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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마지막 시대
23:31-36
31. 여호아하스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삼세라 예루살렘에서 석달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하무달이라 립나 예레미야의 딸이더라
32. 여호아하스가 그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니
33. 바로느고가 저를 하맛 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고 또 그 나라로 은 일백 달란트와 금 한 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 하고
34. 바로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
35. 여호야김이 은과 금을 바로에게 주니라 저가 바로느고의 명령대로 그에게 그 돈을 주기 위하여 나라에 부과하되 국민 각 사람의 힘대로 액수를 정하고 은금을 늑봉하였더라
36. 여호야김이 왕이 될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스비다라 루마 브다야의 딸이더라
37. 여호야김이 그 열조의 모든 행한 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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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설교 제목은 유다의 마지막 시대입니다. 그유명한 남유다 왕국이 이제 마지막 때를 맞이했습니다. 요시아왕이 죽은후에 하나님의 재앙이 과연 그나라에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아하스 왕 다음에 여호야김왕, 여호야긴왕 그다음에 네 번째로 시드기아왕. 이렇게 마지막으로 네왕이 다스리는 유다의 마지막 시기로 접어들어 갑니다.
마치 종말의 때와 똑같습니다. 요즘의 때라고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이제 이 세상 나라를 끝내시는 종말의 때가 가까워온 오늘날의 시대와 영적 상태가 비슷하다고 말씀드릴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마지막 시대의 모습들을 한번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31절에 요시아왕 후에 여호아하스라는 왕이 등장합니다. 요시아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32절에 보니까 "여호아하스가 열조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네왕들이 전부다 똑같습니다. 이 구절이 하나씩 다 들어가 있습니다. 또 37절에 보면 그다음에 여호야김왕도 "열조의 모든 행한일을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전부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야긴 왕도 마찬가지, 시드기아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때의 왕들이 전부다 악을 행하는 왕들입니다. 세상 종말의 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악을 행하며 점점 더 죄악의 깊이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요즘도 죄악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죄악이 깊어집니다. 유다 시대의 마지막때도 이렇게 왕들이 다 악을 행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임합니다.
또 이 네왕들의 모습을 보면 여호아하스왕은 33절에 보면 바로누고가 저를 하맛땅 립나에 가두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지 못하게 하여서 3개월만에 왕이 끝났습니다. 또 그나라로 은 일백달란트와 금 한달란트를 벌금으로 내게했습니다. 성경 열왕기하와 역대하 그리고 예레미아 52장을 같이 연구해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네 왕들이 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왕이었다는 선언이 공통이고 또 두 번째로 이들은 전부다 은, 금으로 벌금을 내면서 살거나 아니면 이들이 통치할때에 은금을 다 빼앗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축복주신 것을 다 빼앗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35절에 보면 여호야김왕같은 경우도 모든 백성들에게 은금 세금을 정해서 바로누고에게 갖다 바칩니다. 여호야긴왕도 은금까지 다 바벨론 왕에게 다 빼앗기고 시드기아왕도 다 빼앗겼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은 것을 다 빼앗기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그다음에 네왕들의 공통은 전부다 잡혀간다는 것입니다.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혀가고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아왕은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이것은 또 무슨 꼴입니까.
여호아하스왕이 애굽으로 잡혀 갔다는 말이 열왕기하 23장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역대하 36장 4절에 보면 애굽으로 잡혀 갑니다. 성경은 이렇게 같이 보면 좋습니다.
왜 잡혀 가는고하니 뭔가 배반한게 있었습니다. 여호야김왕은 애굽으로 잡혀가서 거기서 죽었습니다. 여호야긴왕도 베벨론으로 잡혀가고 시드기아왕도 두눈이 빼어져서 바벨론으로 잡혀가서 거기서 죽습니다. 이렇게 비참하게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모습들이 네왕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이 고난을 당합니다.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은금도 다 빼앗기고 백성들은 과중한 중세에 허덕이고 주위 열강들이 계속 공격을 해오고 왕들은 다 잡혀가고 정말로 모든 면에 있어서 어둠의 때, 마지막 종말의 때의 모습을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 네명의 왕들중에 조금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한 왕이 있었다는 것을 성경이 보여줌으로해서 우리들에게 메세지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그왕은 바로 세 번째왕, 여호야긴왕입니다.
