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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위로할까
전도서 4 : 1 - 6
전도자 솔로몬은 해 아래서 학대받는 모든 사람을 동정 어린 눈으로 보았습니다.
본문 1절에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리고 계속해서 한 말은 “내가 살아있는 산 자보다 죽은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 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 낫다 하였노라”하였습니다.
얼마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힘이 들면 이런 표현을 하였을까 짐작이 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사실 이 전도서를 쓴 솔로몬은 자신이 어떤 학대를 받거나 육신적인 고통을 당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정적인 눈으로 학대받는 모든 사람들을 볼 때 가슴이 아픈 것을 느꼈습니다.
학대를 받는 자가 억울하고 괴로워 눈물을 흘리지마는 세상에서 저희를 위로해 줄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솔로몬은 과연 훌륭한 사람이었다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내려오는 우리말에 ‘제 발잔등에 떨어진 불’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대개는 사람들이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에만 관심을 집중시키지 다른 사람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그렇게 관심이 없을 뿐더러 동정을 표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의 교훈은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에 무관심하지 말고 많은 관심을 가지고 동정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당하는 어려움을 얼마나 관심있게 동정으로 보십니까?
출애굽기 3장에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을 치고 있는 중에 떨기나무 가운데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았다”(출애굽기 3장 7절)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십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현재와 미래 그리고 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현재입니다. 이것을 영원한 현재(Eternal Now)라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숨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옛날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에 계시며 음부에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나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낮과 같이 비치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편 139편 7~12절)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어두운 면까지 밝히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숨길 것이 없습니다.
옛날에는 시집살이가 어려웠습니다., 어떤 지혜있는 여인은 시집에 가서 고생 고생하는 사실을 혼자서만 괴로워하고 혼자서만 눈물 흘리지 친정 집에 돌아와서는 “너 시집살이 어떻더니?” 하고 물으면 “잘 지내고 있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친정 부모님에게 조금이라도 걱정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아 고통을 혼자 씹는 여인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정말 힘들고 고생스럽고 억울한 일이 많아서 견디다 못해 자살을 하면서도 누구에게도 자기의 어려움을 내놓지 않고 세상을 끝낸 비극도 비일비재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낳은 부모도 내가 당하는 어려움을 모릅니다.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보십니다. 하나님에게 숨길 수는 없습니다.
어려운 사정 뿐만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한대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공정하게 판단하십니다. 세상 재판소에서는 공정을 기하는 것이 재판소의 이상(理想)이지마는 인간으로서는 공정을 기할 수가 없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왜요? 인간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므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를 무섭게 범한 사람이 아무 벌도 받지 아니하고 큰 길을 활보하며 다니는가 하면 아무런 죄가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형을 지고 감옥에서 평생을 지내는 일도 종종 있습니다.
인간 세계의 약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겉은 보나 속은 보지 못해서 그럽니다. 현재는 보나 지나간 일은 덮어 버리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곁도 보시고 속도 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판단은 정확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보실 뿐 아니라 그 백성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시편 91편 15절에도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부를 때에 들으십니다.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권합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시편 50편 15절).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내 힘으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이 환난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환난은 예고없이 임합니다. 그런데 꼭같이 환난을 당하지마는 이 환난을 대하는 자세 여하에 따라서 인생을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무엇이나 자기가 하는 것으로 압니다. 사업이 잘되면 자기의 수완이 좋고, 머리가 훌륭하고 일을 잘해서 되는 줄로 생각하기 때문에 잘될 때는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잘되지 아니하고 벽에 부딪치면 자기 능력의 한계를 느끼고 낙심하고 좌절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슨 일을 하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우리는 단지 동역자로 생각합니다. 이 말은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생각도 연구도 하지 아니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자세이기 때문에 더욱 성실히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혹시 생각했던대로 안되면 낙심하거나 원망하거나 좌절되니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살피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형통한 날에는 감사하며 찬송하며 환난의 날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게”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장 33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라고 환난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려울 때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왜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세상에서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을 불쌍하게 생각합니까? 먹을 것, 입을 것, 용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갑자가 어려운 일 당할 때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엄마!”하고 찾습니다. 부르짖습니다. 내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없는 아이는 찾을 이가 없습니다. 이것이 불쌍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령이 곤경에 처했을 때 아버지! 하고 눈물 흘리며 부르짖을 수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십니다.
