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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소원 두 가지
성경본문 : 잠언 30: 7-9
7.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8.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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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문수 목사(신반포교회)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소원을 갖고 살아갑니다. 잘 보면, 그 소원의 내용이 곧 그 사람의 인생의 기치관이며 수준입니다. 옛날 우리가 가난해서 먹을 게 궁하던 시절을 회고해 보면 당시 사람들의 소원은 아주 소박했습니다. 예를 들어 쇠고깃국에 하얀 쌀밥 실컷 먹고 싶다는 식의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 시대 사람들의 수준이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서 7개 장기를 동시에 이식한 7세 소녀 은서의 기사를 봤습니다. 은서는 태어날 때부터 소화 흡수가 안 되는 선천성 희귀병을 앓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적은 양의 식사만 하면서 필요한 영양분의 80%를 영양제 주사에 의존해왔다고 합니다. 그러다 이번에 장기 이식에 성공한 겁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네 소원이 뭐냐? 그러자 은서가 두 가지 소원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음껏 먹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가수 이승기 오빠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서, 얼마나 밥이 먹고 싶었을까 마음이 짠하면서 “역시 천진난만한 아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소원이 뭡니까? 노후 자금으로 돈 10억만 있으면 좋겠네요! 승진했으면 좋겠네요! 우리 아이가 아무 대학에 꼭 합격했으면 좋겠네요! 여러 가지 소원을 댈 수 있을 겁니다. 어떤 소원이든, 그것이 곧 우리 인생의 가치관이요 수준입니다. 그리그 그런 소원들이 쌓여지면서 우리 인생이 만들어집니다.
본문을 보니까, 잠언 30장을 쓴 아굴은 두 가지 소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굴은 당대의 지혜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말했다면 지나가는 식으로 말한 하찮은 소원은 아닐 겁니다. 하나님께서 꼭 이루어 주시라고 간구한 소원입니다. 그래서 이 소원을 흔히 ‘아굴의 기도’라고 부릅니다.
7절 보면, 그 소원은 보통 소원이 아니라 평생의 소원임을 알 수 있습니다. 7절.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내가 죽기 전에’라는 표현을 통해 아굴이 지금까지 기도해왔고, 앞으로도 계속 기도할 것이고, 평생에 기도할 제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구하였사오니’의 ‘구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샤알’(שׁאל)인데, 단순한 소원 정도가 아니라 졸라대며 애원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계속 끈질기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제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그 소원 두 가지가 뭡니까? 어떻게 보면 생뚱맞고 막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대개 생활 속에서 필요한 구체적인 소원을 댈 텐데, 아굴의 소원은 인격과 가치관에 관한 소원입니다.
거짓이 없게 해 달라, 정직한 인격을 소원하는 겁니다. 또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고 생활에 필요한 만큼 적당한 물질을 달라, 주어진 분복에 자족하는 가치관을 소원하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아굴은 인생의 근본적인, 내면적인 소원을 말하였습니다. 이것들은 일견 막연해 보이고 대단치 않아 보이지만, 사실은 이룰 수만 있다면 정말로 영원토록 후회가 없고 행복한 인생의 지름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한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소원이 아닌 엉뚱하고 허무맹랑한 소원을 갖고 살다가 낭패를 봅니까? 이루어지지도 않고, 또 설사 이룬다 하더라도 오히려 허망하고 불행해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경우는 대개 세상적인 소원들입니다. 단순히 물질만 구하거나 육신적인 일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거나, 혹 주신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만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런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소원보다 아굴이 구한 것처럼 먼저 근본적이고 내면적인 소원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소원의 업그레이드를 하자는 말입니다. 그럴 때 참 행복도 따라 올 줄로 믿습니다. 사람은 육신적인 소원을 이룬다고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이 먼저 충족될 때 행복하고, 더 나아가 육신적인 문제들도 해결되고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신하시고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아굴의 첫번째 소원 : 정직한 삶
아굴의 평생 소원 첫 번째는 정직한 삶에 대한 소원입니다. 8절(상).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 ”
아굴은 자신에게서 헛된 것과 거짓말을 제거해 주시라고 간구합니다. 헛된 것은 속임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부정직한 모든 요소들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는 성도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정말 정직하게 산다는 게 너무 힘듭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때로는 유혹을 해 오고, 때로는 핍박을 해 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동하고 타협하고 범죄하도록 유인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마음에 속삭입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모든 게 잘 될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주변을 보면 그런 사람들이 득실거립니다. 도덕적으로 해이해지고 타락한 모습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렇게 사는 게 마치 정상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심지어는 나 혼자 손해보고 뒤떨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결국 타협하고 대충 거짓을 자행하게 됩니다. 정직과 성결을 지키는 게 불가능해 보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만 갖고 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아굴은 정직한 삶을 위해 날마다 기도한 것입니다.
