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강의 주제는 **[70-80년대 폭발적 성장과 대형 집회: 민족 복음화의 불길]**입니다.
[제8강] 70-80년대 폭발적 성장: 광야에 불어온 성령의 바람
본문 말씀: 이사야 54장 2절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1970년대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격한 산업화의 시기였습니다. 시골을 떠나 서울로 몰려든(이촌향도) 수많은 청년과 노동자들은 외롭고 고단했습니다. 판자촌에 살며 공장에서 하루 14시간씩 일하던 그들에게 교회는 유일한 **'안식처'**이자 **'가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가난한 심령들 위에 성령의 불을 떨어뜨리셨습니다.
1.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전도대회: 110만 인파의 기적
1973년 5월 30일부터 6월 3일까지, 여의도 5.16 광장(현 여의도공원).
당시 한국 기독교 인구는 300만 명이 채 안 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데 5일간 연인원 320만 명이 모였고, 마지막 날 집회에는 110만 명이 운집했습니다. 당시 서울 인구가 600만 명이었으니, 기적 같은 숫자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의 설교 통역은 극동방송 김장환 목사님이 맡았습니다.
"Jesus said!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의 강력한 메시지에 수십만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믿겠습니다"라고 결신했습니다. 이 대회는 한국교회에 **"우리도 할 수 있다(Can Do Spirit)"**는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대형 집회의 서막을 알렸습니다.
2. 엑스플로 '74 (Explo '74): 민족 복음화의 정점
그로부터 1년 뒤인 1974년 8월, CCC 김준곤 목사님이 주도한 **'엑스플로 74'**가 열립니다. 주제는 "예수 혁명(Jesus Revolution)".
이 집회는 단순한 부흥회가 아니었습니다. **'전도 훈련'**이었습니다.
낮에는 32만 명의 성도들이 서울 전역의 학교와 교회에 흩어져 '4영리 전도 훈련'을 받고, 밤에는 여의도 광장에 모여 철야 기도를 했습니다.
당시 여의도에는 아무런 시설이 없었습니다. 여름 장마철,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면서도 100만 성도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습니다. 비닐을 뒤집어쓰고 "주여! 이 민족을 구원해 주소서!"라고 외치는 그 울부짖음(Roar)이 한국의 영적 기류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김준곤 목사님의 그 유명한 **'민족 복음화의 꿈'**이 여기서 선포됩니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3. 기도원 운동과 성령의 역사: 산마다 불이 붙다
대형 집회의 열기는 개체 교회와 **'기도원(Prayer Mountain)'**으로 이어졌습니다.
세계에서 한국교회만 가진 독특한 브랜드가 있습니다. 바로 **'통성기도(Tongsung Prayer)'**와 **'철야기도'**입니다.
1970~80년대, 오산리 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비롯해 삼각산, 청계산 등 전국의 기도원들은 365일 24시간 "주여 삼창" 소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암 환자가 낫고, 귀신이 떠나가고, 방언이 터지는 성령의 은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삶이 너무 고달팠던 우리 부모님 세대는 그 산에서 나무 뿌리를 뽑으며 울었고, 그 눈물이 오늘날 한국교회 부흥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4. 섭리적 해석: 왜 하나님은 '성장'을 주셨는가?
신학도 여러분, 냉정하게 질문해봅시다. 왜 하나님은 70-80년대 한국교회에 이런 폭발적인 성장을 허락하셨을까요? 단순히 교회 크기를 키우기 위해서였을까요? 아닙니다.
① '제사장 나라'를 위한 준비 (Global Mission)
하나님은 한국을 **'선교하는 나라'**로 쓰시길 원하셨습니다. 선교를 하려면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필요합니다. 70-80년대의 폭발적 성장을 통해 하나님은 세계 선교를 감당할 수 있는 **'기초 체력'**을 만들어주셨습니다. 실제로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선교사들이 전 세계로 파송되기 시작합니다.
② 사회적 안전망 역할
급격한 사회 변화와 군사 독재의 억압 속에서, 대형 교회와 기도원은 국민들의 '한(恨)'을 풀어주는(Han-puri) 영적 카타르시스의 공간이었습니다. 만약 교회가 이 에너지를 흡수하지 못했다면, 한국 사회는 더 큰 혼란에 빠졌을지도 모릅니다.
[결론 및 적용]
사랑하는 원우 여러분,
우리는 70-80년대 선배 목사님들의 목회 현장을 보며 무엇을 느낍니까?
그때는 에어컨도 없었고, 음향 시설도 열악했습니다. 세련된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엔 **'야성(Wildness)'**이 있었고 **'복음에 대한 굶주림'**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나 좋은 환경에서 목회합니다.
하지만 여의도 광장의 그 뜨거움은 어디로 갔습니까?
"성장은 멈췄고 전도는 안 된다"고 패배주의에 젖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때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문제는 환경이 아니라, 우리 안에 **'민족을 향한 뜨거운 눈물'**이 말라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70년대의 '방식'이 아니라, 그 본질인 **'간절함'**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성장의 빛 뒤에 드리워진 그림자, 교회가 사회 속에서 어떤 목소리를 냈는지(혹은 침묵했는지)를 다루는 **[제9강. 사회적 책임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교회가 성장주의에 취해 있을 때, 거리에서 "정의"를 외쳤던 또 다른 기독교인들의 이야기를 듣게 될 것입니다.
다음 주까지 아모스 5장 24절, "오직 정의를 물 같이..." 말씀을 묵상해 오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