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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형 대신 써야 하는 수기
김미선이 받은 형벌은 사형이었다. 사형이 언도되는 순간 김미선은 만주 벌판에서 겪었던 칼바람보다 더 차고 예리한 현기증에 휩싸였던 것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두 가지 모습이 한꺼번에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들의 얼굴과 이원조의 얼굴이었다. 그 두 모습은 체포된 이후 줄곧 마음에서 맞부딪치고 뒤엉켜왔던 문제였다. 그냥 북행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아니야, 두 새끼들의 그 꼴을 보고는 차마 어쩔 수 없었어... 하지만, 이렇게 잡혀버렸으니 무슨 소용이야... 아니지, 전혀 예상하지 않은 위험은 아니었지. 잡히더라도 죽지만 않고 몇 년 징역살이하고 나서 자식들을 지키는 것이 더 낫다고 각오는 했었지. 이원조 그분은 나의 그런 마음까지 헤아렸던 것일까?... 그분의 말없는 묵인은 무슨 의미였을까? 자식 가진 여자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실 분이야. 나는 당을 버린 것이 아니야. 난 혁명을 포기한 것이 아니야. 어린 자식들을 살려내기 위해 잠시 투쟁을 멈춘 것뿐이야. 그분은 날 믿기에 그런 어려운 묵인을 한게 아닌가. 하지만... 사형을 당하게 되면 어쩔 것인가! 아니야, 아니야, 그럴리는 없어. 군인도 아니고, 사람을 죽인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기자 노릇을 한 것뿐인데, 아무리 살벌한 세상이라 해도 죽이기야 하려고... 조사를 받는 동안에 날마다 되풀이한 생각들이었다. 그런데 형벌은 막상 사형이었다. 언도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이원조의 얼굴은, 이럴줄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로 가슴을 쳤고, 두 아이의 얼굴은, 이 불쌍한 것들아! 하는 울부짖음을 솟게 했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눈물도 보이지 않았고, 법정을 나설때도 흐트러짐 없이 똑바르게 걸었다. 그런 상태는 감방으로 돌아와 허물어지고 말았다. 명백한 죽음 앞에서 확대되는 건 두 자식뿐이었다. 이미 멀리 떠나간 당의 존재는 의식되지 않았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면 어린 두 자식은 어찌 될 것인가... 그 절박한 생각 앞에서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혁명사상을 마음에 심기 시작하면서부터 멀어졌던 눈물이 마침내 한꺼번에 솟구쳐 떠오르고 있었다. 동지로서 짝을 맺은 남편이 백색 테러의 희생이 분명한 행방불명이 되었을 때 떨군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결의였던 것이다.
그런데 두 자식을 두고 떠나야하는 눈물은 걷잡을 수 없는 서러움이고 절망이었다. 남편과 자식의 차이... 남편은 죽음을 각오하고 투쟁하는 존재였고, 남편이 없어도 자식들은 자신이 키울 각오가 되어있었던 것이다. 비합법투쟁상태였지만 자신이 안전했던 그때와 사형선고를 받고 감방에 갇혀 있는 지금과는 자식들의 문제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어떤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는 사형을 면할 길이 없었다. 사람들은 날마다 사형을 당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막연한 기대에 비해 선고에 뒤따라 지체없이 시행되는 사형집행은 너무나 가까이에 있었다. 그래서 그 기대는 '기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혀 기대하지 않은 '엉뚱한 기적'이 김미선을 찾아들었다. 선고를 받고나서 이틀 뒤였다.
"김미선, 면회!" 자물쇠를 따며 간수가 던진 말이었다. 김미선은 말을 또렷이 들었으면서도 잠깐 어리둥절했다. 자신을 면회 올 사람이 없는데다가, 사형선고를 받은 사상범에게 면회가 허용된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야, 김미선! 빨리 나오잖고 뭘 꾸물거려." 간수의 눈 부라린 외침이었다. "예에, 나갑니다" 김미선은 서두르면서도 별로 좋지 않은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예감은 곧 사라지고 말았다. 사형보다 더 나쁜 일이 뭐 있을 것인가 하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김미선이 간수를 따라서 간 곳은 면회실이 아닌 어느 사무실이었다. 사무실에는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두 사나이가 앉아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김미선은 반사적으로 전신이 움츠러들며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것을 느꼈다. '계급장 없는 군복'이 주는 공포감이었다. 계급장 없는 군복들에게 그 동안 닦달을 당할 만큼 당한 반사작용이었다. 그들은 계급장 없는 군복 속에 하나같이 신분도 정체도 감추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가 만족할 만한결과가 나올때까지 무자비한 고문취조를 가해대는 자동기계들이었다.
"김미선, 고개 들어!" 곧 쥐어지를 듯한 우악스러운 목소리였다. 깍지낀 손아귀에 힘을 모으며 김미선은 무겁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김미선, 똑똑히 들어라. 너한테 특별히 살아날 기회를 주겠다. 이분 말씀 잘 듣도록!" 머리를 짧게 깎은 사나이가 핏기 서린 눈으로 김미선을 노려보며 윽박지르듯이 말했다. 김미선은 사나이의 눈길을 피해 그의 가슴께의 군복 단추에 시선을 매달고 있었다. 그녀는 '살아날 기회'라는 말에 아무런 느낌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자아, 말씀하십시오." 머리 짧은 사나이가 옆사람에게 말하며 담배를 빼들었다. 미국 담배 팔말이었다. "김미선 씨, 날 좀 보시오." 느낌이 전혀 다른 목소리였다. 굵고 낮은 그 목소리는 존대를 쓰고 있었다. 김미선은 '김미선 씨'라는 존칭이 너무 생경하게 느껴졌다. '동무'나 '동지'가 익숙해진 귀에 그 존칭은 너무나 설게 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그 동안 겪어 왔던 계급장 없는 군복과는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남자는 똑같은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었으면서도 머리칼이 짧지 않았으며, 얼굴이나 눈에 살기와 독기가 없이 안온하고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김미선 씨, 김미선 씨는 혹시 내가 누군지 알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이렇게 김미선씨를 찾아온 건 이분이 미리 말씀했다시피 김미선 씨에게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드리기 위해 한 가지 일을 권하고자 해서요." 그 남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래, 첫눈에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그런데... 저게 누굴까? 변심한 어떤 직원일까? 글쎄, 조직의 생리상 첫눈에 익을 정도의 얼굴이 누군지 모를 리가 없고, 얼굴만 눈에 익고 신원을 모르는 존재란 있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럼...저건 누굴까? ... 김미선의 머리는 짧은 시간에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내가 김미선 씨한테 권하고자 하는 일은 다른게 아니라, 김미선씨의 직업도 여자로서 흔하지 않은데다가, 괴뢰치하에서 겪은 바도 남다른 역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수기로 자세하게 기록해보라 그것이오. 물론 전향적인 입장에서 말이오. 김미선 씨는 이런 내 권유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소. 감정적으로 당장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를일이오. 그야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이오. 내 말이 갑작스러운데다가, 김미선씨가 한 좌익생활은 너무 오래됐기 때문이오. 그래서 말인데, 지금 당장 대답을 듣자는 것도 아니고, 대답을 하라는 것도 아니오. 앞으로 얼마 동안 생각할 여유를 드리겠소. 김미선 씨가 부잣집 딸로 태어나 좌익사상을 갖게 된 것을 난 충분히 이해하고 있소. 그건 젊은 혈기로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오.
