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어떤 이유로 자신의 도포를 파계사 관세음보살 복장에 봉안했을까?
대구 팔공산에는 천년고찰 동화사와 파계사가 있다.파계사는 9개의 물줄기가 흘렀는데 절 아래 못을 파고 계곡의 물줄기를 하나로 모았다고 해서 파계사란 이름을 얻었다.
파계사의 본전은 원통전이다.
파계하고 원통하다는 우스개 소리도 전해진다.원통전은 관세음 보살을 모시는 불전이다.보고 듣는 성품을 돌이켜 관하면 육근이 하나로 통하는 경지가 열린다. 원통교주 관세음 보살로 부르는 이유이다.
파계사 원통전에는 화려장엄한 수미단 위에 건칠 관음보살상이 봉안되어 있다.머리에는 금속으로 된 화려한 삼중보관을 쓰고 있다.
1979년 관세음 보살 개금불사를 하면서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복장에는 1447년(세종29년) 보살상을 중수했다는 기록이 나왔다.
복장내부의 명문에는 관세음 보살을 모시는 대시주와 화주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영응 대군 이염과 영해군장 이장 신빈김씨가 대시주로 나온다.
..이염은 세종의 8번째 아들이며 이장은 세종의 9번째 아들이다.신빈김씨는 세종의 후궁이다.조선조 세종과 효령.수양.안평대군은 말할 것도 없고 세종의 모든 아들들이 불사에 깊이 참여하고 있음을 볼수 있다.
관세음보살의 복장에서는 건륭연간에 작성된 발원문 1점.옹정 연간 발원문 2점 그리고 영조대왕이 직접 입었던 도포 1점.불서류와 동경.수정등 16종 75점이다.파계사 보살상과 복장유물은 보물 제 992호로 지정되었다.
1740년 9월에 작성된 발원문에는 영조가 파계사에 탱화 천불을 희사하고 왕실의 원당으로 삼는다.성상의 청사상의를 만세유전을 빌면서 복장한다고 기록하였다.
곤룡포는 전해지지만 왕의 도포는 유일한 유물이다.
영조는 어떤 이유로 자신이 입던 도포를 벗어 파계사 관세음보살 복장에 봉안하고 만세유전을 기원했을까? 영조는 어떤 이유로 11세 시절에 자응전이란 편액을 써서 파계사로 내려 보냈을까?
파계사 기영각에는 성종.숙종.덕종.영조 네분의 위령을 모시는 조선 왕실의 원당이 되었을까? 파계사 입구 250년된 느티나무는 왜 영조대왕 나무로 불리고 있을까?
흥미로운 영조의 전생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사진 1번 파계사 관세음보살 복장에서 나온 영조의 도포
사진 2번 파계사 원통전의 관음상.
오래된 불상과 탑은 우리 역사의 블랙박스이다.
복장유물을 통하여 새로운 역사가 밝혀진다.
사진 3번 영조가 11살때 써서 파계사에 보낸 편액,자응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