이 여호야긴왕에 대해서 열왕기하 마지막 부분이 어떻게 설명을 하고 있는지 봅시다. 다른 왕들은 전부 잡혀가서 애굽에서 죽고 바벨론에서 죽는데 이 비참하게 잡혀간 여호야긴왕은 열왕기하 25장 마지막 부분에 어떻게 설명되어 있는지 보겠습니다.
27절에 보면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 왕 에윌므로닥의 즉위한 원년 십이월 이십칠일에 유다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 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그는 사로잡혀 간지 37년만에 그 바벨론 감옥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37년간 감옥 생활하다가 다행스럽게도 풀려 났습니다.
28절 "선히 말하고 그 위를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높이고 그 죄수의 의복을 바꾸게 하고 그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고 저의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정수가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역사의 나라는 망해 버렸어도 마지막에서 두 번째 이 여호야긴왕은 이상하게 바벨론에 가서 37년간 옥살이 하는데 그러나 다행히 어느 시점에서 감옥에서 나와 그냥 평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왕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 위를 바벨론에 저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위보다 즉 바벨론의 다른 분봉 왕보다 높여 줬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 왕에 다음가는 그런 자리까지 높혀 주었습니다. 국무총리의 자리까지 높혀 주었어요. 죄수의 의복을 바꾸고 왕의 의복으로 바꾸었습니다. 일평생 항상 왕의 상에서 같이 먹게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쓸 것을 날마다 왕이 정수로 보내줘서 평생토록 끊이지 않는 그런 대단한 축복을 여호야긴이 받습니다. 좀 이상합니다.
나라도 다 망해버리고 종말의 때에 세 왕들은 애굽에 가서 죽고 바벨론에 가서 죽습니다. 이런 기사가 중요해서 예례미아 52장에 다시 한번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52장 31절 " 유다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지 37년 곧 바벨론왕 에윌므로닥의 즉위 원년 12월 25일에 그가 유다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어 놓아 그머리를 들게하고 그에게 선히 말하고 그의 위를 그와함께 바벨론에 있는 왕들의 위보다 높이고 그죄수의 의복을 바꾸게하고 그일평생 항상 왕의 앞에서 먹게 하였으며 그의 쓸 것은 날마다 바벨론 왕에게 받는 정수가 있어서 죽는날까지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이 여호야긴에 대한 기사가 예례미아에도 나와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두 번 반복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왜 이렇게 여호야긴왕이 이런 은혜를 받았을까요? 참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대비되는 시드기아왕은 52장 11절에 보니까 "시드기아의 두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그 죽는날까지 옥에 두었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야긴왕은 나중에 옥에서 풀려 나는데 시드기아왕은 죽을때까지 옥에 놔둬 버렸단 말입니다. 분명히 무슨 차이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례미아를 잘 공부해 보면 다른 왕들은 전부다 애굽에 반역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듭니다. 전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왕은 바벨론이 포위 공격할 때 순순히 항복했습니다. 자기 집안 사람까지 손을 버쩍들고 항복을 해버렸습니다. 예레미아서에 이 마지막 시드기아왕에게도 예례미아가 그렇게 강조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에게 항복하라. 항복하라. 항복하라." 그런데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세왕과는 달리 여호야긴왕은 바벨론 앞에 금방 손을 들어 항복합니다. 사실 나에게 항복하면 옥에 가두었다가 나중에는 풀어 줍니다. 그러나 내앞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저항하면 눈을 빼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감옥에서 죽으라고 놔두는 것입니다. 그런일이 역사 속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도 한번 말씀드렸습니다만 도대체 왜 항복하지 아니하고 이방 민족에 끝까지 대항한자들은 비참하게 다 회복되지 못하고 죽었는데 이방 민족의 권세앞에 항복해 버린 여호야긴왕은 그 나라 온 수백만 백성중에 유일하게 이렇게 영광을 차지해서 나중에 다시 왕으로 세움을 받게 됩니까?
