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향의 혼인 깃든 명소, 춘설헌
무등산 자락의 춘설헌이 남종화의 거장 의재 허백련(1891~1977)의 창작 공간임은 알고 있지만, 그 이전 그곳이 석아정과 오방정이었음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광주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 5호인 춘설헌은 원래 석아정이었다. 돌 벙어리라는 뜻의 석아는 동경 유학 시절 광주인들이 주축이 된 조선청년독립단 결성과 2·8독립선언 및 3·1운동을 이끈 후 동아일보 주필을 지낸 민족 지도자 최원순(1891~1936)의 호다. 석아정은 그 최원순이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돌 벙어리가 되겠다고 작심하고 요양 목적으로 지은 조그마한 토굴이었다. 1936년, 석아는 서거 직전에 광주 최초의 목사이자 민족운동가인 오방 최흥종(1880∼1966)에게 석아정을 물려준다. 석아정 다음으로 오방정(五放亭)이 들어선 이유다. 명예욕, 물질욕, 성욕, 식욕, 종교적 독선 등 ‘다섯 가지를 놓아 버렸다’는 오방의 이름 또한 재미있다. 오방정의 주인인 목사 최흥종은 원래 광주의 유명한 깡패였다. 깡패 시절 망치로 불렸던 그는 선교사의 나환자를 감싸는 진정한 사랑에 감동받고 기독교에 입문, 목사가 된다. 광주 3·1운동 주도, 광주 YMCA 창립, 광주 나병원 설립도 그의 몫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시국 강연을 위해 광주에 온 김구는 오방정을 찾아 성자의 본색을 감추고 중생과 함께 한다는 뜻의 ‘和光同塵(화광동진)’이라는 휘호를 남기기도 한다. 의재보다 11년 연상인 최흥종은 무등산에 낙향한 의재 허백련과 의기투합한다. 둘은 삼애다원을 일구고 농업학교를 세우는 등 함께 사회사업을 한다. 해방 이후 오방이 증심사 위쪽의 초막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오방정의 주인은 의재가 된다. 그리고 1956년, 의재는 종전의 낡은 집을 허물고 오늘 우리들이 보는 벽돌집을 짓고 이름도 춘설헌으로 바꾼다. 이후 춘설헌은 허백련이 타계하는 1977년까지 전통 남종화의 산실로 광주 예향의 혼이 서린 장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문화계 인사들의 품격 높은 살롱이 된다.
춘설헌의 역사를 알려주는 것으로는 의재 미술관에 보관중인 석아정, 오방정 현판(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 22호)과 2010년 춘설헌 입구에 세워진 오방정 기념비가 있다. 춘설헌의 산 역사가 된 이 현판(94×46센티미터)의 한쪽 면은 ‘石啞亭 惺堂’이라는 글씨가, 다른 한쪽 면은 ‘五放亭 毅齋道人’이라는 글씨가 돋을새김 되어 있고, 글자 오방정 윗부분에는 매화가 그려져 있다. 惺堂(성당)은 당시 서예가로 이름을 날린 김돈희의 호로, 석아정이라는 현판은 당대 명필인 김돈희가 쓴 글씨임을 알게 해준다. 오방정 글씨와 매화를 그린 주인공은 오방과 의기투합했던 의재도인 즉 허백련이었다. 현판 하나에 새겨진 석아정과 오방정에 춘설헌의 옛 주인의 역사가 묻어 있는 셈이다. 2010년, 창립 90주년을 맞아 광주 YMCA는 창립자인 오방 최흥종의 흔적이 묻어 있는 이곳 춘설헌 입구에 오방정 기념비를 세운다. 오방정 기념비에는 첫 출발이 된 석아정의 역사도 기록하고 있다.
1956년 오방정을 인수한 후 의재는 방 두개에 마루가 있는 조그마한 집을 짓고 춘설헌(春雪軒)이라는 이름을 건다. 그 후 의재를 만나기 위해 전국에서 손님이 찾아오자 건너편에 방을 두개 더 늘린다. 현재 본채는 방 두개에다 거실, 부엌, 화장실이 딸려 있다. 의재는 이 방에서 내방객들을 맞았고, 밤에는 그 좁디좁은 방에서 손님들과 같이 몸을 붙이고 잤다. 전북 부안 출신으로 고려 공산당 창립멤버인 지운 김철수와 토착 기독교 사상가인 다석 유영모, 여수에 살던 한량 시인 백민은 단골손님이었다. 우리나라 차계의 어른인 효당 스님도 놀러 오곤 했다. 씨알의 소리 편집인으로 유명한 함석헌도, 젊은 시절 시인 고은도 머리 아픈 일이 생길 때면 며칠 씩 춘설헌을 찾아 쉬어가곤 했다. 춘설헌은 의재의 수제자인 이범재, 구철우, 김옥진 등을 길러 낸 산실이었을 뿐 아니라 그런 문화계 인사들의 감각을 기르는 산 교육장이기도 했다. 춘설헌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국내 인사로만 한정되지 않았다. 1970년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춘설헌을 찾은 후 동양의 신선 같은 풍모와 식견을 지닌 의재에게 반한다. 그리고 몇 년 후 다시 무등산을 찾는다. 소설 유리 반지를 쓴 독일 출신의 여류 작가 루이제 린저도 춘설헌 손님 중 한 분이었다.
