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라입니다. 이번에 초대를 받아 할머니와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되었어요. 한국은 제 할머니의 고향인데, 저는 처음 와봐서 모든 게 신기합니다. 할머니는 일제강점기에 북한의 황해도에서 태어나셨어요. 그렇지만, 당시에는 조선인들을 일본인으로 세탁하려는 시도가 많았잖아요. '일본인은 위대하다'라는 정신 아래 조선인의 혼은 세탁 대상이니까요. 할머니는 집 앞 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계실 때, 순사에게 이유없이 곤봉으로 머리를 맞은 적이 있다고 하셨어요. 일본인 순사는 "더러운 조센징. 소중한 강물에 감히 조선인의 땀을 내보내?"라고 말했댔어요. 할머니의 옷이 피와 땀으로 젖어 들었어요. 나중에 그 옷을 한번 더 빨려고 가보니 이제 아예 순사가 강물 앞에 진을 치고 앉았더래요. 그래서 할머니는 더 이상 집 앞 냇가로 빨래를 하러 가지 못했어요.
할머니의 머리 상처는 흉터로 아물어갔으나 그녀 마음 속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을 적에, 동네 이웃분들과 함게 연해주로 건너가기로 했대요. 조선 땅에서는 더 이상 조선인의 혼을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고 해요. 그나마 연해주는 일본의 숨이 닿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쫓겨난 조선인들은 최종적으로 우즈베키스탄에 정착하게 되었어요. 우즈베키스탄에서 할머니가 '조선인의 혼'에 관해 입이 마르도록 말씀하셔인지, 제 어머니도, 그 어머니로부터 이야기를 전해받은 저도 '혼'이 가장 강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한강 작가가 노벨상을 받으면서 5.18을 겪은 사람들의 혼이 담긴 <소년이 온다>가 조명받고 있잖아요. 저는 그 책의 '혼이 흐른다'라는 문장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어요.
조선인의 혼은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오랜 세월동안 흘렀습니다. 이 곳에서 땅을 일군 조선인들은 '라뾰시카, 당근 김치, 국시'와 같은 조선의 음식을 만들었고, 자신의 후손에게도 그러한 전통을 전달했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조선인의 혼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요. 우리는 '고려인'이라는 이름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향인 한국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고려인의 존재가 잊혀져 갔습니다. 제가 한국 공항에 도착해 '나는 고려인입니다'라는 말을 건넸더니, '그게 누구?'라는 말이 되돌아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제게 러시아인이냐고 물었습니다. 그 말에 항의하고 싶었지만, 저는 한국말을 할 수 없어서 '나는 한국인입니다'라고 답하지 못했습니다. 제 조선인의 혼은 세탁된 것이었을까요.
한국에 도착해서 광주 월곡동에 있는 고려인마을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 가니 우즈베키스탄어가 빼곡히 적혀 있어서 신기했어요. 할머니는 도착하자마자 빨래를 가장 먼저 하셨어요. 한국까지 오면서 흙먼지가 잔뜩 묻은 옷을, 기어코 세탁기가 아닌 본인 손으로 빨래를 하시겠다 고집을 부렸습니다. 할머니는 빨래를 하시면서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음에도 "드디어 고향의 물을 만진다"고 울음을 터뜨렸어요. 손이 부르트도록 몇 번이고 옷감을 쥐어짜시고 벅벅 문지르면서 행복해하는 그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아요.
고려인 마을에 머무르다보니, 제가 우즈베키스탄에서 흔히 먹던 당근김치가 밥상 위에 올라왔습니다. 한국의 땅에서 나고 한국의 물로 깨끗이 씻은 당근으로 만든 김치. 우즈베키스탄의 그것과 맛이 똑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한국인의 혼'이 무엇인지 느꼈습니다. 혼은 세탁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끝없이 더해지는 거라고요. 저는 우즈베키스탄에 살면서도 대한민국이 고향인 사람입니다. 나를 보고 누군가는 낯설어하겠지만, 제가 한국에 와서 느꼈던 정은 분명, 한국인의 혼과 고려인의 혼이 모두 담고 있는 무언가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했다 80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감격한 이유, 낯선 고려인 마을의 한국인들이 반갑게 당근김치를 상에 내온 이유. 아마 그 모든 것은 지울 수 없는 '혼'으로 귀결되는 것 아닐까요.
이 편지를 고려인마을에 방문한 수많은 한국인에게 전합니다.
사라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