일제치하에서 공산주의 혁명은 전인류적 맥락에서 조국해방의 한 방법으로 채택될 수 있었고, 그러한 자각 아래 많은 부잣집 자식들이 공산주의사상에 경도되었소. 김미선 씨만이 아니라 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소, 그러나, 우리는 공산주의혁명과 함께 조국의 해방을 이록한 게 아니라 이차대전의 연합군의 덕으로 해방을 얻지 않았소? 그건 주지의 사실인데, 그렇다면 해방이 이루어졌으니까 그 시점에서 목적하는 바 수단이었던 공산주의는 버려야되는 것 아니겠소? 아니, 공산주의 혁명은 조국해방만을 위한 단순목적이 아니라 인민해방까지 동시에 이룩하자는 복합목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소. 그래도 좋소. 인민해방은 어디 공산주의에서만 할 수 있는 전매특허물은 아니잖소. 용어가 다를 뿐 자유민주주의사회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 아니겠소? 보시오. 난리가 터지기 전에 벌써 이 대한민국에서는 농지개혁을 통해 지주라는 것은 없어지지 않았소? 그 덕에 나도 빈털터리가 됐소만. 이 점을 떠나서 생각하더라도 북한 공산주의자들이 저지른 만행은 도대체 뭐요. 동족간에 전쟁을 일으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살상했으며, 또 얼마나 많은 재산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냔 말이요. 그것까지도 또 덮어준다고 해요. 지금 전황은 어떤지 압니까? 괴뢰군들은 삼팔선 전역에서 북으로 다시 밀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김미선씨는 지금도 괴뢰군들이 서울로 다시 치고 내려오리라고 믿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럴 가망성은 전혀 없으니 어서 그런 허황한 꿈에서 깨나는 게 좋을 게요. 김미선씨는 만주에서부터 내려오면서 직접 봐서 알겠지만, 북쪽은 남쪽보다 더 심하게 잿더미가 돼서 북괴는 아무리 발악을 해도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소. 그럼 중공괴뢰들이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것들이야말로 보잘것없는 거지떼들이오. 인해전술을 하느라고 수없이 죽어버려 숫자도 염려할 것이 못되는데다 무기도 형편없으니 말이오. 자아, 이런 이야기는 너무 간격이 벌어지는 이야기니까 다 그만두고 좀더 직접적인 얘길 해봅시다." 그 남자는 말을 멈추며 담배를 빼들었다. 고생이라고는 모르고 살아온것이 분명한 그의 말끔한 얼굴에는 군복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웃음이 감돌고 있었다.
김미선은 그의 말 같지 않은 소리에 말끝마다 반격을 해대며, 그가 도대체 누구인지를 생각해내려고 애써왔던 것이다. 기억 속에서 그가 누군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고 있었다.
"뭐, 길게 말하지 않겠소. 사상이 도대체 뭐요? 그게 하나뿐인 생명과 바꿀 가치가 있는게요? 아니, 김미선 씨의 경우는 어린 두 자식까지 합해서 세 목숨이오. 물론 사상이란 어느 한때 가질 수도 있는 것이오. 또한 어느 때는 깨끗하게 버릴 수도 있는 게 사상이오. 김미선씨의 경우는 그때가 바로 지금이오. 그러니까 아까 내가 말한 수기를 쓰시오. 그걸 쓰기만하면 그대로 전향서 삼아 무죄석방이 될 것이오. 어서 그걸 쓰고 석방되어 두 자식을 데리고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새 인생의 광명을 찾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소. 신문기자도 글을 쓰는 직업인 이상, 같이 글을 쓰는 입장에서도 공적인 처리를 떠나 개인적으로도 돕고 싶소. 오늘은 이만 돌아갈 테니 며칠 생각해보도록 하시오. 실례하겠소." 그 남자는 담배를 끄고 몸을 일으켰다. 같이 글을 쓰는 입장! 김미선은 반사적으로 상대방을 쏘아보았다. 약간 긴 느낌을 주는 저 부르주아지의 전형적인 얼굴! 그녀의 의식 속에서는 마침내 그 남자의 얼굴과 이름이 일치되고 있었다. 아, 저 사람은 소설가 이아무개가아닌가! 그녀는 입속에서 부르짖었다. 소설가 이아무개는 머리 짧은 사나이를 앞서 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직도 젊은 놈이 그리도 해먹을 짓이 없어 수사기관 앞잡이 노릇이란말이냐. 그래, 네놈은 일정 때부터 이광수 꽁무니에 붙어 친일하고 싶어 몸살했던 놈이고, 해방이 되고나서 쓴다는 소설나부랭이도 술타령이나 연애질하는 것이 아니었더냐. 버러지같은 자식... 김미선은 팔을 낚아채는 손에 놀라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빨리 걸어!" 바로 앞에 간수가 버티고 서 있었다. 김미선은 무겁게 걸음을 떼어놓았다. 두 아이의 삐쩍 마른 얼굴이 선하게 다가왔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의식이 썩을 대로 썩어버린 삼류소설가 이아무개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으로 하고 싶었다. 그것은 두 아이를 미끼로 삼은 함정이었다. 지극히 인간적인 것 같으면서 더없이 비인간적인 회유... 그것은 몰인정한 수사관의 고문보다 더 잔인한 고문이었다. 역사의 발전법칙을 따라 행동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소위 소설가라는 작자가 그따위 교활한 짓이나 앞장서고 다니다니... 그녀는 어금니를 맞물며 다시 두 손을 깍지끼었다. 두 아이는 긴복도를 지나 감방에까지 따라오고 있었다.