우리는 먼저 바벨론 제국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께서 매로 사용하신 도구입니다. 이방 민족이긴 하지만 하나님이 매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매로 이백성들을 치는데 다른 왕들은 전부다 애굽왕을 배반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아하스왕은 성경에 보면 배반했다는 말은 안나옵니다. 그러나 갑자기 애굽왕이 왕을 경질시켜 버리고 잡아갑니다. 이런걸 볼 때 여호아하스왕도 무언가 애굽왕에게 조공을 바치다가 배반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다른 왕들은 배반했다는 것이 성경에 나옵니다.
그러나 여호야긴왕은 바벨론 세력에 배반하지 않고 항복하고 두손을 들며 고분 고분했습니다. 바벨론이나 그때당시 애굽의 세력은 이스라엘, 유다를 징계하기 위한 하나님의 징계의 수단이었습니다. 징계의 도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과 애굽이라는 매를 들고 유다 백성들을 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유다 백성들이 영적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어떻게 이방 민족앞에 굴복할 수 있고 항복할수 있으랴'하고 끝까지 대항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예례미아 선지자가 항복하라면 불사름 당하지 않고 항복하면 죽임당하지 않고 항복하면 영원히 행복하게 살수 있다고 말해도 영적 사실을 깨닫지 못한 시드기아왕은 결국 항복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의 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땅에서 당하는 우리의 고난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인간이 범죄해서 하나님께서 징계의 벌로 때리시는 채찍의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은 맞을 때 빨리 항복해야됩니다.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이 징계로 때리시는데 끝까지 대항하며 쫓아가서 부모님이 들고 있는 매를 꺾어 버리면 되겠습니까? 그때는 무조건 항복해야 됩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의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는 우리가 예수 잘 믿고 있는데 하나님이 내게 징계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시기해서 예수를 못믿게 하려고 핍박하고 박해하고 우리 가정에 어려움을 주는 순수한 사단이 주는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매로 사용하셔서 때리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복음 확장을 방해하려고 우리 예배 생활, 기도 생활 못하게 하려고 마귀가 막는 고난, 사단이 막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이 오면 그때는 항복하면 안됩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사단이 계속해서 어려움을 주자 바울이 항복 합니까? 절대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면서 마귀와 대적합니다. 이럴때는 마귀와 대적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 고난 앞에 굴복하면 안됩니다. "담대하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 장군처럼 앞을 두려워 말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려야 됩니다. 아이성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가 도전해서 정복해야 될 우리의 목표가 됩니다.
내가 신앙 생활 잘해서 사단이 도전하여 막아서는 이런 고난 앞에서 우리는 굴하지 말고 항복하지 말고 도전해야 하지만 하나님이 벌로써 내리는 채찍, 깨달으라고 내리는 채찍, 징계의 채찍을 때릴때는 맞아야 합니다. 맞고 겸비하며 하나님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대들면 안됩니다. 그때는 항복해야 되는 것 입니다.
이 유다 백성들은 지금 항복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부모가 매들고 "무릎꿇고, 두손들어" 하는데 부모한테 대드는 경우가 됩니다. 그리고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마귀가 손들라고 할 때 그 앞에서 잘못했다고 비는 이런 꼴이 됩니다. 그때는 담대하게 해야합니다.
