에 오늘 같은 날은 딱히 갈 곳이 있다면서 한분이 긴급 제안을 한 것이다. "우리 동네에 가면 값도 싸고 소문난 순댓국집이 있으니 일단 한번 가서 맛을 보면 알 일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순댓국! 점심때도 되고 하여 슬그머니 구미가 당겨왔다. 이심전심이었을까. 일행들 가운데 아무도 꽁무니를 빼지 않았다. 우리는 함께 어울려 버스를 타고 서둔동인가 하는 그곳 으로 가서 어느 정류장에 내렸다. 지하도를 건너서 한참동안을 걸어갔다.
찻길 가 허름한 구옥인데다 선뜻 눈에 띄지 않은 곳이었다. 비닐하우스의 출입문을 연상케 하는 그곳 문을 열고 들어가니 마침 점심시간이 한창이었다. 오는 순서에 따라 번호표를 받아들고 대기소에 한동안 자리가 나오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그에 걸 맞는 소파가 놓여있고, 한쪽 옆에는 높이 쌓아놓은 연탄더미와 함께 따끈한 연탄난로가 피워져 있어 손님들을 정겹게 맞이하고 있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본 연탄난로인가. 북적이는 가운데 빙 둘러 에워싸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하며 가슴이 따뜻해오는 것만 같았다. 그동안 잊고 지내던 추억 속의 연탄난로 앞에 기분도 새로웠다. 이미 식사를 끝낸 손님들은 커피를 마시며 난로 옆에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들도 정겨움 속에 보기가 좋았다.
인정으로 겨울 추위 녹여주는 소문난 순댓국집을 찾아서_2
그때 나는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며 한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어디서도 볼 수가 없는 농촌 풍경이었다. 소가 써레질을 하며 모내기 하는 장면과 황금들녘의 풍요로운 모습을 담은 사진 등, 이곳을 찾는 손님들에게 의도하는 이곳 사장님의 메시지가 들어있는 것만 같아보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새마을 사업을 처음 시작하며 썼다는 새마을 노래의 가사와 새마을 깃발이며, 독도 사진과 함께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 가사도 예사롭지가 않아 보였다. 거기에 메뉴표를 보면 '순대국5,000원'이 향토적이라는 데 애정이 갔다. 나와 같은 서민의 마음을 감싸 안아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인정으로 겨울 추위 녹여주는 소문난 순댓국집을 찾아서_3 마침내 변호 표 19번을 들고 기다리던 우리는 호명을 받고 식당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제 서야 앉을 자리가 난 것이다. 신발을 벗고 상이 놓인 빈자리에 찾아가 앉아야 했다. 사방을 둘러보면 손님들 대개가 직장에서 왔거나 아니면 가족끼리, 친구끼리 모여와 자리는 왁자지껄한 가운데 어수선했다.
손님들의 기호에 따라 순대를 넣을 수도 있고, 뺄 수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여성용인가 남성용인가에 따라 매운 정도가 다르다고도 했다. 고기는 물론 양도 많았으며 육질이 부드러워 치아가 안 좋은 사람에게도 별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거기에다 노란 주전자에 담아 내온 막걸리 또한 옛날식이어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인정으로 겨울 추위 녹여주는 소문난 순댓국집을 찾아서_4
마침내 등골 시린 속에 뜨거운 국물과 막걸리 한잔이 들어가니 일 순, 확 풀리며 생기가 도는 그 맛이란 어떤 말이나 글로도 다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자리를 가득 메운 손님들을 보며 이런 맛 때문이려니 싶었다. 무엇보다 얇은 주머니 사정을 감안하여 값이 싸면서도 맛이 있고, 또 양도 많아서 누구나 배불리 먹을 수가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손님이 그토록 많은 가운데도 주방에서는 손 싸게 차려내는 가운데 리필을 외쳐도 싫은 기색하나 없이 친절히 응대하는 모습들을 보자니 더 없이 흐뭇했다.
그리고 이곳 사장은 오십대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마침, 교통봉사 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파란 유니폼을 벗지 않은 채로 줄곧 손님들의 시중들기에 바쁜 모습을 보며 여간한 분이 아니라고 생각 되었다. 자신의 사업만 하여도 이렇듯 눈코 뜰 사이 없이 바쁜데도 봉사활동이라니 말이다. 이집은 특히 지역내 경로당 노인들에게 매달 수십 수백그릇의 순댓국을 무료로 제공하는 '착한 식당'이기도 하다. 가격 착하지, 주인 마음씨 마저 착하지.
나는 이곳에 마련된 연탄난로에서부터 독도, 새마을노래, 농촌풍경사진, 북적대는 손님 등 모두가 그런 여사장님과 일련의 연관이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요즘과 같은 불경기라고 하지만 영업이 끝난 뒤 돈을 포대에 담아 은행에 가져간다는 말이 전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이곳 사장님 혹시 수원댁은 아닐 런지? 나는 수원댁 이라면 왠지 인심 좋고 마음씨도 너그러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옛날부터 갖게 되었다. 그것은 박목월시인의 저서에 나오는 수원댁이라 부르던 자신의 집 식모 이야기를 통해서였다. 얼굴이 둥글넓적하니 마르지 않은 체구의 미소 진 후덕한 중년의 여인상 말이다. 내가 수원사람이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우연히 알게 된 순댓국 집을 통해서 나는 수원의 본래 그 이미지가 주는 수원댁 과 같은 인심을 이제라도 느껴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사는 재미가 아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