이틀 뒤였다. 또 간수를 따라 감방으로 나갔다. 괴로움만 씹고 씹었을 뿐 마음은 그자가 원하는 쪽으로 전혀 움직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간수가 데려간 곳은 그자를 만났던 사무실이 아니라 정말 면회실이었다. 면회실에 들어선 김미선은 우뚝 굳어지고 말았다. 거기에는 뜻밖에 파삭 늙어버린 친정어머니와 깡마른 두 아이가 와 있었던 것이다. 아아, 이럴 수가 있는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부르르 떨었다.
"엄마아!" 울음 섞인 소리가 면회실을 울렸다. 작은아들의 목소리인 것을 그녀는 눈을 감고도 알았다.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 그냥 돌아서버릴까 했던 생각이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승욱아!" 그녀는 철망 쪽으로 내달았다. "엄마야, 보고 싶었어." 작은아들이 철망에 매달려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작은아들의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 잡히는 것은 철망을 움켜잡고 있는 꼬부라진 작은 손가락들뿐이었다.
"용욱아, 너도 손, 손!" 그녀는 숨이 가쁜 듯 큰아들에게 말하며 한 손으로 철망을 더듬었다. "엄마, 안녕하셨어요." 큰아들이 말하며 그녀의 손이 더듬고 있는 철망께를 잡았다. 그런 큰아들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큰아들의 눈물을 보자 그때까지 억누르고 있었던 그녀의 눈물도 기어코 터지고 말았다.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울음을 삼키며 두 아이의 손가락들을 정신없이 매만지고 있었다.
"고생이 많지야?" 친정어머니가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며 말했다. "아니요, 전 괜찮아요. 어무니가 애들 데리고..." 그녀는 목이 메고 말았다. 그녀는 두 아이의 손을 잡은 채 양쪽 팔소매에 눈물을 번갈아가며 닦았다. 한동안 아무도 말이 없었다.
"에미야, 인자 여기서 시키는 대로 해라. 니가 북으로 또 따라가지 않은 것이 요 새끼들 위해서라고 안 했드냐. 기왕 그리 된 것, 시키는 대로 하고 살아나얄 것 아니냐. 니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나면 이 늙은 것이 살면 얼마나 살 것이냐. 그때 이 두 새끼들이 어찌 될것이냐. 니 뜻대로 원대로 그만치 한세상 살았으면 인자 된 것 아니겄냐. 이 불쌍한 새끼들이 무슨 죄가 있냐. 그저 시키는 대로 해라. 다 새끼들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친정어머니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었다. 친정어머니는 비록 그자들의 흉계에 끌려 여기까지왔다 하더라도 그 말만은 진심이었다. 전향수기를 쓰기만 하면 사형을 면하고 살아나게 된다는 그자들의 한마디만 듣고도 어머니는 솔선해서 그 말을 하게 되어 있었다. 그자들은 그것을 환히 알고 어머니를 끼워넣은 것이었다.
"엄마, 나 엄마하고 여기서 살 테야." 작은아들이 울음을 추스르며 또렷하게 말했다. "그래, 그래, 우리 승욱이..." 그녀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간신히 참아내며 질정없이 고개를끄덕였다.
면회는 그것으로 끝났다.
그녀는 감방으로 돌아와서야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 울기 시작했다. 울음이 심해질수록 그녀의 쪼그려앉은 몸은 작아지면서 머리는 머리대로, 어깨는 어깨대로, 팔은 팔대로 떨려대고 있었다. 수기를 쓰게 되면... 보나마나 선전용으로 이용해먹을 것이 틀림없다. 전향서를 대신하다니까 그자들이 원하는 대로 써야 할 것이고... 그자들은 또 저희들 욕심에 맞게 멋대로 가필, 왜곡, 삽입을 해댈 것이 뻔했다. 그런 참담한 꼴을 보이려고 투쟁에 뛰어든 것이 아니었다.
그런 비참한 항복을 하려고 역사의 편에 선 것이 아니었다. 그 순결을 더럽히지 않고 지키는 길은 죽음뿐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녀는 울다가 지쳐 감방바닥에 쓰러졌다. 그녀는 다음날 또 간수를 따라나갔다. 예상대로 그 사무실에 소설가 이아무개가 기다리고있었다. 그녀는 그자가 묻는 여러 가지 말에 전혀 대답하지 않았고, 설득이랍시고 늘어놓는 구역질나는 반동논리에도 귀기울이지 않았다.
"수기는 가명으로 책을 낼 것을 약속합니다. 며칠 더 생각해봐요. 참, 이건 아직 비밀사항인데, 미, 쏘간에 휴전문제에 대해 의견이 오가고 있소." 그자가 몸을 일으키며 한 말이었다. 김미선은 머리가 쿵 울리는 충격에 부딪혔다. 거짓말이야! 그녀는 완강하게 충격을 떠밀어냈다. 그러나 충격은 쉽사리 떠밀리지 않았다. 도시마다 더는 어찌할 수 없을 지경으로 부서지고 불타버린 북쪽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녀는 팔다리에서 힘이 풀려나가는 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 절망적인 파괴가 현실인이상 휴전이라는 말이 오간다는 것은 결코 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라 싶었던 것이다.
국군 정훈국에 있다는 소설가 이아무개는 두 번을 더 찾아왔다. 그때마다 그자는 연기된 사형집행 날짜를 환기시켰고, 치졸스런 인생론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는 했다. 그녀는 비쩍비쩍 몸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두 자식이 매달려 있는 올가미가 갈수록 목을 죄어오고 있었다.