이 세상 그래서 참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을 주신다고 했는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일을 그르쳐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병에 걸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의 기도를 자세히 분석해 보신 분은 금방 알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지금 징계로 질병을 내리셨는지 아니면 이사람이 뭔가 예수일을 잘하고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사단이 막으려고 하는 질병인지 목사도 자세히는 알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 꼭 이 두가지가 들어갑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질병과 고통이 죄로 인하여서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하여서 하나님이 때리시는 채찍, 죄로 인한 고난이라면 우리가 회개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이 사람의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목사도 자세히 다 알수는 없습니다. 때로 느껴지는게 있기는 있지만 그러나 일반적인 경우는 다 알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번 기도하고 그다음에는 "또 이 고난이 이 사람이 믿음 생활 잘하려고 하는데 사단이 어려움을
주고 박해를 주는 사도행전의 복음의 진전을 막는 사단의 도전이라면 하나님 아버지 이 질병 이기게 하옵소서. 예수의 이름으로 물러가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같이 하게 됩니다.
고난에는 두 종류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채찍의 고난은 죄를 지어서 맞는 고난인데, 야고보서에 이것은 되도록 맞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단이 시기한 의로운 고난, 이것은 좋은 고난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고난을 당할때에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말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고난 뒤에는 하늘에서 준비된 상이 크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나에게 닥쳐오는 고난들을 잘 분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목회자도 물론 예외는 아닙니다.
목회자도 목회하면서 어려움 당하지 않습니까? 그럴 때에 '내가 정말 잘못해서 하나님이 교회를 통하여 나를 때리시는 채찍의 고난인가?'라는 생각이 들면 목사라도 버쩍 손들어야 합니다. 교인들앞에서 버쩍 손들어야 됩니다. 무릎꿇고 회개해야 합니다. 항복해야 합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교회를 이끌고 나가는데 교회가 부흥되고 전진해 나가는데 사단이 막으려고 하는 사도행전의 고난일수도 있습니다. 그때에는 목사가 항복하면 안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이 절대 항복하지 않고 기도하면서 전진했습니다.
그런데 이 두가지는 분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니까 기도생활 하면서 분별의 영을 달라고 합니다. 이 고난이 어떻게 해서 온 고난인가를 분석해야 그 다음 나의 행동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분별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볼때도 그 목사가 분명히 잘못하고 교만해서 어려움을 주는데 항복을 안하고 끝까지 버티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성도들의 어려움을 주는 것을 사단이 주는 것이라고 잘못 분석 하면서 자신이 항복해야 되는데 하나님이 매로 주시는것인데 오히려 성도들을 사단이라고 마귀라고 하면서 도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잘못 판단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력이란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있어서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이럴때는 항복해야지 성도들이 마귀짓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여튼 이 마지막 시대에는 내가 잘못해서 당하는 징계의 채찍이 참 많습니다. 이런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여호야긴왕처럼 우리가 잘못했을 때 하나님앞에 회개하며 손을 들고 항복하는 사람은 이 무서운 종말의 재앙의 때에도 하나님께서 나중에 들어 위로하시고 높혀 주는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지금은 종말의 때를 맞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의 재앙과 심판이 임해서 사회는 발전하지만 고통이 심해지고 죄악이 기승을 부리고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이 없고 고난이 더 심해지는 유다 말기와 같은 상황이 지구상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유다 네왕 시절에는 재앙으로 진노하시는 시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재앙이 많은데 우리나라도 많은 재앙을 겪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가 어려움 당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 하면서 하나님께로 돌아 올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의 특징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때리실 때에 하나님이 때리시는 것을 다 맞고 그대로 반항없이 내몸에 맞으면 하나님이 나중에 위로 하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영적 분별력입니다.
언젠가 한번 말씀 드렸는데 오늘 본문과 연관시켜서 다시 한번 보십시다.
사무엘하 16장 5절입니다. " 다윗왕이 바우림에 이르메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 지금은 다윗이 하나님의 채찍을 맞고 있는 때입니다. 간음해서 죄지어 왕궁에서 쫓겨나 도망가는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는 시절입니다. 시기를 잘 알아야됩니다.