뿐만 압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우고를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사람 사이에는 혹시 본의 아닌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두를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인간에 대한 오해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잘못 아심이 없습니다. 바로 아십니다.
요한복음 10장 14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운 문제가 무엇인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이 무엇인지도 아십니다. 지난 주일도 생각한대로 하나님은 나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의 형편을 알아서 바로 인도하고, 지켜주고, 먹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은 사람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시편 139편 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오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그렇습니다. 어진 부모는 갓난애가 입만 벌려도 그 어린애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을 알아서 공급해 줍니다.
하나님은 거기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몰라서 기도하지 못하신다고 합니다. 그럴 필요가 조금도 없습니다. 기도하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아빠나 엄마에게 말하듯 하면 됩니다. 아빠나 엄마가 어린애의 말 잘하는 것 듣고 감동이 되어 줍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말을 아름답게 해서 간구한다고 해도 그 말에 감동되어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시는 하나님께 아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고민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그에게 아뢰어야 합니다. 아이의 눈물은 아버지의 손을 폅니다.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주께 사정 아뢰잖아 평화 얻지 못하네
우리들이 어찌하여 아뢸 줄을 모를까
시험 걱정 모든 괴롬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어디 다시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근심 걱정 무거운 짐 아니진 자 누군가
피난처는 우리 예수 주께 기도 드리세
세상 친구 멸시하고 너를 조롱하여도
주의 품에 안기어서 참된 위로 받겠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이 땅 위에는 학대받아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눈물 흘리는 사람이 그 얼마입니까? 그러나 저희를 위로할 자가 없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계속하여 한탄을 합니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참된 위로를 얻기 위하여 고달프고, 지치고, 상처난 심령을 부둥켜안고 산으로 바다로 헤메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것을 통하여 위로를 얻으려 해봅니다. 그러나 번번히 실패하고 오히려 상처는 더욱 심각해 가기만 합니다.
술을 마셔보나 거기에 참된 위로가 없습니다. 춤을 추어 보았으나 그것으로 우리의 심령 깊은 상처를 싸매어 주지 못했습니다. 환각제를 사용해 보기도 하나 깨어나면 허탈에 빠졌습니다. 마약이 어떤 의미에서는 당장의 고통을 잊게하는 진통제가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근본 치료제는 못됩니다. 중독이 되면 속는 줄 알면서도 이러다가는 패가망신(敗家亡身)할 줄도 뻔히 알면서 “이번 한번만, 이번 한번만 더”하면서 심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맙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너의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이사야 55장 1-2절)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위로를 받으리라.”
그렇습니다. 참된 위로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장 3-10절의 말씀을 같이 찾아서 읽어 보실까요?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하시고자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4절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다.”
6절 “우리가 환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며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7절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예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절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절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의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10절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까? 이는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만 믿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아시아에서 힘이 지나도록 환난을 당해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 살 소망까지 끊어진 형편이었는데 이때 바울은 땅을 내려다보고 절망하고 포기하지 아니하고 오직 눈을 들어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생명의 주 하나님을 쳐다본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새 용기를 얻었습니다. 새 소망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선한 싸움 다 싸우고 달려갈 길 다 마치고, 믿음 끝까지 지켜서 의로우신 재판장 예수님에게서 의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가 우리를 위로하겠습니까?
우리를 위로할 분은 하나밖에 안계십니다. 불행과 역경 속에서 눈물 젖는 분 계십니까?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감당키 어려운 지친 심령 부둥켜안고 이 자리에 나오신 분 계십니까? 여호와를 앙망하세요.
우리 함께 구약 이사야서 40장 27-31절까지의 말씀을 찾아 읽고 기도하십시다.
27절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
28절 “너는 알지 못하느냐? 듣지 못하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절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