그 올가미는 끊어낼 수도, 벗어던질 수도 없는 형틀이었다. "김미선, 면회!" 그녀는 섬뜩 놀라며 두 손바닥으로 양쪽 귀를 막았다. "기다리는 것도 한도가 있어요. 다음 번이 마지막 기횝니다." 그자가 지난번에 한 말이었다. "뭘 해, 김미선!" 간수가 소리쳤다. 김미선은 주춤주춤 몸을 일으켜세웠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자아, 오늘은 결론만 간단하게 대답하세요. 하겠소, 안하겠소!" 어느 때 없이 냉정한 그자의 말이었다. 김미선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상대방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빨리 대답하시오. 시간이 없소." 소설가 이아무개는 그녀를 맞쏘아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그녀는 떠밀리는 기분으로 눈길을 피했고, 고개를 숙였다. "어떡하겠소!" 상대방은 더 세차게 떠밀어대고 있었다. 낭떠러지의 막바지였다. 그녀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꼬옥 감았다. "어서 대답하시오. 하겠소, 안하겠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개는 보일 듯 말듯 끄덕이고 있었다.
"분명하게 말로 대답하시오!" 소설가 이아무개의 입 언저리에 비릿한 웃음이 번지고 있었다. "하겠오..." 그녀가 흑 울음을 터뜨리며 책상에 엎드렸다. "자알 생각했소. 당장 장소를 옮기도록 하겠소." 그자가 벌떡 일어났다. 김미선의 좁고 여윈 어깨가 잘게 들먹이고 있었다.
심재모는 원대복귀 날짜가 정해지자 병원장의 양해를 얻어 이삼 일 동안 병원을 떠날 수있게 되었다.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찜찜하게 남아 있는 단양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원주까지는 군용열차를 두 번 갈아탔다. 전시답게 각종 군용차량들은 뿌우연 흙먼지들을 일으키며 포장 안된 길들을 질주해대고 있었고, 소령 계급장은 아무 차나 쉽게 얻어 탈 수 있는 위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더욱이 원주 쪽으로 가는 차들은 전방에 병력이나 물자를 수송하고 돌아가는 길이라서 대개 비어 있기도 했다. 차를 두 번 갈아타면서 그 동안 멀어졌던 전방의 전투소식을 생생하게 들을 수가 있었다.
"아이고, 말도 마십시오. 그게 어디 말이 전투지 사람이 할 짓입니까. 어디서나 고지탈환전투를 전개하고 있는 판인데, 서로가 뺏으려고 하고 안 뺏기려고 하고, 뺏긴 것 다시 찾으려고 하고 뺏은 것 다시는 안 뺏기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폭탄은 폭탄대로 퍼부어대고, 끝장에는 꼭 육박전을 벌이게 되니 사람은 사람대로 수없이 죽어가고, 아이고, 당최 눈뜨고 볼수가 없어요." 심재모는 그 정경이 환히 눈에 들어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어쨌거나 장교 중에 제일 불쌍한 게 소위지 뭡니까. 적들을 향해 정면으로 돌격을 치다보니 앞장을 안 설 수 없고, 적들은 효과적으로 공격을 저지하려고 지휘관부터 없애려 하고, 그러다보니 총알들이, 쏘위! 쏘위! 하고 날아다니며 소위만 찾는 것 아닙니까. 그래 어떤 소대에선 소대장이 하루에 세 번까지 바뀌었다고 하지 않습니까? 소위가 죽고, 선임하사가 맡았는데 또 죽고, 일등중사가 소대장이 된 거지요. 그런데 그 일등중사도 다음날 어찌 됐는지는 모르지요." 옆에 앉은 중위는 '쏘위! 쏘위!' 할 때 검지손가락을 곧게 펴 정말 총알이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것 같은 시늉을 해보였다. 그 이야기는 새로 듣는 것이면서도, 심재모는 그 동안 더욱 치열해진 전투상황을 능히 실감할 수 있었다. 원주는 전방전투의 보급기지가 되어 있었다. 군용차량들이 수없이 드나들고 있었으며, 일반인들보다 군인들이 더 많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전쟁초기의 부산과 같은 인상이었다. 미군부대 주변에 둘러쳐진 철조망은 특히 그랬다. '무단으로 접근하면 발포한다'는 새빨간 경고판도 똑같았고, 영문과 한글글씨 위에 그려진 해골은 여전히 살벌한 위화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심재모는 부산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런 것들을 스산한 마음으로 지나쳤다. 그들이 조성하고 있는 위화감만큼이나 심재모는 언제나 그들에게서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거리감의 간격은 그들과는 전혀 다른 생김새에서 느끼는 이질감만큼이나 멀었다. 백인의 생김새에서 느끼는 이질감도 컸지만 흑인에게서 느끼는 이질감은 더욱 컸다. 백인과 흑인이라는 정반대의 색깔의 인간들이 한나라 국민이라는 사실이 언제나 부자연스러운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백인이 흑인들을 아프리카에서 강제로 끌어다가 노예로 부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미국의 역사는 쉽게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백인들을 낮춰 부르는 말은 '흰둥이', '양코배기', '코쟁이' 정도인 데비해 흑인들을 낮춰 부르는 말은 '깜둥이', '먹통', '밤중', '땟국' 등으로 더 많았다. 그것은 일반인들의 감정이 백인보다 흑인에 대해서 더 나쁘다는 표시였다. 그로서도 백인과 흑인이 똑같은 짓을 하는데도 그 감정의 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여러 번 느꼈었다. 대낮에 길가는 여자들을 희롱하는 것을 보았을 때, 백인의 경우는 '저새끼들이 저거...' 하는 정도의 반감을 느끼는데 비해 흑인의 경우는 '아니 저 새끼가 감히...' 하는 식으로 분노를 느끼게 되었다. 그 차이를 시원하게 밝힌 것은 군의관이었다.