그런데 저 강건너 편에서 시므이라는 벤냐민 지파의 사람이 나오면서 다윗왕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의 말을 합니다. 그래도 명색이 아직 왕인데 말입니다.
그 저주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 또 다윗과 다윗왕의 신복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때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 우에 있더라, 저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모든 족속의 피를 여호와께서 내게 돌리셨도다 그대신에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네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히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자인고로 화를 자초하느니라 "
시므이가 이렇게 저주를 하자 군대 장관 경호대장 아비세가 "이 죽은개가 어찌 내주 왕을 저주 하리이까"하며 칼을 빼들고 건너가서 그를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랬더니 왕이 뭐라고 합니까?
그러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다윗의 대답을 한번 보십시다.
저가 저주 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다 "
이 시므이 뒤에서 하나님이 시므이를 사용하는 것을 다윗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에게 어려움을 계속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나에게 고통주게 하는 것은 아닙니까? 내가 죄지어서 내
가 잘못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는 분명히 이런 시각으로 볼수 있어야 합니다.
12절입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다윗은 자신이 저주로 얻어 맞으면 우리 하나님 나중에 분명히 일으켜 세워 주시고 이 때린 매때문에 나중에 하나님이 반드시 위로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모님도 자식이 잘못했을 때 매를 때리다가 아이가 계속 매를 맞고 울면 어느 순간에 매를 집어 던져 머리고 다시 그자식을 끌어 안아서 위로해 주십니다. 부모의 모습, 하나님도 이렇게 하실 것을 다윗은 알았던 것입니다. 이 다윗왕의 왕권 다시 회복됩니까 안됩니까? 물론 됩니다.
여호야긴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통하여 내리시는 징계에 여호야긴은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37년간 감옥에서 그 숱한 나날들을 눈물로 회개하며 지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야긴은 다른 왕들처럼 감옥에서 그의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니라 기가 막히게 하나님이 다시 왕으로 세워 주신 것입니다. 평생토록 하나님의 평안함과 왕권의 존귀함으로 하나님이 다시 위로해 주신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다윗의 인구 조사에서도 나옵니다. 다윗이 죄를 지고 백성들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징계하신 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세가지의 선택권을 주셨습니다.
3년 동안의 가뭄과 3개월 동안 대적에게 쫓기는 것. 3일동안 온역에 드는 것중 한가지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직접 맞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하신 하나님이니까 때리시다가 금방 거두실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때리시다가 다시 위로해 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직접 맞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다윗의 나라 백성들을 온역으로 치셔서 칠만명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금방 거두시고 "이제는 족하다 그만하라" 하시면서 갑자기 성전 건축할 터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리아산에 그 유명한 솔로몬 성전의 자리가 만들어 졌습니다.
솔로몬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아라우나의 타작 마당에 세워진 예루살렘 성전에와서 하나님께 기도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들어 주셨습니다. 솔로몬도 그성전에서 천번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왕때 엄청난 부강한 나라로 그나라를 복주셨습니다.
때리신 다음에 주시는 위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가지로 생각하면 됩니다. 여호야긴왕이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여호야긴은 항복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의 채찍을 때릴 때 회개하고 반드시 하나님이 나중에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나의 죄로 인한 고난을 깨닫지 못하고 옆사람을 구박하고 오히려 이 고난에 대해서 인간적 방법으로 도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매앞에서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나중에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신앙 생활하며 믿음 생활하고, 기도 생활하고, 말씀 생활하는 가운데 우리들 모두가 점점 영의 눈이 밝아져서 시드기아처럼 잘못 분별하는 자가 아니라 여호야긴처럼 바르게 분별해서 이 험한 영적 혼미의 시대에 정말로 말씀대로 살며 정확하게 지혜롭게 살며 여호야긴왕처럼 살아서 여러분의 앞날에 지혜로운 자에게 주시는 칭찬과 지혜로운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한 여러분의 앞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