다윗의 모습을 봐도 정직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정직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방심했을 때 큰 죄를 저지르고 맙니다. 사무엘하 11장을 보면, 부하들은 전쟁터에 나가 피흘리며 싸우고 있는데 왕궁에서 빈둥거리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나중에는 죄악을 은폐하려고 그 남편 우리아를 살해하기까지 합니다. 그러고도 시치미를 뚝 떼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기가 막힙니다. 다행히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겨우 회개하는데, 그 때 다윗이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철저히 한탄하며 참회시를 씁니다.
그 중 시51:10 보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무슨 말인가요? 인간은 죄인인지라 하나님이 붙잡아주지 않으면 정직한 삶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그 영혼을 정직한 영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기도합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인간이 죄성을 가지고 있는지라 잘 하다가도 어느 순간 넘어집니다.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거짓을 행하기시 일쑤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비추어보면서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야 합니다. 나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믿음으로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요일1:7,9 “7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와 같이 깨끗한 양심을 지킬 수 있을 때 무엇보다 영적인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항상 당당합니다. 그런 당당함이 있을 때 평생 명예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이 치욕을 당하고 영적인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성경 인물 중 사무엘을 보면, 평생 정직한 삶을 깨끗한 이미지를 보존했던 사람입니다. 그에게 영적 자유가 있었습니다. 삼상12:1~5에 보면, 그가 사사로 오랜 세월 일하다 퇴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 담대히 말합니다. 혹시 자신의 재임 중에 부정한 것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누구든지 밝히라고 말합니다. 그 때 백성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정직한 삶을 인정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인생에서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연약해서 적당히 타협하다 이런 저런 부정직과 거짓을 행하면 두고두고 영적인 부담이 됩니다. 뒤탈이 날까봐 두려워집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신상털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어떤 사람을 겨냥하고 인터넷에 있는 흔적들을 일일이 찾아내서 까발립니다. 그렇게 한 사람 매장키는 것은 일도 아닌 시대입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아예 인터넷의 흔적을 지워주는 회사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취직하려고 할 때, 자기도 모르게 인터넷에 부정적인 자료가 남아 있으면 뒷조사를 당할 수 있으니까 대행업체에 의뢰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업체는 인터넷에 있는 나쁜 흔적을 지워주고 반대로 좋은 자료를 만들어 뿌려준다는 겁니다. 이런 서비스를 받기 위해 월 3천불을 지불한다고 하니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정직한 삶을 추구하고, 연약하기에 십자가를 붙들고 기도하면 이런 염려 전혀 없습니다. 얼마나 영적으로 자유하고 평안하겠습니까? 혹시 그런 가운데 불이익을 당하고 시련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성경 인물 가운데 요셉을 보십시오! 그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바로 왕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일하는데, 그 부인의 유혹을 뿌리치잖아요. 적당히 타협하면 수지맞는 기회였지만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며 살던 요셉은 절대 그럴 수 없죠. 붙잡고 늘어지는 여인을 뿌리치고자 옷을 벗어 던지고 자리를 피합니다. 여인의 모함으로 감옥에 갔지만 나중에 오히려 감옥에서 만난 관리를 통해 바로 왕을 만나고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까 결국 승리한 겁니다.