"그건 우리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백인에 대한 열등감과, 흑인에 대한 우월감이 그렇게 작용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 반응이야말로 미국정부가 이 땅에 흑인들을 더 많이 파견한 여러 가지 목적 중에 하나가 적중한 셈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어떤 전쟁에서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상대로 저지르는 만행은 있게 마련 아닙니까? 그런데, 동족이 아니라 외국인들이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는 전쟁이 끝나고서도 국가감정으로 오래 남게 되어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우리를 돕겠다고 군대를 파견했는데, 미군이 저지른 만행으로 우리 나라 사람들이 미국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감을 갖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대목에서 흑인들은 아주 좋은 이용물인 셈입니다. 우리 황인종들이 가지고 있는 흑인에 대한 우월감을 이용해서 국가감정을 인종감정으로 바꿔버리는 것이죠. 그렇게되면 흑인들만 죽일 놈들이 되고. 미국이라는 나라는 아무런 피해도 안 입게 되는 겁니다.
우린 지금 그 함정에 빠져 있는 거지요. 그리고,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전쟁에 더 많이 투입된 목적은 그뿐이 아니겠지요. 겉으로는 신성한 국민의 의무를 내세워 흑인과 백인이 평등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속으로는 백인보호를 시행하는 것이 아닙니까. 또한 흑인들의 입장에서는 자기네 나라에서와는 달리 외국땅에서 미국군인으로 당당하게 행세하는 기회가 되는 거지요." 말을 마친 군의관은 씁쓸하고 허전하게 웃었던 것이다.
심재모는 원주를 떠나면서, 자신은 군인으로 출세하기는 틀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미군이라면 무조건 좋고, 고문관들에게는 어느때나 굽신거려져야 하는데 갈수록 감정이 나쁘게 꼬여가고 있었다. 어쩌면 김범우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도 몰랐다. 김범우가 남다르게 해대는 미국에 대한 비판을 듣다보니 전에 없던 생각들이 자꾸 꼬리를 물고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영관급 장교들은 별자리가 될 꿈을 앞에 두고 영어회화를 공부하기 위해 하급장교들 중에서 영어 잘하는 자를 부관으로 골라낸다, 고문관들에게 연줄을 대려고 통역장교에게 선심을 쓴다, 노골적인 짓들을 해댔다. 그로서는 그런 짓들이 모두 추잡하고 경멸스럽게만 보였던 것이다. 심재모는 차가 덜컹거리는 대로 몸을 내맡긴채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전쟁중인데도 산밭의 보리들은 누릿누릿 익어가고 있었다. 그는 비탈진 산밭과 익어가는 보리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했다. 강원도와 강원도에 인접한 충청북도 일부는 온통 산투성이라서 밭들도 거의가 비탈일수 밖에 없었다. 또한 넓이가 넓지도 못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전쟁에 죽고 시달리면서도 거기에 농사를 지었던 것이다. 그는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을 떠올렸다. 땅 파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다 그 지경이 아닐까 싶었다. 엉뚱하게 '비탈보지'라는 말이 떠올랐다. 그는 면구스러운 생각에 입맛을 다셨다. 그 야스럽고 듣기 거북한 말은 전방으로 이동하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말의 연유를 듣고 보니 그것이 못된 욕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강원도의 밭들이 거의 다 비탈이라서 여자들이 오랜 세월 동안 그 밭을 매다보니 거기마저 비탈을 닮아 삐딱해졌다는 뜻이었다. 어떤 허풍쟁이가 지어낸 음한 우스갯소리였지만, 거기에는 평생토록 비탈 밭을 매고 살아야 하는 그 고장 여인네들의 고달픔과 서글픔이 젖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런 느낌은 그가 혼자서 가진 것이고, 사병들 사이에서 '비탈보지'라는 말이 튀어 나올 때는 강원도 출신들을 미련하다고 해서 '감자바우'라고 부르는 것보다 더 비하시킨 욕이 되었다. 단양이라는 산으로 에워싸인 작은 도시도 어김없이 전쟁의 피해를 입고 있었다. 심재모는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어 순덕이가 있을 하숙집을 향해 발길을 돌렸다. 그녀를 억지로라도 고향으로 돌려보내지 못했던 것이 후회로 되짚였다. 그건 단순한 책무감에서가 아니었다. 다시 벌교에 가서 그녀가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한 뒤로 그녀는 이상스럽게 자신의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앉았던 것이다. 그러고는 날이 갈수록 그 모습이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숙집 대문은 그전처럼 반나마 열려있었다. 심재모는 대문을 밀며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목을 가다듬었다.
"아주머니 계십니까?" 그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누구쉬우?" 열린 방문에서 여자가 얼굴을 내밀며 느릿한 억양으로 물었다. 심재모는 주춤했다. 그 여자는 전혀 낯 모르는 얼굴이었던 것이다.
"주인아주머니 안 계십니까?" 불길한 생각일 들었지만 심재모는 침착하게 물었다. "내가 쥔인디유." 여자가 얼굴을 더 내밀며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껌벅거렸다. "그럼, 전에 여기 살던 분들은 어디로 이살 갔습니까?" 심재모는 난감한 심정이 되면서 물었다.
"충주댁을 찾으시는감유?" 여자가 느리게 방에서 나왔다. "예에, 충주댁 맞습니다." 심재모는 주인아주머니가 충주댁으로 불리던 것을 생각해냈다. "걸음이 늦었구만유. 그 난리 당하구 여기 무서 못 살겄다구 친정있는 충주로 나갔구만유." 쉰이 넘었을 여자는 심재모를 훔쳐보듯하며 연상 눈을 껌벅거렸다.
"그 난리라니, 전쟁이 무서워 피난을 떠났다 그 말입니까?" 심재모는 다수 마음이 놓이며 물었다. "아니지유. 작년 삼동까지 이 집서 살다가 그 숭헌 난리 당하구 짐을 싼 것이지유." "자꾸 난리라고 하시는데, 전쟁 말고 무슨 난리가 또 있었습니까?" 심재모는 그 느리고 처지는 어조에다가, 말뜻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속이 너무 답답했다.
"워디 총질하는 것만 난리간디유. 코쟁이덜이 지멋대루 여자덜 욕보이구 뎀비는 것이 여자들루서야 더 무선 난리 중에 난리지유." "그럼 이 집에서 무슨 일 당했다는 겁니까?" 심재모는 현기증 같은 것을 얼핏 느끼며 다그쳐 물었다. "워디 이 집만 당했간디유. 그날밤에 밀어닥친 코쟁이덜헌티 온 동네 집집이 쑥밭이 됐지유." 여인네는 어깨가 처져내리도록 한숨을 토해냈다.