춘설헌이 근대 호남 제일의 품격을 갖춘 살롱으로 많은 예인들이 찾았던 것은 의재의 풍모와 식견 때문만은 아니었다. 춘설헌이 명품 살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춘설차도 한몫을 거든다. 증심사 주차장 뒤편의 무등산 자락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차밭이 있었다. 해방 뒤 이 차밭을 인수한 의재는 춘설헌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무등산의 명차인 춘설차를 대접했다. 게오르규도, 루이제 린저도 이 춘설차를 맛본다. 차 이름 춘설로 인해 의재는 거처지 이름도 춘설헌이라 짓는다.
명차 이름 춘설은 어디서 따온 이름일까? 송나라 시인 나대경의 다시(茶詩)에 “한 사발의 춘설이 제호보다 더 낫다.는 구절이 있다. 제호는 중국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음료다. 즉 이 구절은 눈 속에서도 푸른 움이 올라오는 잎으로 만든 차(춘설)가 일품이라는 의미로 읽힌다. 그 춘설을 그는 무등산에서 재배한 차의 이름으로 삼았고, 그리고 그가 거처했던 집의 이름으로 삼는다. 의재는 평생을 무등산에서 그림을 그리며 인간이 마시는 최고의 차인 이 춘설차를 벗하며 신선처럼 살다 간 셈이다.
그는 세상을 떴지만, 광주의 큰 어른인 의재를 광주 시민들은 쉬이 보내지 못한다. 증심사로 올라가는 학동 삼거리 입구에 그의 동상이 세워지고, 학동 삼거리에서 증심사까지는 그의 호를 딴 의재로다. 그가 광복 직후부터 작품 활동에 매진했고 교육사업을 전개했던 무등산 자락에는 제 10회 한국건축문화대상을 받은 지하 지상 2층 규모의 의재 미술관이 세워진다. 2001년 개관한 미술관에는 의재의 각 시기별 대표 작품과 미공개작 60여 점을 비롯, 오방정 현판과 의재 사진, 편지 등 각종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명품 춘설차를 생산해냈던 녹차 밭은 아직도 미술관 뒤편에 손길이 덜미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농업기술학교 실습용 축사였던 건물은 춘설차 보급 장소인 문향정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고, 의재가 지인들과 함께 차를 마시면서 시국을 논했던 관풍대는 지금 다례 실습장이 되어 그 뜻을 잇고 있다.
무등산 신선, 의재 허백련
인간이 마시는 최고의 음료인 춘설차를 벗하며 살았던, 당대 명사들이 꼭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던 춘설헌의 주인 의재 허백련은 어떤 분일까?
1891년 전남 진도에서 태어난 그는 8세 때 진도에 유배중이던 무정 정만조의 서당에서 글 공부를 시작한다. 의재란 호도 스승 정만조가 지어준다. 11살 때에 허련이 만든 운림산방에서 소치의 아들 허형에게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의재에게 소치는 집안 할아버지뻘이었다. 1912년 법률 공부를 위해 일본 도쿄에 들어간 후 김성수, 송진우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맺는다. 1915년 그는 법률공부를 그만두고 일본 남종화의 대가인 고무로 스이운의 문하생이 되어 다시 그림공부를 시작한다.
1918년 귀국한 후 1922년 제 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상하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가 광주에 돌아와 정착한 것은 1927년이었다. 무등산 자락 춘설헌에 기거하면서 많은 명작을 완성하였을 뿐 아니라 시서화 동호인의 모임인 연진회를 조직하여 제자를 길러내는 등 광주가 예향으로 불리는데 큰 역할을 한다. 그는 단순히 그림에만 몰두하는 화가가 아니었다. 피폐된 농촌을 일으키기 위해 광주농업기술학교를 세워 직접 교장이 된다. 한편, 그는 애천, 애토, 애인이라는 민족정신인 삼애사상을 제창한 사상가요 지사였다.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의 첫 교명도 삼애학원이었고 해방 직후 무등산 차밭을 사들여 다원을 만들고 붙인 이름도 삼애다원이었다. 그는 삼애다원에서 재배한 차를 춘설차라 이름 짓고 “우리 민족이 차를 마심으로서 정신을 맑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판단하여 실천하면 실수를 줄일 수 있다.”며 차 문화 보급에도 앞장선다. 국전 심사위원, 대한민국예술원 종신회원으로 한국 예술계의 큰 인물이 된 그는 1977년 향년 87세로 사망한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계산청하(1924), 설경(1965), 추경산수(1971) 등이 있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한다.
첫댓글 춘설헌의 역사를 알게되었습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
어제, 양림동에 있는 오방 최흥종 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五放은 "가사에 放漫, 사회에 放逸, 경제에 放縱, 정치에 放棄, 종교에 放浪"이라고 나와있더군요.
개인 기념관이면 오방의 가족에 대한 내용도 있을까 해서 찾았는데 안타깝게도....ㅠ
시간내어 춘설헌에도 들러봐야겠네요^^