1982년 시카고에서 무서운 사건이 터졌습니다. 존슨앤드존슨의 해열진통제 타이레놀을 복용한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그 후 이틀 동안 7명이나 연달아 죽었습니다. 미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때 그 회사는 아무 변명도 하지 않고 신속하게 대응조치를 했습니다. 전국에 있는 전량을 회수했는데 1얼 달러어치에 달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병원과 약국에 50만 통의 협조문을 보냈습니다. 회장은 TV에 직접 나가서 실시간으로 상황을 보고하면서 회사의 장래보다 소비자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자 국민들의 마음이 진정되었고, 그러는 동안 진상이 밝혀졌습니다. 정신병자가 캡슐 안의 약을 꺼내고 그 속에 청산가리를 넣은 후 다시 판매대에 얹어놓았던 겁니다. 소비자는 아무 생각 없이 구입해서 복용했고 사망 사고가 터졌던 겁니다. 그 후 회사의 신뢰도를 급상승했고, 타이레놀은 처방전 없이 판매되는 의약품 중 1위를 차지하는 계기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경영학자들이 윤리경영을 언급할 때마다 모범 사례로 제시하게 됐습니다. 정직하게 기업을 운영할 때 손해보는 것보다 이익을 보는 게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정직한 삶을 위해 추구하고 기도하면 반드시 축복해 주신다고 말입니다. 시84: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뿐만 아니라 그 축복이 후손들에게까지 대대로 이어진다는 겁니다. 시112:1~2 “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2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그래서 영국 속담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 동안 행복하려면 이발을 하고, 일주일 동안 행복하려면 결혼을 하고, 한 달 동안 행복하려면 말을 사고, 한 해를 행복하게 지내려면 새 집을 짓고, 평생을 행복하게 지내려면 정직하라.” 정직한 삶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행복해지는 길이요, 두고두고 후회 없이 승리하는 길임을 믿습니다.
여러분,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좋아지고 군사력이 강해지는 게 최고가 아닙니다. 그건 기본입니다. 이에 앞서 국민들의 도덕성이 높아져야 합니다. 그게 흔히 말하는 국격 아닙니까?
일찍이 백범 김 구 선생이「내가 원하는 나라」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하지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해 주고 더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도산 안창호 선생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거짓은 나의 불구대천지 원수”라며 정직을 생활화하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한 마디로 ‘정직 코리아!’를 소원한 겁니다. 금년에 총선과 대선이 있는데, 정말 정직한 지도자가 선출되어 국민들에게 정직의 본을 보여주면서 정직한 나라를 이루어가는 모습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반드시 축복하시고 세계선교의 선한 도구로 쓰실 줄로 믿습니다.
아무쪼록 우리 모두 아굴처럼 평생 정직한 삶을 위해 기도하고 힘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보증하는 축복의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2] 아굴의 두번째 소원 : 자족하는 삶
아굴의 두번째 소원은 자족하는 삶입니다.
8절(하)~9절. “ ...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9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얼른 보면 물질의 분량을 언급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건전한 가치관을 말하는 겁니다. 부하면 부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늘 생활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자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삶을 소원하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삶이 쉬워 보입니까? 사실은 굉장히 힘듭니다. 보통은 어떻습니까? 무조건 많이만 달라고 기도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굴은 소유 자체보다 그것을 잘 컨트롤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구한 겁니다. 사람이 연약한 죄인인지라 환경의 변화에 따라 마음이 변하기 십상입니다. 부해지면 자기도 모르게 교만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처럼 착각합니다. 사실은 그것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경고했습니다.
신8:12~14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 ”
광야에서 고생하던 시절 하나님이 도와주셨음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안타깝게도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이 경고의 말씀을 잊고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의 부가 오히려 저주가 되고 말았습니다.
도루묵이란 고기가 있죠. 그 이름과 연관된 재미있는 이이갸기 전해져 내려옵니다. 본래 ‘목어’(木魚)라고 불렀는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신의주까지 피난 갔을 때의 일입니다. 빈궁한 중에 식사를 거르던 선조가 유성룡이 구해온 생선을 먹고는 생전 그렇게 맛있는 생선은 처음 본다고 감탄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름을 ‘은어’(銀魚)로 바꾸어 부르도록 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란 후 궁궐로 돌아와 그 때 먹은 은어가 생각나 수라상에 올리게 했는데, 너무 맛이 없었습니다. 임금의 입맛이 변한 겁니다. 좋은 반찬을 만히 먹다보니까 어렵던 시절 맛있게 먹던 은어가 이제는 맛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도로 목러로 부르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도로목어 → 도루목어 → 도루묵’ 이렇게 음의 변이가 일어난 겁니다. 우리 신앙도 이럴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는 하나님께 울며불며 매달 매달리다가 이제 부해지고 편해지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린 채 멀리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도루묵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환경이나 조건으로 만족을 구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참 만족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영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 절대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전5:1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풍요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하지 아니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서 신앙으로 마음의 욕심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져도 욕심이 더 크면 불만족스럽습니다. 불행이죠. 소유가 적어도 욕심을 조절하면 만족스럽고 행복해집니다.