"이 집에 함께 살았던 처녀가 있었는데 어째 됐는지 아십니까?" 여인네는 힘없는 눈길로 심재모를 믈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나 겉은 늙어빠진 것이나 그 숭헌 꼴 면했지 좀 젊었다 하문 처녀고 뭐시고 성한 여자가 하나도 웂었구만유." 여인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 그런 막연한 말이 아니고, 그때까지 그 처녀가 이 집에 살았었는지, 아주머니가 그 처녀를 아시는지 그걸 묻는 겁니다." 심재모의 다급한 말에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 "알지유, 순덕이라구." 여인네가 마땅찮다는 듯 눈을 흘겼다. 심재모의 가슴은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그는 오른쪽 손바닥으로 이마를 눌러잡았다. 숨이 막힐 지경으로 가슴이 벌떡거리며 분노가 치뻗어 오르고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양쪽 관자놀이를 눌렀다. 그는 어금니를 점점 세게 맞물며 손가락들 끝에도 더 강하게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런 거의 몸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그 떨림에 따라 거친 숨결도 매듭매듭 끊기고 있었다.
"진작에 왔어야지 너머 늦어부렀지유. 숭헌 눔에 시상." 심재모의 귀에는 여인네의 말이먼 메아리로 들리고 있었다. 심재모는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직 확인할 사실이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 처녀도 충주로 함께 떠났습니까?" "아니유. 혼자 떠났어유." "어디로요?" 심재모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몰르지유. 말 안하고 떠났이니." "고향으로 간 것 아닙니까?" 여인네는 그저 고개만 저었다. 심재모는 전신에 힘이 쑥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 꼴을 당하고 그녀가 고향으로 갔을 것 같지는 않았다.
"거지꼴로라도 한 분이라도 지 맘얼 받어주셨으면 그 표시로 평상 혼자서도 살아졌을 것인디..." 순덕이의 목메인 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순박하기 그지없던 그녀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서 울고 있었다. 심재모는 그 얼굴을 잡으려는 듯 걸음을 옮겨 놓고 있었다. 그의 껑충하게 긴 다리는 약간씩 흔들리며 하숙집을 벗어나고 있었다.
"서장님, 저는 아직 순번이 멀었는디요. 그간에 벌써 두 번이나 나갔구만요." 서 순경이 기죽은 소리로 겨우 말하고 있었다. "어허, 명령이면 따를 것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소." 반쯤 옆으로 돌아앉은 남인태는 상대방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싸늘하게 내쏘았다.
"저어 서장님, 그래도 원칙이라는게 있는 것 아닙니까. 제 경우는 윤번제가 지켜지지도 않고, 부정을 저지른 일도 없는데 세 번째 내보내는 것은..." "그래서,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 그거요?" 남인태는 의자를 홱 돌리며 눈을 부라렸다. 서순경은 움찔하며 고개를 좀더 숙였다. 고개가 움츠러든 만큼 어깨가 솟겼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직 한 번도 토벌에 안 나간 사람도 있으니 좀 공평하게..." "시끄럽소!" 남인태는 책상을 치며 몸을 일으키더니, "당신 말이야, 이제 보니 사상이 불온하구만" 하면서 상대방을 노려보았다. "아니, 무, 무슨 말씀입니까!" 서 순경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무슨 말이냐니, 사상이 불온하지 않고서야 명령불복종에, 동료를 모함할 수 있냐 그거요." "그게 아니라 서장님..." "글쎄 듣기 싫다니까. 당신은 특히 말조심하고 명령 똑바로 따라야해. 그렇지 않으면 아주 본서를 떠나 취약지구 지서로 가거나, 토벌대에 말뚝박게 될 테니까 말야." 남인태의 말이꼬이고 있었다. 서 순경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몰라서 묻소? 서 순경은 안팎으로 빨갱이 집안 아니냔 말이오. 당숙 아들놈에다가, 외삼촌 아들놈까지 입산 빨갱이들 아닌가. 서 순경이 깨끗한 걸 보이려면 명령이 있기 전에 솔선해서 토벌에 나가 전과를 올려야만 할 처진데, 그렇게 매사에 불편불만만 해대니 어떻게서 순경의 충성심을 믿을 수 있겠소? 서 순경이 토벌작전에서 빠지려고 하면 그자들이 활동을 도우려고 하는 것으로 의심받는다 그거요. 더 할 말없으니 그만 나가보시오." 고개를 푹떨어뜨린 서 순경이 돌아섰고, 남인태는 그런 부하의 뒷모습에 눈길을 박은 채 입꼬리 처지는 웃음을 피워내고 있었다. 어느 경찰서에서나 토벌대의 차출을 놓고 그런 식의 말썽은 빈발해오고 있었다. 경찰들의 경우 토벌대의 참가는 의무적 윤번제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하나같이 토벌대에 나가기를 꺼려 꽁무니를 빼려했고, 그 윤번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수를 써서든 뒤빠져 책상을 붙들고 앉아 있으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지만, 토벌대에 나갔다하면 어느 산골짜기에 처박혀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경찰들은 경력이 오래도 사람들일수록 어김없이 친일경력의 소유자들이었고, 세상의 물결을 요령 좋게 타고 넘는 기회주의를 몸에 익힌 그들로서는 목숨을 내거는 일에 서로 몸을 사리고 뒤꽁무니를 빼려고 급급했다. 그러다보니 남모르게 뒷손을 쓰고, 서로간에 모함을 해대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자기네의 생존보호를 위해 이승만정권을 떠받치며 반공세력으로 똘똘 뭉쳤던 그들의 집단기회주의는 정작 전쟁이 벌어진 다음부터는 개개인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각자가 개체기회주의를 발동시켜 내부혼란이 야기되고있었다. 뒷손을 쓰자니 돈이 필요하고, 돈을 마련하자니 부정을 저질러야하고, 부정을 저질르다보니 턱없이 민간인들을 괴롭히고, 그런 것을 노려 옆 사람이 밀고하게 되고... 돈 없고 빽 없는 놈들만 토벌대에 나가 개죽음한다는 말은 경찰 내부를 벗어나 세상이 다 아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경찰의 부패를 조장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그런 형편에서 윤번제가 지켜질 리 없었고, 돈이나 빽이 없는 사람, 어떤 조그만 트집이라도 잡힐 것이 있는 사람은 토벌대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경찰들이 죽는 수가 늘어가면서 내부의 갈등은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토벌대를 유지시키기 위해 의경제를 실시해서 젊은이들을 투입하고 있었지만 그 뼈대는 어디까지나 경찰이어야 했던 것이다.
한편, 권서장은 염상구와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다. "글쎄, 몇 번씩이나 국민 방위군과 향토방위대법이 해체되었다고 말해야 합니까. 그 법이 국회를 통과한게 지난 사월 삼십일이었고, 공포가 오월 십이일 아닙니까." 권 서장의 얼굴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나야 원체로 무식혀논께 고런 것 알바 웂고, 워쨌그나 간에 우리 아그덜 토벌대로 돌리겄다는 것은 반대요." 윗몸을 뒤로 젖혀 앉은 염상구는 고개를 홰홰 저었다. 그는 검정색 양복차림이었고, 계절에 맞지 않게 조끼까지 받쳐입고 있었는데 그 단추고리에서 주머니로는 시계 금줄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 금줄은 검정 조끼 위에서 유난히 샛노랗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장가를 든 다음부터 염상구가 즐겨 입는 옷차림이었다.
"염 단장, 아니, 염 사장님, 이건 유, 무식으로 지나칠 문제가 아니잖소. 법에 따라 처리할 문제니까 순조롭게 협조를 좀 하시오." 염상구는 장가를 가고 부터 자신을 '염 단장'이나 '염 대장'으로 부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호칭을 '염 사장님'으로 통일시켰던것이다.
"나허고 쎄가 닳아빠질 때까지 말혀봤자 아무 소양 웂소. 그리는 못허겄단는 나 생각은 제석산 몬뎅이에 콱 박은 말뚝잉께!" 차림새에 어울리도록 염상구의 태도는 자신만만하고 거만스러웠다. "정 그렇다면 별수가 없소, 법대로 할 수밖에." 권 서장이 쓴 입맛을 다시며 앉음새를 바꾸었다.
"버업!" 염상구가 뒤로 젖히고 있던 윗몸을 빠르게 바로 세우며 목청을 높였다. "그렇고, 다른 방법이 없소." 권 서장이 염상구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하! 나허고 막보기로 나스겄다 그것인디, 쪼오쏘, 막보기로 허겄다면 워디 한분 붙어봅씨다. 서장이 씬가 요 염상구가 씬가. 우리 청년단이 썩은 홍어좆이 아니라는 것을 요분에 아조 쌈빡허니 봬주겄어. 해방되고부텀 니기미 씨펄눔덜이 즈그덜 좋을 대로 궂은 일에 다 부레묵고 난리가 터진께 워쩌? 똥친 막대기맹키로 우리덜 내뿔고 즈그덜만 쏙 빠져나가? 그려도 참고 또 협조럴 혔어. 근디, 그 공 하나 또 몰라라 허고 인자와서 법대로 죽을 구뎅이로 처박겄다고? 워디 법대로, 맘대로 혀보드라고. 토벌대로 나가서 죽으나, 경찰허고 총질해서 죽으나, 죽기는 매일방잉께!" 얼굴에 독기를 품은 염상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권 서장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요 염 상구가 인자 옛날 염상구가 아니란걸 알어야 쓸것이여. 돈도 주먹도 다 나 것이고, 벌교 바닥이 다 나 것이다 그것이여." 염상구가 거칠 것 없이 소리치며 사무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권 서장은 이마를 짚었다. 염상구가 그런식으로 나올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완력에다가 재력까지 갖추었으니 그는 예사 골치덩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또, 염상구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말도 결코 억지는 아니었다. 청년단이 줄곧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고, 이제와서 자기 부하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지 않으려고 반발하는 것은 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의리있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러나 토벌대의 인원보충은 피할 수 없이 시급한 문제였다. 권 서정은 난감하기만 했다. 그와 순조롭게 타협할 수 있는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예 그와 의논하지 않고 한 명씩 표나지 않게 의경으로 돌리지 못한게 후회스러웠다. 한꺼번에 일을 처리해 버리려고 욕심을 부렸던 것이 탈이었다. 그를 설득할 만한 사람이 없을까... 이사람, 저사람 떠올려보았지만 그를 다스릴 사람은 잡히지 않았다. 유지라는 사람들은 그의 결혼을 계기로 태도를 표변해서 '염사장님' 호칭을 말끝마다 써가며 그를 자기네들과 동급으로 대접하기에 바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금융조합장 유주상이었다. 권 서장은 몸을 비틀며 끄으응 된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염상구는 양복깃에 바람을 일으키며 역전 쪽으로 세차게 걸어가고 있었다. 하! 좆대감지럴 팍조사불 눔, 워따가 대고 법이여, 법이. 고런 느자구웂는 새끼가 법 찾음서 요 염상구럴 겁믹일라고 혀? 고 새끼가 나럴 시퍼보고 뎀비는 것인디, 워디 혀보자. 우리 아그덜 손만 댔다허먼 니눔얼 벌고 바닥서 깨끔허니 몰아치고 말 것잉께. 돈이고 빽이먼 안되는 것 웂는 시상인디, 니까징 것 하나 몰아치기야 식은 죽 먹기다. 버업! 씹 겉은 새끼, 좆뽈고 자빠졌네. 이눔의 나라에 법이란 것이 워디 있냐, 빨갱이 맹그는 만병통치 다이야찡 가리법 하나 말고는.