여러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need)를 채워주시지 탐욕(greed)을 채워주시지 않습니다. 욕심을 채우려고 하면 절대 불가능하고, 하나님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욕심으로 인생을 망가뜨립니다. 성경에서 탐욕을 추구하다 망한 사람의 이야기가 여럿이 있는데, 그 중에 아합 왕을 꼽을 수 있습니다. 열왕기상21장을 보면, 그의 탐욕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아쉬울 게 뭐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왕궁 근처 나봇의 포도원에 욕심을 냅니다. 마음에 욕심이 들어가니까 그때부터 스스로 불행해집니다. 밥맛도 없고, 삶의 의욕을 상실합니다. 부인 이세벨의 충동질로 나봇을 살해하고 그 포도원을 차지합니다. 그런데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사건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저주받고 아합 왕가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러니까 멀쩡하던 사람도 욕심이 들어가면 불행해짐을 알아야 합니다.
약1:14~14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래서 성경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필요한 만큼 구하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 중에 매일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는데, 욕심을 내서 거둔 자나 필요한 만큼 거둔 자가 똑같았다고 합니다.
출16: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신기한 일이죠. 그런데 사실은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습니다. 욕심 부려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웅다웅하며 분주하게 살지만 밥 세끼 먹고 옷 한 벌 입는 것 마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도 주기도문 가운데 뭐라고 가르쳐 주셨습니까?
마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는 말은 욕심 부리지 말고 적당한 소원을 가지라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족의 비결입니다. 딤전6:6~8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석이버섯 채취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석이버섯은 특이하게도 깎아지른 절벽의 바위에 붙어서 서식하는 버섯으로 식용과 약재로 쓰입니다. 고소득을 올릴 수 있어 바위 위에 올라가 채취하는 위험 부담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채취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초보자들과 고수들의 채취법이 다르다는 겁니다.
초보자들은 아래에서부터 무조건 버섯이 보이는 대로 따라가면서 채취합니다. 그러다 보면 너무 멀리 갔다가 돌아오기 힘든 경우가 생깁니다. 목숨의 위협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반면 고수들은 산등성이 아래서 산을 전체적으로 훑어보고 먼저 목표지점을 선정한다고 합니다. 그 후에 그곳으로 곧바로 올라간 후 거기서부터 훑어내려 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혀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고 충분히 안전하게 채취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지나치게 욕심을 부리지 않고 자기가 차지할 수 있는 만큼 정해놓고 사는 게 삶의 지혜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인생을 살다가 가난과 시련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하나님이 주신 영적 은혜들을 기억하면서 잘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전의 축복을 주시고 두고두고 보상해 주십니다. 욥을 보십시오! 극한 시련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부인하지 않고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욥1:21~22
“21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그한 시련 가운데서도 끝까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지켰던 욥을 하나님이 결국은 회복시치시고 갑절의 축복으로 갚아주셨습니다.
하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궁핍한 상황 가운데 처음에는 원망과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영적으로 구원해 주셨음을 깨닫고 노래합니다.
합3:17~18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그리고 혹시 하나님이 우리에게 풍성하게 주시면 잉여축복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선한 일을 위해 헌신하면 됩니다. 그러면 인생에 영원한 영광이 됩니다.
딤전6:18~19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부해도 겸손히 하나님을 섬기고, 가난해도 인내하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대로 자족하고 주의 일에 헌신하는 삶! 이게 바로 아굴이 평생 소원하던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저마다 여러 가지 소원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위해 도전하고 노력합니다. 기도도 합니다. 그 소원들이 우리 인생의 내용과 가치를 결정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떤 소원을 갖고 있습니까? 오늘 말씀에서 본 대로 아굴의 평생 소원 두 가지를 나의 것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평생 행복한 인생, 두고두고 후회 없는 영원히 존귀한 인생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