니눔도 기지랄치고 나대먼 빨갱이되는 수가 있다는 것을 알어야 쓸 것이여, 염상구는 뽀드득 이빨을 갈아붙였다. "사장님, 인자 나오신게라?" 젊은이 하나가 염상구 앞에 꾸뻑 절을 했다. "감찰부장 워딨냐!" 염상구가 거칡게 내쏘았다. "야아, 다방에 있구만이라." 젊은이가 다급하게 다방 쪽으로 몸을 되돌렸다. "어이, 감찰 부장!" 염상구는 다방으로 들어서며 소리치고 있었다. 아가씨와 노닥거리고 있던 한 사내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단장님, 아니 저 사장님. 무, 무신 일 있으신게라?" 당황한 사내는 허둥거리고 있었다. "정신채리고 싸게 앉거." 염상구가 가느다란 눈으로 사내를 째려보며 의자에 앉았다. 사내는 굽신거리며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감찰부장, 지끔 당장 아그덜 멫 명 모타서 총얼 싹 다 우리집으로 욂겨." "야아?" "표 안나게 보재기로 싸든지, 가마니로 덮든지 혀서 소리소문 웂이 싸게 해치워." "무, 무신 일인다라?" "이약언 이따가 허고, 나가 집에서 기둘릴 팅께 시킨 대로 일아니 영축웂이 혀. 싸게!" "야아, 알겄구만이라." 사내가 서둘러 다방을 나갔다.
"사장님, 커피 하실 거지요?" 새 얼굴인 아가씨가 눈웃음을 치며 염상구에게로 다가왔다. "암스로 멀라고 묻냐." 염상구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담배를 빼들었다. 아가씨는 샐쭉해지며 돌아섰다. 그는 라이터를 꺼내 심지 덮개를 밀어올리고 불을 일으켰다. 그을음이 피어오르는 불꽃에 그는 점잔을 피우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가 가진 라이터는 돈푼깨나 만지거나 겉멋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용개 라이터'였다. 체면을 살려야 할 점잖으신 분네들이 지니는 물건치고 그 별명은 어울리지 않게 상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어쩔 수 없는 것이, 그 심지 덮개라는 것이 생겨먹기를 영락없이 발기한 남자의 그것 대가리였던 것이다. 물론 그것 아니고도 군인의 철모를 닮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철모 라이터'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대부분의 욕들이 남녀의 거기에 연관되어 있듯이,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그 별명을 '용개 라이터'로 통일하고 있었다.
"참, 조합장님이 아까부터 사장님을 찾고 있었어요." 아가씨가 커피잔을 탁자에 놓으며 뒤늦게 생각난 듯이 말했다. 염상구는 코방귀를 뀌며 새끼숟가락을 집어들었다. "혹시 오시면 전화 넣어달라고 하던데요. 급한 일이라고요." 염상구는 길게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마주앉은 아가씨의 얼굴에 확 내뿜어버렸다.
"어머머, 나 몰라, 몰라." 아가씨가 상을 찡그리며 얼굴을 돌리고, 두 손을 내젓고 하며 야단을 피웠다. 그러나 아가씨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자리를 뜨지도 않은 채 오히려 색정 묻어나는 눈흘김을 보내고 있었다. "내빌라둬라. 급헌 것이야 지가 급허제 나가 급헌 게 아닝께로." 염상구는 윗몸을 뒤로 젖히어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윗몸을 뒤로 젖히는 앉음새도 결혼한 다음부터 생긴 것이었다. 흥, 또 금융조합에 돈 잠 맽게도라고 애가 타겄제? 지아무리 발싸심혀봤자 요 염상구 맘언 끄떡 안혀. 그 조합 이자라는 것이 장터바닥 돈놀이에 비허자먼 벼룩에 간인디, 누구 존 일 시키자고 돈얼 맽겨, 맽기길. 그눔이 넋이 나가도 열 분 나간 눔이제. 지눔이야 인자 내 발샅에 때꼽만치도 못헌 눔이여. 입술 사이에 커피액을 문 염상구는 비웃음을 짓고있었다.
"사장님이 전화 안하시면 제가 곤란해지잖아요. 그분도 손님인데, 아주 급한 일이라고 그러던데, 제가 전화 연결해드릴 테니까 통화 좀 하세요. 무슨 급한 일인지 모르잖아요." 아가씨가 아양을 떨며 말했다. "하 그년, 그려, 니럴 봐서 전화허자." 염상구는 큰 선심을 쓰듯 했다.
염상구가 커피잔을 다 비웠을 즈음에 전화통 앞에 선 아가씨가 손을 까불었다. 염상구는 헛트림을 하며 느리게 일어났다.
"아아, 나요, 염 사장이오." "예에, 염 사장님. 얼마나 찾았는지 모릅니다. 거 다름이 아니라 내가 급한 사정이 생겨서 논을 처분해야 되게 생겼어요. 소유권 이전을 해줘야 되겠으니까 사장님 도장이 필요해서요." 전화 속에서 유주상의 목소리는 터무니없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당신 논얼 포는디 워째 내 도장이 있어야 허요?" 염상구의 목소리는 태평스러웠다. "아하, 염 사장님이 잊고 계시는 구먼. 거 재작년에 농지개혁 피허자고 내 논을 염 사장님 앞으로 명의를 바꿔놓은 것 있잖습니까. 그걸 팔아야 하니까 염 사장님 도장이 필요하지요." "거 무신 자다가 봉창 뚜둘기는 소리요? 나넌 통 몰르는 일인디." 염상구는 태연스럽게 말하고 있었다.
"아니, 염 사장! 그게 무슨 소리요. 나한테 사례까지 받고 그 일을 해놓고서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리요, 도대체!" 유주상이 곧 숨이 넘어갈 듯이 다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그 무신 생뚱헌 소리요. 나넌 고런 짓거리 헌 일 웂소. 맥엄씨 나 화나게 맹글지 말고 다시는 고런 넋빠진 소리 씨불대지 마씨요. 전화끊소." "염 사장! 염 사장!" 염상구는 비식이 웃으며 냉혹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속이 후련하게 뚫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일을 치른 것으로 그 논들은 완전한 자기 소유가 된 것이었다.
언제든 유주상이가 권리주장을 하고 나오면 바로 이런 식으로 일을 끝장내려고 진작부터 작정해두고 있었던 터였다. 염상구는 논의 소유권자로서 법적으로 아무런 하자가 없었고, 유주상은 논을 빼돌리는 꾀를 부린다고 부렸는데 그만 염상구한테서 소유권포기각서를 받아두지않은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첫댓글 백지보다 훨낫다...인쇄지가 좋아졌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